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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창세기 강해 (2000년~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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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세기 강해(208)
설교자 당회장 이재록 목사 설교본문 창41:26-36 등록일자 2006.04.07
“일곱 좋은 암소는 일곱 해요 일곱 좋은 이삭도 일곱 해니 그 꿈은 하나이라 그 후에 올라온 파리하고 흉악한 일곱 소는 칠년이요 동풍에 말라 속이 빈 일곱 이삭도 일곱 해 흉년이니 내가 바로에게 고하기를 하나님이 그 하실 일로 바로에게 보이신다 함이 이것이라
[29절부터 35절까지 중략]
이와 같이 그 곡물을 이 땅에 저장하여 애굽 땅에 임할 일곱 해 흉년을 예비하시면 땅이 이 흉년을 인하여 멸망치 아니하리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때로 세상 사람들 중에는 “나는 되는 일이 없다”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열심히 노력하는데도 운이 따라 주지 않고 남들이 하는 방법대로 다 따라 해봐도 형통함을 받지 못하니 낙심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세상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면 요셉이 꼭 그런 경우였습니다. 육으로 볼 때는 상황이 점점 꼬여만 가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지요.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자란 아들이 하루아침에 먼 나라에 종으로 팔려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언어도 풍습도 다른 이방 나라에 비록 종으로 팔려왔음에도 선하고 성실하게 행하여 주인에게 인정을 받아 마침내 온 집안의 살림을 관장하는 가정 총무에까지 이르게 되었지요.
그런데 이처럼 처지가 좀 나아지는가 했더니 이번에는 갑자기 수치스러운 누명까지 쓰고 왕의 죄수들이 갇히는 깊은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육으로는 너무나 억울한 상황이었지만 자신의 누명을 풀어줄 사람도 없고, 언제쯤이나 감옥에서 나올 수 있을지 기약이 있는 것도 아니지요.
그렇게 막막한 상황에서 어느 날 요셉이 왕의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주게 되는 사건을 계기로 한줄기 희망의 빛이 보이게 됩니다. 자신의 억울함을 풀고 감옥에서 나갈 수도 있다는 희망이 생긴 것이지요.
그러니 요셉의 입장에서는 왕의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하여 왕의 곁으로 돌아가고 난 후 그로부터 기별이 오기를 얼마나 간절히 기다렸겠습니까? ‘오늘에나 연락이 올까, 내일은 오겠지’ 이러면서 기다려 보았지만, 하루, 이틀, 몇 달이 지나고 일 년이 넘어도 아무런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지요.
여러분이 한번 요셉의 입장이 되어서 그 상황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도 혹시 이런 경우가 있지는 않았나요? 큰 시련이 와서 그것을 이겨내는가 했는데 다시금 큰 시련이 밀려오고 ‘언제나 하나님의 축복이 임할까?’ 기다려 보지만 세월이 지나도 눈에 보여지는 것은 없이 오히려 현실은 더 막막해 지기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면 세상사람 중에도 운이 좋아 형통한 것 같고 악인 중에도 성공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지요. 그럴 때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데, 나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최선을 다해서 성실하고 정직하게 노력한다고 했는데 왜 나는 이렇게 불통해야 하는가?’ 혹시 이런 생각을 하지는 않았습니까?
또는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을 향해 “하나님을 믿으면 축복받는다고 하더니 당신은 왜 그렇지 못하냐?” 혹시 이런 말을 할까봐 초조하고 부끄럽지는 않았나요?
그러나 이런 것이 다 육신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참 믿음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과는 다르다는 사실도 알아야 하지요.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사람마다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것을 주시며 그러기 위해 각자에게 맞는 연단을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사람의 생각에는 이제쯤은 축복의 때가 되었을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는 “아직 때가 아니라” 하시기도 하고, 사람이 보기에는 고난의 길로만 가는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는 “그 길이 큰 축복을 받을 수 있는 형통한 길이라” 하시는 경우가 있는 것이지요.
요셉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순간순간, 자신의 기대와 어긋나는 상황을 만나도 결코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절망적으로 보이는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을 잃지 않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도 않았지요.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관 하에 있음을 믿었기에 ‘사람의 방법을 동원해볼까?’ 하는 생각도 없었습니다. 다만 그런 상황을 만날 때마다 더욱 자신의 마음을 점검하고 또 점검하여 오직 선과 성실을 좇고자 했지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연단 중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모든 말을 들으시고 매순간 어떤 생각을 품는지, 어떤 모습으로 행하는지를 지켜보십니다. 그리고 일곱 영을 통해 공의의 저울에 달아서 여러분에게 축복 주실 때를 정하시지요. (일곱 영의 측정 분야: 믿음, 기쁨, 기도, 감사, 계명지킴, 충성, 사랑)
이것을 통과하는 방법은 제가 여러분에게 늘 말씀드려왔습니다. 설령 사망의 골짜기에 놓일지라도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므로 감사와 기쁨의 고백을 하시기 바랍니다. 막막하고 어려운 현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오직 선과 진리만 좇아 행하시기 바랍니다.
요셉이 바로 이처럼 행했기에 그는 마침내 응답의 때를 맞게 된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바로 여러분에게도 넘치는 축복을 주시고자 여러분의 그릇이 준비될 때까지 여러분을 바라보며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롬 8:18에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하신 말씀 대로 어떠한 연단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크신 축복을 바라보면서 승리해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드디어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어 요셉은 마침내 바로 앞에 서게 됩니다. 바로의 꿈을 해석하기 위해서였지요. 그런데 바로 앞에 선 요셉은 너무나 담대했습니다. 애굽의 왕이라고 하는 그 대단한 권세자 앞이었지만 요셉은 자신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믿었기에 자신을 살리고 죽일 권세를 가진 바로 앞에서도 담대할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혹여라도 자신이 바로의 꿈을 잘못 해석하거나 바로의 비위라도 상하게 하는 일이 생기면 당장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요셉은 그런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이지요. 지극히 겸비하여 자신을 낮추며 하나님께만 모든 영광을 돌리지만 동시에 세상의 그 어떤 권세 앞에서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교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며, 또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볼 때도 책망할 것이 없으므로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지요. 결국 마음에서 죄를 버리고 성결되어야 하나님의 뜻도 정확히 분별하고 깨달으며 영적인 담대함도 오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성령의 음성을 들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때 온전히 영으로 들어오기 전에는 자신의 생각이 가미되지 않도록 늘 주의를 해야 하지요. 사실 성령의 음성이 들려올 때는 '이것일까? 저것일까?' 고민하게 되지 않습니다. 너무나 명확하고 뚜렷하지요.
물론 어떤 사람은 자기 육신의 생각 가운데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며 자신 있게 주장하는 사람도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열매를 보면 그것이 성령의 음성이었는지 아니면 육신의 생각 가운데 자기주장이었는지를 알 수 있지요.
성령의 음성과 주관을 받아서 한 일은 때로는 비록 시간이 좀 걸린다 해도 반드시 좋은 열매를 거두게 되며 화평함과 거룩함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음성을 온전히 듣기까지는 늘 열매를 통해 점검해서 자신의 생각을 마치 성령의 음성이나 주관처럼 주장하고 내세우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요셉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감 가운데 바로의 꿈을 정확히 해석할 수가 있었지요. 곧 보기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나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은 둘 다 7년 동안의 풍성한 수확 즉 7년의 풍년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흉악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와 세약한 일곱 이삭은 7년의 흉년을 의미하지요.
결국 바로의 꿈은 애굽에 7년 간 풍년이 들었다가, 연이어 7년 간 흉년이 들게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더욱이 파리하고 흉악한 소가 살진 소를 잡아먹고 세약한 이삭이 좋은 이삭을 삼킨 것은 후에 든 흉년이 너무 심하므로 이전 풍년을 이 땅에서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는 의미였지요. 그리고 이처럼 의미가 같은 두 가지 꿈을 연속으로 꾸었다는 것은 이 일을 하나님께서 이미 정하셨으며 속히 이뤄질 것이라는 의미였습니다.
당시에는 농사나 목축이 주된 산업인데 아무리 부강한 나라라고 해도 미리 어떠한 대비도 없이 있다가 연달아 7년씩이나 큰 흉년을 맞게 되면 거의 나라가 망할 지경이 될 수 있지요. 그러니 이 꿈대로 된다면 이는 애굽에 참으로 큰 재앙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 바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런데 요셉은 바로에게 단순히 꿈의 의미만 해석해준 것이 아니라 다가올 재앙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까지도 상세히 알려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실질적인 대처 방법을, 그것도 아주 상세히 알려 주었지요.
먼저 지혜로운 한 사람을 책임자로 세우고, 나라에 여러 관리를 두어서 일곱 해 풍년 동안 애굽 땅의 5분의 1에서 수확하는 모든 곡물을 거두어 저장해 두라는 것입니다. 물론 앞으로 7년 풍년과 7년 흉년이 연이어 온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풍년에 거둔 양식을 저장해 두었다가 다가올 흉년을 대비해야 되겠다.'고 하는 생각은 누구나 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지금 요셉은 그냥 막연히 풍년 때에 거둔 곡식을 저장해서 흉년을 대비하라는 식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꿈을 해석하고 나서 곧바로 구체적인 수치까지 언급하면서 해결책을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지요. 요셉이 미리 바로의 꿈을 알아서 생각하고 대비하여 나온 것도 아닌데 이처럼 요셉은 그 자리에서 즉시로 시원한 해결책까지 내놓았다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만약 이 상황에서 바로 왕이 나라의 박사나 관리들을 시켜서 대비책을 내놓으라고 했다면 그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먼저 나라의 평균 수확량이 얼마나 되는지, 한 해 필요한 양식은 얼마나 되는지 이러한 자료부터 조사해 보아야 합니다. 또 큰 풍년이 든다면 예상되는 수확량이 얼마나 될지, 반면에 큰 흉년이 든다면 그때 예상되는 수확량은 얼마일지, 이런 것들도 다 예측을 해보아야 하지요. 그래서 흉년에 대비하기 위해 드는 곡물의 양과 집에서 키우는 육축을 위한 먹이의 양 이밖에도 다음 해에 농사를 짓기 위해 남겨 두어야 하는 종자의 양 등 일일이 계산해 넣어야 할 것들이 하나 둘이 아니지요.
설령 이 많은 자료들을 가지고 연구를 한다 해도 쉽게 결론이 나는 것이 아니며, 이렇게 다 계산해서 대비책을 세워놓았다 해도 갑자기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생겨서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요셉은 전혀 주저함이나 생각을 동원하는 것도 없이 5분의 1이라는 수치를 제시했던 것이지요. 이는 과연 무엇을 말해 주는 것입니까? 요셉이 그냥 영감 가운데 받아서 이런 말을 한 것일까요? 물론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지혜를 주시고 그의 마음을 주관해 주신 것이지만 요셉이 이러한 해결책을 내놓기 위해서는 그가 이미 얼마나 나라 살림에 대해 밝히 꿰뚫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줍니다.
요셉은 이미 보디발의 집에서 오랫동안 큰 규모의 살림살이를 책임져 왔기에 실무를 감당할 능력도 있었고, 여기다가 감옥에 있으면서 애굽의 나라 살림과 정치에 대해 듣고 배운 내용들이 더해지면서 애굽의 경제에 대해서도 밝히 통달하고 있었지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요셉을 보디발의 집과 감옥에서 연단하신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영적인 그릇준비는 물론이고, 육적으로도 충분히 능력을 갖춘 상태에서 쓰임받을 수 있도록 하신 것이지요.
예를 들어 여러분이 어떤 사업을 할 때 그 분야에 대해 전혀 지식도 없고 아무런 능력도 없는 상태에서 무조건 "하나님, 형통케 인도해 주세요." 기도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한 지식도 익히고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하나님께서 어떤 길을 제시해 주셨을 때 그대로 인도받아 나갈 수가 있지요.
이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일꾼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나갈 길과 방향 그리고 방법론을 제시해 주셔도, 만약 여러분이 준비되어 있지 못하면 그것을 깨달을 수도 없고 원하시는 대로 행할 수도 없지요.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육적인 그릇 준비를 해 놓아야 하나님께서 나갈 방향을 제시 해주셨을 때 지혜가 생기고 명철의 길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요셉은 육적인 그릇준비가 된 상태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밝히 영감을 받게 되니 이처럼 구체적인 방법론이 즉시로 나올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니 요셉으로부터 이러한 방법을 제시받은 바로의 마음은 너무나 시원함을 얻게 됩니다.
잠 17:22에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하는 말씀처럼 사람의 마음에 큰 고민거리가 있으면 잠깐의 평안도 누리기가 어렵지요. 그 고민이 마음에서 떠나지를 않으니 일을 하려고 해도 집중이 되지 않고, 먹어도 맛을 잘 알지 못하며, 누워도 편안한 잠을 잘 수도 없고요.
더구나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에게 있어서 나라에 큰 근심거리가 생기게 되면 일반 백성이나 신하와는 그 고뇌의 무게가 다릅니다. 그래서 머리된 사람일수록 주변에 지혜 있고 명철한 조력자들을 찾게 되지요.
본문에 나오는 바로 역시 많은 박수와 술객들을 가까이에 두고 그들로부터 도움을 얻고자 했던 것을 봅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 누구도 꿈을 해석하지 못하니 바로는 더 답답하고 번민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요셉이라는 인물이 아무도 풀지 못했던 꿈을 풀어 주었을 뿐 아니라 해결책까지도 시원하게 제시해 준 것입니다. 육적으로도 겸비함과 성실함이 느껴지면서 영감과 함께 지혜와 명철까지 갖춘 요셉의 모습에 바로는 단번에 반해 버렸고 이러한 요셉에게 큰 영광을 안겨주게 되지요.
이후로 계속 설명하겠지만 바로는 흉년을 대비하는 모든 일에 관해 요셉에게 전권(全權)을 위임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신의 모든 권세를 맡겨 그를 왕 다음가는 높은 지위에 올려줍니다.
이방에서 팔려온 종이요 죄수였던 요셉에게 일순간에 인생의 대반전이 이루어진 것이지요. 이때가 바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요셉의 때였고, 그 숱한 연단의 날을 통과한 요셉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의 열매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영적인 지혜나 가르침을 들었을 때 그것을 듣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듣고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요셉이 바로의 꿈을 해석해 줌으로써 결국 애굽의 머리로 세워지고 이를 통해 훗날 그의 가족들까지도 큰 은혜를 입게 되지만, 애굽의 바로 역시 이 일을 통해 너무나 큰 축복을 받은 사람이었지요. 요셉이라는 인물이 없었다면 자칫 나라 전체가 기울어질 수밖에 없는 엄청난 재앙을 맞을 수도 있었지만 바로는 요셉으로 인해 그 재앙을 피했고 더욱이 엄청난 재물과 토지까지도 얻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바로가 요셉의 말을 들었을 때 “아, 그 꿈이 그런 의미였구나, 너의 지혜가 참으로 뛰어나구나!” 하며 꿈을 시원하게 풀어 받은 것으로 만족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또한 요셉이 제시해준 방법을 따르지 않고 요셉을 총리로 세워 흉년을 대비하게 하지 않았다면 요셉의 꿈 풀이가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로가 재앙에서 벗어나 오히려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결과적으로 그가 요셉의 말을 믿고 그대로 행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지혜로운 말을 듣기만 하고 그 말에 따라 행해야 할 바를 하지 않으므로 결국 재앙을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요.
예를 들어 다니엘 5장에 보면 갈대아 왕 벨사살의 사례가 나옵니다. 어느 날 벨사살 왕이 큰 잔치를 벌였는데 그 잔치에서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성전에서 약탈해 온 그릇들 곧 하나님의 성물에 음식을 담아 먹고 마시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이 잔치가 한창 무르익은 도중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지요.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벽에 어떤 글자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허공에 손가락이 나타난 것도 너무나 놀라운데 그 손가락이 글씨를 쓰고, 더욱이 그 글자의 의미를 아무도 읽거나 해석할 수가 없으니 왕으로서는 심히 두려운 일이었지요. 이에 수많은 박사들을 불러서 물어보았지만 그 글을 읽을 수도 없고 해석도 할 수 없으니 왕의 근심은 점점 더 커지기만 했습니다.
이 때 태후가 다니엘을 추천하여 다니엘이 왕 앞에 나와 그 글자를 읽고 해석해 주게 되지요. 단 5:25-28에 “기록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그 뜻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데겔은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었다 함이요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니이다” 했던 것입니다. 왕에게 다가올 재앙을 의미하고 있었지요. 이 말을 들은 왕은 너무나 명쾌하고 지혜로운 답변에 감탄하여 다니엘에게 큰 상을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후에 벨사살 왕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날 밤 대적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벨사살 왕에게 있어서 정말 중요했던 것은 다니엘로부터 명쾌한 풀이를 듣는 자체가 아니라, 그 풀이를 듣고 나서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들었어야 하는 것인데 왕은 그러지를 않았던 것이지요.
자신에게 재앙이 닥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다니엘로부터 조언을 받아 그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철저히 회개하므로 살 길을 얻었어야 했으나 벨사살 왕은 다니엘의 지혜를 듣고 그저 시원하게 여기며 감탄했을 뿐 정작 자신이 해야 할 일은 하지 않았기에 풀이 받은 내용 그대로 재앙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그가 다니엘을 통해 해석을 들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고 소용이 있었겠습니까? 만약 왕이 다니엘의 말을 믿지 않았다면 상을 줄 필요도 없고, 그저 무시해 버리면 되지요. 이보다 더 악한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 예언한 다니엘에게, 벌을 주려고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벨사살 왕은 무시하거나 화를 낸 것도 아니고 그의 해석을 기쁘게 여겨 상까지 주었으면서도 정작 해결책을 찾아 행하려 하지 않았으니 너무나 이해되지 않는 일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이해되지 않는 경우들이 오늘날도 늘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는 ‘아 옳다. 그렇구나!’ 하며 깨닫고 은혜를 받지만 정작 자신의 삶 속에서는 깨닫고 은혜 받은 것을 행하지 않는 것이지요. 또한 성령의 음성과 주관을 받았을 때, ‘아 그렇게 하면 좋겠다’ 하면서도 막상 그것을 행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에 대해 마 7:26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하셨지요. 또 약 1:22에는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했고, 롬 2:13에는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했습니다. 곧 아무리 좋은 말씀을 듣고 지혜를 깨달아도 이를 마음으로 믿고 행할 때라야 자신에게 유익도 되는 것이고, 결국 의로워질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렘 29:11에 보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연단을 허락하시는 것도, 혹은 어떤 시험을 미리 알려 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고통을 주거나 두렵게 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평안과 소망과 축복을 주시려는 것이지요.
이러한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면 여러분은 어떤 상황에서도 선하신 하나님의 뜻을 바라볼 것입니다. 어떤 마음 상할 일이 있거나, 좋지 않은 일들이 생길 때 물론 ‘이런 일들이 왜 있는 것일까?’ 궁구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겠지만,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힘들어 하거나 낙심하고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겸비한 마음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게 되지요. 하나님의 정하신 때를 기다리며 변함없는 믿음으로 진리를 행해 나갑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연단 중에도 함께하시며 결국 축복된 길로 인도해 주시지요. 이처럼 좋으신 하나님과 늘 동행하시므로 범사에 형통함을 받으며 아버지 하나님의 뜻과 섭리 가운데 넘치는 축복을 받아나가는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6-04-10 오전 9:59:30 Posted
2018-12-04 오후 1:51:27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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