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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역공과
2022-09-09 제36과천국 잔치에 초청받은 사람들 누가복음 14:16~24
읽을말씀 : 누가복음 14:16~24  |  외울말씀 : 갈라디아서 3:13 | 참고 말씀: 누가복음 4:18~19, 6:24~26
교육목표 : 주님께서 배설하신 천국 잔치에 들어가 참 평안과 기쁨, 영생 복락을 누리게 한다.


   옛날부터 회갑이나 결혼 등 집안에 경사스러운 일이 생기면 사랑을 주고받은 사람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초청받은 사람은 예의를 갖추고 참석해 함께 기쁨을 나누고 진수성찬을 먹으며 축하해 주었지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하시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도 큰 잔치를 배설하시며 사랑하는 자녀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아름다운 천국을 예비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마다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어 영광의 천국 잔치에 참여하도록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1. 천국 잔치 비유
   
   누가복음 14장에는 천국 잔치 비유의 말씀이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몇 월 며칠에 큰 잔치를 베풀고자 하오니 오셔서 행복하게 즐기시기를 바랍니다.”라는 초청장을 많은 사람에게 보냈습니다. 마침내 잔칫날이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초청받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못 간다는 것입니다. 이유인즉슨 밭을 샀으니 가봐야 한다, 소 다섯 겨리를 시험하러 가야 한다, 장가들어서 못 가겠다는 것이었지요(눅 14:16~20).
   막대한 비용을 들여 정성스럽게 큰 잔치를 배설한 주인은 초청한 사람들이 못 온다고 하자 크게 노합니다. 그리고 종에게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고 하지요. 그렇게 했는데도 자리가 있다고 하자 주인은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 하리라” 합니다(눅 14:21~24).
   
   예수님께서는 천국 잔치 비유를 통해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셨을까요? 여기서 잔치를 베푼 ‘주인’은 주님을 의미하고, 잔치를 베푼 ‘장소’는 교회를 가리킵니다. 주님께서는 교회를 훌륭한 연회장으로 만드시고 생명의 말씀으로 진수성찬을 베푸신 다음에 주의 종들을 통해 세상 사람들을 초청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으로서 진수성찬을 맛있게 먹는 것과 같습니다. 천국 잔치 비유는 주님의 초청에 응하여 잔치에 참석한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지만, 초청에 응하지 않은 사람은 천국을 소유할 수 없다는 교훈을 줍니다.
   
   
   2. 주님의 초청에 응하지 않은 사람들
   
   이스라엘에서는 보통 잔칫날이 되기 오래전에 사람들에게 초청 의사를 밝힌 후 잔칫날이 되면 다시 종을 보내 전에 청했던 손님들을 데려오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밭을 사거나 결혼하는 일은 갑작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얼마든지 초청을 거절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가 있지요. 그런데 이들은 주인이 준비를 다 한 후에야 참석할 수 없다는 통보를 해 온 것입니다.
   오늘날도 세상의 지위와 명예, 물질과 안락 등으로 배부른 사람들 곧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가득 찬 사람들은 주님의 초청에 응하지 않습니다. 이미 세상의 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위로와 진리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지요. 그러니 천국을 소유하거나 영생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눅 6:24~26).
   우리는 세상의 부귀영화를 부러워하거나 이에 매이지 말고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되어 주님께서 초청하시는 천국 잔치에 기쁘게 응해야 하겠습니다.
   
   
   3. 천국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
   
   주님의 초청에 응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소경, 저는 사람 등 주로 소외되고 버림받아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조금도 부끄럽지 않고 도리어 복된 사람들이지요. 하나님 앞에 나오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경우, 인생의 비극을 맛보고 사람의 나약함과 한계를 철저히 깨달은 이들입니다.
   물론 선한 양심 가운데 사람의 도리를 좇아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로 심령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나오기 때문에 복음을 전할 때 부요한 사람보다는 그들에게 전하는 것이 더 쉽습니다.
   마태복음 5장을 보면 어떤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지가 잘 나와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 애통해하는 사람, 마음이 온유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 마음이 청결한 사람, 화평케 하는 사람, 의를 행하다가 핍박받는 사람입니다. 이들을 찾아가 복음을 전해야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4. 천국 잔치에 많은 사람을 초청하신 이유
   
   주인은 종에게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했습니다(눅 14장). 이처럼 주님께서 많은 사람을 천국 잔치에 초청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가난한 사람에게 복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14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벗이라 불리며 부요했던 아브라함의 복을 우리에게 주셔서 영적 승리뿐 아니라 물질의 축복도 누리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말씀에 순종하면 가난으로부터 해방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포로 된 사람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날 죄의 노예가 되어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죄의 문제는 어떤 사람도 대신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만이 우리를 죄에서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6) 말씀하셨지요. 주님의 보혈만이 우리를 죄에서 깨끗게 하실 수 있으며, 우리의 영혼을 생명으로 풍성하게 하십니다. 이러한 주님으로 인해 우리가 천국 잔치에 참석해 진리로 자유 함을 얻는 것입니다.
   
   셋째로, 눈먼 자를 다시 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이 주님을 영접하지 않고 죽으면 참혹한 지옥으로 끌려가 끝없는 고통을 받습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것만 못하지요. 천국 잔치는 영적으로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여 천국을 바라보게 해줍니다. 누구든지 주님을 영접하고 천국 잔치에 참여하면 부활의 소망과 천국 소망이 생기며 영생을 얻습니다.
   
   넷째로,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기 위해서입니다.
   ‘은혜의 해’란 이스라엘에서 50년마다 지키는 희년 곧 노예로 팔려 간 가족이나 친지 혹은 빚으로 넘어갔던 땅 등 잃었던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는 때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 승천하신 후 성령을 보내 주심으로 복음이 전 세계에 전파돼 은혜의 시대가 됐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회복하게 됩니다. 첫 사람 아담이 원수 마귀에게 넘겨준 모든 권세를 되찾을 수 있지요. 주님께서는 전 세계 만민을 천국 잔치에 초청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많은 사람이 천국 잔치에 참석할 수 있도록 더욱 힘써 전해야 하겠습니다.
지난 주 설교요약
2022-09-04 성령의 음성, 주관, 인도(3) - 이재록 목사 롬 8:12~16
성령의 음성을 듣고 주관 받는 것에 이어서 오늘은 성령의 인도받는 것과 성령의 음성을 듣고 주관, 인도받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부터 왕정 시대가 열리기까지 몇백 년 동안은 매우 혼란한 시기였습니다. 출애굽 2세대가 다 죽은 후 그 후손들은 점차 하나님의 말씀을 잊었고, 자기 보기에 옳은 대로 살았지요(삿 21:25). 주변의 적들에게 무수한 침략을 받게 되는데, 이는 이방인들이 섬기는 우상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자초한 시련들이었습니다.
   사사시대에는 소돔과 고모라에나 있을 법한 더러운 죄악이 싹트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같은 민족 내의 ‘지파 간 전쟁’으로 수만 명씩 목숨을 잃는 비극도 일어났지요. 백성들이 고통 중에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는 사사를 세우셔서 백성들을 위기 가운데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사라고 해서 모두 하나님의 뜻을 밝히 아는 것은 아니었지요. 사사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못하면 그만큼 백성들은 다시 어려움 속에 빠져들곤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가 없으면 결코 평탄한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그 삶은 고난의 연속이지요.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보혜사 성령은 구약시대의 사사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의 뜻을 잘 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음성을 듣고 주관과 인도를 밝히 받을 수만 있다면 하나님의 뜻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으며 평안과 축복의 길로만 갈 수 있지요. 지난 시간에 ‘성령의 음성을 듣고 주관 받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한 데 이어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이란?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은 성령의 음성을 듣거나 성령의 주관을 받았을 때 우리 편에서도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예배를 드릴 때, 불같이 기도하거나 감동 속에 찬양할 때 ‘이렇게 해야겠다.’ 주관 받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또는 A, B 두 가지 중 한 가지를 택해야 할 때 어떤 길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기 위해 기도하면 마음에 강하게 오는 쪽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에 순종해 행하지요.
   이처럼 성령의 음성을 듣거나 성령의 주관을 받은 대로 행해 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령이 음성을 들려주시고 행할 바를 주관하셔도 순종하지 않으면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또는 순종하다가 중간에 변개해도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가 없지요.
   예를 들어 여러분에게 어떤 응답받을 제목이 있는데 마음에 ‘이번 다니엘 철야를 작정해서 드리면 응답받겠다.’는 성령의 주관이 옵니다. 그래서 열심히 다니엘 철야에 참석했는데 작정 기간이 다 차 가는데도 응답의 기미가 보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때 ‘성령의 주관이 맞나? 그냥 내 생각이었나?’ 이런저런 생각이 틈타 변개해 버린다면 응답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눅 18:1)이나 다니엘이 기도한 지 21일째 되던 날 비로소 응답받았다는 성경 말씀(단 10:12~14) 등을 떠올려 주심으로 작정한 대로 끝까지 철야기도를 드리도록 주관하십니다. 이때 변개함 없이 주관 받은 대로 온전히 행하면 성령의 인도를 받았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변개할 마음은 아닌데 진리가 마음에 잘 무장되지 않아서 도중에 성령의 인도에서 이탈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령의 음성과 주관을 따라 잘 가다가 어느 순간 자기 생각을 따라가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성령의 주관을 받아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기로 작정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팔리지 않던 땅이 매매되어서 그 수입으로 작정 예물을 드리기로 마음먹었지요. 성령의 주관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순종하니 하나님께서 작정한 금액을 응답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또 다른 축복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계산해 보니 그 액수가 전에 땅을 매매한 금액보다 더 컸지요. 그러자 이왕이면 하나님께 더 많이 드리고 싶은 마음에 새로이 축복받은 물질로 작정한 액수보다 더 크게 드리기로 합니다. 전에 땅이 매매된 돈은 우선 개인 사업자금으로 사용하기로 하지요. 이런 경우도 작정한 예물을 안 드리려는 마음은 아니지만, 분명히 변개한 것입니다.
   레위기 27장 9~10절에 “사람이 예물로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 생축이면 서원물로 여호와께 드릴 때는 다 거룩하니 그것을 변개하여 우열 간 바꾸지 못할 것이요 혹 생축으로 생축을 바꾸면 둘 다 거룩할 것이며” 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드리기로 작정한 생축보다 더 좋은 것이 생겨도 바꾸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정 드리고 싶으면 둘 다 드리라고 하시지요. 드리기로 작정한 것은 이미 하나님의 것으로 거룩하게 구별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음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순종입니다. 변함없이 끝까지 순종하는 것이지요. 성령의 음성과 주관에 늘 순종하면 항상 성령의 인도를 받습니다. 그런 사람은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 한 대로 참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성령의 인도를 받았는지 곧 성령의 음성을 정확하게 들었는지, 그 음성에 그대로 순종했는지는 열매를 보고 분별할 수가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반드시 영의 열매가 맺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음성을 듣고, 주관, 인도받는 것 외에도 성령과 교통하는 방법에는 성령의 역사 가운데 영감으로 음성을 듣는 경우가 있습니다.
   영감으로 듣는 음성은 ‘마음의 소리’로 들리는 성령의 음성과는 조금 다릅니다. 그러나 마치 소리로 듣는 것처럼 또렷하게 마음에 전달되기 때문에 음성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영감의 음성을 통해 주시는 내용은 매우 다양합니다. 성경에 보면 이사야, 에스겔, 호세아 등 선지자들이 하나님께 받아 기록한 계시들이 있습니다. 이것도 성령의 역사 속에 영감으로 음성을 들어 기록한 것이지요. 구약시대에는 성령이 마음 안에 거하신 것이 아니고 사람의 외부에서 성신으로 역사하셨습니다.
   
   
   2. 성령의 음성을 듣고 주관, 인도받으려면 마음을 진리로 일궈야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면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따라서 성령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실상을 보면 성령을 받았다고 해서 다 성령의 음성을 듣고 성령의 주관과 인도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이 아무리 음성을 들려주셔도 들을 준비가 안 돼 있으면 들을 수가 없지요.
   하나님께서는 진리 자체이십니다. 요한복음 14장 1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보혜사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은 진리를 통해서만 역사하실 수 있지요. 그래서 우리 마음에 있는 진리의 분량만큼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곧 마음을 진리로 일궈서 영적인 믿음이 성장하는 만큼 성령의 음성을 밝히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영의 믿음, 곧 4단계 이상의 믿음은 마음의 비진리를 다 벗은 믿음입니다. 마음을 진리로 일군 상태이지요. 그래서 성령의 음성을 밝히 들을 수가 있습니다. 물론 1, 2단계에 있는 초신자도 때로는 성령의 음성을 밝히 듣습니다. 믿음의 분량이 적어도 성령 충만할 때는 성령의 음성을 밝히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 성령 충만함을 잃으면 더 이상 밝히 들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을 진리로 이뤄 영적인 믿음이 계속 성장해야 지속해서 들을 수가 있습니다. 또 마음을 진리로 일군 만큼 더 밝히, 깊게 들을 수가 있지요. 반면 주님을 영접하고 성령을 받았어도 마음을 진리로 일구는 작업을 하지 않으면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성령의 음성을 듣고, 또 밝히 듣기 위해서는 마음에서 비진리를 다 벗어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진리로 가득 채워야 하지요. 비진리를 벗어 버리는 작업과 진리를 채우는 작업을 동시에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마음을 진리로 채운다는 것은 단지 진리의 지식을 머리에 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진리로 일구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눅 6:27) 말씀하십니다. 대부분 이 말씀을 들어보셨고 잘 아실 것입니다. 암송하는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머리로 아는 것만으로 ‘원수도 사랑하라’는 진리가 마음에 일궈졌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 말씀대로 정말 원수까지도 사랑할 때 이 진리의 말씀이 마음에 임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여러분을 세게 밀치고 아무 말 없이 지나갔습니다. 어떤 분은 ‘순간 균형을 잃었나? 다급한 일이 있나 보다.’ 하고 이해합니다. 불쾌한 마음이 조금도 없지요. 더 나아가 ‘다치지는 않았나?’ 하고 상대를 걱정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상대가 밀치는 순간 짜증이 확 나면서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지?’ 또는 ‘어떻게 사과도 안 하고 그냥 가나?’ 이런 생각들이 스칩니다. 이렇게 찰나에 떠오르는 생각은 거짓으로 꾸밀 수가 없기에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있습니다.
   ‘원수도 사랑하라’는 진리가 마음에 임한 사람은 이런 급작스러운 상황에 부닥쳐도 마음이 평온하고 선한 생각만 떠오릅니다.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마음에 ‘원수도 사랑하라’는 진리가 일궈지지 않은 만큼 사랑의 반대인 미움이나 혈기가 동합니다. 마치 구정물이 가득 들어있는 양동이를 흔들면 구정물이 넘치는 것처럼 마음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이 그대로 나오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비진리를 벗고 진리로 채우려면 명백한 비진리를 벗은 후 양심의 악, 본성 속의 악 등 더 깊은 차원의 비진리를 버려 나가야 합니다. 그러니 성령의 음성을 밝히 듣는 능력 있는 일꾼이 되기를 사모한다면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미움, 시기, 질투, 거짓 등 명백한 비진리조차 마음에서 버리지 않고 노력만 하는 차원에 머물러 있지는 않으십니까? 아무리 마음에 결단했다 해도 말과 생각뿐이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중에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몸 바쳐 충성하리라 자원한 일꾼이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일꾼에도 그냥 일꾼이 있고 믿음의 일꾼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영적 전쟁에 내보낼 만한 일꾼은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주관 받고 그대로 순종하는 ‘믿음의 일꾼’이지요. 따라서 반드시 마음에서 비진리를 뽑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성령의 음성을 밝히 듣고 순종하는 참믿음의 일꾼으로 나올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서 앞으로 있을 영적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영적 장수들이 많이 나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2-09-04 욥기강해(22) - 욥의 무지③ - 이수진 목사 욥기 9:27~35, 10:1~2
오늘은 욥이 영적 무지함 속에 점점 나쁜 하나님으로 몰아가는 모습을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조건적인 신앙을 내세우는 욥
   
   “가령 내가 말하기를 내 원통함을 잊고 얼굴빛을 고쳐 즐거운 모양을 하자 할지라도… 내가 정죄하심을 입을진대 어찌 헛되이 수고하리이까”(욥 9:27~29)
   욥은 너무 원통하지만 친구들이 자꾸 권면하니 그 권면대로 원통함을 잊어버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바꾸어 본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내 모든 고통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설령 자신이 돌이켜서 치료받는다 해도 하나님께서 또 이유 없이 쳐버리실 것이기에 또다시 고통 속에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회개하고 행함으로 돌이킬 때 지난 허물을 기억하지도 않으십니다. 시편 103:12~13에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말씀했습니다.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할 때 불쌍히 여기시고(잠 8:13, 시 103:17~18), 주님의 보혈로 씻어 주시기에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친구들이 “돌이키라”고 거듭 권면하는데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설령 친구들의 권면을 받아들여 돌이킨다 해도 하나님은 자신을 여전히 죄인 취급하실 것이기에 고통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수고를 하며 회개하여 돌이켜도 아무런 대가가 없을 것이니 손해 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조건적인 신앙을 내세우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조건을 제시하는 모습은 없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아직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 중에는 “하나님, 이러이러한 문제를 해결해 주시면 교회에서 봉사하겠습니다.” “하나님, 제가 금식하고 철야기도 했는데도 응답이 오지 않네요. 이젠 교회를 떠나겠어요.” 합니다.
   구원받은 자체만 해도 감사해야 하는데 오히려 조건부로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조건을 내세우는 자체가 믿음이 아님을 알아야겠습니다.
   
   
   2. 갈수록 나쁜 하나님으로 몰아가는 욥
   
   “내가 눈 녹은 물로 몸을 씻고 잿물로 손을 깨끗이 할지라도 주께서 나를 개천에 빠지게 하시리니 내 옷이라도 나를 싫어하리이다”(욥 9:30~31)
   ‘눈 녹은 물로 몸을 씻는다’는 것은 우물이나 시냇가의 물도 구할 수 없는, 물이 참으로 귀한 상황을 말합니다. 잿물은 짚이나 나무를 태운 재를 우려낸 물로서, 비누가 없던 시절에 빨래할 때 표백제로 사용했습니다. 이런 잿물로 악창이 난 손을 씻는다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고통을 감수하고 잿물로 정성껏 손을 씻고, 귀하디 귀한 물로 깨끗하게 몸을 씻는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욥을 개천에 또 빠뜨려 버릴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생명이 없는 옷이라 할지라도 욥 자신을 싫어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함도 불가하고 대질하여 재판할 수도 없고 양척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욥 9:32~33)
   욥의 말대로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십니다. 그렇지만 사람과 대화를 안 하시는 분이 아니라 자녀들과 늘 교통하기를 원하시지요. 그래서 꿈과 이상으로, 환상으로 만나 주시기도 하며, 드물게는 친히 음성을 들려주시기도 합니다. 오늘날은 성령의 음성으로 하나님 뜻을 알려주시는 경우가 많지요.
   아브라함이나 모세 선지자 등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과 늘 교통했는데, 욥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정작 자신은 하나님께 대답할 수도 없다고 부인해 버립니다. 욥은 말씀을 들어 아는 지식적인 믿음이었을 뿐, 본인이 체험하지 못했고 마음에 믿어지는 영적인 믿음이 없기에 믿음의 고백이 나올 수 없었던 것입니다.
   ‘양척’이란 법률 용어로 원고와 피고를 통틀어 이르는 말입니다. 욥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질병을 주었으니 하나님은 원고이고 자신은 피고입니다. 자신은 억울하게 피고가 되어 있는데 누가 공의로운 재판을 해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스스로 피고가 되어서 자신을 저주하고 있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우리 인생의 마음이 드러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시험이 옵니다. 어떤 사람은 재물을 탕진해서 자신의 힘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도움 받을 만한 곳도 없기에 스스로 낙담하고 비참한 상태에 빠져 버린다면, 스스로 피고가 되어 자신을 저주하는 것과 다름없지요.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설령 거지가 되었다 해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천국의 소망을 갖고 기뻐하며 믿음을 내보일 수 있습니다.
   또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는 경우, 상대를 원망하며 미워할 뿐 아니라 상대를 믿은 자신을 탓하여 괴로움 속에 살아간다면 피해의식과 우울감에서 헤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육적인 사랑의 무익함을 철저히 깨닫고 주님의 참사랑으로 마음을 채우면 원망도 괴로움도 사라지며 도리어 영적인 성장을 이루지요. 이렇게 모든 일들에 영적인 해결방법을 찾아 낙오자가 아니라 승리자가 되어야겠습니다.
   “주께서 그 막대기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그 위엄으로 나를 두렵게 하지 아니하시기를 원하노라… 나는 본래 그런 자가 아니니라”(욥 9:34~35)
   여기서 ‘막대기’란 하나님의 주권된 권세를 의미합니다. 모세의 지팡이와 아론의 싹이 난 지팡이 등 구약 성경에서 막대기는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냅니다.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때리려고 막대기를 대고 있으니 두려워서 꼼짝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막대기를 치우고 자신을 상관하지 않으신다면 이 원통함을 참지 않고 마음껏 하나님을 저주하고 욕하겠다는 말입니다.
   욥은 그동안 얼마나 합당치 않은 말을 광풍같이 쏟아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두려움을 알기에 이 정도로 참고 절제한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 앞에 지금보다 몇 배 더 악을 쏟아 내겠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도 본래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변명하고 있습니다.
   
   
   3. 가중되는 곤고함으로 인해 악이 더욱 드러나는 욥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원통함을 발설하고… 무슨 연고로 나로 더불어 쟁변하시는지 나로 알게 하옵소서”(욥 10:1~2)
   ‘곤비’란 괴롭고 고달프고 피곤한 것을 말합니다. 자신은 아무 잘못이 없고 의롭게 살았다고 생각하는데, 친구들이 책망과 지적의 말로 힘들게 하니 욥은 곤비함으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친구들의 말은 마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것처럼 마음까지 고통스럽게 만들었지요. 이제는 마음의 고통이 육의 고통보다 더한 상황이 되니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앞에서 욥은 할 말이 많이 있지만 하나님이 두려워서 절제한다고 했습니다(욥 9:12, 9:14). 그런데 지금은 분하고 억울함을 다 발설하겠다, 말하고 싶은 대로 모두 해 버리겠다고 말합니다. 곤고함이 가중되니 욥의 악이 한층 더 드러나고 있는 장면이지요.
   
   욥의 심중에 ‘내가 친구들보다 더 낫다’라는 교만이 있기에 자신이 얼마나 진리에 위배되어 있는지를 깨우치지 못합니다. 앞서 친구 빌닷은 진리의 말씀으로 깨우쳐 주었지만 욥은 그 말이 들리지 않았지요. 이처럼 “내가 너보다 낫다”는 교만함이 있을 때는 상대의 말이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욥은 친구들에게 “지금은 비록 내가 이 모양이 되었지만 전에는 너희들보다 재물도 많고 지식도 많고 아름다운 가정을 갖고 많은 사람들에게 권면하며 살지 않았느냐? 왜 나의 현재 모습만 보고 지적하며 훈계하느냐? 너희들과는 아예 상대하고 싶지도 않다.” 이런 태도입니다.
   이전까지는 그래도 “친구야, 내가 옳다. 네가 그르다.” 하면서 변론이라도 했었는데, 이제는 마음이 더 강퍅해져서 아예 친구들을 무시한 채 하나님 앞에 직접 고하며 따지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쟁변”이란 “다투어 변론하다”라는 뜻입니다. 욥은 하나님께 “애꿎은 저를 정죄하지 마시고, 무엇 때문에 저와 다투어 변론하시는지 이유를 알게 해 주십시오.”라고 따지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유 없는 연단은 없고 까닭 없는 정죄함도 없습니다. 죄로 인해 오는어려움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더 아름답게 변화시키고자, 큰 그릇 만들어 귀히 사용하고자 허락하시는 연단도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연단의 과정을 통과하여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고, 모세도 연단을 통해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는 차원에 이르렀지요. 다윗, 사도 바울 등 모든 믿음의 선진들은 각자에게 맞는 연단의 시간을 거치면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그릇으로 나왔던 것입니다.
   욥은 이미 친구들이 많은 진리의 말씀으로 권면과 지적을 해주었지만 여전히 깨우치지 못하며 교만한 말을 내뱉고 있습니다. 이처럼 교만하면 말씀을 들어도 깨우칠 수 없고 영적인 믿음을 가질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말씀하셨지요. 영적인 어린아이는 순수하고 단순하며 겸손하여, 하나님 앞에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설령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해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믿고 순종하며, 겸손히 배우고자 하지요.
   이렇게 어린아이처럼 겸손한 심령이 되어야 말씀을 들을 때 깨우쳐서 회개할 수 있고, 어떤 연단이 오더라도 겸비한 자세로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또 자신보다 믿음이나 직분이 낮은 이가 권면해도 귀담아 듣고 자신을 돌아보기에 날마다 아름답게 변화될 수 있지요.
   그러므로 베드로전서 5:5~6에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온전히 선하시고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오해할 일이 없습니다. 독생자도 아끼지 않고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한다면, 아무리 벼랑 끝에 서 있는 듯한 상황이라도, 반드시 하나님은 나를 붙들어 주시고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런 믿음이 있다면 어찌하든 하나님의 뜻, 진리대로 행할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먼저 수많은 희생을 치러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아드리면 기쁘셔서 “내가 뭘 줄까, 뭘 더해 줄까?” 하시는 것이 애틋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더 알아서 제일로 사랑해 드리는 것이 우리가 행해야 할 가장 크고 중요한 선입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기도로 속히 변화되어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드리며, 하나님과 깊은 사랑을 주고받는 참 자녀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금주 예배 안내
주일 대예배 (2022년 9월 4일 주일)
* 사회: 이미경 목사
개회찬송 9장 1절
성시교독 21번
찬송 442장
기도 최종태 장로
성경봉독 로마서 8:12~16
찬양 주와 함께 가리라
임마누엘성가대 · 닛시오케스트라
설교 성령의 음성 주관 인도(4)
당회장님
찬송 만민 찬양 33장
주일 저녁예배 (2022년 9월 4일 주일 오후 3시)
* 사회: 박광현 목사
대표기도 최영신 전도사
성경봉독 욥기 10:3~12
특송 서경애 권사
설교 욥기 강해(23) - 욥의 착각
당회장 직무대행 이수진 목사
수요 예배 (9월 7일 수요일 오후 7시)
* 사회: 노영진 목사
대표기도 권영남 전도사
성경봉독 골로새서 3:1~4
설교 수직 인생
문신현 목사
금요 철야예배 (9월 9일 금요일 오후 11시)
추석 연휴 관계로 금요 철야예배는 없습니다.
새벽 예배
인도 추후 공지 시까지 새벽예배는 모이지 않습니다
시간 매일 오전 5시(토요일은 제외)
장소 3층 성전
온라인헌금 안내(예금주 : 만민중앙교회)
우리은행 1005-501-353157
국민은행 547801-04-030598
신한은행 140-008-226641
농협 064-01-184095
기업은행 318-039172-04-031
SC제일은행 353-20-488363
하나은행 118-890064-10004
※ 입금 시 송금자명에 반드시
이름+동명번호+헌금의종류 기재를 부탁드립니다.
(예 : 홍길동1감사, 홍길동1십일조)
알려드리는 말씀
2022-09-04 2022년 9월 첫째주 교회 공지
본 교회에 새로 나오셔서 등록해 주신 분들과 인터넷으로 등록하신 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 교회 소식

● 당회장님의 저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이탈리아어가 종이책으로 발간되었습니다.

● 당회장님 신앙칼럼이 「기독선교신문」, 「시사뉴스」 등에 정기 게재되고 있습니다.

● 금주는 민족 고유의 명절인 추석 연휴가 있습니다. 주 안에서 즐거운 명절이 되시길 바라며 일가친척, 이웃 등 주변의 많은 분들께 전도하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 추석 명절 감사예배 순서와 예문이 주보에 게재되어 있습니다. (주보 19페이지 참조)
※ 9월 9일 금요 철야예배는 추석 연휴 관계로 없습니다.

● 제21회 말씀퀴즈대회 본선 및 결선이 오늘 저녁예배 후 오후 6시에 신학교 스튜디오에서 현장으로 진행됩니다. 인터넷 생방송으로 시청하실 수 있으니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 GCN방송에서는 추석 연휴 기간 중에 2022년 만민하계수련회 교육, 캠프파이어 프로그램을 특별 편성합니다.
※ 방송시간/ 교육1: 9월 9일(금) 오후 7시, 교육2: 9월 9일(금) 오후 8시 30분
캠프파이어1: 9월 10일(토) 오후 7시, 캠프파이어2: 9월 11일(주일) 오후 7시

● 9월 추천도서는 「주님의 자취(상)」입니다. 성도님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우림북 홈페이지 www.urimbooks.com)

● 당회장님 저서를(주보 맨 뒷장 참고) 교보문고, 영풍문고, 북스리브로, 예스24, 인터파크 등에서 판매하고 있습니다. 또한 전자책(e-book) 및 오디오북으로 발간하여 주요 인터넷 서점에서도 판매합니다.
성도님들의 신앙 성장과 전도 및 문서 선교를 위해 널리 활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기관 소식

권사회
연합월례회/ 9월 7일(수) 오후 2시 신학교 3층 예배실(인도: 빈금선 연합회장)


● 성도 소식

전진수 형제(1청년)/ 제46회 전국 대학 레슬링대회에서 70kg 자유형 동메달 획득


● 감사드립니다.

강단헌화/ 여구역장연합회(꽃꽂이 봉사: 예배국 미화부, 시설관리국)
주간 성경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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