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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의 소식

제목
[기획 특집 일곱교회]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주님의 교훈 (2)
출처
만민뉴스 제505호 PDF
날짜
2011년 10월 30일 일요일
조회수: 8445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요한계시록 3:18~21)

오늘날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이 미지근한 신앙에 머무는 교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교회가 열심히 기도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한다면 부흥과 물질의 축복도 주시며 성도들에게도 합당한 축복을 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잘못 사용해 세상과 타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속히 회개하고 열심을 내어 다시금 하나님과의 신뢰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뉴스

당회장 이재록 목사

 

일곱교회 중 가장 크게 책망하신 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로, 그들은 열심을 내지 아니하므로 그 행위가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칭찬하시는 교회는 뜨거운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 뜻을 좇아 행함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 말씀을 끝까지 지키는 교회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스스로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고 도리어 부요하다 생각하는 라오디게아 교회라 할지라도 진정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얼마나 영적으로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는지 깨우쳐 주며 권면의 말씀을 하십니다.

 

 

1.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금은 정금 같은 믿음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이 금을 귀하게 여기므로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귀중한 믿음을 금에 비유합니다. 따라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는 말씀은 금과 같이 변함없는 믿음을 소유하라는 뜻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구원받아 천국에 갈 수 있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마 9:29). 입술로만 '믿습니다'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이 따르는 믿음, 상황과 조건에 상관없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을 영적인 믿음이라고 하며, 이처럼 변함없는 믿음을 성경에서는 금 또는 정금에 비유합니다. 영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한 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대적으로 믿고 따릅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그러했습니다(왕상 18장). 엘리야는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 때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하루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3년 반 동안 가뭄으로 고통받는 이스라엘에 비를 내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이 말씀을 온전히 믿고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땅에 꿇어 엎드려 얼굴이 무릎 사이로 들어갈 만큼 간절한 기도를 드려 마침내 큰 비의 응답을 받습니다. 엘리야가 사환에게 일곱 번까지 올라가 구름이 있는지 확인하라 했는데 이는 끝까지 믿고 기도해 응답받겠다는 의미입니다. 만약 일곱 번째에 응답이 없었다 해도 엘리야 선지자는 응답이 올 때까지 계속해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한 번 믿은 하나님을 끝까지 믿는 것이 참 믿음이고, 정금과 같은 영적인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그냥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도 정금이 나오기까지는 불로 단련하는 과정이 있어야 하듯이 믿음 역시 연단의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많은 시험과 환난을 거치면서 믿음으로 승리하고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며 말씀대로 살기 위해 수고하고 인내하며 절제할 때 정금 같은 믿음을 가질 수 있지요.

 

 

2.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주님께서는 마음이 부요해 벌거벗은 수치를 당하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흰옷을 사서 입으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흰옷은 성도들의 거룩한 행실을 의미하며, 그것은 바로 거룩한 마음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흰옷을 입는다'는 말씀은 '마음에 있는 비진리의 검은 마음을 벗고 진리의 하얀 마음으로 만든다'는 뜻입니다. 그럴 때 의의 옷을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면할 수 있습니다. 죄로 물든 검은 마음을 갖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죄와 어둠을 발견치 못하고 사람의 본분을 잃은 모습이 바로 영적으로 벌거벗은 것이며 부끄러운 일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자신의 벌거벗은 것조차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영적인 소경이나 다름없습니다. 이들을 향해 주님께서는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하여 영적인 눈이 열려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믿음을 가지고 말씀대로 살아가면 차츰 성령의 음성을 듣고 진리가 무엇인지, 죄가 무엇인지 깨달아 영적인 분별력이 생깁니다. 이러한 상태를 영안이 열렸다고 합니다. 이처럼 영안이 열릴 때 하나님 말씀을 들어도 이해가 되고 천국에 대한 소망이 주어지며 말씀에 비추어 자신을 발견해 진리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영안이 열린다는 것은 실제 영안이 열려 영의 세계를 본다는 의미도 있지만, 더 중요한 의미로 하나님 말씀을 들음으로써 그 뜻을 깨닫고 자신을 진리로 변화시켜 가는 것을 뜻합니다. 영안이 열려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뜻을 깨닫는 사람이라면 세상과 짝하지 않으며, 어찌하든 말씀에 비추어 자신의 어둠을 발견해 진리로 변화되고자 노력합니다. 이런 사람이 빛 가운데 사는 사람으로서 하나님 사랑을 받게 됩니다.

 

 

3.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주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다시 한 번 그릇된 신앙에서 돌이킬 것을 촉구하셨습니다. 곧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하시는데, 이는 징계하시는 이유와 목적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는 아이가 그릇된 길로 갈 때에 매를 들어서라도 바로 잡습니다. 고통스러울 것을 염려해 매를 들지 못한다면 진정 사랑한다 할 수 없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두 아들이 성전을 더럽히는데도 말로만 타이를 뿐 징계하지 않았습니다. 아들들의 나쁜 행실은 계속됐고 결국 하나님 진노로 그들은 전쟁터에서 전사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엘리 제사장 역시 의자에서 넘어져 죽고 말았지요.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징계하시는 것은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히 12:6~8). 죄를 지었는데도 아무런 책망이나 징계가 없다면 결국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영계의 법칙에 따라 사망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으로 느껴야 하며, 징계를 통해서라도 사랑을 느끼는 사람은 회개하고 변화될 수 있습니다. 반면에 한 번, 두 번 징계를 받아도 아무런 깨달음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징계하실 이유가 없으므로 다음에는 잘못을 해도 징계조차 오지 않습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죄를 지어 가는데도 형통한 것처럼 보이며 징계도 없다면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외면을 당한 상태이므로 이보다 더한 불행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가 잘못된 길로 갈 때에 사생자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고 사랑의 매를 드십니다. 징계가 당장에는 무섭고 아플 수 있지만 이는 돌이키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다 해서 꼭 징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징계하시기 전에 말씀으로 깨우쳐 주는 등 여러 방법으로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이때 신속하게 깨닫고 돌이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해 징계가 임한다 해도 그 역시 하나님 사랑임을 깨달아 중심에서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의 신뢰관계를 회복하고 하늘나라에도 다시금 상급을 쌓아가야 합니다.

 

 

4.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주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미지근한 신앙생활로 깊은 영적 잠에 빠졌지만, 이제라도 주님 음성을 듣고 깨어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먼저 주님께서 문밖에 서서 두드린다는 것은 진리 말씀으로 우리 생각을 두드린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 마음에 담아 양식 삼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먼저 진리 말씀이 생각의 문으로 들어와야 하며 다음으로 마음의 문에 들어와야 합니다. 말씀이 마음에 담기면 차츰 말씀대로 지켜 행할 수 있는데 이것을 가리켜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신다'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일단 생각의 문으로 말씀을 받았다 해도 정작 중요한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면 말씀이 머리에 지식으로만 남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식적인 믿음 곧 행함이 따르지 않는 죽은 믿음이며, 이런 믿음으로는 결국 미지근한 신앙에 머무릅니다.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해서 말씀에 대한 지식은 많다 해도 막상 행함으로써 마음에 일구지 못했으니 영적인 믿음도 오지 않고 교회만 왔다갔다 하는 모습이 되고 맙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리 능력이 있다 해도 사람의 마음 문을 강제로 열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 공의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 문을 강제로 열어 영적인 믿음을 갖게 한다면 이 세상에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공의 가운데 이루어지는 인간 경작이 아닙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습니다. 스스로 우러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참 자녀를 얻기 원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우리의 생각의 문과 마음의 문을 자꾸 두드리시지만 그 문을 여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생각의 문은 물론, 마음의 문까지 활짝 열어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심으로써 진리인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5.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마음 문을 열고 진리의 말씀을 받아서 지켜 행함으로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사람은 이 세상과 원수 마귀 사단을 이길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계 3:21) 말씀하십니다. 사망 권세를 이기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주님처럼, 끝까지 이기는 사람 역시 구원받은 자리에 이르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미지근한 신앙으로 인해 토하여 내치리라는 엄중한 책망을 받은 라오디게아 교회이지만 지금이라도 마음 문을 열고 회개한다면 구원의 길이 열려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원의 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까지는 아직 기회가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끝까지 이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좁은 길을 변함없이 감사와 기쁨과 사랑으로 갈 때만이 그분이 다시 오실 때에 영광을 함께 누릴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기는 것 같다가도 중도에 포기해 축복과 영광의 자리에 동참하지 못하는데 결코 그래서는 안 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말씀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 봄으로써 혹여라도 미지근한 신앙에 젖어 있었다면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돌이켜야 하겠습니다. 또한 끝까지 이기는 자의 대열에 동참해 더욱 힘써 천국을 침노함으로 주님 보좌 가까이에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때 신앙이 잠든 교회를 깨우시고 신부 단장하게 하시려는 하나님 사랑을 깨달아 주님께 칭찬받는 교회와 성도로 거듭나며,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