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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제목
죽음보다 더한 고통, 대상포진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어요 - 조분한 권사
출처
날짜
1999년 7월 1일 목요일
조회수
12469
제가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한 것은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되기 전부터였는데, 결혼 후 시집 식구들의 반대에 부딪혀 더 이상 교회에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1952년 6·25 전쟁중, 저는 전혀 예기치 못했던 한 사건을 만나게 되었는데, 남편이 세 딸과 유복자를 남긴 채 콜레라에 걸려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절망감 속에서 하나님께 의지하고자 다시 교회에 나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대구에서 멀리 떨어진 청도읍에서 남편이 남겨 준 농토를 가지고 알뜰히 생활해 나갔습니다.
6천 평의 논과 500여 평의 대지, 그리고 집이 있었기에 열심히 농사를 지으며 네 딸들을 대학까지 보내게 되었고,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훌륭한 사위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면서

그러던 1987년 어느 날부터인가 큰딸이 「죽음 앞에서 영생을 맛보며」라는 이재록 목사님의 간증수기를 읽더니 은혜를 받아 서울에 자주 올라가면서 만민중앙교회의 예배에 참석하곤 하였습니다.
나중에는 고려대학교 의과 대학 대학원 박사과정에 있던 둘째 외손자 황준하 집사까지 함께 올라가 주일예배와 금요철야예배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고 다시 대구로 내려오곤 하는 것이었습니다.
큰딸로부터 간증 책자를 전달받아 읽으면서 저 역시 큰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목사님의 말씀이 무척 사모되기도 하였고, 딸들 중에 가장 형편이 어려웠던 셋째 딸이 늘 안쓰러워 돌보아 줄 겸 해서 1986년에 서울에 올라가 방을 얻어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서울에 있는 동안에는 만민중앙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며 말씀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던 중 '혼자 사는 것이 보기에 민망하니 어서 내려오라'는 큰딸의 성화에 못이겨 다시 대구에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대구에 내려오기 바로 전 한 가지 신기한 체험을 하였습니다. 심한 기침이 나와 몹시 고통스러워하다가 이재록 목사님의 기도를 받았더니 즉시로 기침이 멈추는 것이었습니다.

수의를 짓다가 불치병 '대상포진'에 걸려

대구에 내려와 큰딸네 집에서 거하던 저는 고운 명주를 가지고 수의(壽衣)를 짓기 시작하였습니다. 딸이 극구 말렸지만, 수족이 멀쩡할 때 자식들에게 의지하지 않고 내 손으로 죽음을 준비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수의(壽衣)를 지었던 것이지요.
그러던 1988년 8월말, 뜻하지 않은 병마가 찾아왔습니다. 뒷머리가 욱씬욱씬 쑤시면서 몹시 아프기 시작한 것입니다. 또한 턱 밑에서 시작하여 오른쪽 가슴 전체에 물집이 생기며 터져 나가는데 참으로 산고(産苦)보다 더한 고통이었습니다.
병원에 가 진단을 해 보니 이 병은 일종의 바이러스에 의한 수포성 피부질환인 대상포진(帶狀疱疹)이라는 것이며, 그 후유증으로 인해 신경통과 같은 심한 통증이 온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바이러스는 항생제에도 죽지 않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죽을 때까지 이러한 고통에 시달려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참으로 암담하였습니다.
'나에게 왜 이런 질병이 틈타게 되었을까.' 생각하다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람을 미워하는 등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지 못하고 자꾸 하나님과 죄의 담을 쌓으니 지킴을 받지 못하고 질병이 틈타게 된 것을 깨닫게 되었지요.

죄를 회개하며 기도받기를 사모하니

그러던 1989년 11월 6일, 대구 신천교회에 부흥성회 인도차 이재록 목사님께서 오셨는데 마침 군의관이었던 외손자의 도움으로 부흥성회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때 저에게 기도를 해 주시면서 "회개를 해야 병이 낫습니다."라고 깨우쳐 주시며 치료받을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 후 저는 지난날의 죄악들을 성령님께서 떠올려 주시는 대로 눈물로 회개하게 되었지요.
1990년 2월이 되면서부터는 양팔이 오그라 붙을 만큼 고통이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차라리 죽어 버리면 고통에서 해방될 것 같아 살 소망이 끊어진 채 죽음을 고대하던 저였습니다. 질병에서 오는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수족이 오그라들 정도로 통증이 심하여 꼼짝 못하고 누운 채 "아이고 아야…." 하며 밤낮 비명을 질러대는 일이 하루 일과가 되었고, 저를 간호하느라 고생하는 큰딸과 사위, 온 가족들의 모습을 보는 것도 큰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한가닥 소망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재록 목사님의 기도를 받는 것이었지요. 능력 있는 목사님의 기도를 받으면 꼭 치료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지만, 꼼짝없이 병원에 누워 있어야 하는 병자 신세니 서울까지 갈 방법이 묘연하였습니다.
"우짤꼬! 비행기 타고 서울에 갈꺼나! 우짜면 목사님을 뵙고 기도받을 수 있을꼬?"
공항까지 가려 해도 택시를 타야 하는데, 제 몸으로는 거동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입니다. "어찌해야 서울에 갈 수 있는고?" 안타까워하며 오매불망(寤寐不忘) 목사님이 그리워 견딜 수 없었습니다.

모든 고통이 사라지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

1990년 3월 어느 날, 거듭되는 약물 투여로 정신마저 오락가락하고 혼미해져 죽음만을 기다리던 저에게 오랜 가뭄으로 메마른 땅에 쏟아지는 단비와 같은 기쁜 소식이 들렸습니다.
"이재록 목사님께서 이번에 부흥집회가 있어 대구에 내려오신대요!"
"오늘 지나면 앞으로 며칠 남은 겐가?"
저는 명절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설레는 마음을 달래며 손꼽아 부흥집회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저의 병세는 점점 악화되어 문 밖에도 거동할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졌기에 목사님을 찾아가 뵈올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안타까워하는 제 마음을 사랑의 하나님께서 보시고 모든 환경을 주관해 주셨습니다.
3월 12일, 대구 성심교회에 부흥집회 인도차 오신 이재록 목사님이 그 바쁘신 가운데서도 짬을 내어 저를 방문하셔서 기도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 때 또 한 번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게 되었지요. 신기하게도 몸 안에서 병마가 쫓겨 나가는 것을 느끼는 동시에 그토록 심하던 고통이 깨끗이 사라졌고 양 팔 모두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저는 생명의 말씀이 있는 교회가 너무나 그립고 사모되었기에 딸들이 서로 모시겠다는 것도 뿌리치고 서울에 올라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가정 복음화를 허락하신 하나님

당시 대구 계명대 중국학 교수로 재직중이던 큰사위는 장로 직분을 가지고 있었지만, 교회만 왔다갔다하는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1989년말 부흥성회 강사로 오신 이재록 목사님을 만난 후 급변하여 뜨거운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으니 이 또한 감사한 일입니다.
하루에 보통 두세 시간 이상을 기도하면서 전도에 열심을 내기 시작하였을 뿐만 아니라 생명의 말씀을 사모하여 틈만 나면 서울에 올라가 은혜받고 내려오곤 하게 된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그 후에도 여러 가지 연단을 통하여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참믿음을 소유하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원래 세상 욕심도 적지 않던 큰사위는 자녀들 중에서 제일 성실하며 총명한 둘째 아들 황준하 집사에게 내심 커다란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장래가 촉망되는 의학도였으므로 유능한 의사나 대학 교수가 되어 의술을 펼치면서 하나님도 잘 섬기기를 원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 아들이 어느 날 육체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보다는 근본된 영혼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훨씬 더 값지다는 판단을 내리고 오로지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겠다는 뜻을 아버지에게 밝힌 것입니다.
큰사위는 이런 아들이 이해가 안 된다며 허락하지 않았고 늘 마음아파했지요. 그러더니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지금은 젊은 나이에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자 용단을 내린 아들을 오히려 격려해 주고 있으며, 자신도 남은 인생 동안 하나님의 일에 열심내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처럼 질병의 고통에서 해방되고 자손의 축복을 받으며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입었으니 저는 앉으나 서나 감사와 찬송뿐입니다. 이제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열심히 신부단장 하면서 영육간에 강건함을 얻어 주님께 영광돌리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