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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창세기 강해 (2000년~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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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세기 강해(207)
설교자 당회장 이재록 목사 설교본문 창41:9-25 등록일자 2006.03.31
“술 맡은 관원장이 바로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오늘날 나의 허물을 추억하나이다 바로께서 종들에게 노하사 나와 떡 굽는 관원장을 시위대장의 집에 가두셨을 때에 나와 그가 하룻밤에 꿈을 꾼즉 각기 징조가 있는 꿈이라
[ 12절부터 23절까지 중략]
그 세약한 이삭이 좋은 일곱 이삭을 삼키더라 내가 그 꿈을 술객에게 말하였으나 그것을 내게 보이는 자가 없느니라 요셉이 바로에게 고하되 바로의 꿈은 하나이라 하나님이 그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만약 아침에 잠에서 깨어 일어났는데 간밤에 꾸었던 꿈의 내용이 또렷이 기억은 나면서도 그 내용이 무슨 의미인지는 전혀 모르겠고 다만 뭔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면 하루 종일 마음이 불편할 수가 있습니다. ‘이 꿈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하는 생각에 일이 제대로 손에 잡히지도 않고 자꾸만 꿈 내용에 마음을 쓰게 되지요.
물론 영적인 분별력이 있는 성도라면 ‘이 꿈이 하나님께서 주신 꿈인지, 아니면 사단이 준 꿈인지, 또는 자기 생각 가운데 꾼 꿈인지’를 분별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꿈이라면 기도하여 그 영적인 의미를 깨달으면 되고, 사단이 준 꿈이라면 주님의 이름으로 물리치면 되지요.
또한 자기 생각 가운데 꾼 꿈이라면 꿈에 혹여 비진리가 있지는 않았는가? 돌아보면 되고 아무 의미 없이 꾼 꿈이라면 더 이상 마음에 담아둘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분별력이 없다고 하면 자신이 꾼 꿈으로 인해 그 의미를 알지 못한 채 근심하고 고민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지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애굽의 왕 바로가 그랬습니다. 그는 어느 날 밤에 이상한 꿈을 연속으로 두 번이나 꾸었는데 꿈의 의미를 깨달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꿈의 내용도 너무 기이했기 때문에 그로 인해 마음이 번민하게 되었지요. 자기 나라의 술객과 박사들을 모두 불러서 그들에게 꿈을 해석하도록 해보았지만 그것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 꿈이 누구로부터 말미암았는지조차도 깨달을 수가 없었지요.
그런데 이때 바로의 곁에 있던 술 맡은 관원장의 기억에 2년 전의 일이 떠올랐던 것입니다. 자신이 감옥에 있을 때 자기 꿈을 해석해 주었던 히브리 사람 요셉이 떠올랐던 것이지요. 지난 2년 동안 요셉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왕이 꿈으로 인해 번민하는 것을 보면서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2년 전 요셉과 했던 약속 즉 자신이 복직되고 나면 요셉의 사정을 바로에게 고하여 그를 감옥에서 건져내 주겠다던 약속도 기억났지요. 이에 술 맡은 관원장은 바로에게 요셉을 추천하기로 마음먹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술 맡은 관원장은 바로에게 직접적으로 요셉을 추천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딴 이야기라도 하듯이 “내가 오늘날 나의 허물을 추억하나이다” 하며 이야기를 시작하지요. 그리고 이어서 10-13절에 “바로께서 종들에게 노하사 나와 떡 굽는 관원장을 시위대장의 집에 가두셨을 때에 나와 그가 하룻밤에 꿈을 꾼즉 각기 징조가 있는 꿈이라 그곳에 시위대장의 종 된 히브리 소년이 우리와 함께 있기로 우리가 그에게 고하매 그가 우리의 꿈을 풀되 그 꿈대로 각인에게 해석하더니 그 해석 한대로 되어 나는 복직하고 그는 매여 달렸나이다” 말합니다.
이 말을 들은 바로는 급히 사람을 보내어 요셉을 자기 앞으로 불러오게 하지요. 이처럼 술맡은 관원장이 결국은 요셉을 바로와 연결시키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술 맡은 관원장은 왜 바로에게 직접 요셉을 추천하지 않고 이런 식으로 돌려서 말을 했던 것일까요? 여기에 바로 그의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 오히려 바로에게 더 확신을 줄 수 있기 때문이었지요.
술 맡은 관원장이 만약 바로에게 직접적으로 “왕이시여, 요셉이라는 히브리 소년이 있는데 제가 감옥에 있을 때 만난 사람입니다. 그를 불러 한번 꿈을 해석해 보도록 하시지요. 그의 꿈 해석이 아주 정확합니다.” 이렇게 말했다면 바로가 순순히 그 말을 들었을까요?
바로가 술 맡은 관원장을 얼마나 신뢰하느냐에 따라 반응이 다르게 나올 수도 있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술 맡은 관원장의 말이 단번에 바로의 마음을 끌기에는 부족하지요. 자칫하면 “히브리 종이 감히 우리나라의 술객과 박사들도 해석하지 못한 내 꿈을 어찌 해석할 수 있다는 말이냐?” 하며 오히려 심기가 더 불편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바로의 마음이 심히도 불안하며 번민하고 있는 상황에서 말 한 마디 잘못했다가는 도리어 화가 될 수 있다는 말이지요. ‘
혹시 바로가 그렇게 나오면 그때 가서 요셉과 있었던 일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면 되지 않을까요?’ 생각할 수 있지만 왕 앞에서 마치 말대답이라도 하듯이 그처럼 쉽게 말을 꺼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왕의 심기가 한번 불편해지면 더 이상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지요. 왕의 말 한 마디에 자신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함부로 나설 수가 없는 것이고요.
술 맡은 관원장은 곁에서 왕을 모시다보니 이러한 상황들에 대해 잘 알았던 것이고 그래서 나름대로 터득한 지혜 가운데 자연스럽게 바로에게 요셉이 인식되도록 이야기를 이끌어 갔던 것입니다. “자신의 허물을 추억한다”는 말로 자신을 왕 앞에 지극히 낮추면서 왕이 거부감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듣도록 지혜롭게 말을 이어갔던 것이지요.
요셉의 꿈 해석이 얼마나 정확했는지를 자신의 산 경험을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비록 짧은 몇 마디의 말이지만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차근차근 하면서도 조리 있고 설득력 있게 설명해 나갔지요. 결국 술 맡은 관원장의 이러한 지혜로운 말이 바로의 마음을 움직여서 요셉을 감옥에서 불러오게 했던 것이고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미 술 맡은 관원장의 성품과 마음씀, 지혜 등을 다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를 택하여 요셉을 바로에게 연결시켜 주는 도구로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떡 굽는 관원장도 함께 옥에 갇혔었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룸에 있어서 누가 더 적임자인지를 이미 아셨지요. 또한 누가 도리(道理)를 저버리지 않는 양심적인 마음을 가졌는지도 아셨고요.
만약 술 맡은 관원장이 도리를 저버리는 사람이었다면 아마 요셉이 생각났다 해도 왕에게 굳이 그를 추천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일이 잘돼서 요셉의 꿈 해석이 그대로 맞는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고 해석을 못한다거나 해석한 대로 되지 않는다면 그 책임이 술 맡은 관원장 자신에게도 돌아올 수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술 맡은 관원장은 만약 일이 잘 안됐을 경우 요셉을 추천한 자신에게까지 자칫하면 해가 올 수 있음을 알면서도 요셉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나서서 요셉을 추천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술 맡은 관원장이 지난 2년 동안 요셉을 까맣게 잊고는 있었지만 그것은 그가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었고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주관하지 않으셨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제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그를 주관하여 요셉이 기억나게 하시자 그는 결코 사람의 도리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돌아올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요셉과 했던 약속을 지키려 했지요.
이처럼 술 맡은 관원장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그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해 낼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아셨기 때문에 떡 굽는 관원장이 아닌 술 맡은 관원장을 택하여 그를 복직시키셨던 것이고요.
그렇다하여 떡 굽는 관원장이 죄가 없음에도 단지 쓰임받을 그릇이 안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가 그냥 죽도록 놔두셨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전에도 설명을 드렸지만 떡 굽는 관원장은 공의에 비추어 볼 때 죽을 수밖에 없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고, 반면에 술 맡은 관원장은 공의에 비추어 보아도 죽을 이유가 없었던 것뿐이지요.
즉 모든 상황과 사건들은 결국 공의에 맞추어 정확히 역사되는데, 다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어떻게 되어질지를 이미 아시기 때문에 공의가 어그러지지 않으면서도 섭리가 정확히 이루어지도록 미리 미리 주관하시고 역사해 가신다는 말입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도리도 모르는 사람이고 자기의 유익만을 좇는 사람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을 예비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셨겠지요. 그런데 술 맡은 관원장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쓰임에 합당한 성격과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고 때가 되면 하나님의 주관하심에 따라 그 입을 열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낼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거기다가 바로를 곁에서 모시면서 ‘어떻게 대화하는 것이 더 설득력 있는가’에 대한 경험과 지혜를 갖추고 있었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하나님의 섭리를 위해 쓰임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쓰실만한 그릇준비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사람의 중심을 보시지요. 자기 유익을 좇아 변개하지 않는 모습, 사람의 도리를 저버리지 않는 모습, 한번 한 약속이나 마음에 정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지키는 모습, 이러한 모습은 바로 여러분의 마음을 영으로 일구었을 때에만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위로부터 오는 선의 지혜를 받아 모든 사람과 화평할 수 있어야 하며 말의 지혜 역시 너무나 필요하지요. 여기서 말의 지혜란 단순히 말 잘하고 못하고가 아니라 말을 할 때 얼마나 선으로 하고 얼마나 상대의 입장까지 헤아리며 또한 경우에 합당한 말과 그렇지 않은 말, 해도 되는 말과 그렇지 않은 말을 분별할 수 있는가 하는 지혜입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준비가 되었을 때 (물론 육적으로도 갖추어지면 더 좋겠고요) 하나님께서는 정확한 때에 맞추어 여러분을 들어 사용해 가실 수 있는 것이지요.
혹 어떤 사람은 ‘나는 준비가 다 된 것 같은데 왜 쓰임받지 못하는 것일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준비가 됐는지 안 됐는지는 오직 하나님께서만 판단하실 수 있습니다. 또한 준비는 다 되었다 해도 쓰임받아야 할 가장 정확한 시점을 아시는 분도 바로 하나님이시지요.

에스더서를 읽어가다 보면 모든 일에 ‘때’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알 수 있는 사건이 하나 나옵니다. 하만은 모르드개라는 유다인이 자신 앞에 꿇어 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해 앙심을 품고 모르드개의 동족인 유다인 전체를 진멸하려는 악한 궤계를 세우지요.
그런데 이러한 하만의 계획이 절정을 이루어 가고 있던 시점에 하나님께서는 아주 멋진 사건 하나를 예비해 두십니다. 에 6:1-2에 보면 “이 밤에 왕이 잠이 오지 아니하므로 명하여 역대 일기를 가져다가 자기 앞에서 읽히더니 그 속에 기록하기를 문 지킨 왕의 두 내시 빅다나와 데레스가 아하수에로 왕을 모살하려 하는 것을 모르드개가 고발하였다 하였는지라” 했지요.
여기에 나오는 암살 기도 사건은 에 2:19 이하에 기록되어 있는데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미리 안 모르드개가 이 사실을 왕후인 에스더에게 고하여 결국 왕을 구하게 된 일이었습니다.
이 일이 궁중 일기에 기록된 것인데 모르드개는 그 당시 그처럼 큰 공을 세웠음에도 아무런 상을 받지 못하고 지나갔지요. 그런데 이렇게 그냥 지나쳐 가는 듯했던 일이 훗날 왕이 잠이 오지 않아 읽게 된 역대 일기를 통해 왕에게 다시 인식되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모르드개는 뒤늦게나마 왕으로부터 큰 상과 존귀함을 얻게 되지요. 그리고 이 일을 시작으로 모르드개와 유다 민족을 멸절하려던 하만은 몰락의 길을 걷다가 결국 자신이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성도 여러분, 만약 모르드개가 예전에 공을 세웠을 때 그 당시에 상을 받고 넘어갔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이후로 이렇게 극적인 반전의 순간이 오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가장 적당한 시점, 가장 필요한 때를 아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그 때와 시에 맞추어 역사해 가시지요. 예전에 모르드개가 공을 세웠음에도 그냥 지나가게 하신 것도, 그 밤에 왕이 역대 일기를 보게 하신 것도, 왕의 마음을 주관하여 뒤늦게 모르드개에게 상을 내리게 하신 것도 모두가 하나님께서 때에 맞추어 역사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어떤 일에 당장 열매가 나지 않는다거나 자신이 생각한 때와는 너무나 차이가 있다 해도 거기에는 바로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깊은 뜻과 섭리가 있음을 알아야 하지요.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잠잠히 그 때를 기다리며 정확히 때에 맞추어 인도받아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이제 애굽의 왕 바로가 자신을 찾는다는 말을 들은 요셉은 과연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왕이 나를 왜 부르는가?’ 하여 불안하고 두려웠을까요? 또한 왕 앞에 나간 요셉에게 왕이 자신의 꿈을 해석해 달라는 말을 했을 때 요셉은 ‘아, 드디어 때가 왔구나’ 하며 조급함 가운데 마음이 분주했을까요?
요셉은 불안하거나 두렵지도 않았고 마음이 급하지도 않았습니다. 요셉은 이렇게 바로 앞에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왔으며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일임을 알았지요.
그래서 요셉은 바로 앞에 나가서도 16절에 “이는 (즉, 꿈을 해석하는 것이)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하며 담대히 말할 수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꿈을 해석할 수 있다는 높아진 마음에서가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기에 꿈의 해석 역시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실 것을 믿는 겸비한 마음이었기 때문이지요.
동시에 바로에게도 꿈의 해석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확실히 해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깨우쳐주셔야만 바로의 꿈을 해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며 하나님의 이름을 높였던 것이지요.
여러분도 주의 일을 함에 있어서 바로 이러한 마음과 행함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입술로는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능력을 주셔야 합니다.” 고백하지만 막상 일을 할 때는 자신이 앞서서 자기 힘과 능력으로 하려는 것을 보게 되지요.
또한 어떤 열매를 내었을 때도 입술로는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고백하지만 정작 그 속에는 자신이 인정받고 높임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는 것도 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아예 “내가 이렇게 성령의 음성을 밝히 들어서, 내가 이렇게 영안이 밝히 열려서, 내가 이렇게 하나님과 밝히 교통해서…” 이런 말들을 하며 자기를 앞세우지요. 물론 주 안에서의 자랑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령의 음성도 밝히 듣고, 영안도 열려서 밝히 보며, 하나님과 밝히 교통하는 것은 너무나 좋은 일입니다. 또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당연하고요.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신의 영광을 위해, 자신을 드러내고 높이기 위해 그렇게 말을 하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런 사람이 성령의 음성을 밝히 듣거나 영안이 밝히 열려서 보거나 하나님과 밝히 교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이처럼 자신의 영광을 구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거두시게 되지요. 그때부터는 자기 생각 가운데 말하고 듣고 보면서도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역사인 것처럼 거짓을 말하게 되는 것이고요.
그러나 오늘 본문의 요셉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했습니다. 요셉은 바로의 꿈이 하나님께서 주신 꿈이라면 하나님만이 푸실 수 있음을 알기에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하고 담대히 대답을 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에 바로가 요셉에게 자신이 꾼 두 가지 꿈을 이야기 하자 요셉은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바로에게 “바로의 꿈은 하나이라 하나님이 그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 하며 꿈을 해석해 나갑니다. 요셉은 어떤 생각을 동원한다거나 자신의 경험과 지혜를 동원하지 않았지요.
그러나 이처럼 꿈 이야기를 듣자마자 곧바로 해석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 성령의 역사는 바로 이런 것이지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이 역사하시니 생각을 동원하거나 머뭇거릴 필요 없이 성령의 감동함 가운데 술술 풀어지게 됩니다.
저도 늘 성령의 역사를 따라 말씀을 증거하고 상담하며 대화하기 때문에 어떤 영적인 대답을 할 때 생각을 동원한다거나 머뭇거릴 필요가 없지요. 육의 지식에 관한 것은 떠올리기 위해 잠시 기억을 더듬을 수는 있겠지만 이러한 육의 지식에 관한 것도 필요하면 성령께서 거의 대부분 즉시즉시 떠올려 주십니다. 영적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요.
요셉도 이처럼 자기 생각과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감동함 가운데 역사하여 깨우쳐주셨기에 바로의 꿈 이야기를 듣는 즉시 일사천리로 꿈을 해석해 내려갔던 것입니다. 이렇게 바로의 꿈을 시원스럽게 해석한 요셉에게 그 후 어떤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는지는 다음시간에 계속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신 영적인 것을 해석할 때는 결코 자기의 유익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나 사심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침이 없는 공평하고 공의로운 마음이 되어야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고자 하는 의미를 정확히 깨달을 수가 있는 것이지요.
사사로운 감정이나 개인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이 있을 때는 하나님의 뜻이 왜곡되어 질 수 있고 편벽되게 해석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더 깊은 차원까지 깨달으려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하지요.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아느냐에 따라 영적인 것을 깨닫는 깊이와 차원이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똑같이 사랑에 대해 깨우쳐 주시려 해도 ‘내가 얼마나 하나님의 그 깊은 사랑을 알고 체험해 봤으며 내 마음에 영으로 사랑을 일구었느냐’에 따라 하나님께서 깨우쳐주시려는 사랑에 대해 깨닫고 느끼는 정도가 다르지요. 결국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선하며 얼마나 영으로 일구어졌느냐에 따라 영적인 것을 분별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영적인 것을 깨닫는 능력도 더해지는 것입니다. 온전히 주님의 마음이 되었을 때만이 모든 일을 주님의 마음과 뜻에 따라 정확히 분별하고 해석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떤 것을 보고 들을 때 늘 더 선으로 보고 선으로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노력해 나갈 때 점점 더 선으로 보고 들을 수가 있게 되지요. 사실 여러분 편에서 아무리 선으로 보고 듣는다 해도 그것이 주님의 선과 비교한다면 아직 많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선으로 보고 들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것을 악으로 보고 들으므로 판단 정죄하는 죄를 범하고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상황에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최고의 선일까?’를 늘 생각하셔서 그렇게 행하기 위해 노력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물론 겉으로 보여지는 행함만이 아니라 마음 역시 선으로 이루었을 때 그 선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행함이야말로 진실한 선의 행함이 되는 것이고요. 마 12:35에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하신 말씀과 같이 먼저는 선으로 보고 들으려고 노력하며 행할 때 이를 통해 점차 여러분의 마음에도 선이 쌓이게 되는 것이며, 결국은 이렇게 마음에 쌓인 선으로부터 다시금 선한 행함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원리를 잘 깨달아서 날마다 여러분의 삶 속에 선을 쌓아가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마음에 가득한 선으로부터 세상을 감동시키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며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선한 말과 행실만이 넘쳐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6-04-03 오전 10:00:26 Posted
2018-12-04 오후 1:51:27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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