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목표 : 자신의 본분을 변함없이 지켜 행하며 마지막 때에 주님의 길을 온전히 예비하는 도구가 되게 한다.
엘리야는 심히 겸비하였기에 자기 의가 없었고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았습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였기에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도 순종했습니다. 모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한 후에는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했지요.
주를 향한 사랑이 불붙는 듯하여 그는 다시 이 땅에 내려와 세례 요한으로서 주의 길을 예비하고 마침내는 순교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의 선은 과연 무엇일까요?
1. 자기 본분을 변함없이 지키는 마음
제사장 사가랴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은 나이가 많았지만 자녀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하루는 가브리엘 천사장이 사가랴에게 나타나 장차 아이를 갖게 될 것을 알려 줍니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눅 1:13~17)
그 후 엘리사벳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누가복음 1장 80절에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빈 들에 있었다’는 것은 세상과 구분된 삶을 살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면서 늘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을 이뤘고 세상에 드러날 때를 정확히 주관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은 자신이 엘리야인 줄 알고 있었을까요? 요한복음 1장 21절에 유대인들이 “네가 엘리야냐”라고 물었을 때 “나는 아니라”고 답한 것을 보면 자신이 엘리야인 줄 몰랐습니다. 그가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은 받았지만 부모의 기로 인해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부모의 기를 전혀 받지 않으셨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자신이 누구인지, 왜 이 땅에 왔는지 잘 아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열두 살 때에 있었던 일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유월절을 맞아 마리아와 요셉은 아직 어린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서 절기를 지킨 후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룻길을 간 후에야 일행 중에 예수님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랍니다. 다시 길을 되짚어 성전에 와보니 예수님은 대화를 나누고 계셨습니다. 마리아가 그동안 근심하며 예수님을 찾았었다고 말씀드리자 예수님은 도리어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2:49) 대답합니다.
어릴 적부터 자신에 대해 잘 아셨던 예수님과 달리 세례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영 안에 엘리야의 마음이 담겨 있었기에 어렴풋이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주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스스로 세상과 구분돼 절제된 삶을 살며 늘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자신의 사명에 대해 깨달아갔습니다. 자신이 주의 길을 예비해야 한다는 것과 무엇을 외쳐야 하는지를 주관받아 세상에 드러날 때를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때가 되자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외쳤습니다. 이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사람들이 다 그에게 나아와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지요(마 3:5~6). 이런 세례 요한을 보고 백성 중에 어떤 이들은 그가 혹 그리스도이신가 궁금히 여깁니다(눅 3:15).
이때 세례 요한은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라고 고백했습니다(눅 3:16). 그는 자신의 본분이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임을 분명히 알았기에 그 이상의 선을 넘지 않았습니다. 항상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신다.’고 전파하니 사람들이 장차 오실 분에 대한 사모함이 얼마나 더했겠습니까.
사람들에게는 세례 요한도 큰 하나님의 선지자인데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하니 ‘과연 그분은 어떤 분일까?’ 하고 심히 기대하게 되었지요. “신들메”란, 신발을 묶는 끈인데, ‘세례 요한이 그것을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자신을 철저히 낮추며 증거하는 그분은 얼마나 높으신 분일까’를 생각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시자 세례 요한을 따르던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로 몰려갔습니다. 그러자 요한의 제자들이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라고 하지요(요 3:26).
그러면 세례 요한이 “이제 내 시대는 끝났구나!” 하며 슬퍼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제자들에게 “나의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했습니다(요 3:28~30).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의 본분을 되새겼고 예수님의 나타나심을 진심으로 기뻐했습니다. 이렇게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그의 모습에서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어떠한지 느낄 수 있지요.
이러한 세례 요한의 마음은 순교하기까지 변함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자신의 본분을 변함없이 지킨 점을 기뻐하시며 이를 선으로 인정하셨습니다.
2.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며 오직 주의 영광을 구하는 마음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이 심히 가까운 마지막 때에 사는 우리에게도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주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처럼 우리도 더 많은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재림의 주님을 함께 맞이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하지요.
직분자들이라면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충성되게 감당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설령 직분이 없어도 누구나 전도의 사명이 있고 각자 있는 곳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사명이 있습니다. 어떤 사명을 맡았다 해도 세례 요한처럼 변함없이 자기의 본분을 지키면 주의 길을 잘 예비한 일꾼이라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혹 자기 본분을 잘 지키지 못하고 있다면 스스로 마음이 높아져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앞서 설명한 대로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전하면서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여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주의 영광만을 구했습니다. 우리가 세례 요한처럼 귀한 사역에 쓰임 받으려면 사심이 없고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며 주님만 높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하면서 은근히 자신도 영광을 누리고자 하는 사심이 없어야 하지요.
또 주의 일을 이루는 동역자들이 나보다 더 크게 영광을 돌릴 수 있다면 중심에서 기쁨과 감사함으로 자신의 기득권까지 내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가’보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 영광을 더 크게 드러낼까’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것이 나는 없고 오직 주의 영광만 구하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위치에 연연하기보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나보다 나은 사람이 머리로 세워지길 바랄 뿐입니다. 이는 주의 일에 대한 열심이 없거나 뒤로 물러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설령 나보다 못한 사람이 머리로 세워졌다 해도 그가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도울 수 있는 마음이지요. 다른 사람이 사랑과 칭찬을 받아도 시기하거나 불편해하지 않고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정녕 재림의 주님을 사모하며 기다린다면 엘리야처럼 자기를 온전히 비우고 자신의 본분을 변함없이 지켜 행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세례 요한처럼 주님의 길을 온전히 예비하는 도구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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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는 세례 요한의 어떠한 점을 기뻐하시며 선으로 인정해 주셨나요?
2. ( ) 안에 알맞은 말을 넣어 보세요.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전하면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하며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주의 영광만을 구했다. 우리가 세례 요한처럼 귀한 사역에 쓰임 받으려면 ( )이 없고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며 ( )만 높일 수 있어야 한다.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09~116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사가랴’는 누구일까?
세례 요한의 아버지로 헤롯 왕 때 아비야 반열의 제사장이다(눅 1:5). 그의 아내 엘리사벳은 동정녀 마리아와 친척이다. 이들 부부는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는 선한 사람이었다.
사가랴가 자기 순서대로 제사장직을 수행할 때,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을 것과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많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사가랴는 천사의 말을 믿지 않으므로 벙어리가 되어 아들이 태어나서 할례를 받기까지 말을 하지 못했다. 후에 천사의 말대로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을 때 혀가 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