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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의 소식

제목
끝이 없는 긍휼과 용서의 사랑
출처
만민뉴스 제745호 PDF
날짜
2016년 7월 3일 일요일
조회수: 7841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보내주심으로 구원의 길을 활짝 열어 주셨다. 그리고 참 자녀 얻을 것을 바라시며 오래 참으시되 끝이 없는 긍휼과 용서의 사랑으로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으로 이끌고 계신다. 이러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우쳐 늘 감사의 향을 올려드리는 참 자녀가 되기를 바란다.


어찌하든지 살리고자 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마태복음 18장 21~22절을 보면 예수님께 수제자 베드로가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하고 물으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답변하셨다. 이는 일흔 번씩 일곱 번, 490번만 용서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더 깊은 영적 의미가 담겨 있다.

칠(7)은 완전수인데 일흔 번은 일곱의 열 배이며, 여기에 또 칠을 곱했으니 무한대의 용서, 곧 완전한 용서와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의 하나님을 알지 못해 공의의 법대로만 심판하시는 하나님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

신구약 성경 66권을 상고해 보면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의 끝은 과연 어디일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찌하든 살리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깊고도 넓은 사랑을 깨우칠 수 있다.

예레미야 18장 7~8절

"내가 언제든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파하거나 멸하리라 한다고 하자 만일 나의 말한 그 민족이 그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요나서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적국인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 성에 죄악이 관영하고 악독이 심히 커 요나 선지자를 통해 40일 후 멸망할 것을 선포케 하셨다. 그런데 놀랍게도 왕 이하 온 신하와 백성, 짐승까지도 재를 무릅쓰고 금식하며 회개한 것이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않으신 것을 볼 수 있다(욘 3장).

에스겔 33장 14~16절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돌이켜 자기의 죄에서 떠나서 법과 의대로 행하여 전당물을 도로 주며 억탈물을 돌려보내고 생명의 율례를 준행하여 다시는 죄악을 짓지 아니하면 그가 정녕 살고 죽지 않을지라 그의 본래 범한 모든 죄가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정녕 살리라 이는 법과 의를 행하였음이니라 하라"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악인이라 하여 바로 벌을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어찌하든 그를 살리고자 하신다. 사랑의 마음으로 항상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마음 중심에서 회개하고 돌이키면 기다리셨다는 듯이 용서하시고 기억지도 않으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죽을 병에 걸린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 앞에 통회자복 하니 그 생명이 15년이나 연장되었고(왕하 20:1~7), 므낫세는 우상숭배를 하며 심히 악을 행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으나 하나님 앞에 크게 겸비하여 회개함으로 다시 왕위에 거할 수 있었다(대하 33:10~13).

누가복음 15장 31~32절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이 말씀은 미리 유산을 받아 집을 떠난 후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고 돌아온 둘째 아들을 아버지가 반갑게 맞아 잔치를 배설하자 큰아들이 불평하고 서운해함으로 아버지가 그 마음을 달래 주며 하는 말이다.

만일 큰아들이 아버지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동생에 대한 사랑과 긍휼이 있었다면 이런 불만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동생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아버지의 용서에 감사해 하며 기쁜 마음으로 달려가서 동생을 안고 "얼마나 고생하고 힘들었느냐?" 위로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아버지는 집을 떠난 둘째 아들을 늘 마음에 품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래서 다시 돌아온 아들의 행색을 보며 한없이 측은한 마음에 잔치를 배설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 하나님의 끝없는 긍휼과 용서의 사랑의 마음이다.


영혼들을 위한 예수님의 중보 기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맏아들로서 돌아온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의 마음과 같은 사랑을 나타내 보이셨다. 동생의 좋은 점을 떠올리며 선한 말로써 아버지의 마음을 위로해 드리셨고, 열심히 수소문하여 동생을 찾아 나선 뒤에는 남의 집 종으로 묶여 있어 엄청난 값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 빚을 갚아줌으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올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동생을 용서해 주시도록 용서를 구하는 중보 역할까지 하고 계신다.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를 이루실 때도 예수님께서는 습관을 좇아 늘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우리를 위해 자신을 모두 버릴 수 있음을 오히려 감사해 하시며 늘 아버지 앞에 인생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심지어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실 때 예수님을 핍박하고 조롱하며 죽이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중보 기도를 올리셨다(눅 23:34). 이러한 예수님의 중보 기도는 지금도 끊임없이, 하루도 빠짐없이 시마다, 분마다, 초마다 계속 되고 있다.

부활 승천하신 주님께서는 아름다운 천국의 하나님 보좌 우편에 있는 영광의 빛이 가득하고 금빛 찬란한 보좌에 앉기를 마다하시고 항상 우리를 위해 아무것도 드시지 않고 중보 기도하고 계신다.

누구나 구원받아 천국에 이르기를, 모든 인간 경작의 섭리가 끝나고 구원받은 성도들이 영광의 대열에 들어가는 그날까지, 영원한 천국 처소에 이르는 날까지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주님의 지극한 사랑의 기도 가운데 살아가고 있음을 마음 깊이 기억하며, 형제를 용서하되 그 위에 사랑을 더하는(마 5:23~24 ; 골 3:13~14) 행함으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을 받아 영광 돌릴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