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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획특집]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다 - 밀라노 칙령과 니케아 신조
출처
만민뉴스 제480호 PDF
날짜
2011년 5월 8일 일요일
조회수: 18870
뉴스주님의 부활 승천 이후, 기독교는 로마제국 전역으로 급속히 전파되었고 교회는 크게 부흥하였다. 그러나 4세기 초까지 로마 황제들의 극심한 핍박으로 교회들은 파괴되었으며 성경을 압수당하고 기독교인들의 지위와 권리를 박탈당하며 투옥되거나 죽임을 당해야 했다.



[로마제국의 10대 기독교 박해]

로마 황제 이름 / 재위 기간

1. 네로 / 54 - 68년

2. 도미티아누스 / 81 - 96년

3. 트라야누스 / 97 - 117년

4. 하드리아누스 / 117 - 138년

5.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161 - 180년

6.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 193 - 211년

7. 막시미누스 / 235 - 238년

8. 데키우스 / 249 - 251년

9. 발레리아누스 / 253 - 260년

10. 디오클레티아누스 / 284 - 305년

이러한 로마제국에서 콘스탄티누스는 최초의 기독교인 황제였으며 313년 밀라노 칙령을 선포하여 기독교 박해를 종식시키고 325년 니케아 회의를 개최하여 교회의 통일을 꾀했다. 그는 여러 차례의 전쟁을 거쳐 동서로마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고 주님을 만난 영적인 체험이 있기에 적극적으로 기독교를 보호하고 장려하는 정책을 펼쳤다.



◈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를 종식시킨 '밀라노 칙령'

1세기부터 시작된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는 4세기 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까지 계속되었다(로마제국의 10대 기독교 박해 참조). 그 당시 로마제국은 한 사람이 다스리기에는 너무나 광활한 영토였기에 크게 동과 서로 나누고 정, 부 두사람이 통치하였다. 총 4명의 황제가 다스렸기 때문에 이 시기를 사두(四頭)정치 체제 시기라고 부른다.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죽은 후 정치 권력은 불안정하게 되었고 황제들 사이에 반목과 권력 다툼이 치열하게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결국 312년, 콘스탄티누스는 막센티우스와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서로마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승리를 그리스도께서 도와주신 덕분이라고 믿었다(만민뉴스 475호 '콜로세움에 숨겨진 기독교 역사' 참조).

313년, 콘스탄티누스는 정치적 현안과 통치적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메디올라눔(지금의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동로마제국의 유일한 황제 리키니우스와 만났다. 이 회담에서 두 황제가 타협의 산물로 얻은 성과가 바로 '신앙의 자유와 빼앗은 교회재산의 반환 등을 밝힌 밀라노 칙령'이다. 이에 박해시절 기독교인들에게 몰수한 사유 및 공유 재산을 반환해 주었을 뿐 아니라 압류된 교회 재산도 조건 없이 반환해 주었다. 또한 로마의 여타 종교들과 같은 법적 지위를 기독교에 부여했다.

콘스탄티누스는 리키니우스와 달리 적극적으로 기독교를 보호하고 장려하는 정책을 펼쳤다. 교회와 성직자의 재정적, 법률적 특권을 보장하고, 기독교인들을 모욕하는 다양한 관습과 법령을 폐지하였다. 그는 기독교인 노예들의 해방을 촉진했고 교회에 유산을 기증하는 행위를 합법화했으며 일요일을 국정 공휴일로 공포했다. 밀라노 칙령을 통해 로마제국에서 기독교에 가해진 기나긴 박해가 종식된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재확인한 '니케아 신조'

324년, 콘스탄티누스가 리키니우스를 이기고 동서로마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 그런데 그에게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문제를 둘러싸고 생겨난 아리우스 논쟁 때문에 분열 위기에 놓인 것이다.

아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무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아들이 존재하지 않는 때가 있었다'고 말했다. 곧 '아버지와 아들은 동일한 본질이 아니라 유사한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반면 아타나시우스는 '아들은 무로부터 창조된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나신 분'이며 '시간 이전의 영원부터 계신 분'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아버지와 아들은 유사한 본질이 아니라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했다.

325년, 콘스탄티누스는 이 분쟁이 국가적 차원에서 분열이 생길 것을 우려하여 니케아에서 범국가적인 종교회의를 개최하였다. 회의의 동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단죄하여 분열된 교회를 통일시키고 로마제국의 안정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그 결과 니케아 신조가 발표되고 4명의 아리우스파가 파문, 유형을 당했다. 일단 아타나시우스가 승리한 것 같았으나 이후에도 이에 대한 논쟁과 투쟁은 계속되었다.



(지도 1)
뉴스(지도 2)
뉴스117년, 로마제국이 지중해를 중심으로 세계 최대의 영토를 소유하였기에 이스라엘에서 시작된 복음이 신속히 전 세계로 전파될 수 있었다(지도 1).

330년, 동서로마제국을 통일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재위기간 306-337년)는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으로 옮기고 '새로운 로마'라고 명명했다. 그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플(지금의 터어키 이스탄불)이라고도 불렸다.

392년, 동로마제국의 테오도시우스 대제(재위기간 379-395년)가 동서로마제국을 다스리면서 기독교를 국교로 정했다. 그가 죽은 후 로마제국은 동과 서로 분리되어 다시는 합쳐지지 않았다(지도 2).

476년,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로마제국이 망하고 1453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동로마제국이 멸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