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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희망을 치는 피아니스트 시각장애인 이소영씨
출처
조선일보
날짜
2007년 1월 3일 수요일
조회수: 6036
[박종인기자의 인물기행] '희망'을 치는 피아니스트 시각장애인 이소영씨

"눈이 없는데 귀가 있더라고요.그것만 생각해요. 눈이 없는게 아니라, 귀가 있다는거…"

그녀를 만난 곳은 잔설(殘雪)이 남아 있는 서울 서초동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지하 2층 연습실이었다. 그랜드피아노 뒤에 앉아 있던 이소영(24)씨가 말했다.

"저는 할 줄 아는 게 음악밖에 없어요. 어떤 일이 있었냐 하면요, 기저귀 찰 때니까 세 살 때였대요. 내가 길을 잃은 거예요. 엄마가 한참 찾아보니까 불도 안 켠 교회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더래요. 그것도 '제법'. 워낙에 제가 소리를 좋아해서 소리만 들리면 소리 나는 곳에 가서 쭈그리고 앉아 있곤 했대요. 그래서 고등학교도 인천예고에 갔죠. 작곡을 전공했어요."

소영씨는 절대음감의 소유자다. 한번 들은 곡은 바로 연주를 할 수 있고, 웬만한 소리는 들으면 무슨 소리인지 구분한다.

들은 곡 바로 연주하는 절대음감 지녀…대학 낙방·가출 온가족 자살 시도도

뉴스▲ 이소영씨가 피아노를 친다. 방긋방긋 미소 가득한 그녀가'뒤로 서서'피아노를 연주한다. 앞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슬픔을 소영씨는 음악을 통해 희망으로 바꿔놓았다. /박종인 기자

방긋방긋 미소를 던지며 소영씨가 의자에서 일어선다. 기다란 손가락을 건반에 올려놓자 피아노가 선율을 풀어낸다. 그런데 그녀는 피아노를 등지고 서서 손을 뒤로 뻗어 연주를 하는 게 아닌가. 직접 보고서도 믿기지 않는 묘기였다. 그 묘기를 펼치고 있는 피아니스트 이소영은 시각장애자다. 선천성 백내장으로 오른쪽 눈은 실명, 왼쪽 눈은 형체만 분간할 수 있는 약시다. 놀란 기자에게 그녀가 말했다.

"그런데요, 눈이 없는데 귀가 있더라고요. 그것만 생각해요. 눈이 없는 게 아니라, 귀가 있다는 거. 그게 제 희망이에요. 그래서 지금은 희망으로 산답니다. 아, 원래는 이런 식으로 피아노 안 쳐요. 그냥, 이렇게 피아노를 치면 다리 운동이 장난이 아니거든요."

희망을 찾을 때까지 힘이 들었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2학년 때 하늘나라로 떠났다. 엄마는 닥치는 대로 일하며 정신지체가 있는 큰딸과 소영씨를 키웠다. 2002년 말 소영씨는 한 음대 입시에서 떨어졌다. "장애인이라서 떨어졌다"는 패배감. 소영씨는 툭하면 화를 내고 가출했다.

2003년 엄마가 하던 사업이 망했다. 몸도 정신도 피폐했고 생계는 극도로 어려워졌다. 여름이 왔다. 엄마가 두 딸을 데리고 공원 한구석에 가서 쥐약 봉지를 끌렀다. "우리 죽자." 한참 있다가 소영씨가 입을 열었다. "…안 죽으면 안 돼, 엄마?" 세 여자가 부둥켜안고 울었다.

"그날 이후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기로 다짐했어요. '할 수 없다'가 아니라 '할 수 있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어요." 소영씨가 말했다. 죽을 각오로 공부를 했다. 그래서 2005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지휘과에 합격했다. 수석이었다. "마틴 베어만이라는 독일 교수님이 계셨는데, 그 분이 나중에 그랬대요. '소영이는 음악성이 평균 이상이다. 안 뽑을 수가 없었다'라고요." 곤궁한 집안 형편에 4년 전액 장학금을 받게 된 것도 희망의 일부였다.

죽을 각오로 다시 공부 음대 지휘과 수석합격…눈도 희미하게 살아나 "난생처음 흰눈 봤어요"

인천에 사는 소영씨는 주말을 빼고 매일같이 전철 두 번, 버스 한 번 갈아타고 학교로 간다. 새 악보가 나오면, 악보에 코를 박고 음정을 외우고 음악 기호를 외운다. "나만의 연습법이죠. 안 보이니까, 외우는 거예요. 음, 조금 힘든데, 안 외우면 안 되니까."

실명과 엄마의 사업 실패, 장애인에 대한 편견…. 지긋지긋하게 싫었던 모든 것들이 이제는 희망으로 변했다. 앞을 볼 수 없기에 선율을 더 잘 들을 수 있다고 했고, 그래서 음악을 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했다.

희망은 기적을 낳았다. 지난여름, 왼쪽 눈이 희미하게 살아난 것이다. 안경 쓴 교정시력이 겨우 0.2지만, 소영씨는 "아, 희망이 있구나!"라고 소리쳤다. 함박눈이 내리던 며칠 전 소영씨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눈을 '보았다'!

"벚꽃이라는 느낌이 확 떠올랐어요. 겨울 벚꽃, 근사하죠?" 이번 학기에 소영씨는 지휘과에서 성악과로 전공을 바꿨다. 노래를 하고 싶었던 그녀에게 새로운 도전이다. 희망이라고는 터럭만큼도 찾아볼 수 없던 가난한 시각장애인이 스스로 희망을 찾아 새 길을 떠난다.

"'무척'까지는 아니지만, 행복해요. 음, 집안 형편은 심각한 수준인데, 뭐, 나는 '할 수 있으니까'." 소영씨가 말을 멈추고 허공을 바라본다. 밝은 형광등 빛에 소영씨 얼굴이 반짝인다. 밝음과 어둠이 뒤섞인 2006년이 저무는데, 소영씨는 어둠 속에서 희망을 바라본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희망'을 연주하는 시각장애인 피아니스트 이소영씨. /조선일보 박종인 기자 박종인 sen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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