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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창세기 강해 (2000년~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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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세기 강해(212)
설교자 당회장 이재록 목사 설교본문 창42:8-25 등록일자 2006.05.12
“요셉은 그 형들을 아나 그들은 요셉을 알지 못하더라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정탐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
[10절부터 23절까지 중략]
요셉이 그들을 떠나 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취하여 그들의 목전에서 결박하고 명하여 곡물을 그 그릇에 채우게 하고 각인의 돈은 그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또 길 양식을 그들에게 주게 하니 그대로 행하였더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랜만에 형들을 만난 요셉의 마음에는 형들에 대한 진한 정이 밀려왔습니다. 자신을 죽이려고까지 했었고, 그러다 결국은 자신을 종으로 팔아버린 형들이지만 요셉은 그러한 형들이 밉지 않았지요.
연단의 과정을 거치면서 오히려 형들의 입장을 헤아리게 되었고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자신이 조금만 더 형들의 입장을 헤아려서 형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 않았다면 형들로부터 미움을 사는 일도 없었을 것이라 하며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렸지요. 자신에게 들레려는 마음이 없었고 형들의 허물을 보았을 때도 그것을 지적하고 드러내려 하기 보다는 사랑과 덕으로 덮어주었다면, 형들과 화평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라 하며 자신의 부족함을 탓했습니다.
요셉은 연단을 통해 이처럼 아름답고 선한 마음으로 변화되었던 것이지요. 더욱이 요셉은 자신의 형들이 양식을 구하기 위해 애굽에까지 와서 자신 앞에 무릎 꿇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도 밝히 깨달았습니다. 육적으로 볼 때는 자신이 형들의 시기, 질투로 인해 애굽에 종으로 팔려오게 되었지만 오히려 이로 인해 결과적으로는 자신은 물론이고 자기의 혈육까지도 다 구원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요셉은 깨닫게 되었지요.
비록 자신을 종으로 팔아넘긴 형들의 행위 자체는 악한 것이었지만 그들로 인해 자신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으니 요셉의 마음에는 형들에 대한 어떠한 감정이나 미움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애틋한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또한 자신을 이처럼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뿐이었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여러분에게 시험이 찾아오고 어려움이 왔을 때 혹여 그것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며 자신을 어렵게 만든 사람에 대해 미움의 감정을 쌓아가지는 않았는지요?
하나님을 만나기 전, 저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습니다. 세상에서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나름대로 선하게 살았지만, 제가 아프기 시작하면서 제 마음에는 감정이 쌓이기 시작했지요. 제가 아프고 변변히 돈도 못 번다하여 저를 무시하고 미워했던 사람들에 대해 저도 마음에 감정이 쌓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 내가 다 낫기만 해봐라 내가 성공하여 돈도 많이 벌어서 보란 듯이 보여 주리라’ 이런 마음이 쌓이면서 미움이 자리 잡게 되었지요.
그런데 제가 하나님을 만나고 진리를 알게 되면서 이 모든 감정은 눈 녹듯이 녹아져 내렸습니다. 모든 것을 제 탓으로 돌리게 되었고, 그들의 입장과 마음이 이해되었지요. 그러면서 제 마음에서 참으로 그들을 용서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지나온 모든 일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뀌었지요.
예전에는 제가 아플 수밖에 없었던 것도 다 남의 탓으로 돌렸었지만, 이제는 아팠던 것도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제가 아프지 않았다면 어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니 제가 아팠던 것도, 아프면서 겪어야 했던 모든 과정에 대해서도, 감사의 마음이 되었던 것이지요. 그 과정이 있었기에 오늘의 저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도 연단을 통해 자신을 철저히 발견하여 변화되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임을 깨달았듯이 저도 하나님을 만나고 진리를 알게 되면서 지난날의 모든 과정을 되돌아보며 저를 철저히 발견하고 회개하면서 변화되었지요. 또한 저를 오늘에 이르게 하시기 위해 섬세하게 간섭하시며 인도해 오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며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이 모든 것이 비록 주 안에 들어오기 전에 제가 세상에서 겪었던 연단의 과정이지만 저는 주 안에 들어와서 그 모든 것을 교훈삼아 신속히 진리로 변화되어 나갈 수가 있었지요.
오늘 본문의 요셉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요셉은 연단 중에 자신을 발견하고 깨달았을 때 그것을 신속히 진리로 변화시켜 나갔기 때문에 똑같은 연단을 두 번 다시 되풀이 하지 않았지요. 그러면서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 온전히 순종하여 이루어 나갔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도 요셉이 하나님의 뜻을 알아서 그 뜻에 순종하기 위해 하나님의 주관에 따라 인도받아 나가는 장면이지요.
요셉의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형들을 반갑게 맞이하여 형들과 뜨거운 정을 나누고 고향에 있는 아버지와 가족들에게도 자신의 소식을 알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만약 그렇게 했다면 하나님의 공의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가 온전히 이루어질 수는 없었지요.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성도 여러분, 야곱의 열두 아들들은 장차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게 될 기초석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아들들 사이에는 서로 하나되지 못하게 하는 장벽이 있었지요. 이들은 서로 다른 네 명의 여인으로부터 태어났고 더욱이 야곱의 편애 때문에 시기, 질투로 인한 갈등까지 있었습니다. 급기야 동생 요셉을 종으로 파는 너무나 악한 행동까지도 나오게 되었지요.
이렇게 동생 요셉을 종으로 판 후에 물론 형들의 마음에는 양심의 가책이 있었고 아버지 야곱에게 죄스러운 마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그 마음은 무디어지고 지난 일들은 점점 과거로 묻혀갔지요. 이제 요셉의 일은 더 이상 자신들끼리도 꺼내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형제들 사이에 어떤 진한 형제애나 하나 된 단결심 같은 것도 없었지요. 그래서 심한 기근으로 가족 전체가 굶어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 되었지만 아버지 야곱이 말을 꺼내기 전에는 누구 하나 앞장서서 가족을 위해 헌신하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저 서로가 관망만 하고 있었지요.
그러니 만약 이러한 상태에서 요셉이 형들을 만났을 때 그들을 용서하고 모든 지난날의 허물을 덮어주며 무조건 사랑과 은혜만 베풀었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요셉 편에서야 선을 베푼 것이지만 형제들의 관계는 여전히 껄끄럽고 서로 간에 하나 되지 못한 그 상태가 계속될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런 모습이라면 비록 그들로부터 한 민족이 나왔다 해도 서로 간에 단합하며 하나 된 민족이 되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형제들이 요셉에게 행했던 죄를 철저히 회개할 기회를 줄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형제간에도 서로 위해주고 아끼며 사랑으로 하나되는 계기로 삼기 원하셨습니다. 이처럼 지난날의 모든 허물된 일들을 회개하고 공의 가운데 아무런 흠도 없이 깨끗하게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게 하신 것이지요.
이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본 제단에 지난 98, 99년도의 일들에 대해 회개할 기회를 주심으로 모든 허물된 일들을 털어버리게 하신 것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공의의 법칙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원수까지라도 사랑하고 상대의 허물을 덮어주며 일흔 번에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 하십니다. 그러니 본 제단에도 굳이 지난날의 일들을 드러내실 것이 아니라 그냥 덮어두고 가시면 안 되었을까요? 예, 그러면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어 그 당시의 일에 대해 철저히 계수하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본 제단은 마지막 때에 세계선교와 대성전 건축의 사명을 이루는 제단입니다. 많은 영혼들이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야 하는 제단이지요. 그런데 만약 지난 98, 99년도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철저히 계수하여 털어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본 제단에 주시고자 하는 축복을 우리가 받을 수 없습니다. 공의의 법칙 가운데 주실 수가 없지요. 어찌 그 많은 허물과 죄의 담을 가진 채로 하나님의 축복이 올 수 있겠습니까? 원수 마귀 사단이 당연히 송사하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공의에 맞추어 마지막 때에 여러분과 만민의 제단을 하나님의 귀한 도구로 쓰시며 축복주시기 위해 그와 같이 지난날의 허물과 죄를 씻을 수 있는 회개의 기회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또한 사망에 이르는 죄에 대해서도 그처럼 회개의 기회를 주신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어떤 파티에 초대받아 가는데 겉옷만 새롭게 갈아입는다고 해서 과연 준비가 다 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여전히 몸은 더럽고 속옷은 냄새가 나는데 겉옷만 새 옷을 입었다고 해서 ‘나는 깨끗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 깨끗해지기 위해서는 몸도 깨끗이 씻고 속옷도 갈아입고 그런 다음에 겉옷도 새 옷으로 입어야 하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지난날의 죄와 허물을 마냥 덮어주고 가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의 회개를 받아야 하고 회개편지를 읽어야 하는 저는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고통을 받는지 아십니까? 그럼에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제라도 지난날의 모든 담을 깨끗이 헐고 새롭게 출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축복받아 마음껏 아버지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어 드려야 하기 때문이지요. 더 이상 지난날의 죄와 허물로 인해 본 제단이 큰 사명을 이루어 나가는데 있어서 지장을 받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여러분이 다 구원받고 또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지난날의 허물과 죄를 무조건 그대로 덮어두는 것을 사랑이라고만 여겼는데 마지막 심판 날에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그 죄와 허물을 물으신다면 무엇이라 하겠는지요? 혹여 그때의 일들로 인해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없는 흠이 된다거나 상급이 깎이게 되고 심한 경우 구원조차 받지 못하는 일이 생긴다면 이 얼마나 마음 아픈 일이겠습니까?
따라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본 제단에 지난날의 일들에 대해 다 드러나게 하시고 그것을 통해 회개의 기회를 갖게 하신 것은 공의 가운데 여러분을 축복하시기 위함이며, 결국은 여러분을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요셉도 그의 선한 마음으로는 지난날의 일들에 대해 얼마든지 그냥 덮어두고 이제 새롭게 출발하고자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공의에 맞지 않고 온전한 사랑도 아니기에 하나님께서는 굳이 요셉의 마음을 주관하여 이처럼 형들에게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게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지요.

그러면 요셉은 형들에게 과연 어떤 방법으로 회개의 기회를 주었을까요? 오늘 본문에 그 과정이 자세히 나옵니다. 요셉은 자신 앞에 나와 엎드린 형들을 보았을 때 그들을 이내 알아보았지요. 그러나 요셉의 형들은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는 요셉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에 요셉은 형들에게 “너희는 정탐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 하며 그들을 정탐꾼으로 몰아세우지요.
당황한 요셉의 형들은 “내 주여 아니니이다 종들은 곡물을 구하러 왔나이다” 하며 자신들이 누구이고 가족 상황은 어떠하며 여기에는 왜 왔는지를 설명합니다. 자신들은 모두가 한 사람의 아들로서 열두 형제인데 지금 말째는 아버지와 함께 가나안 땅에 있고 또 하나 즉 요셉은 없어졌다 말하고 있지요.
요셉은 지금 형들과의 몇 마디 대화를 통해 지난 세월동안 너무나 궁금했던 아버지 야곱과 동생 베냐민에 대한 소식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시다는 사실, 동생 베냐민도 잘 있으며 여전히 가나안 땅에 살고 있다는 사실 등을 파악할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이처럼 일단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한 요셉은 형들에게 자신들이 정탐이 아님을 증명하려면 막내 동생을 데려오라 말합니다.
이때 요셉이 굳이 막내 동생을 데려오라고 한 데에는 이유가 있지요. 베냐민은 자신과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혈육으로 아무래도 가장 정이 가는 형제이니 그러한 동생이 너무나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집에 남겨두고 온 동생 베냐민을 이곳으로 데려오라고 했을 때 과연 형들의 반응이 어떻게 나올지를 살피기 위함이었지요. 이를 통해 형들의 마음을 살피고 형들이 예전에 자신을 종으로 팔았던 일에 대해 지금 어떤 마음인지를 간접적으로 나마 알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렇게 형들에게 실마리를 던져준 요셉은 그들을 삼 일 동안 가두어 두지요. 이는 바로 형들에게 생각할 시간 즉 자신들을 돌아볼 시간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형들이 삼 일 동안 갇혀 있으면서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겠습니까?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도 되고 그러면서 자신들을 돌아보니 자신들이 잘못했던 일들이 하나하나 떠올랐지요.
그들이 이처럼 고심했던 흔적이 이어지는 요셉과의 대화에서 나옵니다. 삼 일 만에 형들을 부른 요셉은 형제들 중에 한 사람만 남기고 나머지는 곡식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가족들의 주림을 구하고 난 후에 말째 아우를 데리고 다시 오라 말하지요. 요셉은 이렇게 형제들 중에 하나만 남기게 함으로써 형들로 하여금 형제를 남의 손에 넘겨야 하는 슬픔을 느껴보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들 사이에 과연 얼마나 정이 있고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있는가를 보려했던 것이며 동시에 예전에 자신을 팔았던 기억 즉 형제를 자신들의 손으로 팔아넘겼던 기억을 되살리도록 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요셉의 의도대로 형들은 지난날 자신들이 동생 요셉에게 행했던 너무나 큰 죄악을 회상하며 고백하기 시작합니다.

21절에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했지요.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책임을 맡고 있는 장자 르우벤은 22절에 “내가 너희더러 그 아이에게 득죄하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피 값을 내게 되었도다” 합니다. 장자로서 그때의 일을 막지 못했던 것에 대해 아무래도 가장 많은 책임을 느끼고 있었지요.
하지만 그의 말에는 아직 모든 것을 자신의 잘못으로 돌리려 하기 보다는 다른 형제들 즉 동생들에게 그 탓을 돌리려는 마음이 있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비록 동생들의 행동을 막으려 했고 어찌하든 요셉을 지키려는 마음이었다고는 하나 정말 요셉을 어떻게든 지키려 했다면 더 단호하고 강경한 말과 행동으로써 동생들을 막았어야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형제들이 요셉을 팔았던 것이지요.
그러나 어쨌든 요셉의 형들은 이와 같은 급박한 상황에 처하게 되자 지난날 자신들이 행했던 죄와 허물을 돌아보며 마음에서부터 후회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제 점점 요셉이 의도했던 대로 상황이 진행되어 가고 있었지요.
그러나 아직 형들의 태도가 자신들의 잘못을 철저히 인정하고 뉘우치는 온전한 회개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또 한 번의 계기를 만들기 위해 형제 중 시므온을 남긴 채 곡물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형들의 자루에 곡물 값으로 받은 돈을 도로 넣도록 지시하지요. 마치 형들이 곡물 값도 치르지 않고 곡물을 가져가는 것처럼 되고 만 것입니다.
이 행동으로만 봐서는 요셉이 형들에게 억지로 누명을 씌워서 곤란하게 만드는 것 같아 보이는데 이는 요셉이 악한 의도에서 한 것이 아니라 결국은 형들을 다시 만나서 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고 서로 화해하기 위해 생각해낸 지혜였지요. 이러한 일이 있었기에 요셉의 형들은 왜 이런 일이 자신들에게 일어나는지 더욱 자신들을 돌아보게 되었고 결국 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요셉 앞으로 나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제 앞으로 요셉과 형들 사이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다음시간에 계속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23-24절에 보면 형들 사이에 오고가는 대화를 듣고 있던 요셉이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돌아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요셉은 지금 형들에게 악한 마음이나 감정이 있어서 일부러 이렇게 형들을 어렵게 몰아가는 것이 아니었지요.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하나님의 주관하심에 순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에서 형들을 옥에 가두어야 했고 또한 형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지난날의 잘못을 후회하는 모습을 볼 때 요셉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형들의 입에서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고백하는 것을 들을 때 요셉의 기억에는 지난날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고 있었지요. 그러면서 지난 세월에 대한 감회와 함께 형들이 이렇게 번민하며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있는 것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들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런 형들 앞에 자신이 누군지 밝히지 못한 채 엄한 모습으로 있어야 하는 현실이 너무나 마음 아팠던 것이고요.
그러면서도 요셉은 형들이 철저히 회개하고 돌이켜 모든 것이 깨끗케 정리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감정을 절제하며 계속해서 형들을 궁지로 몰아갑니다. 삼 일이라는 시간 동안 가두어 두기도 했고 형들 중에 시므온을 택하여 형제들이 보는 앞에서 결박하지요. 바로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요셉의 형들은 번민하고 근심하며 더욱 가난한 심령이 되어갔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요셉이 이처럼 시간을 끌지 않고 그냥 곧바로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예전의 잘못에 대해 형들을 책망했다면 어찌되었을까요? 아마 요셉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라도 형들은 머리를 조아려 요셉 앞에 용서를 구하면서 지난날의 잘못을 회개한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회개가 진정한 회개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지 두려움 때문에 당장의 상황을 모면해 보고자 마음에서 억지로 하는 회개이지요.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회개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요셉도 그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이처럼 형들에게 시간을 주면서 지난날의 잘못을 깊이 되새기며 마음에 찔림이 되도록 하고 있지요. 그래야 참 회개가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후 7:8-9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했지요. 사도 바울의 편지가 고린도 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근심하게 만들었는데 그처럼 근심하게 만들었기에 그들이 결국은 회개할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들을 잠시 근심하게 한 것으로 인해 이제는 도리어 기뻐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지요.
요셉의 형들도 이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이 지금은 근심하며 번민하고 있지만 그들은 결국 이로 인해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에 이를 수가 있었지요. 그래서 고후 7:10 전반절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러한 경험을 해보셨는지요? 만약 죄 가운데 거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단에서 나오는 죄에 대한 지적이 때로는 여러분의 마음을 근심케 하고 번민하게 하며 두렵게 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당장 회개하고 돌이키면 될 텐데 그렇게 하지 않는 분들이 있지요. 그래서 이런 분들은 단에서 나오는 말씀에 계속 찔림이 되고 두려움이 쌓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가 그래도 믿음이 있는 분이라고 하면 ‘이제는 도저히 안 되겠다’ 하며 하나님 앞에 두 손을 들고 나오게 되지요. 결국 회개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회개하고 났을 때 얼마나 마음이 시원하고 아버지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이 느껴집니까? 다시 마음에 평안을 얻고 충만한 신앙생활을 회복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처럼 말씀을 듣고 깨닫는 즉시 회개하고 돌이키면 신속히 근심이 사라지고 평안과 행복을 되찾을 수 있음에도 돌이키지는 않고 계속해서 근심하며 두려움 가운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모습입니까? 그것도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그런다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때때로 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죄를 지적하시고 장차 있을 7년 환난과 심판 그리고 지옥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은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을 멸하시기 위함이 아니지요. 지금이라도 이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돌이켜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성령의 탄식 가운데 근심케 하시며 때로는 두려움도 가지게 하시는 것이고요. 이러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여러분 중에는 한 분도 어두움의 죄 가운데 빠지는 분이 없으셔서 늘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행복 안에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6-05-15 오전 9:29:19 Posted
2018-12-04 오후 1:46:15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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