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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제목
현재의 고난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영광을 위하여 - 이중원 목사
출처
날짜
2007년 3월 3일 토요일
조회수
5176
뉴스제 인생 여정 가운데 함께해 주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쓰임받을 그릇으로 만들어 오신 좋으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며, 또한 많은 분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 영원한 영광을 함께 누리기를 소망하며 이 간증을 드립니다.

배고픔을 벗어나려 머슴살이를 하던 중

충남 부여에서 옹기 굽는 일을 업으로 하시는 부유한 부모님 밑에서 태어난 저는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남부럽지 않은 유복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사업이라는 것이 그렇듯이 아버지가 하시던 사업이 부도가 나면서 한순간에 저희 집은 빚더미 에 올라앉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저의 삶은 완전히 바뀌어 버렸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2학기를 얼마 남겨 두지 않고 학업을 중단해야 했지요. 어떻게 해서든 초등학교 졸업장이라도 남기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밥을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더 많아 기운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주의 종이 된 지금도 제가 될 수 있으면 금식을 피하려는 이유가 바로 그처럼 심하게 배를 곯았던 시절의 기억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 후 친구들이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저는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습니다. 누구의 권유도 아니요, 순전히 제 의사에 의해서 단지 굶지 않고 밥을 먹을 수 있는 길을 찾아 무작정 집을 나선 것입니다. 일단 집을 나선 저는 일은 힘들어도 밥은 굶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농사를 많이 짓는 시골집의 머슴으로 들어갔습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논밭 일과 넓은 집안일까지 쉼없이 하니 우선 주린 배는 채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너무 많이 굶은 데다가 한창 자랄 나이에 무리한 지겟일을 한 탓인지 제 키는 더 이상 자라지 않았습니다. 지금이야 농촌에도 트랙터나 경운기로 많은 짐을 나르며 쉽게 일을 하지만, 예전에는 순전히 사람의 힘으로 해내야 했지요. 지금도 가끔 거울 앞에 서서 제 작은 키를 볼 때면 그 시절이 생각나곤 합니다.
열일곱 살 때부터 스물다섯 살이 될 때까지 무려 8년이라는 세월을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느라 꽃다운 청춘을 다 보냈습니다. 사랑을 말하고 인생을 논한다는 자체가 저에게는 사치였고, 그 흔한 철부지 기분이나 감정조차 표현하지 못했지요. 아침에 눈 비비고 일어나면 해가 저물도록 쉴새없이 일하고 곯아떨어지기가 일쑤였습니다. 그렇다고 저에게 청춘의 열정과 희망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모든 것을 억누르며 지냈을 뿐이지요.
지금이야 남의 집 일을 하는 사람에게 주인들이 잘 대접하며 적지 않은 삯도 주고 든든한 세 끼 식사에다가 새참까지 날라 오지만 제가 머슴살이를 할 때에는 사람 취급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도 지극히 정상적인 감정을 지닌 사람이었기 때문에 주인과 주변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를 받을 때면 모욕감에 참으로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렇다고 남의 집 머슴살이 인생을 벗어날 뾰족한 수도 보이지 않았기에 그저 묵묵히 일할 뿐이었지요.

동네 목사님의 전도로 주님을 영접하게 되고

이렇게 아무 기쁨도 희망도 없는 머슴살이를 하던 어느 날, 이웃 마을의 교회에서 시무하시는 강수명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제가 일하고 있던 논 부근을 지나시면서 "이 선생, 수고하십니다." 하고 인사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제 평생 '선생'이라는 말을 듣는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하던 터라, 저는 너무나 황송해서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 그저 고개를 조아렸습니다. 그 당시 시골의 목사님이라고 하면 그래도 마을의 유지급 어른인데, 그런 분이 다들 우습게보고 멸시하는 저 같은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해 주신다는 사실에 감격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 만났을 때에도 목사님은 여전히 "이 선생님, 그 동안 잘 지내셨어요? 건강은 어떠세요. 교회에 꼭 한번 나오세요."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대접도 못 받는 나를, 높으신 목사님이 이토록 정중하게 초대를 하시다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 같은 것이 느껴져서 저는 낮에는 일을 하느라 교회에 못 가고 저녁에 한두 번씩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머슴살이를 하는 저에게 변변한 옷이 있을 리 만무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초라한 모습으로 교회에 갔는데도 목사님은 언제나 따뜻하게 환영해 주시며 극진하게 대접해 주셨습니다. 또 목사님은 제가 교회에 갈 때마다 예배가 끝난 후 사택으로 데리고 들어가셔서 식사를 하도록 배려해 주셨는데, 그것도 목사님과 겸상이었습니다. '하늘같은 목사님과 겸상을 하다니?' 처음에는 어떻게 먹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쑥스러움과 긴장 속에서 식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돌아올 때면 "이 선생, 고생이 많지요." 하시며 잘 이겨내라는 따뜻한 격려의 눈길로 제 손을 꼬옥 잡아 주셨습니다. 어느 새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저를 대하시는 그분을 나도 모르게 신뢰하고 따르며 무엇이든지 순종하게 되었고, 그러는 사이 차츰 신앙이 성장하였습니다.

설교를 듣다가 목사가 되고자 꿈꾸며

그러던 1973년 여름, 비오는 수요일 저녁예배였는데 강 목사님의 설교가 제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비가 와서 일찍 일을 마치고 교회에 갔더니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는 장면을 설교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고기잡이로 생계를 이어 가는 거칠고 무식한 뱃사람에 불과하였지만,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순종한 결과 위대한 수제자가 되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결론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현재 처한 상황에서 성실하게 일하면 하나님께서 언제 그를 부르실지 모르며, 그에 순종하면 주님의 훌륭한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날의 설교는 한 절 한 절이 잘 박힌 못과 같이 제 마음판에 그대로 새겨지면서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은 진실이고, 성경에도 분명히 그렇게 기록되어 있잖아. 고기잡는 어부가 주님의 제자가 되었다면 농부인 나도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겠지. 그래, 나도 도전해 보자!'
그 당시 강수명 목사님은 저의 정신적 지주였고, 제 삶의 전부였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은 곧 저의 앞길을 인도하는 빛이고 힘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어부 베드로를 주님의 제자로 부르신 하나님, 저를 주님의 종으로 써 주십시오." 하며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남의 집 머슴으로 사는 제가 하나님의 종이 된다는 것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이라고 생각되긴 했지만, 성경과 목사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제 마음 속에 피어나는 소망의 불꽃을 계속 지펴 주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제게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믿음과 새 희망을 주신 강수명 목사님이 그 마을을 떠나시고 다른 목사님이 부임해 오셨습니다. 후임으로 오신 이계선 목사님이 제 소원을 아시고 한 가지 제안을 하셨습니다. 바로 마산에 있는 합성감리교회의 담임 교역자인 구동태 목사님이 삼남 지역에 감리교 신학교를 운영하면서 성경 공부를 가르치고 계시는데, 그분께 훈련을 받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마음을 정하여 8년 간의 머슴살이를 청산하였는데, 그 때 제 나이 스물여섯이었습니다. 당시 부산에서 마산으로 가려는데 난생 처음 기차를 보고 어찌나 신기하던지 한참이나 바라보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마산에 도착해서 낮에는 열심히 인쇄소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마산 합성감리교회 구동태 목사님이 가르치시는 성경공부반에 들어가서 열심히 공부를 하였습니다. 어느덧 3년 과정을 마치고 그간의 꿈을 이루기 위해 신학대학을 진학해야 했지만 고등학교는커녕 초등학교 졸업장조차 없는 현실에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1980년 1월 16일, 마산에서는 자격증도 배경도 없는 저를 도와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무조건 서울로 상경해 친구의 소개로 서대문 영천성결교회의 사찰이 되었습니다. 교회의 크고 작은 일은 물론 화장실 청소에 이르기까지 목사님이 시키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말없이 다 했지만, 제 마음은 안정을 찾을 수 없었고 답답함과 곤고함만 밀려왔습니다.
이대로 인생을 마치기에는 너무나 억울하다는 생각에 나사렛 성결신학대학, 협성신학교 교무처장을 찾아가서 공부할 수 있는 길이 없겠느냐고 도움을 청하였지만 보기 좋게 거절당했습니다. "그 옛날 고기잡던 베드로가 주의 종이 되었다고 해서 오늘날 머슴살던 형제도 주의 종이 될 수 있다고 생각지 말고 가서 농사나 지으시지요."라는 야박한 말뿐이었지요. 말할 수 없는 절망감과 아픔이 밀려 왔지만 애써 마음을 다시 잡고 재도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 이들이 원하고 사회가 원하는 공부를 하고 말리라!"

검정고시를 거쳐 신학공부를 마치니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마음에 두 개의 깃발을 꽂았습니다. 그 하나는 '인내하며 최선을 다하자.'였고, 또 하나는 '감사하자.'였습니다.
스물아홉의 나이에 '죽기 아니면 살기다.'라는 각오로 초등학교 과정을 공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평화시장에서 남들이 쓰던 헌 참고서를 싸게 사와서 6개월 만에 졸업 검정고시에 합격하였습니다. 이어 고등학교 과정에 도전해서 8개월 10일 만에 마치고, 중·고등학교 과정을 공부하기 시작한 지 1년 2개월 10일 만에 6년 전과정을 마쳤습니다.
저도 놀랐고 주위 사람들도 놀랐습니다. 낮에는 교회에서 사찰로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고 밤에는 독학으로 검정고시 준비를 하면서 한 번도 자고 싶을 때 잔 적이 없었습니다. 밤이 깊도록 책과 씨름하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 잠이 들었지요. 내 생애에 두 번 다시 그럴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정말 최선을 다해 공부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어디서 그런 열정이 나왔는지 생각할수록 알 수 없는 일입니다. 혼자 공부를 하다 보니 너무 힘이 들어서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하루에도 여러 차례 들었지만, 주의 종이 되겠다는 포기할 수 없는 꿈이 모든 어려움을 이기게 했던 것 같습니다.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을 하고 난 직후, 저는 바로 지금의 협성신학대학의 전신인 당시 감리교 서울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들어온 대학마저도 결코 수월하게 마친 것은 아닙니다.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바짝바짝 타는 가슴을 안고 수없이 눈물 뿌려 기도하였습니다. 기도하고 또 기도해도 응답이 없어 슬며시 서글픔이 밀려올 때면 내 영혼이나마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자는 생각으로 애써 서글픔을 달랬습니다.
"하나님, 등록금을 못 내면 수강신청을 할 수 없으니 어떡합니까. 수강신청을 못 하면 수업을 못 받고, 수업을 받는다 해도 학점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목사가 되려는 제 꿈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래도 저는 목회자가 되겠다고 사람 취급 못받고 의지할 데 없이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이 길을 걸어왔는데 지금와서 그만두자니 너무 억울합니다."
푸념 끝에 원망도 나왔습니다. "하나님, 제가 무얼 그리 잘못했습니까?"
그러다가 '에라, 못 갈 길이라면 농사나 지으러 가자.'고 제 자신에게 타협을 시도하기도 하였지요. 지쳐서 원망할 힘도 없어질 즈음에 성령께서 저의 잘못된 생각을 책망하셨습니다.
"아들아, 남의 집 머슴을 살면서 막걸리나 퍼 마시다가 흙 속에 묻혀 버릴 너를 구원하여 존귀한 이 길을 가게하고 천국을 알게 해 주었는데 어찌하여 응답이 더디다고 원망하느냐?"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억눌린 서러움이 밀려들어 울다가, 또 나같이 보잘것없는 사람을 만나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엉엉 울고 나면 어느 새 마음에 평안이 임하였습니다. 그러고 나면 기적같이 등록금이 마련되어 수업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신학과정을 마치고 목사 고시를 통과하여 감리교단에서 1990년 4월 7일, 정식으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숱한 역경 끝에 꿈을 이룬 것입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한계를 절감하면서

천신만고 끝에 학업을 마치고 주의 종이 되고 난 후 빈손으로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맨주먹이기는 하지만 숱한 고난을 신념과 의지로 통과한 저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 개척과 목회는 남의 집 머슴살이보다, 독학으로 검정고시 공부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웠습니다. 아무리 노력하고 애를 써도 수년이 지나도록 그 숫자가 그 숫자일 뿐이었습니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왜 이렇게 내 인생은 고난을 벗삼아 가야만 하는가.
이러한 어려움 가운데 있을 때 친구라면 친구요, 선배라면 선배인 마산의 S 목사님이 담임하는 교회가 부흥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간 소식도 물을 겸 부흥 비결을 알고자 마산으로 내려가서 3년 동안 성경공부를 했던 그리운 그 자리에서 밤을 새워 가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일방적으로 그분의 말을 듣는 형편이었지요.
십자가의 도, 영적인 사랑 등에 대해 너무도 열정적으로 전하길래 귀 기울여 들었지만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간혹 이해가 되는 부분은 은혜를 받고 교회로 돌아와 심기일전하려 했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습니다.

이재록 목사님을 만나 진리의 길을 발견하게 되니

이처럼 제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고서 S 목사님이 말씀하시던 이재록 목사님을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 목사님과의 만남은 제 인생의 또 한번의 전환점이 되었고 그 때 저는 길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천국으로 훤히 곧장 뻗어 있는 대로를 본 것입니다. 그분에게서 배우는 동안 제 영혼은 쉼을 얻고 제 마음은 기쁘고 평안하였으며 이전과는 다른 자신감이 솟아올랐습니다. 바로 저의 신념과 의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믿고 그 뜻을 구하여 순종함으로 주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갈 자신감이 생긴 것입니다.
이분에게서 배우며 따라만 가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크게 영광을 돌릴 수 있겠다는 확신이 와서 그 날개 아래 들어가기로 하였습니다. 결국 1991년 9월 15일 만민중앙교회의 부목사가 된 것입니다. 이재록 목사님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에 순종하며 영혼들을 섬기면 저나 양 떼 모두 안전하게 천국으로 갈 수 있겠다는 확신이 그러한 결단을 내리게 하였습니다.
물론, 앞서 가시는 당회장님께서도 그만한 그릇이 되기까지 엄청난 연단과 시련을 거치셨기에 덕과 사랑으로 또한 진리대로 행하시는 것임을 잘 압니다. 그런데 너무나 쉽고 명쾌한 진리의 도를 배우면서도 때로는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는 고통스러워하기도 하였습니다. 고난의 세월 동안 제 마음 깊이 심겨진 비진리와 악이 아직 많이 남아 있는 탓이었지요.
그러나 그 때마다 자청하고 간청해서 이재록 목사님을 따라 주님께 충성하기로 한 것을 떠올리며 내가 옳다고 여기는 의를 버리고 기쁨으로 순종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오랫동안 갈급히 헤매다가 찾은 영혼의 안식처요, 부족한 저를 품어 주신 그분께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는 전도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예수 믿고 구원받으시오."라고 하기가 "밥 한 그릇 주시오."라고 말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는 말이 실감났습니다. 또한 여러 가지 주어진 사명이 많아 전도를 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지요.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지 시간을 내려고 애썼고 궁리 끝에 일단 토요일을 전도하는 날로 정하였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거절도 많이 당하였지만 감사하게도 낙심이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갈수록 용기도 생기고 지혜도 생겼습니다. 온통 영혼 구원에 대한 생각뿐이었고, 전도 대상자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달려갔습니다. 이쯤 되니 꿈도 전도하는 꿈을 꿀 정도였지요.
한 번은 새벽 4시에 끝나는 금요철야예배를 마치고 한두 시간 눈을 붙인 후 곧바로 전도 대상자가 있는 수원으로 달려가 그분이 일어날 때까지 대문 앞에서 한참을 기다린 적도 있습니다.
그러한 열심을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매주 새신자를 인도할 수 있도록 역사해 주셔서 1997년 한 해 동안 160여 명이 넘는 영혼들을 주님의 품으로 인도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려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신 주님의 마음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교구장으로서 맡겨 주신 영혼들도 마음을 다해 돌보았습니다. 그 결과 교회에서 부상으로 주어지는 성지순례에 다녀올 수 있는 축복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1997년도 성지순례는 제가 주의 종이 되고 난 후에 가진 꿈이고 목표였는데 교회의 배려로 다녀옴으로써 일생의 꿈을 또 하나 이룬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당회장 목사님께 받은바 은혜를 갚고자 노력하니 하나님께서는 더욱 크게 축복하셔서 지금은 세계 20대 교회로 우뚝 발돋움한 만민중앙교회 주의 종들의 모임인 교역자회 회장으로 주의 종들과 많은 영혼들을 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만 받드는 종이 되고파

지금 생각해 보면 지난 40여 년 가시밭길 같은 세월을 어떻게 헤치고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잡초처럼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을 수 있도록 주님께서 때마다 지켜 주시고 성장시켜 주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사실 믿는다고 했고 기도한다고 했지만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을 구하기보다는 나의 의지와 신념 속에서 이루려 한 것이 더 많았음을 고백합니다. 하지만 낭패와 실망을 맛본 지금에는 오로지 하나님의 뜻만 받드는 종이 되고자 합니다.
그래서 이제 온 힘을 다해 광야 같은 곳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향기 좋은 한 송이 꽃을 피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달려가고 있습니다. 숱한 고난과 아픔은 보잘것없는 저를 참된 주의 종이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 속에서 허락되어진 것임을 이제서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로마서 8:18)라는 말씀과의 만남이 없었던들 저는 결코 주의 종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저는 많은 성경 말씀 중에서 특히 이 말씀을 좋아하는데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1975년 5월 5일 오전 11시, 주일이었는데도 저는 들에서 모내기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한창 바쁘게 오가며 일을 하고 있는데 아랫마을 교회 성도들이 야외예배를 드리러 가는 행렬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제 마음에서 올라온 불평이 입 밖으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공평치가 않으시군요. 저도 하나님의 아들이건만 어찌하여 저는 주일에도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두시고 저 성도들은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길래 자유롭게 야유회를 갑니까."
성도들의 즐거운 나들이를 바라보는 사이에 그만 힘이 빠져서 논에서 나와 지게 밑에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그 때 성령께서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중원아,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그 때는 이 말씀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내 마음 속에 임하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기쁨으로 온 마음이 감동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현재의 고난보다도 장차 나타날 영광이 족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그 말씀을 붙들고 어떤 고난을 당할지라도 주의 종으로 갈 길을 열어 달라고 간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그 말씀은 이제껏 겪은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되었고, 오늘날 주의 종으로 나오기까지의 지표가 되었습니다. 저는 아직도 제 인생의 지표를 세워 준 그 날을 잊을 수 없습니다.

장차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며

목회자가 되기까지 숱한 고비고비마다 기도했던 순간들이 생각납니다. 주의 종의 길을 가게 해 달라고 3년이 넘게 기도했던 순간들, 너무나 힘들어서 포기하고 차라리 다시 농사나 지으러 갈까 망설였던 순간들도 생각납니다. 배가 고파 울던 순간들, 멸시와 천대와 조롱을 받고 견딜 수 없이 괴로워했던 순간들, 보이지 않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도 끊임없이 도전하던 순간들, 누구 하나 도와 줄 이 없는 고아와 같은 현실, 밤을 새워 풀어도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와 영어 문제들, 맨주먹으로 교회를 개척하려고 뛰어들었던 무모한 순간들이 기억납니다.
결국은 장차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며 현재의 고난을 잘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길 외에 다른 해결 방법이 없음을 많은 체험을 통해 잘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크고 작은 일들을 만날 때 이렇게 기도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이후에 아버지 나라에서 누릴 영원한 영광을 위해 오늘 이 어려움을 감사함으로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이제 지난 세월을 돌아보니 남의 집 종으로 살던 8년의 세월이 오히려 감사할 뿐입니다. 그 때는 몰랐습니다. 저를 주님의 참된 종으로 만드시려고 머슴살이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조금도 깨닫지 못했던 것이지요. 다만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낮은 자리에 나를 두셨을까 하는 서러운 마음뿐이었습니다.

종은 자유가 없습니다.
종은 소유가 없습니다.
종은 자기주장이 없습니다.
종은 주인의 명령에 오직 순종과 충성과 생명을 바치는 헌신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를 참된 종으로 만드시고자 그토록 고달픈 세월을 보내도록 허락하셨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요, 지혜임을 이제야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좋으신 하나님께서 저를 숱한 고난과 역경의 도가니에서 연단하신 후, 좋은 목자, 좋은 제단으로 이끄시고 좋은 양 떼들을 맡겨 주셨으니 오직 충성하며 장차 나타날 영광에 동참하려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이 종을 통하여 영원토록 영광을 받으시오며 이 종이 나의 스승, 나의 목자에게 큰 힘이 되게 하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