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예배

설교 > 헌신 예배

목록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다음요즘 메일보내기 바로가기복사
제목 신뢰
설교자 강사 이재록 목사 설교본문 마 16:16 등록일자 2013.03.24
사랑하는 헌신자 여러분, 성도 여러분, 예수님 당시, 권능을 행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사람들의 반응은 가지각색입니다.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도 하고, 구약의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가 다시 왔다거나 많은 선지자 중 하나라고도 했지요. 물론 귀신들렸다는 등 악한 말로 비방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런 악한 말에는 귀 기울일 필요조차 못 느꼈고, 선한 고백만을 예수님께 전해드렸지요. 이에 예수님께서는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러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했지요. 이 고백은 베드로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므로 하나님께서 깨우쳐 주신 것이었지요.

물론 베드로는 아직 성령을 받지 못했기에 이후에 예수님을 부인하는 오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을 목도한 후 성령을 받고 그 신뢰가 온전해 졌을 때 베드로에게는 더 이상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큰 권능을 행하며, 살기등등한 백성들과 관원들 앞에서도 담대히 주의 복음을 외쳤습니다. 마침내 십자가를 거꾸로 질 때도 베드로의 마음에는 두려움과 의심이 아니라, 주를 향한 뜨거운 사랑과 온전한 신뢰뿐이었지요.

헌신하시는 여러분도 이런 영적인 고백을 중심으로 하기 원하실 것입니다. 물론 지금도 “아버지 하나님을, 주님을 믿고 사랑합니다.” 또 “목자를 사랑하고 신뢰합니다” 이런 고백들을 많이 하시지요. 그러나 양 떼의 머리인 구역장, 조장, 지역장으로서 그 고백이 진실하고 온전한 것이라면 지금쯤 영으로 들어왔어야 할 것입니다.

이 시간은 여러분이 참된 신뢰를 이루는데 필요한 세 가지 분야를 설명합니다. 말씀을 통해 참된 신뢰와 사랑 가운데 아버지 하나님과, 주님과 또 목자와 온전히 하나되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헌신자 여러분, 참된 신뢰를 이루기 위해서는 첫째, 육신의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는 사람은 범사에 자기의 기준에 맞춰 판단하고 자기 유익을 좇아 생각합니다. 옳은 일을 잘못이라고 비난하고 선한 일을 악하다고 오해하지요. 그러면서도 자기 생각이 틀린 줄을 모릅니다.

쉬운 예로, 평소에 호감을 갖고 있던 상대가 어느 날 갑자기 인사를 잘 받아주지 않고 표정이 영 좋지 않습니다. 그러면 육의 사람들은 온갖 생각을 합니다. ‘나에게 기분 나쁜 일이 있나? 오해가 있나?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주 무례한 사람이네’ 이러면서 상대를 좋은 사람이라고 여겼던 마음이 순식간에 변해 버리지요. 그렇지 않을 거라고 누군가 반대되는 말을 하면 “내 눈치가 얼마나 빠른데, 척하면 척”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옳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이지요.

성경에도 이런 경우가 참 많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올 때 다윗은 춤을 추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때 아내인 미갈은 그것을 보고 다윗을 무시하며 비난합니다. 품위 없이 천한 행동을 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다윗은 경박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낮아진 것입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인데 이 법궤를 가까이 두게 된 것이 너무나 기뻐서 온몸으로 하나님께 찬양드릴 수밖에 없었지요. 미갈의 마음에 선이 있었다면 아마 다윗의 기쁨을 함께 느끼며 힘써 하나님께 영광 돌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미갈은 자기 악함과 교만함 속에 다윗이 행한 선을 악이라고 판단했고 그로 인해 저주를 받고 말았지요.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당시에도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선한 사역을 악하게만 생각했습니다. 선한 것을 선하게 볼 수가 없었지요. 예를 들어 누가복음 13장에는 18년 동안 귀신들려 꼬부라진 채로 살던 여인을 예수님께서 고쳐 주신 장면이 나옵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 현장에 있었다면 어떤 생각을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역사는 정말 놀랍구나 18년간이나 귀신에게 시달리다가 풀려났으니 저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 이런 권능을 행하는 예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실까?”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율법을 잘 안다는 회당장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정죄합니다. “안식일에는 노동을 하면 안 되는데 왜 안식일에 귀신을 내쫓아 주는 것인가? 다른 날에 고쳐주면 될 텐데” 하고 분을 내지요.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났다는 것도, 비참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것도 생각지 못합니다. 이렇게 고침 받은 사람이 회당장 자신이었다면 그래도 안식일을 범했다고 싫어했을까요? 사랑이 없고 선이 없기 때문에 자기 의와 틀에 맞춰 판단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고집하지요.

저도 이런 일을 많이 겪어 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어떤 사람을 구제할 때는 성령의 주관을 따라 합니다. 합당한 사람에게 합당한 액수를 구제하며 또한 그 구제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생명으로 나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심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구제 하나를 보고도 육신의 생각 속에 온갖 판단 정죄를 합니다. ‘왜 저 사람에게 저렇게 많이 구제해 주시지? 다른 어려운 사람들도 많은데, 나도 어려운데’ 하면서 불편한 마음을 품지요. 아니면 ‘이보다 더 중요한 일도 있을 텐데 더 좋은 일에 쓰지 않고 낭비하시네’ 하고 판단하기도 합니다. 제가 성령의 역사를 따라 선으로 구제해도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자기 생각이 더 옳게 보이는 것입니다.

자신이 큰 어려움에 처했다가 구제를 받았다면 ‘꼭 이렇게 많이 구제하셔야 하나’ 하고 불편해 할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크시다” 하고 감사만 하겠지요. 결국 자기 욕심과 시기, 질투, 자기 의와 틀 때문에 육신의 생각이 나오고, 선한 것을 악하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라면 구제만 아니라 다른 분야도 얼마나 많이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겠습니까? 설교를 들을 때도 자기 지식과 생각에 안 맞으면 불편해합니다. 선한 일을 보아도 악한 생각만 하니 자기 스스로도 마음이 괴롭지요. 계속해서 육신의 생각 속에 빠져들다 보면 결국 사단의 역사에 사로잡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온전한 신뢰를 이루기 위해 먼저는 육신의 생각을 철저히 벗어야 합니다. 고전 2:13 후반절에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한다는 말씀처럼, 영의 생각을 할 수 있어야 영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고 신뢰할 수 있습니다. 선한 것을 선하다고 깨닫지 못하게 하는 자신의 악을 발견하여 뽑아버리고, 범사에 영의 생각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헌신자 여러분, 참된 신뢰를 이루기 위해서는 둘째, 성령의 음성을 듣고 주관을 받아야 합니다.

악을 버리고 육신의 생각을 버리는 만큼, 성령의 주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 속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깨우칠 수 있지요.
예를 들어, 귀신들린 딸을 가진 이방 여인이 예수님께 치료받기를 구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냉정하게 대하십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그래도 여인은 전혀 서운해하지 않았습니다. 더 자신을 낮추며 끝까지 매달립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 겸비한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 믿음을 칭찬하시며 즉시 고쳐 주셨습니다.

만약 이 장면을 여러분이 지켜보고 있었다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요?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는 사람은 '예수님은 사랑이 없으시다' 하고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의 선과 사랑을 믿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궁구해 볼 수는 있지요. “예수님께서 저렇게 하시는 이유가 뭘까?” 이를 참 선한 마음으로 궁구한다면 성령의 주관 속에서 예수님의 뜻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사실 이 여인이 자존심을 내세웠다면 예수님께 서운함을 품을 수도 있고 낙심하여 응답받기를 포기했을 수도 있지요. 그러나 여인은 응답받을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변함없이 선한 고백으로 매달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으로 하여금 끝까지 믿음을 내보이게 하셔서 응답받을 만한 공의의 분량을 채우게 하신 것입니다. 선한 마음으로 분별하는 사람은 이러한 예수님의 의도를 성령으로 깨우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역사도 깊이가 서로 다릅니다. 성령의 역사를 좀 더 밝히 받는다면 예수님의 뜻도 더 깊이 깨달을 수 있지요. 곧 예수님은 이 여인의 믿음을 이미 아셨기에 이 여인의 사례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도 깨우침을 주시고자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믿는다 하면서도 자기 기대대로 응답받지 못하면 쉽게 낙심하고 혹은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무슨 대단한 모욕을 받은 것도 아닌데 조금만 마음 상하는 일을 겪으면 변개하지요.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에게도 참 믿음이란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시기 위해 이 여인의 겸비한 고백을 끌어내신 것입니다. 성령이 도우심 속에 선한 마음으로 궁구하면 이런 예수님의 뜻도 깨우칠 수 있습니다. 그 선하신 뜻을 깨우쳐 나가는 만큼 예수님에 대한 신뢰도 점점 더 깊어지고요.

다른 비유를 들어보지요. 갑자기 은혜를 받고 뜨겁게 달려가는 분을 보고 “저렇게 열심히 달려가니 곧 영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제가 칭찬을 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고민을 하기 시작합니다. '저 사람의 단점을 당회장님이 모르시나? 저 사람이 정말 믿음 좋은 줄로 성도님들이 오해하면 안 되는데, 당회장님께 뭔가 잘해드린 것이 있어서 저 사람만 편애하시는 것인가?' 이렇게 온갖 생각이 떠오르지요.
제가 그 부족함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누구를 편벽되이 사랑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분이 변화된 모습을 통해 많은 성도님들이 도전받기 원하는 것입니다. 또 칭찬받은 분도 칭찬을 통해 더 힘을 내고 더 열심히 달려갈 수 있기 원하는 것이고요.

그보다 더 깊은 이유는 목자로서 제게 주신 양 떼를 사랑하기에 여러분의 부족함이 부족함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다고 믿고 곧 온전히 변화될 모습을 믿음으로 바라봅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노력하는 모습이 보이면 제편에서는 그분을 위해 믿음과 사랑의 고백으로 아버지 하나님 앞에 심어드리는 것이지요. 성령의 역사를 받아가는 분들은 이런 사소한 일 하나 속에서도 아버지의 선하신 뜻을 깨달아 나갑니다. 그럴수록 신뢰와 사랑이 더하며 “나도 그 사랑을 의지하여 영의 깊은 차원으로 곧 들어가리라”는 고백이 저절로 우러나오게 되지요.

사랑하는 헌신자 여러분, 셋째로 사랑이 커지는 만큼 신뢰도 커집니다.

베드로는 제자로서 예수님을 따라다닐 때도 예수님을 신뢰하고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사건을 겪은 후에는 그 사랑의 차원이 달라졌습니다. 너무나 사랑하던 스승이, 더구나 선하고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눈앞에서 참혹한 고난을 당하셨지요. 그러나 자신은 예수님을 지켜드리기는커녕 모른다고 부인했고, 심지어 저주하는 말까지 내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어떤 책망도 없이 묵묵히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처참한 십자가 처형을 받으셨지요. 자기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고난을 목도한 후 베드로의 사랑은 예전과 달랐습니다. 그 사랑이 깊어진 만큼 주님에 대한 신뢰도 전혀 달라졌지요.
전에는 어린 여종 앞에서도 두려워했는데 이제는 살기등등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도 담대히 복음을 외칩니다. 십자가를 거꾸로 지고 순교할 때도 그 신뢰에 추호도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정말 주님께서 부활하셨나? 내가 전하는 복음이 사실이라면 왜 하나님께서 나를 안 지켜 주시나, 내가 왜 이런 죽음을 당해야 하는가?’ 이런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오직 뜨거운 사랑과 굳건한 신뢰 속에 영광스러운 순교를 할 수 있었지요.

사랑하는 헌신자 여러분, 하나님께서 저를 만나주신 이후로 저는 아버지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조금도 의심할 수가 없었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당해도, 차마 감당하기 어려운 연단이 와도, 주님을 신뢰하는 마음은 한순간도 변함이 없었지요.

개척 당시에는 많은 성도들 앞에서 7주 동안을 책망받은 적도 있었습니다. 온힘을 다해 아버지의 영광만을 위해 살고 있었기에 무엇을 악하다 하시는지 알 수가 없었지요. 그래도 ‘아버지께서 왜 성도들 앞에서 나를 망신 주시나?’ 원망하거나 ‘억울하다. 슬프다’ 하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께서 무엇을 책망하시는지 알아서 고치려는 마음과 감사뿐이었지요. 결국은 아버지께서 제 중심을 테스트 하셨음을 알려 주시면서 흔들림 없는 신뢰를 칭찬해 주셨지요.

1998, 1999년 당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축복이라고만 하셨지만 현실적으로는 상상 못할 시련과 애통의 날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시간을 지내면서도 축복이라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습니다. 신실하시고 선하신 아버지, 나를 인도하시는 사랑의 아버지께서 가장 좋은 것 주심을 확신했지요.

성도 여러분, 헌신자 여러분, 철모르는 어린아이는 자기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사람인 줄 압니다. 그 사랑하는 아빠를 누가 험담이라도 하면 ‘우리 아빠가 나쁜 사람인가?’ 생각하거나 아빠를 멀리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아빠는 절대 그렇지 않아!” 하고 화를 내지요.
또 자녀가 철이 들어서 자신을 위한 부모님의 희생을 깨달으면 부모님에 대한 사랑이 더 절절해집니다. 그런 부모님을 누군가가 욕하거나 모욕하면 가슴이 아파서 참을 수가 없지요.

하물며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주님은 육의 부모와는 비할 수 없이 순전하고 미쁘신 분입니다. 생명 다한 사랑을 드리기에 합당하며, 온전히 신뢰할 만한 분이시지요. 이런 하나님께 드리는 여러분의 사랑과 신뢰는 과연 어떠하십니까?
목자에 대한 신뢰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자님, 받은바 은혜에 감사합니다, 저를 위한 희생과 헌신에 대해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이런 고백들을 많이 하십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참이라면 중심에서 신뢰하여 하나 될 수 있고 그 신뢰가 흔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헌신자 여러분,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참된 신뢰를 이루기 위해서는 첫째, 육신의 생각을 버리고, 둘째, 성령의 주관을 받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분별해야 하며, 셋째, 사랑하는 만큼 신뢰가 더해진다 했습니다.

들은 말씀을 마음에 새겨 자신을 발견하며 신속하게 변화되어 참마음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고백이 순도 100프로의 정금과 같이 순전하다고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속히 영으로 온 영으로 들어가며,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푯대를 향하여 멈추지 않고 달려가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3-03-25 오후 11:33:21 Posted
2013-04-10 오후 4:53:21 Updated

이전글 우리의 열심은
다음글 나를 누구라 하느냐
검색
이전 페이지 인쇄하기 글자크게 글자작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