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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의 소식

제목
[기획특집 일곱교회]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주님의 교훈 (1)
출처
만민뉴스 제504호 PDF
날짜
2011년 10월 23일 일요일
조회수: 855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요한계시록 3:14~17)





주님께서는 왜 라오디게아 교회의 미지근한 신앙을 경계하며
그냥 '더워지라'고 하지 않고 '차든지 더웁든지 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여기에는 미지근한 신앙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깨우쳐 주려는 주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뉴스 당회장 이재록 목사

라오디게아는 사도 바울의 동역자인 에바브로디도가 복음을 전파한 곳이며 사도 바울 역시 그곳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골 4:15~16). 라오디게아는 양모가 풍부한 곳으로 일찍부터 은행 제도가 생겨날 정도로 부요했습니다. 이러한 기반 위에 세워진 라오디게아 교회는 좋은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풍족함으로 인해 주님께서 그들의 신앙이 미지근하다고 책망하실 정도로 영적으로 침체되고 나태했습니다.



1.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책망의 말씀을 하신 주님께서는 하나님 앞에 오직 '예'와 '아멘'만 있었고 불순종이 없으셨습니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사람의 형상을 입고 오셨습니다. 또한 피조물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하나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빌 2:6~8).

하나님 자녀가 된 우리도 하나님 앞에 오직 '예'와 '아멘'만 있어야 합니다. 자기 생각과 이론 등 자기가 옳다 하는 모든 것을 무(無)로 돌리고 하나님 말씀에 순복할 수 있어야 하나님께서 보장하시고 이를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다음으로, 주님께서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십니다. 충성된 사람은 자기주장을 내세우거나 유익을 구하지 않으며 오직 '아멘'만 합니다. 예를 들어, 충성된 장수는 왕이 '가라' 하면 설령 목숨이 위태로운 곳이라 해도 순종해 떠납니다. 주님께서는 구약의 모든 예언(사 53:4~10, 61:1~3 ; 슥 9:9)을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죄인들을 위해 아낌없이 자신의 생명을 주시며 충성으로써 하나님의 약속하신 모든 말씀이 신실하게 성취됐다는 사실에 대한 참된 증인이 되셨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십니다(골 1:15~17). 원래 우주 만물은 하나님 말씀으로 창조됐는데, 요한복음 1:1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했지요. 요한복음 1:14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했습니다. 근본 하나님과 하나로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인간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따라서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하시며 주님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과 심판이 정확하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함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면서도 오직 아멘과 충성으로 모든 말씀을 온전히 이루신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주시는 말씀 역시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2. 네가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라오디게아 교회는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미지근한 신앙 때문에 주님께 책망받았습니다. 신앙 안에서 찬 것과 더운 것, 미지근한 것은 각각 무엇을 의미할까요?

영적으로 '차다'는 것은 그 마음에 성령의 역사가 없고 아예 구원과 상관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 중에도 성령을 받지 못해 참 믿음과 구원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말씀대로 살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령을 받았어도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으므로 다시금 세상으로 빠져들어 성령이 소멸되는 경우도 있지요 이렇게 구원과 멀어진 사람을 '차다' 말씀하십니다.

반면에 '덥다'는 것은 성령받은 사람이 날마다 영적인 새 힘을 공급받으며 믿음이 자라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 말씀에 따라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워 그것을 버림으로써 날마다 육은 죽고 영이 자랍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열심을 내고 자신을 희생하지요. 또한 마가복음 12:30에 말씀한 대로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데, 이 상태가 바로 '덥다'고 표현하는 뜨거운 신앙입니다.

여기서 차가운 신앙, 뜨거운 신앙이란 믿음의 분량이 크고 작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초신자라 해서 차가운 신앙이 아니고 교회에 오래 다니고 직분이 높다 해서 뜨거운 신앙이 아닙니다. 아직 믿음이 작고 진리를 온전히 행하지 못한다 해도 자신의 믿음의 분량 안에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 뜻을 좇는다면 시간이 갈수록 믿음이 성장합니다. 이처럼 하나님 뜻을 좇아 순종하는 사람이라면 뜨거운 신앙을 가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미지근한 신앙'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는 성령을 받아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고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알면서도 뜨거워지지 않고 신앙이 정체된 상태입니다. 이러한 미지근한 신앙을 소유한 사람은, 교회는 왔다 갔다 하지만 성령과 교통이 없으므로 그 음성과 주관과 인도를 받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을 들어도 자신의 모습을 잘 깨우치지 못합니다.

그나마 차가운 신앙이 되면 지옥에 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교회 출석은 하지만 주님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 하지도, 더 마음 다해 드리려 하지도 않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열심히 충성한다 해도 마음의 할례를 하지 않으니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 해도 삶의 변화가 없지요. 이렇게 미지근한 상태에 머물러 돌이키지 않는 사람은 결국 차가운 신앙이 되고 맙니다.

차라리 차가운 신앙 상태에서는 징계를 통해서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는 기회라도 있습니다. 가령,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서 외면하시므로 질병이나 사고를 당하거나 재앙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때 자신의 문제를 깨닫고 통회자복하면 신앙을 회복할 가능성이라도 있지만 미지근한 신앙일 때에는 그런 기회조차 얻기가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차가운 신앙이 되라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사실 차갑게 식어버린 상태에서 징계를 받을 때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설령 회개해 하나님 앞에 용서를 받는다 해도 이미 깨진 하나님과의 신뢰 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미지근한 신앙에 담긴 근본적 의미는 바로 하나님과 세상, 양쪽에 걸친 신앙을 말합니다. 양쪽에 걸쳐 있다가 상황에 따라 자신의 유익이나 편의를 좇아 좋은 쪽을 택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을 '입에서 토하여 내치겠다' 말씀하셨습니다(계 3:16). '토하여 내친다'는 것은 하나님 자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무서운 경계의 말씀입니다.



3.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라오디게아 교회는 심령이 부요하여 '나는 부자라, 부족한 것이 없다' 말했습니다. 마태복음 5:3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말씀한 대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의지합니다. 반면에 심령이 부요한 사람은 교만, 자존심, 이기심, 욕심 등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으려는 마음이 없고 끊임없이 세상의 것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심령이 가난한 상태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심령이 부요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눌러 놓았던 육의 마음이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특히 부와 명예와 권세 등을 가지면 점점 육의 신앙으로 변질되는 경우가 있지요. 신앙생활은 한다고 하지만 정작 진리에 대한 사모함이나 갈급함이 없고 기도도 점점 쉬다가 멈춥니다. 형식적인 행함만 있고 하나님과 그분의 일보다는 자신과 세상의 일이 우선이 되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이런 모습이 있었습니다.



4. 네 곤고한 것, 가련한 것, 가난한 것, 눈먼 것,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차라리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인정한다면 돌이킬 수 있는 기회라도 얻을 수 있지만, 미지근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스스로 부자라고 여기기 때문에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지도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성령께서 탄식하시므로 영혼이 곤고해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니 열심을 내려고 하지도 않고 변화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지요. 그 상태로 계속 가다가는 설령 육적으로 부족함이 없다 해도 결국 구원에서 멀어지니 '가련하다'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서 누리는 부요함은 결국 썩고 없어질 것에 불과하며, 썩지 않을 하늘나라에 영원한 상급을 쌓아 가는 사람이 진정 부요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미지근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 앞에 충성 봉사하지도 않고 물질이 아까워 심지도 못하니 결국 하늘나라에 쌓은 것이 없습니다. 설령 나중에 회개해 간신히 구원받아 천국에 간다 해도 받을 상급이 전혀 없지요. 그러니 영적으로 볼 때 '가난하다'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영적으로 깨닫고 이해하는 사람은 내세에 대한 분명한 소망이 있기 때문에 말씀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며 어둠을 벗고 빛으로 나옵니다. 또한 하늘나라에 쌓기 위해 열심히 충성 봉사하며 정성껏 하나님 나라를 위해 심습니다. 반면에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신령한 영의 세계를 알지 못하므로 내세에 대한 소망보다 당장 눈에 보이는 현실만을 바라봅니다. 곧 영적으로 눈먼 것이지요.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의 어둠을 발견하지 못하므로 여전히 어둠 가운데 있게 됩니다(마 6:22~23). 성도로서 당연히 입어야 할 의의 옷을 입지 못하였으므로 '벌거벗었다' 하는 것입니다.

옷은 사람의 마음을 뜻하며, 의의 옷을 입는다는 것은 마음을 할례 하여 의를 이룬다는 뜻입니다.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마음을 할례하지 않고 말씀대로 행하지도 않으니 여전히 죄악 가운데 살아갑니다. 이것이 곧 영적으로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내는 모습입니다. 겉으로 아름답고 화려한 옷을 입었다 해서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할례하지 않아 여전히 죄악을 품고 있다면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에는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내는 것과 같습니다.



5. 오늘날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은 경우

오늘날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이 미지근한 신앙에 머무는 교회가 많습니다. 어떤 교회가 열심히 기도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부흥과 물질의 축복을 주시고 성도들에게도 합당한 축복을 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잘못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축복으로 인해 교회와 성도들이 오히려 세상과 타협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교회가 커지면 부와 명예, 권세가 생깁니다. 그러다 보니 점점 하나님 일은 뒷전으로 하고 명예와 부를 좇아 자기 보기에 좋은 대로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갑니다. '어찌하면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할까! 어찌하면 하나님 나라를 더 확장할까!' 이런 것에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부와 명예와 권세를 가진 사람들과 연합합니다.

물론 부와 명예와 권세를 가진 사람들을 배척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당연히 그러한 사람들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품어야 하고 주 안에서 교제하며 믿음을 심어 주어 그들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다면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순수한 목적이 아니라 교회가 더 큰 부와 명예와 권세를 얻기 위해 세상과 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교회를 향해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며 미지근하다' 책망하십니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