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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창세기 강해 (2000년~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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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세기 강해(209)
설교자 당회장 이재록 목사 설교본문 창41:37-46 등록일자 2006.04.21
“바로와 그 모든 신하가 이 일을 좋게 여긴지라 바로가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있는 자가 없도다
[40절에서 45절까지 중략]
요셉이 애굽 왕 바로 앞에 설 때에 삼십 세라 그가 바로 앞을 떠나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은 드디어 요셉이 애굽의 총리에 오르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시와 때에 맞추어 정확히 이루어지는 순간이며, 요셉에게 있어서는 지난 13년간의 연단이 마침내 값진 열매를 맺는 순간이지요.
요셉은 애굽에 노예로 팔려오는 순간부터 이제 애굽의 총리에 오르는 순간까지 연단의 시간 속에서 그냥 눌러 참기만 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늘 정도를 걸었으며 성실과 정직으로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했지요. 연단 중에라도 기쁨과 감사를 잃지 않았고 입술로 불평, 불만을 내지 않았습니다. 단지 입술로만 불평, 불만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부터 그런 것이 전혀 없었지요.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꿈에 대해 의심하거나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고 끝까지 변함없는 마음으로 믿었습니다. 어떤 일을 이룸에 있어서도 자기 생각이나 자기적인 방법을 동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여 인도받아 나갔던 것이고요.
그러니 비록 연단을 받는 중이라도 요셉에게서 어떤 비진리나 악의 모습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도 이러한 요셉의 모습과 같이 연단 중에라도 감사하며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발견하여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뜻을 마음에 명심하여 행함으로 같은 연단을 반복하는 우(愚)를 범치 않는다면, 얼마든지 짧은 시간 안에 영으로 들어오고 축복도 받을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은 요셉에 대한 말씀을 통해 이러한 영적인 축복의 비결을 마음으로 깨닫고 행하셔서 요셉이 마침내 애굽의 총리에 오르는 이와 같은 축복의 말씀이 증거되고 있는 이 시점에 많은 분들이 응답과 축복의 열매를 풍성히 거두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요셉은 애굽의 바로가 꾼 꿈을 정확하게 해석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문제해결의 길까지도 명철하게 제시해 줍니다. 앞으로 다가올 7년의 풍년을 어떻게 보내야 그 후에 다가올 7년의 흉년에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는지, 그 방법까지도 알려 주었던 것이지요. 그것도 대충 알려준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수치까지 언급하면서 손에 만진 듯이 쥐어줍니다.
그러니 이러한 요셉을 볼 때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꿈으로 인해 너무나 번민하던 것만 해결해 주어도 참으로 기쁘고 감사해야할 상황인데 거기다가 자칫 나라의 흥망까지 영향을 줄 수 있는 커다란 재앙에 대비할 방법까지 알려 주었으니 그 마음이 너무나 흡족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바로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 37절에 보면 “바로와 그 모든 신하가 이 일을 좋게 여긴지라” 했지요. 바로는 물론이고 그의 모든 신하들까지도 요셉이 제시한 대비책을 좋게 여긴 것입니다. 이는 다시 말해 바로와 모든 신하들이 요셉을 신뢰하고 있다는 말이며, 요셉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인정하고 있다는 뜻이 되지요. 또한 바로와 모든 신하들의 마음이 이 순간 하나가 되어있음을 말해줍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지요. ‘왜 하나님께서 바로를 택하셨는지?’ ‘왜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 애굽을 구원할 길을 제시해 주셨는지?’ 그 이유에 대한 답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말씀드렸듯이 하나님께서는 공의 가운데 역사하십니다.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시기 위해 다른 모든 상황은 무시하고 무조건 요셉을 총리로 세우시는 것이 아니지요. 주변의 모든 상황과 여건,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마음과 중심 등 이러한 모든 것까지도 공의의 법칙 안에서 정확하게 맞아 들어가도록 역사해 가시는 것입니다.
보디발과 감옥의 전옥, 왕의 술 맡은 관원장, 그리고 애굽의 바로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비록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기 위한 과정에서 도구로 쓰인 것이지만 그들도 각자의 공의에 맞게 쓰임받았지요. 악한 사람을 억지로 주관하여 선한 도구로 쓰이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 있는 선한 마음을 보시고 그것을 주관하여 선한 도구로 쓰셨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셉이 이렇게 애굽의 총리에 올라도 원수 마귀는 전혀 송사할 수가 없지요. 요셉에게서는 물론이고 그 주변의 누구에게서도 공의에 어긋나는 일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공의적인 측면에서 볼 때 바로와 그의 신하들의 마음과 태도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지요.
지금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요셉과 그의 말을 좋게 여겼다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 하나로 모아졌을 뿐만 아니라, 그만큼 선한 마음을 가졌다는 의미입니다. 한낱 히브리 노예의 말이라 하여 그를 무시하거나 업신여기지 않았지요. 바로가 요셉을 신임하여 그의 말대로 따르려 하는 일에 대해서도 신하들은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신하들이 나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국가적인 유익을 생각하기보다 자신들의 안위와 유익을 먼저 생각하여 요셉의 말에 시비를 걸거나 그를 못마땅하게 여길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요.
이어지는 본문에 잘 나와 있듯이 바로는 그의 신하들에게 요셉에 대해 이르기를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하며 칭찬합니다. 그리고 요셉에게도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하며 요셉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요셉의 지혜와 명철을 높이 사지요.
분위기가 이쯤 되면 신하들 편에서는 ‘왕이 어찌하려고 저러시나’ 하며 내심 걱정과 염려가 들 수도 있습니다. 자기 나라의 많은 신하들을 제쳐두고 히브리 노예 출신인 요셉의 말에 귀 기울이며 그를 신뢰하고 있는 바로를 보면서 만약 신하들이 악한 마음을 가졌다면 얼마든지 요셉을 시기, 질투하며 서운함을 품을 수가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바로는 마침내 요셉에게 40절에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 내 백성이 다 네 명을 복종하리니 나는 너보다 높음이 보좌뿐이니라” 합니다. 그러면서 41-44절에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로 애굽 온 땅을 총리하게 하노라 하고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목에 걸고 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그를 태우매 무리가 그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 하더라 바로가 그로 애굽 전국을 총리하게 하였더라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나는 바로라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 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 말씀하고 있지요.
육으로 생각하면 바로의 신하들 편에서는 너무나 황당한 일이 순식간에 일어난 것입니다. 이제 자신들은 모두가 노예 출신의 히브리 사람 요셉 앞에 머리를 숙여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지요. 신하들 중에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면 이러한 상황에 대해 불평과 불만이 나올 수 있습니다.
또는 요셉이 제시한 해결책은 따르겠지만 자신들의 지혜와 능력으로도 이 사태를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고 하며, 어찌하든 요셉을 밀어내고자 궤계를 쓰려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요. 애굽의 정치, 경제, 사회 등 전반적인 상황을 요셉보다야 당연히 신하인 자신들이 훨씬 더 잘 안다고 생각하여 왕의 결정을 돌이키려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요.
그런데 바로의 신하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또한 바로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아도 사실 이제 처음 만난 요셉에게 애굽 전국을 치리하는 총리를 맡긴다는 것은 한 마디로 모험이 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이처럼 육으로 보면 이러한 여러 가지 장애 요소들이 있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는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지요. 이는 바로 자신은 물론이고 그의 신하들 역시 선한 마음이 아니라면 결코 쉽게 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한 가지 비유를 들어 만약 오늘날 어떤 당에서 그 당의 최고 머리된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외부 인사를 영입하여 그를 단번에 대통령 후보로 세우려 한다면 과연 기존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아무 소리 없이 그 결정에 따르겠는지요? 자신들의 기득권을 다 포기하고 새로 영입한 외부 인사를 자신들의 머리로 세워야 하는데 말입니다. 이런 상황을 한번 생각해 본다면 당시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그래도 얼마나 선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 느껴볼 수가 있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는 것과는 상관없이 어차피 애굽에는 공의에 따라 7년의 풍년과 7년의 흉년이 오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 만약 요셉이 없었다면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일단 7년의 풍년 동안은 바로를 비롯하여 모든 신하와 백성들이 기뻐하며 풍년의 기쁨을 누렸겠지요. 그러나 그 누구도 그 뒤에 다가올 엄청난 흉년의 재앙은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니 흉년에 대한 대비도 전혀 못했을 것이고요.
따라서 요셉이라는 인물이 애굽에 없었다면 애굽은 나라 전체가 흉년의 재앙으로 인해 큰 어려움과 고통 가운데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애굽과 백성들에게 있어서 요셉은 나라 전체를 구한 은인과 같은 존재이지요. 특히 바로에게 있어서 요셉은 자신을 구해준 은인이었고, 더욱이 7년 풍년과 7년 흉년을 통해 자신의 재산까지 엄청나게 불려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와 그의 나라가 이러한 은혜를 입을 수 있었던 것도 공의에 따른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바로와 그의 신하들에게 그래도 선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공의에 따라 그와 같은 은혜가 임할 수 있었지요. 만약 바로와 신하들에게 그러한 선의 마음마저도 없었다면, 그래서 요셉을 인정하지도 않았고 요셉이 제시한 방법을 따르지도 않았다면, 애굽은 결국 큰 재앙 가운데 빠졌을 것입니다.
또한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하나되지 못했다 해도 그들은 큰 어려움에 빠졌을 것이고요. 바로가 선한 마음에 주관을 받았고 모든 신하들도 이러한 바로의 뜻에 따라주었기에 애굽 나라 전체와 백성들이 큰 은혜를 입을 수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머리된 사람과 그와 함께하는 사람들이 한 마음이 된다는 것이 이처럼 중요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너무나 사랑하시고 보장하는 모세 선지자가 지도자로 있었지만 백성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않았고 한 마음이 되지 않으니 결국 그들의 세대에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반면에 여호수아의 인도를 받는 출애굽 2세들은 여호수아의 말 즉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 주신 말씀에 오직 순종하여 한 마음이 되었기에 능히 가나안 땅을 정복해 들어갔던 것을 봅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감에 있어서 동일하게 적용되는 영적인 법칙입니다. 아무리 큰일이라 해도 함께한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된다면 능히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가 있지요. 하나 된 마음에는 사단이 역사할 수가 없기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만 나간다면 능히 하나님의 일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개개인적으로는 아무리 뛰어난 일꾼이 많고 이루어야 할 일은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모두의 마음이 하나되지 못하면 거기에는 사단이 역사할 틈을 주기 때문에 일이 어그러질 수가 있지요.
그런데 바로와 신하들은 선한 마음으로 하나를 이루었기에 하나님의 사람 요셉을 통해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이 공의의 법칙에도 맞았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고 그의 신하들 역시 요셉을 시기, 질투하는 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이러한 그들의 마음까지 억지로 주관하셔서 요셉을 통해 은혜를 입도록 역사하실 수는 없었다는 말이지요.
누차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께서 영의 분리를 통해 역사하시되 선한 사람은 선한 그릇대로 악한 사람은 악한 그릇대로 쓰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해서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의 차원에 이르렀다는 의미는 아니지요. 다만 그들이 비록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이었음에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사람을 인정하며 은혜와 도리를 아는 마음을 가진 것이 그들에게 적용되는 공의에 비추어 볼 때는 그나마 선으로 인정받을 수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은혜나 축복을 주시기 위해 각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선의 기준은 다 다르지요. 믿음의 1단계에 있는 사람은 그 수준에 맞는 선만 이루면 응답을 받을 수 있지만, 믿음의 3단계에 있는 사람이 믿음의 1,2단계에서나 가질만한 선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으로는 응답받을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다른 사람을 보면서 ‘저 사람은 나보다 선하지 않은 것 같은데 저렇게 응답이 척척오네’ 하며 의아해하거나 불평해서는 안 되지요. 그렇게 의아해하고 불평하는 것 자체도 이미 선이 아닐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적용하시는 공의의 기준 즉 선과 사랑과 믿음의 기준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비록 응답받을 만한 수준의 선과 사랑과 믿음을 가졌다 해도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주관하셨을 때 순종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을 이루실 때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예를 들어 영적으로 비슷한 수준의 두 사람이라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거나 주관하셨을 때 곧바로 순종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순종을 잘 안 하는 사람도 있지요. 이때 순종을 잘 안 하는 사람은 나름대로는 이것저것 주변도 살피고 이런저런 상황도 생각하느라 그랬다고 합니다. 물론 모든 사람과의 화평함도 생각해야 하고 상대의 입장도 배려하려는 마음은 좋지요. 하지만 그렇다하여 정말 해야 할 일에 순종을 못했다면 이 또한 결코 잘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라면 하나님께서는 화평을 깨지 않으면서도 일을 이룰 수 있는 지혜로운 선의 방법을 깨우쳐 주시지요.
물론 그러는 과정 중에는 시행착오도 나올 수 있습니다. 때로는 다른 의견과 부딪히는 소리가 날 수도 있지요. 그러나 만약 아직 일꾼으로 성장하기도 전에 ‘왜 일을 하면서 그렇게 소리가 나느냐’ ‘왜 그렇게 화평을 깨뜨리느냐’ 이렇게 잘못된 것만 지적하면서 그가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뜨거운 열정까지도 다 꺾어버린다면 어떻게 일꾼이 성장하겠습니까?
그렇다하여 이 말을 혹여 ‘비록 조금의 소리는 나더라도 어떻게든 열매만 내면 되는구나’ 하고 잘못 오해해서 들으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그 사람이 어떤 중심으로 일하느냐에 따라 당장은 좀 소리가 나더라도 기회를 주시고 또 주시며 더 영으로 변화된 일꾼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 편에서 어떤 일을 위해 사람을 쓰실 때는 누가 더 순종하려는 마음이 있는가를 보시고 더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을 주관하여 일을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 기준에 맞추어 ‘이 사람이 좋겠다’ 하거나 ‘저 사람은 안 되겠다’ 하게 되지만, 외모를 보고 사람을 썼다가 나중에 후회하게 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는 중심을 보시므로 누가 하나님의 주관하심에 순종할지를 아시지요.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바로가 요셉의 말을 들었을 때 그의 말을 신뢰하고 순종할 것을 아셨기에 그를 택하여 도구로 쓰셨던 것입니다. 만약 그 당시 애굽의 바로가 출애굽 당시에 있었던 바로와 같은 마음을 가졌다면 결코 그를 통해서는 이러한 일들이 가능하지는 않았겠지요.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심에 있어서 지금 애굽의 바로가 누구인가까지도 고려하여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도록 주관하시고 역사해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바로 ‘때’와 ‘시’라는 것이 필요하지요.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심에 있어서 아무 때, 아무 시에나 억지로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환경과 조건이 어느 때, 어느 시에 가장 무르익어 알맞게 될지를 아시기 때문에 거기에 맞추어서 정확히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있어서 그때를 바로 그의 나이 ‘삼십 세’에 맞추셨던 것이고요.
그런데 오늘 본문 45절에 보면 “그가 (즉 바로가) 요셉의 이름을 사브낫바네아라 하고 또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그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니라 요셉이 나가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라” 했습니다. [온: 나일 삼각주 남단에 위치한 성의 이름 당시 태양신을 숭배하던 애굽의 중심지로 알려진 곳]
바로는 지금 요셉을 애굽 전국을 다스리는 총리로 세웠을 뿐만 아니라, 그 나라에서 최고 고위층이라 할 수 있는 제사장의 딸을 아내로 맞게 하였지요. 이는 요셉을 영, 육간에 확실히 보장해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제사장의 딸을 아내로 맞아 제사장의 사위까지 되었으니 이제 애굽 땅에서는 그 누구도 요셉을 얕보거나 무시할 수 없는 확실한 권세와 힘을 가지게 되었지요.
여기서 바로의 지혜를 엿볼 수 있습니다. 바로가 요셉을 믿고 신뢰함에 있어서 결코 형식적이거나 말로만 그런 것이 아님을 분명히 나타내 보여 주고 있지요. 바로는 요셉이 애굽을 치리해 나감에 있어서 막강한 힘과 권세를 가지고 마음껏 뜻을 펼칠 수 있도록 최대한의 배려를 해주었던 것입니다.
바로가 만약 말로는 요셉을 신뢰한다 하고 그를 애굽 전국의 총리로 세웠다 해도 이처럼 확실한 지지를 보여 주지 않았다면 요셉은 일을 함에 있어서 여러 가지 도전과 어려움에 부딪힐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요셉은 이처럼 바로로부터 굳은 신뢰와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어떠한 주저함이나 망설임 없이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마음껏 펼칠 수 있었고 결국 애굽과 바로에게도 은혜를 끼칠 수 있었습니다.
저도 지금까지 일꾼들에게 일을 맡겨옴에 있어서 그냥 말로만 한 것이 아닙니다. 일을 맡은 일꾼이 마음껏 능력을 발휘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있도록 필요한 권한도 주었고, 물질적으로도 받쳐주었지요. 원하는 만큼 열매를 못 낸다 하여 얼마 안 가서 사명을 거둔다거나 다른 사람으로 대신 해야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가져 본 적이 없습니다. 제 편에서는 끝까지 믿어주고 끝까지 힘이 되어주고자 하였지요.
그랬을 때, 그것을 은혜로 갚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는 것을 보면서 마음 아팠던 적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마 12:20에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하신 말씀대로 저 역시 또 참아주고 믿어주고 바라봐주며 변화되기를 인내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제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다가오는 풍년과 흉년의 때에 어떻게 대처해 나갔는지는 다음 시간에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내용을 보면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주관하여 이루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바로는 처음 본 요셉에게 전폭적인 신뢰와 지지를 보냅니다. 그리고는 그를 단번에 애굽 전국을 치리하는 총리의 자리에까지 높이지요.
장관이나 다른 직책을 주고도 얼마든지 일을 맡길 수 있을 것 같은데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을 대신하는 전권을 위임합니다. 또 당시로서는 아주 특별한 계층으로서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었던 제사장의 딸을 주어 아내를 삼게 합니다. 최고의 지위를 보장해주고 최고의 대우를 해준 것입니다.
바로의 꿈을 해석해 주고 앞으로 다가올 재앙에 대한 대비책을 알려 주었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대접을 해준다는 것은 ‘좀 과하지 않나’ 싶을 정도이지요. 그런데 바로 이러한 일이 현실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주관해 주셨기 때문이지요. 바로가 요셉을 신뢰하고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마음을 주관하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억지로 주관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가 자유의지 가운데 한 것이지만 그것도 결국은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주관하여 자유의지 가운데 행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지요.
하나님의 일을 이룸에 있어서 영의 분리를 통해 사람의 마음을 주관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는 장면입니다. 그렇다고 아무 때나 원한다고 사람의 마음을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와 시에 맞추어 정확히 주관해야만이 하나님의 섭리가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바로 이러한 모든 상황과 때가 정확히 맞아 들어가면서 마침내 열매를 맺은 것이지요.
아버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때가 되어 역사하시는 일들은 너무나 형통하고 정확하게 모든 상황과 조건들이 착착 맞아들어 갑니다. 때로는 현실이 반대로 가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지만 결국은 그 모든 과정들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지요.
2006년도 아버지 하나님께서 본 제단에 주신 첫 번째 기도제목이 ‘섭리’입니다. 본 제단을 향하신 섭리를 이루기 위해 또한 여러분 각자를 향하신 섭리를 이루기 위해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리들보다 더 간절한 마음으로 우리들을 바라보고 계시지요.
‘때’를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공의의 저울로 측량하여 ‘이제 됐다’ 하시는 그 ‘때’이지요. 그 ‘때’는 바로 ‘오늘’이 될 수도 있습니다. 변함없는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기도하여 아버지 하나님께서 응답주시는 그 ‘때’를 신속히 맞이할 수 있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6-04-23 오후 10:50:12 Posted
2018-12-04 오후 1:51:27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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