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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창세기 강해 (2000년~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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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세기 강해(205)
설교자 당회장 이재록 목사 설교본문 창40:1-23 등록일자 2006.03.10
“그 후에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그 주 애굽 왕에게 범죄한지라 바로가 그 두 관원장 곧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그들을 시위대장의 집 안에 있는 옥에 가두니 곧 요셉의 갇힌 곳이라
[4절부터 20절까지 중략]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은 전직을 회복하매 그가 잔을 바로의 손에 받들어 드렸고 떡 굽는 관원장은 매달리니 요셉이 그들에게 해석함과 같이 되었으나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지 않고 잊었더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표현할 때 자주 쓰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전지(全知): 모든 것을 다 앎], [전능(全能):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음] 무엇이든지 알지 못하는 것이 없으시며, 무엇이든지 능치 못하신 것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라는 의미이지요.
그런데 만약 하나님께서 ‘전지’하시지는 않고 ‘전능’하시다고만 하면 어떨까요?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 전능하시면 무엇이나 다 하실 수 있는데 굳이 어떤 것을 모른다 해서 문제 될 것이 없지 않은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전능하시다고만 해도 무엇이나 하실 수 있기 때문에 그 앞에 장애될 것이나 문제될 것은 전혀 없지요.
하지만 전지하신 능력이 없이 전능하시다는 것만으로는 온전치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만약 여러분에게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는 전능한 힘이 있다고 가정합시다. 그러면 그것이 무조건 좋을 것 같지만 자칫 그 능력으로 인해 모든 것을 뒤죽박죽으로 엉키게 할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일에는 순서와 질서가 있지요. 그런데 그런 것을 무시한 채 전능의 능력만을 앞세우다 보면 그것이 잘못 쓰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의 깊은 마음을 모르니 공의에 맞지 않게 축복을 주어서는 안 될 사람에게 축복을 잘못 주는 수가 있지요. 또한 지금 축복을 주어서는 안 될 사람에게 축복을 잘못 주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응답해 주어야 하는 가장 알맞은 시기를 놓쳐버리는 경우도 생길 수 있지요.
그릇이 안 되는 사람에게 능력을 주어서 잘못 쓰이게 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고, 살려서는 안 될 사람을 살리게 되는 수도 있습니다. 전능한 능력이 있으면 무엇이나 할 수 있기 때문에 이처럼 원하는 대로 마음껏 일을 이룰 수는 있지만, 전지한 능력이 없게 되면 적당하지 않은 사람에게 잘못 응답해 주거나 적당하지 않은 시점에 역사하는 등의 이러한 일들이 생길 수가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다 보면 공의의 법칙에 비추어 볼 때 어긋나는 일들이 생길 수 있는 것이고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전능하실 뿐만 아니라, 전지하신 능력까지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는 조금의 실수나 한 치의 오차도 있을 수 없지요. 모든 것을 다 아시기 때문에 가장 적당한 시점에 맞추어서 공의에 맞게 정확히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제가 지금 이런 비유를 말씀드린 이유는 바로 ‘영의 분리’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영의 분리를 온전히 이루는 차원에 이르면 그때는 상상을 초월하는 일들이 일어나지요. 그야말로 무엇이나 가능한 차원에 이릅니다. 마음에 품은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차원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영의 분리를 온전히 이루려면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온전히 알아야 합니다.
즉, 마음에 품어야 할 사람과 품지 말아야 할 사람, 응답해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지금 품어야 할 일과 좀 더 시간을 두고 기다려야 할 일 등 모든 것을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에 100% 맞추어 역사해 나가야 하기 때문이지요. 무엇이나 할 수 있다고 해서 무조건 마음에 품어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품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까지도 정확히 하나님의 마음에 맞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영의 분리란 일곱 영을 비롯하여 수많은 천사들을 통해 이 땅의 모든 것을 살피시며 공의의 법칙에 맞추어 정확히 역사해 가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깊은 마음까지라도 알아야 비로소 온전히 가능하다는 말이지요.
자동차가 아무리 성능이 좋아도 가야 할 길을 정확히 알아야 하고 자동차의 뛰어난 기능을 가장 알맞은 때와 장소에 맞추어 사용해야 하는 것처럼, 영의 분리도 무한한 권능의 차원을 공의 가운데서 적절한 때와 시에 맞추어 정확히 역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단 2:21에 보면 “그는 때와 기한을 변하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지식자에게 총명을 주시는도다”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냥 마음에 내키시는 대로 때와 기한을 바꾸시는 것이 아니며 마음대로 누구를 왕으로 세우거나 폐하시기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임의대로 누구에게는 지혜를 주고 누구에게는 주지 않으시며 누구에게는 총명을 주고 누구에게는 주지 않으시는 것도 아니지요.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정확한 공의에 맞추어 역사하십니다. 바로 영의 분리를 온전히 이루게 되면 이 모든 것이 깨달아지면서 공의에 따라 정확한 역사를 베풀게 되지요.

오늘 본문 창세기 40장의 내용도 결국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각각의 상황에 맞추어 가장 알맞은 시와 때에 사람들의 마음을 주관하시고 또는 꿈으로 역사하여 계획하신 일들을 이루어 가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그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1-3절의 내용을 보면 애굽 왕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이 왕에게 범죄하여 왕으로부터 노(怒)를 사서 시위대장의 집 안에 있는 옥에 갇히게 되는 사건이 나옵니다. 그곳은 곧 요셉이 갇혀 있는 곳이기도 했지요. 그런데 이 모든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왕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이 언제쯤 왕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로 인해 감옥에 들어가게 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정확히 때를 맞추어 역사하신 일이었지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요셉과 왕의 두 관원장은 꼭 만나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죄 없는 두 관원장을 감옥에 들어가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도 각자 나름대로 행함의 열매를 거둔 것이었지요. 감옥에 들어갈 만한 일을 했기에 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다만 두 관원장이 감옥에 들어가는 것과 요셉이 그 감옥에 미리 들어가 있었던 것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정확히 맞아 떨어졌을 뿐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철저히 공의에 맞추어 역사하시면서 모든 상황들을 때와 흐름에 맞추어 정확히 주관해 가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마음에 품으신 것은 공의에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역사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4절에 보면 “시위대장이 요셉으로 그들에게 수종하게 하매 요셉이 그들을 섬겼더라 그들이 갇힌 지 수일이라” 했습니다. 요셉을 감옥에 넣은 장본인인 시위대장이 이번에는 요셉으로 하여금 왕의 두 관원장을 섬기는 중요한 사명을 맡긴 것이지요. 그것은 보디발이 ‘요셉이 어떤 사람인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자기 집에서 일하는 동안 시위대장 보디발은 요셉의 성실함을 보았고 그가 얼마나 마음과 뜻을 다해 주인을 섬겼는지를 친히 보고 체험했지요. 또한 요셉이 지혜 있고 총명하며 윗사람의 마음까지 헤아려 섬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보디발에게 요셉에 대한 나쁜 감정만 있었던 것이 아니지요.
예전에는 당장에 아내의 말만 듣고 앞뒤 정황을 살펴볼 겨를도 없이 크게 노하여 요셉을 감옥에 집어넣기는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요셉에 대해 느꼈던 좋은 감정들이 하나 둘 되살아나고 있었습니다. 요셉처럼 중심으로 섬기는 사람을 찾아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마침 보디발이 감독하고 있는 감옥에 왕의 최측근에 있던 두 관원장이 들어온 것입니다. 보디발의 입장에서는 이 두 관원장을 결코 소홀히 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지요. 원래 정치 세계라는 것이 어느 순간에 권력을 다 잃는 듯 싶다가도 한순간에 다시 회복하는 경우들이 있기 때문에 왕의 두 관원장 역시 지금은 비록 감옥에 들어와 있다 해도 언제 다시 복직을 하게 될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위대장 보디발도 이 두 관원장에 대해 그만한 예우를 해주어야 했지요.
그래서 이 두 관원장을 잘 섬기고 수종들며 그들의 마음을 흡족케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았는데 그가 바로 요셉이었습니다. 아직 개인적으로는 요셉에 대해 감정이 남아 있을 수도 있었지만 이처럼 중요한 일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은 그래도 요셉밖에 없었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사실을 놓고 볼 때 시위대장 보디발은 공(公)과 사(私)를 분명히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는 것과 요셉이 얼마나 인정받았었는지를 다시 한 번 알 수가 있습니다. 물론 보디발의 마음을 주관하여 요셉으로 하여금 두 관원장을 수종들도록 역사하신 것은 하나님이시지만 억지로 보디발의 마음을 주관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 안에 있는 좋은 마음을 주관하여 역사해 가셨다는 말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악한 사람을 억지로 주관하여 선한 일을 하도록 하신다거나 반대로 선한 사람을 강제로 주관하여 악한 일을 하도록 하시는 분이 결코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곧 공의이지요.
예를 들어 출애굽 당시 애굽의 바로 왕은 장자의 재앙까지 겪고 나서야 비로소 마지못해 출애굽을 허락합니다. 이때 만약 하나님께서 바로 왕의 마음을 조금만 선하게 주관하셨다면 일은 아주 간단히 끝날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공의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만약 하나님께서 악한 사람의 마음까지도 억지로 선하게 주관하여 일을 이루신다면 하나님의 일은 너무나 쉽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핍박하는 사람의 마음도 주관하여 핍박하지 않도록 만들고,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는 사람도 주관하여 영의 생각만 하게하며, 믿지 않는 사람의 마음도 주관하여 믿도록 하면 될 테니까요. 그러나 이것은 공의가 아닙니다. 이럴 경우 원수 마귀 사단도 당장에 송사해 오겠지요.
하나님께서는 정확한 공의 가운데 인간 경작을 이루어 가시기 때문에 사람의 자유의지까지 억지로 주관하여 역사하시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로 왕의 경우도 하나님께서는 그가 자기 마음의 악을 좇아 자기 그릇대로 쓰이도록 놔두신 것이지요.
출애굽기 10:20에 보면 “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 했는데 사람들 중에는 이 말씀을 오해하여 하나님께서 마치 일부러 바로 왕의 마음을 강퍅케 하셔서 그가 결국 열 재앙을 겪게 하신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런 의미가 아니지요. 하나님께서 선한 바로 왕의 마음을 일부러 악하게 만드셔서 하나님을 대적하도록 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로 왕의 마음이 악하고 강퍅하니 결국 자기 그릇대로 쓰인 것뿐이지요. 다만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그의 강퍅한 마음이 드러나야 할 때가 되었기에 그 시점에 맞추어 드러났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영의 분리를 통한 역사는 공의를 어그러뜨리면서까지 어떤 일을 억지로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공의에 맞추어 가장 정확하게 역사된다는 사실입니다. 영의 분리를 이룬다 해서 생명을 거두어야 할 사람을 억지로 다시 살린다거나 응답 주어서는 안 될 사람에게까지 억지로 응답을 주는 일은 없지요.
영의 분리를 이루게 되면 오히려 각 사람에게 적용되는 공의를 너무나 정확히 알게 되기 때문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역사가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각 사람의 믿음을 정확히 보시고 그 믿음대로 역사해 주셨던 것을 볼 수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살려할 사람은 다시 살리셨고 치료받고 응답받아야 할 사람에게는 반드시 역사해 주실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시면서도 모든 일을 시와 때에 맞추어 정확히 역사해 가셨다는 사실입니다.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실 때도 급하게 가서 그를 살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하신 때를 기다렸다가 나흘이 되어서야 살리셨던 것이지요.
이처럼 영의 분리란 마음 내키는 대로 누구에게나 무조건 응답주고 축복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정확하게 마음에 주관을 받아 응답 주고 축복 주어야 할 사람에게 꼭 역사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아버지 하나님의 정하신 때와 시에 정확히 맞추어 역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고요.
제가 물 위를 걸어야 하는 시점도 또한 UFO를 끌어내려야 하는 시점도 바로 영의 분리를 온전히 이룬 후에 정확히 마음에 주관을 받아 역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 같아서는 지금 당장 보여 주면 좋을 것 같고, 믿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보여 주면 좋을 것 같지만 그것은 공의에 맞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에도 맞지 않지요.
마 12:38에 보면 “그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했을 때 39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표적을 구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이것 보아라” 하시며 얼마든지 큰 표적을 나타내주실 수도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지요. 그렇게 해서 그들이 믿을 수 있다면 표적을 보여 주실 수도 있으셨겠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잘 아셨고 또한 공의에 어긋나서는 안 되겠기에 아무런 표적도 보이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러한 설명들을 통해 우리 성도님들이 ‘영의 분리가 어떤 것인지’ 좀 이해가 되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이제 이어지는 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하룻밤에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각기 다른 몽조의 꿈을 꾸게 하시지요. 그 꿈은 앞으로 그들의 운명이 각각 어떻게 될지를 보여주는 꿈이었습니다.
이때도 하나님께서는 임의대로 누구에게는 길조의 꿈을, 누구에게는 흉조의 꿈을 꾸게 하신 것이 아니라 각각 그들이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행하고 심은 대로 거기에 맞는 열매를 거두게 하신 것이었지요.
비록 지금은 두 사람이 똑같이 왕으로부터 노여움을 사서 감옥에 있지만 누가 선하게 선을 심으면서 살아왔고 누가 악하게 악을 심으면서 살아왔는지 하나님께서는 정확히 아십니다.
또한 왕의 마음도 잘 아시지요. 왕이 지금 누구는 복직시킬 마음이고 누구는 살려두지 않을 마음인지를 하나님께서는 다 아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아시므로 공의에 맞추어 각자에게 맞는 꿈으로 역사하셨지요.
그 꿈의 내용이 9-19절 사이에 나옵니다. 두 관원장은 자신들이 꾼 꿈의 내용을 해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요셉이 그 내용을 듣고 해석을 해 주었지요. 즉 술 맡은 관원장은 사흘 안에 예전에 자신이 맡았던 직무를 회복하여 왕의 곁에 있게 된다는 것이고, 떡 굽는 관원장은 역시 사흘 안에 처형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이러한 해석대로 삼 일 째 되는 바로 왕의 생일을 맞아 술 맡은 관원장은 복직이 되었고, 떡 굽는 관원장은 처형을 당하게 되었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 6-7절을 보면, "아침에 요셉이 들어가 보니 그들에게 근심 빛이 있는지라 요셉이 그 주인의 집에 자기와 함께 갇힌 바로의 관원장에게 묻되 당신들이 오늘 어찌하여 근심 빛이 있나이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윗사람을 섬김에 있어서 단지 형식적으로만 섬겼던 것이 아니라 마음과 정성을 다해 섬기는 사람이었지요. 그래서 윗사람의 심기(心氣)까지라도 헤아려 마음에 맞추어 섬기려 했습니다. ‘혹여 불편한 것은 없는가’, ‘필요한 것은 없는가’ 이런 마음으로 그들의 얼굴빛까지도 늘 살폈지요.
윗사람의 눈치를 보려는 의도가 아니라 ‘어찌하면 더 윗분의 마음에 맞출까’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바로 두 관원장도 요셉의 이러한 중심의 마음과 정성을 다한 섬김을 느꼈기에 요셉에게 선뜻 자신들이 꾼 꿈의 내용을 말해 줄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만약 두 관원장과 요셉의 관계가 신뢰도 없고 마음을 나눌 사이도 아니라면 두 관원장이 자신을 수종드는 몸종과 같은 요셉에게 마음에 있는 말을 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관원장과 요셉의 관계는 비록 짧은 시간의 사귐을 통해서였지만 이미 서로의 마음 문을 터놓을 수 있었지요. 이는 요셉이 그만큼 두 관원장으로부터 신뢰와 인정을 받도록 행했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요셉은 어디를 가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항상 인정받고 신뢰받으며 사랑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며 진리의 선한 향을 내는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이지요.
만약 두 관원장이 요셉을 인정하지 못하고 신뢰하지도 못했다면 8절에 요셉이 그들에게 “청컨대 내게 고하소서” 했을 때 "네가 어찌 풀 수 있느냐" 하며 얼마든지 요셉을 무시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보면 두 관원장은 요셉에게 자신들이 꾼 꿈의 내용을 순순히 고했던 것을 볼 수 있지요.
그런데 이때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요셉이 결코 자기 임의대로 그들의 꿈을 해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8절에 보면 두 관원장이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하고 말했을 때 요셉은 "내가 풀어 주겠으니 나에게 고하시오." 했던 것이 아니었지요. 요셉은 그들에게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대답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은 스스로 교만하여 자신이 그 꿈을 해석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어떤 꿈이든지 능히 풀어 주실 수 있다고 말했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요셉이 두 관원장의 꿈을 해석한 내용은 자기 생각 가운데 임의로 푼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영감으로 해석해 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지요. 여러분이 어떤 꿈을 꾸었을 때 또는 다른 사람의 꿈에 대해 들었을 때 그것을 자신의 생각과 느낌 가운데 풀게 되면 전혀 엉뚱한 결과를 낳게 됩니다. 자기 보기에 좋게 풀어서도 안 되며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해석해서도 안 되지요.
성령의 감동함 가운데 정확한 영감을 통해 풀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해석한 것이 한두 번 맞았다 해서 그것을 가지고 스스로가 꿈을 정확하게 해석한다고 자만해서는 안 되지요. 하나님께서 주신 꿈인지 아니면 혼의 작용으로 꾼 꿈인지 또는 사단이 준 꿈인지도 분별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꿈이라면 성령의 역사 가운데 정확히 영적인 뜻을 해석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꿈인지 아닌지조차 분별 못하며 자기편에 좋을 대로 해석해서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까지도 힘들게 만드는 경우가 있지요. 그러므로 환상을 보는 경우는 물론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꾸는 경우에 있어서도 그것을 해석할 때 자기 생각이 들어가는 것을 삼가 주의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해서 요셉이 두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준 대로 술 맡은 관원장은 복직이 되고 떡 굽는 관원장은 죽음을 맞게 되었는데, 이때 복직이 된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이 그에게 했던 부탁을 그만 잊고 말지요. 요셉은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주면서 14절에 “당신이 득의하거든 (즉, 복직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고하여 이 집에서 나를 건져 내소서” 하고 부탁했었는데, 23절에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지 않고 잊었더라”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이대로 영영 감옥에 갇힌 신세가 되고 마는 것일까요? 그러나 여기서 바로 한 편의 극적인 역전 드라마와 같은 사건이 일어나게 되지요. 모든 것을 가장 알맞은 시와 때에 맞추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계획이 어떻게 펼쳐지는지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음에 있는 말을 서로 나눌 수 있는 사이라면 그런 사이에는 비밀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서로 간에 신뢰가 쌓여야 하지요. 정말 서로를 믿을 수 있는 신뢰관계가 쌓였을 때 어떤 비밀이라도 나눌 수 있게 됩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 선지자는 하나님과의 사이에도 바로 이러한 신뢰관계를 이루었던 것을 봅니다.
여러분 중에 혹여 ‘나는 잘하고 있는데, 나는 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일까? 나는 왜 사랑받지 못하는 것일까? 나는 왜 축복받지 못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는 분이 있다면. ‘여러분이 과연 하나님과의 사이에 있어서 또한 세우신 목자와의 관계에 있어서 얼마나 신뢰관계를 이루고 있는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정말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 행함과 진실함으로 여러분의 사랑을 나타내 보였다면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에 대한 사랑과 신뢰를 나타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결국 자기 하기 나름이지요.
요셉은 하나님과의 사이에는 물론이고 사람과의 사이에 있어서도 가는 곳마다 인정받고 신뢰받았습니다. 그것은 가식적이지 않은 마음 중심을 다한 섬김이 있었기 때문이며 그것이 변함없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요셉은 연단을 받으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선을 더 깊은 차원의 선으로 승화시켜 나갔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선하다’ 하지만 선이 더 승해지지 못하고 그 자리에 정체되어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기적인 선의 한계에 머물러서 더 이상 자신을 발견하지도 깨우치지도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서로 비슷한 수준의 선의 차원에 있었던 두 사람이라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연단을 어떻게 받아서 선으로 승화시켜 나가느냐에 따라 두 사람의 결과는 전혀 달라집니다.
더 깊은 선으로 이루어 가는 사람은 그만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점점 신뢰의 관계가 이루어지게 되지요. 연단을 하나하나 통과하면서 더 깊은 선의 차원으로 쑥쑥 들어오는 것을 볼 때 하나님 편에서도 얼마나 믿음직스럽겠고 얼마나 사랑스러우시겠습니까? 반면에 변화도 없고 발전도 없으며 늘 제자리에 머무는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은 하나님 앞에 신뢰받기가 쉽지 않지요.
그러므로 여러분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확실한 신뢰관계를 이루어 나가시기 바랍니다. 바로 지금 들으시는 창세기 강해를 통해 요셉이 어떻게 하나님께 신뢰를 얻었고 또 사람들에게도 신뢰를 얻을 수 있었는지 깨우치셔서 아버지 하나님과 깊은 비밀이라도 나눌 수 있는 아름다운 관계를 만들어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6-03-13 오전 9:40:12 Posted
2018-12-04 오후 1:51:27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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