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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제목
오직 푯대를 향하여 - 남은 생애 전적으로 복음전하는 일에 매진하고자... - 정구영 권사
출처
날짜
2007년 3월 3일 토요일
조회수
4821
뉴스가난하지도 부유하지도 않은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난 저는 어릴 적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는데 중학교 2학년 때 읽었던 마담 퀴리의 자서전은 저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가난 때문에 고생을 하면서도 꿈을 가지고 부단히 공부한 결과 화학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기고 두 번씩이나 노벨상을 받은 퀴리 부인을 보면서 저는 '나도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하는 가능성과 함께 '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평소 자연 과학에 관심이 많았던 저는 그 때부터 흰 가운을 입고 밤을 새우며 연구하는 과학자가 되기로 인생의 목표를 정했습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그저 학업에 충실하고 다양한 책을 읽으면서 지냈을 뿐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교회 근처에도 가 보지 않았습니다.

대학 3학년 때 주님을 영접하고

그런데 1967년 기독교 계통의 학교인 서울여대에 입학하면서부터 어쩔 수 없이 하나님께로 떠 밀려갔습니다.
채플(chapel, 학교예배)과 기독교 관련 교과목들을 의무적으로 수강해야 되는 학교 규정 때문에 저는 학점을 따기 위해 예배에 참석하고 성경을 읽으며 찬송가도 부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점수는 잘 받으려고 열심히 성경을 읽고 성서의 참고서와 같은 주석까지 뒤적였습니다. 그러나 모를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았으니 깊고 오묘한 진리를 깨달을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렇게 2년 동안을 마지못해 하나님에 대해 배우는 중에 '나도 저분들처럼 살고 싶다.' 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제가 다니던 대학의 학장님이셨던 고황경 박사님을 비롯한 몇몇 교수님들이었는데, 그 말 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모든 것이 진실하고 정결해 보여 왠지 닮고 싶어졌습니다.
그런 소원이 생기던 즈음 기숙사 내에 있는 기도실 책꽂이에 있던 신앙인들의 간증책을 읽으면서 ' 정말 하나님은 살아계신가 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대학 3학년이 되자 저도 하나님 앞에 결단을 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저의 구주로 영접하였습니다. 그리고 기왕이면 성경도 잘 알고 싶어서 성경공부를 하는 모임에 부지런히 좇아다니면서 배운 대로 행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감각이 둔해서인지 하나님의 사랑을 뜨겁게 느끼지 못하였고 이렇다 할 신앙적인 체험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제가 행한 것보다 더 큰 축복을 부어 주셨습니다.
1971년에는 고려대학원에 입학해서 식품생화학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1974년에는 서울 대학원에 들어가서 식품공학을 공부하여 어렵잖게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그것도 대학이나 대학원 과정을 이수하는 동안 특별 장학생으로서의 특혜도 받았으며, 한 과목에서 B학점을 받은 것을 제외하고 모두 A학점을 받은 것입니다.
물론 저도 성실하게 노력하였지만 그보다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그러한 성적이 가능하였다고 믿어 감사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는 동안 틈틈이 「길은 여기에」, 「이 질그릇에도」 등 일본 여류 기독교 작가인 미우라 아야꼬가 쓴 책들을 읽으면서 예수 믿는 삶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저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세례를 받았습니다.
서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니 남부러울 것이 없다는 생각도 들었으나 그것도 잠시, 외국에 가서 1, 2년 정도라도 공부를 더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엉뚱하게도 저를 전공과는 상관없는 기독교 관련 분야의 학문을 하도록 이끄셨습니다.
당시 서울여대를 이끌어 가시던 고 박사님께서 저에게 외국에 가서 본래 저의 전공인 식품공학이 아니라 기독교 교육을 공부하도록 은근히 종용해 오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전공 관련 과목이 아닌 기독교 관련 공부를 왜 해야 되는가.'라는 문제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권사님이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인데 왜 요나처럼 피하려느냐?"는 질책과 함께 하나님께 맡기면 선하게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의 말씀도 해 주셨습니다.
미국에 가서 기독교 관련 공부를 하는 것이 단순히 고 학장님의 계획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기도 한 것을 깨달은 저는 1980년 고 박사님의 권유를 받아들여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에 있는 웨스턴 에반젤리컬 세미나리에서 기독교 교육학 석사과정을 공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서울여대 학장이 되어

기독교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후 저를 마음속에 서울여대의 후계자로 점찍어 놓으신 고 학장님께서는 2년여 간에 걸쳐 행정 수업을 시키셨습니다.
마침내 1984년 12월, 제 나이 서른다섯 살 되던 해에 하나님께서는 제가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던 모교 학장으로 일할 수 있도록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고 박사님이 임기 전에 물러나시면서 저에게 학장일을 맡겨 주신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서울여대가 단과대학이었으므로 학장이 대학 운영의 전반적인 책임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 때까지 제가 한 것이라고는 공부밖에 없었기에 저는 어떻게 이 직분을 감당해야 될지 몰라 당황하였지만, 주위의 많은 분들이 저를 위해 기도하시며 여러 모로 도와 주셨습니다.
그래서 제 마음에 하나님께서 저를 지켜 주시리라는 믿음이 생기면서 내가 할 것은 순종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서울여대의 교육 이념을 구현하고 대학을 발전시킬 능력을 주십사 하고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30대에 대학 학장이 된 것은 매우 드문 일이라 각 언론에서는 '학계의 신화 창조', '교육계의 신데렐라' 등 각종 미사여구를 사용하며 저를 치켜세웠고, 그만큼 저는 책임감과 부담을 느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대학 학장이란 직분이 명예롭고 멋지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 저에게는 그 직위가 마치 무거운 십자가처럼 여겨졌습니다.
유난히도 각종 데모로 시끄러웠던 1980년대는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습니다. 마땅히 호소할 곳도 없으니 자연스럽게 하나님 앞에 아뢰며 기도하는 시간이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답답할 때면, 저는 종종 "하나님, 제 이 무거운 짐을 언제나 벗겨 주실 겁니까?" 하는 질문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학내 분규로 마음의 연단을 받으며

서울여대 재직중에 학내 분규로 인한 마음의 연단을 받은 후 저에게 너무나 큰 충격을 주는 사건이 1987년 10월에 발생하였습니다. 서울여대와 비슷한 시기에 세워진 다른 대학들은 종합대학으로 승격을 했는데 서울여대는 그 대상에서 제외된 사실에 학생들이 분개하여 큰 데모를 일으킨 것입니다.
다른 대학들이 많은 수의 학생들을 뽑으며 학교를 키워 나가는 반면 저희 학교의 초대학장으로 청빙되어 20여 년을 이끌어 오신 고 박사님은 양보다는 질적인 교육을 원하셨습니다.
학교를 무작정 키우기보다는 생활 교육이라는 서울여대의 특별한 교육 철학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소규모의 학교로 알차게 키우시겠다는 생각으로 학교를 다듬어 오신 것입니다. 구태여 종합대학으로 가야 할 필요성을 안 느꼈다고도 볼 수 있지요.
그러나 고도의 경제성장 기류에 편승하여 1980년대의 시대 상황은 물량주의 사고가 팽배해 있어서 학교건 교회건 숫자가 많고 커야만 그럴듯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대단히 농후하였습니다.
이런 상황하에서 종합대학은 좋은 대학이고 단과대학은 형편없는 대학이라는 근거 없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학생들은 학장이 무능하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온 것이라며 "학장은 물러가라."고 40일 동안이나 철야농성까지 하며 시위를 계속하였습니다.
당시 저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려고 머리를 숙이면 눈물부터 펑펑 쏟아지면서 원망이 머리끝까지 차오르곤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끝내 참지 못하고 어느 순간 믿음 없이 불평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저에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제가 언제 하나님께 학장시켜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습니까? 평교수로 잘있던 저를 공연히 학장으로 세우셔서 온 세상을 놀라게 하시더니 이제 와서 무능하다고 물러나게 하신다면 저도 창피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또 얼마나 창피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고

하나님께서 묵묵부답이신 것 같아 답답하던 중 하루는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두 가지 깨우침을 주셨습니다.
"네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고 내가 필요해서 너처럼 보잘것없는 자를 들어서 서울여대의 학장으로 세웠고 또 필요해서 너를 그 자리에서 내린다 한들 네가 내게 원망을 할 수가 있겠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이 물음에 세상적으로 명예가 올라갈 때는 순종하겠다고 하다가 이제 세상적으로 명예가 실추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자 원망하는 얄팍하고 간사한 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모든 재산과 자녀를 다 잃고도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고 오히려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기 1:21)라고 고백하며 순전함을 버리지 않은 욥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저도 욥과 같은 고백을 드려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하고 "하나님, 저를 학장으로 쓰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십시오. 오로지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쓰임을 받기만 한다면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라는 고백을 드렸습니다.
구하는 대로 응답해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느끼고 이런 고백을 드리고 나니 바로 전까지 울고불고했던 제 자신이 너무나 어리석게 여겨졌습니다.
또 하나의 깨우침은 하나님께서는 서울여대나 그 학교의 학장으로 일하고 있는 저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다른 학교,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더 나은 성결이 아니라 전적인 성결, 전적인 신뢰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죽고자 하면 살리라."라는 말씀과 같이 세상의 명예나 체면에 연연해하던 저 자신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며 믿음으로 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100%까지는 순종하지 못했던 일들을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하겠다는 결심으로 모든 것을 포기했을 때 학생들은 학장이 무능한 탓이 아니니 오히려 우리가 보호해 드려야 되겠다며 데모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40일 간의 데모를 마무리하는 공청회를 통해 "앞으로 1년 간 열심히 노력해서 다음 해에는 종합대학으로 승인을 받도록 하겠으며 중앙도서관도 가능한 한 빨리 짓도록 하겠다. 만일 그렇게 되지 않으면 스스로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 당시로서는 이 두 가지가 어느 모로 보나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이었습니다.

오직 기도로 신실하신 하나님께 구하니

그러나 저는 하나님께 대한 저의 믿음을 학생들 앞에서 선포한 것이었기에 하나님께 매달리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평소에 저를 위해 중보기도 해 주시던 많은 분들도 그 때부터는 철야기도까지 하며 힘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러자 1988년에는 종합대학 승인 기준이 바뀌어서 입학 인원을 늘리지 않아도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동창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어 수익 자산을 초과 모금할 수 있도록 역사해 주셨습니다.
또한 만나기 쉽지 않은 현대 그룹의 정주영 명예 회장님을 만나 뵙고, 서울여대에 대한 비전과 필요한 것을 설명드렸더니 도서관을 좋은 조건으로 지어 주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 결과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훌륭한 최신식 시설을 갖춘 도서관이 지어졌지요.
벽돌 한 장 한 장이 올라갈 때마다 감격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고, 돕는 천사로 보내 주신 정 회장님을 위해서도 날마다 기도하였습니다. 결국 믿음을 저버리지 않으시고 응답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학생들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서른아홉의 나이로 서울여대의 총장이 됨으로써 또 한번 뉴스거리가 되었고, 학교도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도 하나님께서는 정주영 명예 회장님의 마음을 움직여 주셔서 대학 교회와 기독교 교육관, 아동연구센타, 미술대학, 제 2과학관, 생활교육센타 등 수많은 건물들을 좋은 조건으로 세울 수 있도록 역사하셨습니다.

믿음대로 응답하시며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

"입을 크게 열어 구하라 내가 채우리라"는 말씀을 기도 가운데 주셨으므로 담대한 믿음으로 추진하였더니 믿음의 실상인 건물들이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그야말로 새롭게 우뚝우뚝 들어선 많은 건물들 때문에 서울여대의 스카이라인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느끼면서 저는 나름대로 기도하는 것과 성경 읽는 것에 힘쓰며, 서울여대도 더욱 열심히 섬기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에 알고 지내던 어떤 장로님으로부터 만민중앙교회에 대해 듣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말씀대로라면 지구상에서 제일 좋은 교회라는 생각이 들 만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설마 하고 대충 50% 정도는 디스카운트해서 들었습니다.
얼마 후에 만민중앙교회 창립 9주년 기념예배에 초대를 받고 축사까지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 전에 장로님으로부터 들었던 말씀을 떠올리며 '정말 그럴까?','아냐, 지금까지 경험으로 보면 소문의 반 정도만 진실로 받아들이면 될 거야.'라는생각 사이를 왔다갔다하다가 그래도 성의를 다해야 될 것 같아서 잠을 설쳐가며 인사말을 꼼꼼하게 준비하였습니다.
그 다음 날, 교회에 발을 내딛는 순간 저는 들리는 소문의 진상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솔로몬 왕을 찾아갔던 스바 여왕의 고백이 떠오르며 저 자신도 스바 여왕이 한 고백을 할 수밖에 없다는 강한 성령님의 주관을 받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그 전날 밤 작성하였던 축사는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고 즉석에서 성령의 감동함 속에 받은 스바 여왕의 고백으로 축사를 바꾸어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령의 감동함 속에 스바 여왕의 고백으로 축사를 하고 뉴스지금도 그 당시의 강한 인상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한 마디로 말해 소문보다 훨씬 더 은혜롭고 아름답고 훌륭한 교회였던 것입니다.
그 후에 저는 어느 기독 모임에서 이재록 목사님을 뵈었는데 그 겸손한 모습에 은혜를 받은 한편, 너무나 점잖아 보여서 '저런 목사님이 어떻게 그 큰 교회를 이끌어 가실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저 목사님을 우리 학교 기도회원으로 모셔야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말씀을 드리고 허락을 받았습니다.
이런 계기로 만민중앙교회와 이재록 목사님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은 저는 목사님의 설교 테이프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도 종종 설교 부탁을 받아 오고 있던 터라 나름대로 많은 신앙서적을 읽고 정리하며 여러 목사님들의 설교 테이프를 듣고 있었는데 이재록 목사님의 설교는 성경 말씀에 담긴 영적인 뜻을 명쾌하게 풀어 주는 데서 전혀 다른 차원의 감동을 받았습니다.
어느 책이나 설교에서도 들어 보지 못했던 「예수가 왜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는가」라는 설교와 「토지 무르기 법칙」,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영생」 등의 말씀을 들을 때에는 '그렇구나' 하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인자의 살과 피란 무엇이며 어린 양을 먹는 방법을 듣는 동안 막혔던 무엇이 뚫려 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생명의 말씀으로 천국까지 인도받기를 바라며

그 때부터 이재록 목사님의 설교 테이프를 빠짐없이 들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몸은 와 있지 않았지만 제 영혼은 생명수가 넘치는 만민중앙교회를 안식처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12년 간 세 차례에 걸친 학장, 총장의 임기를 마치고 다시 서울여대의 교수로 재임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저는 세계적인 여류 과학자가 되겠다는 꿈보다는 선교에의 꿈이 더 크게 제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남은 생애는 어떤 형태로든지 전적으로 복음 전하는 일에 매진해야겠다고 마음을 정하고 심사숙고한 끝에 서울여대 교수직을 그만두고 2년 전에 만민중앙교회의 양 떼가 되었습니다.
만민중앙교회의 식구가 된 지금 더욱 믿음의 도전을 받으며 더 좋은 천국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기도하는 사람으로 자부하고 있었지만 막상 본교회에 와서 보니 결코 자랑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였고, 금식과 기도로 비진리를 벗어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려 애쓰는 많은 성도들을 보며 내가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를 새롭게 다짐하고 있는 요즈음입니다.
저도 주님의 마음을 닮고 주님께서 가신 길을 따라감으로 이후에 아름다운 새예루살렘에서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을 뵙고자 합니다. 이제껏 좋은 길로 인도하시며 좋은 것을 택하도록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모든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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