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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6계명(5)
설교자 정구영 목사 설교본문 출 20:13 등록일자 2018.01.24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 중에 여섯 번째 계명 “살인하지 말지니라”에 대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 속에는 육적인 살인과 더불어 영적인 살인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살인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오늘은 형제를 미워하는 것에 대해 증거합니다.

1. 육적인 살인으로 연결되는 영적인 살인

육적인 살인은 타살, 자살, 낙태를 말하며 영적인 살인은 진리에서 벗어나는 말과 행동으로 상대의 영혼을 실족시키는 것,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해당됩니다.
지난 시간에는 진리에서 벗어나는 말과 행동으로 상대의 영혼을 실족시키는 것에 대해 1) 잘못 상담하여 비진리를 행하게 하는 경우, 2) 악한 말을 전하여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경우, 3) 진리가 아닌 말을 전하여 실족시키는 경우, 4) 자신의 악으로 인해 스스로 실족당하는 경우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영적인 살인 중에서 형제를 미워하는 것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요한일서 3장 15절에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하셨습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한다’는 것은 구원도 받기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이기에 구원받기 어려운 것일까요? 사실 육적인 살인도 근본을 추적해 들어가면 결국 미움이라는 것이 뿌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봅니다. 어떤 조건과 환경이 되면 뿌리에서 꽃이 피고 열매가 맺어지듯이 영적인 살인은 결국 육적인 살인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4장에 나오는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도 미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께 대한 서운한 마음이 들면서 아벨에 대한 미움이 극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하셨지만 이를 다스리지 못해 동생 아벨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는다’고 했는데 예수님은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는다고 하셨고 형제에게 욕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며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도 결국 지옥불에 들어간다’고 하셨지요(마 5:21~22).
이처럼 마음에 있는 미움은 여러 가지 악을 행하게 합니다. 분이 나서 욕하고 다투기도 하고 시기 질투는 물론 판단 정죄하여 상대의 허물을 전하기도 하며 거짓으로 속여 손해를 입히기도 하고 원수를 맺어 상종도 하지 않습니다.
사울왕도 다윗을 미워하여 평생을 쫓아다니다가 결국 전쟁터에서 비참하게 죽습니다. 최근 역사에도 보면 히틀러가 유대인을 600만 명이나 죽인 것도 유대 민족에 대한 증오심 때문이었지요.
창세기 37장에 나오는 요셉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채색 옷을 입힐 정도로 그를 지극히 편애하였습니다. 이를 본 형들은 요셉을 미워하고 언사가 불평하였지요(4절). 설상가상으로 형들의 곡식 단이 요셉의 곡식 단에 절하고 해달별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다고 말하자 형들은 요셉을 더욱 미워하여 시기까지 합니다.
어느 날 요셉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을 만나기 위해 세겜을 거쳐 도단으로 갑니다. 그러나 형들은 요셉을 보자 미움이 폭발합니다. 채색 옷을 입고 걸어오는 요셉에게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하며 놀리고 죽일 모의를 하지요. 그리고는 요셉의 채색 옷을 벗기고 그를 잡아 물이 없는 빈 구덩이에 던집니다. 유다가 마침 그곳을 지나던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요셉을 팔자고 제안하면서 형들은 결국 은 이십 개를 받고 요셉을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아넘기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도 그 당시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의 시기심 때문이었습니다. 시기는 샘이 나서 미워하는 것인데 결국 미움이 그 뿌리가 되었지요. 권세 있는 말씀으로 많은 군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며 귀신들을 쫓아 내주고, 죽은 자들을 살리기도 하면서 예수님의 인기가 충천하자 그들은 시기심이 가득하여 예수를 잡아 죽이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이는 빌라도의 재판 과정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18절에 “이는 저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러라”라고 했던 것처럼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시기해서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부르짖는 모습을, 이방인인 빌라도가 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아버지 하나님의 선하신 뜻

미움에 대한 아버지 하나님의 선하신 뜻 1단계는 미움이라는 죄성을 뽑아 버리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성령이 오시지 않았기에 스스로 마음에 할례하여 성결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신약 시대에는 성령이 내주하셔서 마음에 있는 죄성까지 버릴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십니다. 그래서 신약 시대에는 형제를 미워하는 것도 살인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음욕만 품어도 간음이라고 말씀하시는 근거도 여기에 있지요(마 5:28).
우리 속에 있는 죄성들을 다 뽑아 버리면 깨끗한 마음이 됩니다. 이를 영으로 들어갔다 또는 믿음의 4단계에 들어갔다고 하지요. 그런데 영으로 깨끗한 그릇을 이루었다고 해서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그 그릇 속에 사랑으로, 선으로, 진리로 채워 가야 하지요. 다시 말하면 미움을 빼내고 사랑으로 채워 가야 되는데 그 첫 번째 단계가 용서라는 말입니다.

1) 예수님의 용서의 차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예수님을 희롱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갈대로 예수님의 머리를 쳤던 ‘군병’들도 있었고(마 27:27~30), “자기 머리를 흔들며 …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는 ‘지나가는 자들’도 있었습니다(마 27:39~40). 그리고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하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장로들’도 있었지요. 그리고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도 욕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극한 고통을 받으시면서도 이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3장 34절에 보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셨는데 여기서 저희란, 당시 예수님을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구원의 섭리를 완성하신 후에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지 않고 죄 가운데 행할 온 인류를 지칭하지요.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중보기도를 통해서 용서만 끌어내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구원의 길까지 열어 주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의 무자비한 종의 비유
한 번은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 나와서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고 여쭙습니다. 당시 유대 랍비들은 세 번까지 용서하라고 가르쳤지만 예수님께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산술적으로 490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7은 완전수로서, 일흔 번에 일곱 번이란, 무한대의 용서, 완전한 용서를 말합니다.

한 종이 주인(왕)에게 일만 달란트의 빚을 졌습니다. 일만 달란트는 자그만치 15만 년 치 임금에 해당하는 액수입니다. 이러한 엄청난 빚을 갚지 못하자, 주인은 그와 그의 가족들과 전 재산을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합니다. 그는 빚을 갚지 못해 식구들이 다 노예로 팔려가게 될 판이었습니다. 하지만 주인은 그를 불쌍히 여겨 놓아 주고 빚을 다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종이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을 만납니다. 백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백 일 치 임금으로 오늘날로 치면 4달 치 봉급에 해당되지요. 그가 탕감받은 6천만 데나리온(일만 달란트)에 비하면 60만 분의 1밖에 되지 않는데 그는 탕감받은 것의 60만 분의 1의 빚을 진 사람에게 빚 갚을 것을 독촉합니다. 자신은 6천만 데나리온이나 되는 빚을 다 탕감받았는데, 일백 데나리온을 갚지 않는다고 해서 빚을 다 갚을 때까지 동관을 감옥에 가둡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왕은 일만 달란트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감옥에서 나올 수 없게 했지요(마 5:26). 이 비유에 나오는 왕은 일만 달란트(6천만 데나리온)의 빚을 탕감해 준 자비로운 왕인 동시에 공의로운 왕이었지요.
이처럼 하나님께서도 자비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를 무조건적으로 다 용서하셨는데 우리가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진노하십니다. 그분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마태복음 18장 35절을 보면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미움은 지옥 같은 괴로움을 일으키고 나를 파괴하여 서서히 죽여 갑니다. 하지만 용서는 죄의 악순환, 고통의 악순환, 상처의 악순환 등 모든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리는 역할을 합니다.
요셉마저 형들에게 복수했더라면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요셉의 용서가 모든 죄와 상처와 고통과 복수의 악순환의 고리를 완전히 끊어버리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만약 변화되기 전 사도 바울을 사랑 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면, 아마 “다른 사람은 다 구원받아도 저 사울은 안 될 거야. 성격은 강하지, 지식이 많아서 자기만 옳다 하고 심지어 주를 믿는 성도들을 찾아다니면서까지 잡아 죽이는 지독한 악을 쌓고 있으니 도저히 복음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없구나”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이러한 사울을 권능의 사도로 바꾸셨지요. 강한 성격은 핍박에 굴하지 않는 의지로, 복음을 대적했던 많은 지식은 복음을 정립할 수 있는 도구로 바꾸셨습니다. 성도들을 찾아다니며 핍박하는 열정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교회를 개척하는 열정으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미움을 빼버리는 차원이 아니라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을 가득가득 채워 가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18-01-27 오후 10:51:09 Posted
2018-01-31 오후 8:53:58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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