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응답서비스

언론보도

제목
[이재록목사의 잠언강해-41] 생명으로 인도하는 의인의 입술 [본문:잠 10:21-22]
출처
크리스챤 신문
날짜
2011년 8월 22일 월요일
조회수: 4334
뉴스▲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치료하신 예수님/일러스트 김동호


1. 의인의 입술이 되자

잠언 10장 21절에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하나 미련한 자는 지식이 없으므로 죽느니라" 했습니다. 의인의 입술은 많은 사람을 교육하며 감동케 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예수님이지요. 예수님은 진리를 가르치셨고 선만 행하였지만 대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 등 악한 사람들은 송사할 거리만 찾았습니다.

이들은 율법과 자기중심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었지요. 그토록 고대하던 메시아가 눈 앞에 있었지만 말씀을 듣고 표적을 보아도 깨닫지 못했으며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분명한 하나님의 역사를 보면서도 자기 생각이나 틀에 맞지 않으니 오히려 핍박했습니다.

이렇게 육에 속한 율법을 따르면 하나님과 상관이 없으며 구원받을 수도 없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인 율법은 긍휼과 사랑과 용서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율법을 좇는 사람들은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사람들이 이런 저런 질문을 한 장면들이 나옵니다. 그 중에 누가복음 6장에는 예수님께서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오른 쪽 손이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칠 것인가를 엿보고 있었지요. 왜냐하면 병을 고치는 것도 일하는 것으로 여겨 송사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악한 생각을 아신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에게 일어서라고 하며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중 어느 것이 옳은지 질문하였습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생명을 죽이는 것이 옳다고 할 리는 없지요.

예수님이 손 마른 자에게 손을 내밀라고 하셨고 그가 순종하여 손을 내밀자 회복되었습니다. 그러나 완악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표적을 보면서 자신의 악함을 깨닫고 회개하기는커녕 예수님을 잡아 죽일 방책을 연구할 뿐이었습니다.

말 한 마디에 천냥 빚도 갚는다는 우리나라 속담이 있습니다. 의인의 말은 많은 사람을 가르칩니다. 내가 얼마나 악을 버리고 성결되었느냐, 주님의 마음을 닮았느냐에 따라 하늘의 지혜가 오고 성령의 음성을 들어 말하기 때문에 어떠한 사람도 감복시킬 수 있습니다.

상대가 혈기와 감정 속에 올무 잡고자 할지라도 감동 시킬 수 있으며, 변화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빛은 어둠을 물리칠 수 있으며 지배하고 다스리고 정복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사람들이 놀라 말하기를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하고 감탄했습니다(마 13:54). 우리는 의인의 입술이 되어 많은 사람에게 믿음을 심어주며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어야하겠습니다.


2. 지식이 없어 망한 사람들

잠언 10장 14절에 "지혜로운 자는 지식을 간직한다" 했는데 본문 21절에는 "미련한 자는 지식이 없으므로 죽는다"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어떤 의미일까요? 이 세상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지식들이 있습니다.

지식의 종류나 다양성을 논하고자 한다면 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교양이 없어서 혹은 지식이 없어 단명한 경우도 있습니다. 만일 말하지도, 보거나 듣지도, 움직이지도 못하는 식물 인간이 된다면 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결여된 분야나 결함이 많을수록 이를 통해 죽는 경우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성경에는 지식이 없어 죽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발람 선지자도 지식이 없어 죽은 경우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택한 선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면 그렇게 허무하게 죽음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타락시킬 방책을 모압 왕에게 알려 주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손에게 도움이 될 방법을 간구했을 것입니다. 기생 라합은 이방인이었지만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숨겨 주어 자신과 가족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신다는 생명의 지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발람은 탐심과 욕심이 있었기에 이런 지식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세벨도 지식이 없으므로 망한 예가 됩니다. 아합 왕의 왕비가 되었던 그녀는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에 하나님을 섬기기는커녕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도록 만들었으니 어찌 죽음의 길을 피할 수 있었겠습니까. 세계사나 우리나라 역사 중에서도 지식이 없어 죽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식이 많아도 죽는 경우는 대부분 방법론이 지혜롭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왕조 시대에 후궁들이 왕자를 낳았는데도 사약을 받은 경우는 미련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악하여 자기 욕심만 좇은 결과 의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선한 행동과 선에 대한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악만 쌓아가니 미련한 행동이 되어 죽음을 자초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에이즈 환자는 지금은 살아있어도 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올바른 지식이 있었다면 예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참된 크리스천이라면 영생의 지식을 쌓아가고 교양을 닦아가며, 영생의 사고를 만들어 갑니다. 그러므로 그 영혼이 생명 자체이며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지식은 사람에게 참 생명이 됩니다.

우리에게 참된 생명과 유익을 주는 지식이 있는 반면에 아무 유익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유발하여 잡념을 가져다주며 세상의 죄 가운데로 이끌어가는 지식도 있습니다.

이렇게 참된 믿음이나 생명을 갖는데 손해가 되는 지식이라면 과감히 버려야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지혜로워야 하지만 저절로 얻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지혜를 달라고 구해야하며 말씀을 영적으로 무장하여 악을 버리며 성결되어야 합니다. 성결을 이루면서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면 무궁무진한 지혜를 주십니다.


3. 근심케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에

10장 22절에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사람으로 부하게 하시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 하였습니다. 옛 왕조 시대를 생각해 보면 왕에게 충성한 공신들은 상을 받았지만 노심초사하며 불안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임금의 마음에 맞지 아니하면 언제 의심을 받고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으며 언제 반란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명회는 생명을 걸고 수양 대군이 왕이 되도록 도왔던 공신이었지만 말 한 마디 잘못한 결과 모든 직위가 박탈된 채 감옥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확실하게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복을 주시기에 근심까지 겸하여 주시는 일이 없습니다. 참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정도를 걷기에 시험이 와도 염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면 물이나 불 속에 지나가도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문제가 생기고 시험 환란이 오는 것은 하나님의 법도를 어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준행하는 사람에게는 근심은 오지 않고 복만 임합니다.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다고 인정받았지만 온전한 믿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복을 받았지만 두려움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지요. 욥은 시험, 환란이 임하였을 때에 "내 두려워함이 임하였고" 하였습니다. 평소에 하나님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의 연단을 허락하실 때에 독재적으로 하신 것이 아닙니다.

순전하고 정직한 욥이었지만 자신도 알지 못하는 본성 속의 악까지 다 뽑아내야 온전한 성결을 이룰 수 있었기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가 모든 악을 버리고 나니 어떤 극단적인 환경에서도 악이 나오지 않는 성결한 자가 될 수가 있었습니다. 폭풍 가운데 하나님이 나타나 말씀할 때에 그는 아무 소리를 못하였지요. 이전에는 하나님이 나타나 자신과 변론해 보자고 당당하게 외쳤지만 하나님이 폭풍 가운데 나타나자 아무 말도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이치에 맞게 설명해 가시니 욥이 말 한마디 못한 채 회개하였습니다.

이렇게 회개할 것이 있기 때문에 연단이 왔던 것입니다. 악함이나 잘못이 없으면 연단이 오지 않습니다. 그 잘못된 부분을 하나님께서 지적해 주니 철저하게 통회자복하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지요. 회개하고 나니 깨끗하게 치료받고 이전보다 갑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그 후에 얼마나 큰 평강을 누릴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진리 안에서의 자유함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며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욥이 회개한 후 하나님을 만나 온전한 축복을 받았을 때에, 더 이상 두려움의 하나님이 아니요 사랑과 축복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아브라함도 연단하심으로 완전케 하신 후에 범사에 복을 주셨습니다.

이 외에도 하나님을 닮아 주님의 마음이 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영원한 방패요 산성이 되어 복을 주십니다. 대표적인 예로 다윗은 시편 144편 2절에 "여호와는 나의 인자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는 자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라고 노래하였습니다.



2011년 08월 29일 (월) 16:53: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