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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창세기 강해 (2000년~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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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세기 강해(213)
설교자 당회장 이재록 목사 설교본문 창42:26-38 등록일자 2006.05.19
“그들이 곡식을 나귀에 싣고 그 곳을 떠났더니 한 사람이 객점에서 나귀에게 먹이를 주려고 자루를 풀고 본즉 그 돈이 자루 아구에 있는지라
[28절부터 37절까지 중략]
야곱이 가로되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의 형은 죽고 그만 남았음이라 만일 너희 행하는 길에서 재난이 그 몸에 미치면 너희가 나의 흰 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보통 사랑과 공의를 동전의 양면에 비유합니다. 사랑과 공의가 서로 반대되는 것 같지만 그러면서도 결국은 하나이며 둘이 함께 있을 때 온전해지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사랑과 공의를 ‘천’과 ‘실’에 비유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의 천을 ‘사랑’이라고 할 때 그 천을 구성하는 하나하나의 실이 ‘공의’이지요. 천을 멀리서 볼 때는 잘 안 보이지만 가까이에서 살펴보게 되면 한 올 한 올의 실들이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짜여지면서 하나의 천을 이루고 있듯이 사랑도 자세히 그 속을 들여다보면 수많은 공의의 법칙들이 정확하게 맞물려서 결국은 ‘온전한 사랑’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랑을 이루고 있는 공의의 법칙들에 대해서도 정확히 깨닫고 알아야 하지요.
저도 바로 영의 훈련들을 통해 사랑과 공의 사이의 이러한 관계성들을 하나하나 터득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수많은 양 떼들을 대하면서 예전에는 어떠한 죄를 지은 양 떼이건 간에 무조건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이었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도 오래참고 인내하시며 기회를 주셨지요.
그런데 제가 새로운 영의 훈련을 하면서 공의라는 차원에 대해 더 깊이 알게 될수록 그렇지 않은 경우들이 있음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제가 예전보다 용서와 사랑의 마음이 줄어들었다거나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제는 예전처럼 저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신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예전에는 제가 피조물의 입장에 서서 그 영혼을 위해 너무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여 아버지 하나님의 응답을 끌어내렸었지요. 마치 모세 선지자가 범죄한 자기 동족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기도했던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러한 차원을 넘어 아버지 하나님 편에 서서 분별할 수 있도록 훈련을 시켜나가고 계신 것입니다.
저로 하여금 기도해야 할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용서해야 할 일과 아무리 용서해 주고 싶어도 그래서는 안 되는 일, 바로 이러한 경우들에 대해 아버지 하나님 편에 서서 바라보게 하시는 것이지요. 그러니 예전에는 정말 용서가 안 될 사람도 제 입장에서 어떻게든 아버지 앞에 매달렸지만 이제는 아버지 하나님의 입장에서 바라보게 되니 그럴 수 없는 경우들이 있더라는 말입니다.
자, 예를 들어서 우리 주님의 마음이시라면 자신을 팔아넘긴 가룟 유다라도 얼마든지 용서해 주시고자 하는 마음이십니다. 빌라도 총독이라도 용서해 주실 수만 있다면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용서해 주실 마음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편에서 정해 놓으신 공의에 비춰본다면 합당하지가 않습니다. 만약 주님께서 어떤 죄든지 다 용서해 주시고 그래서 그렇게 용서해 준 사람은 누구나 다 죄사함을 받아 구원에 이를 수 있다면 이 세상에 지옥에 갈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할 수는 없지요.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공의에 맞지 않기 때문이지요. 처음 하나님께서 인간 경작을 시작하시면서 어둠의 세력에게도 권세를 주시고 정확한 공의 가운데 인간 경작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것과 맞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도 공의를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여러분이 이해할 수 있도록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다윗 왕과 솔로몬 왕 중에 누구를 더 사랑하셨겠습니까? 예, 당연히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 왕이지요.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다윗 왕이 그의 손으로 성전을 지어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그의 아들 솔로몬 왕 때에 성전을 지어 드릴 수 있도록 하셨지요.
그 이유는 다윗이 수많은 전쟁으로 인해 그의 손에 피를 많이 묻혔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다윗 왕을 사랑하신다 해도 하나님 앞에 드리는 성전은 깨끗한 손으로 지어져야 하기에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다윗이 아닌 솔로몬을 통해 성전을 짓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의입니다.
이는 본교회를 향한 섭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지요. 성도 여러분, 이 마지막 때에 여러분처럼 악을 버리고 성결되기 위해 기도하고 금식하며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성도들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또한 본교회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헌신하며 충성하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께서 세우신 목자를 믿고 신뢰하여 순종하며 그 어느 곳보다도 믿음 좋은 성도님들이 많지요.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하는 성도님들이시고요.
그러니 하나님께서도 이러한 본교회와 성도님들을 보실 때, 얼마나 사랑스러우시겠습니까? 그 어떤 성도들보다도 여러분을 너무나 사랑하시지요. 하지만 이렇게 사랑하신다하여 무조건 당장에 가나안 성전과 대성전을 허락해 주실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까지도 누누이 말씀드렸지만 가나안 성전과 대성전은 여러분 마음의 성결이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일정한 수준에 이르러야 이룰 수가 있지요.
그것이 바로 공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여러분을 사랑하셔도 모든 것이 공의에 맞을 때라야 가나안 성전과 대성전을 허락하실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본교회와 여러분을 통해 대성전을 받으시고자 지금까지 이처럼 여러분을 연단하여 정금같이 나오게 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이 마지막 때에 여러분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 좋은 성도들을 찾아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성도들이 나오기까지 대성전 건축을 마냥 미룰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저와 본교회와 여러분을 택하셔서 이 귀한 사명을 주셨던 것이지요. 그리고 공의에 맞추어 대성전 건축을 허락하실 수 있는 수준에 이르기까지 때로는 연단도 허락하시면서 참고 인내하며 오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과 공의 사이의 관계는 모세의 경우를 보아도 잘 알 수 있지요. 모세는 하나님의 사랑을 지극히 받는 사람이었고 하나님께서 친히 대면하여 말씀하실 정도로 하나님 앞에 합당하고 온전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모세였지만 그는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 땅을 눈 앞에 두고 결국 그 땅에 들어갈 수는 없었지요. 느보산에 올라 멀리 가나안 땅을 내려다보기는 했지만, 40년 동안 목표 삼아 왔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그처럼 사랑하는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 것일까요? 가나안 땅을 한 번만이라도 밟아보게 하실 수는 없으셨던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너무나 사랑하셨지만 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은 공의 때문에 허락하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신 4:21에 보면 그 이유가 나오지요. 모세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너희로 인하여 내게 진노하사 나로 요단을 건너지 못하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그 아름다운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라고 맹세하셨은즉”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출애굽의 인도자로서 그만한 책임이 있었고 대표성을 띄고 있었지요. 따라서 모세 개인적으로 아무런 흠과 티가 없다 해도 모세에게는 전체 백성을 대신하여 그들의 죄와 허물을 져야하는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 1세대 중 20세 이상인 자 중에는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 가나안 땅에 들어갈 것이라 말씀하신대로 모세 역시 백성들로 인해 책임을 함께지고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이처럼 아무리 사랑이 있다 해도 반드시 공의 안에서 이루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만 공의를 뛰어넘는 사랑의 차원이 있는데 이 역시 무조건 공의를 어기면서까지 사랑을 베푸신다는 의미는 아니지요. 이는 상대가 치러야 할 값을 내 편에서 대신하여 사랑과 희생으로 치러주는 것으로써 이 역시 결국은 상대에게 적용될 공의의 법칙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대신해 주는 것과 같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가족 중에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너무나 큰 죄의 담이 있다고 할 때, 다른 가족이 정말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대신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므로 하나님께서 다른 가족들의 믿음과 사랑을 보시고 공의를 넘어선 사랑과 긍휼을 베푸시는 경우이지요. 그러므로 사랑과 공의는 결국 하나로 연결되며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자녀가 있는데 그 자녀가 어떤 잘못을 했다고 할 때, 때로는 그냥 모른 척하고 은혜로 넘어가줘야 할 것도 있겠지만 어떤 것은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도 있습니다. 사랑한다 해서 무조건 은혜로 넘어가 줬다가는 자칫 아이에게 비진리가 심겨져서 잘못된 길로 나갈 수가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아이 스스로 깨닫고 돌이킬 기회는 주되 그래도 깨닫지 못할 때는 징계해서라도 정확히 진리를 분별하도록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이지요. 여러분의 자녀가 하나님 앞에 커다란 죄의 담을 쌓고 있는데 그것을 알면서도 그냥 놔둔다면 그것이 과연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겠습니까? 어떻게든 자녀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돌이켜 막힌 죄의 담을 헐고 새롭게 신앙생활해 나갈 수 있도록 도와줘야하지요. 그것이 참된 사랑이며 자녀를 위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의 요셉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지금 형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이지요. 요셉은 지금 당장에라도 형들의 지난 잘못을 다 용서하고 형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싶은 마음이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정(情)에 이끌리는 것이지 진정 형들을 위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정말로 형들을 위한다면 형들이 하나님 앞에 지은 죄에 대해 스스로 깨닫고 돌이키도록 도와주어야 하지요.
물론 형들이 요셉을 종으로 판 것은 요셉에게 행한 죄였지만, 그들은 동시에 아버지 야곱도 속였고 더 나아가 하나님 앞에서도 큰 죄를 지은 것이었습니다. 시기, 질투로 인해 형제를 종으로 판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하나님 앞에 큰 죄일 뿐만 아니라, 더욱이 요셉의 형들은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주신 꿈을 무시하고 만홀히 여겼지요.
그들이 처음에 요셉을 죽이려고 마음먹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이처럼 요셉을 죽이고 나면 과연 “그 꿈이 어떻게 되는 것을 우리가 볼 것이니라” 했던 것입니다. 이는 요셉이 자신들에게 말했던 꿈의 내용을 비웃고 있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자신들이 지금 요셉을 죽일 것인데 그렇게 되면 요셉이 말하던 꿈의 내용 즉 자신들의 단이 요셉에게 절하고 열한 별이 요셉에게 절했다는 요셉의 꿈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는 의미입니다. 이제 그 꿈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라고 비아냥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 야곱은 요셉의 꿈을 마음에 두었지만 요셉의 형들은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인정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무시했던 것이지요. 그러니 야곱의 아들들이 장차 선민 이스라엘을 이룰 기초석이 되기 위해서는 바로 이러한 죄의 담들을 헐어야 했습니다.
그냥 이 상태에서 모든 것을 덮고 그들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이룰 수는 없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바로 요셉을 주관하셔서 형들을 곤경에 빠지게 만들므로 그들이 지난날의 잘못을 떠올리고 깨달아 깊이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해 가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먼저는 형들을 정탐으로 몰아서 그들 중에 한 사람만 고향으로 돌아가 그곳에 있는 막내 베냐민을 데리고 오라 하지요. 그러면서 그것만이 자신들이 정탐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라 말합니다.
앞으로 설명이 되겠지만 아버지 야곱이 동생 베냐민을 얼마나 애지중지 하고 있는지를 잘 아는 형들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지요. 요셉도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어려운 제안을 한 후에 형들을 삼 일 동안 가두어 둡니다. 형들은 이렇게 삼 일 동안 갇혀있으면서 자신들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지요. 또한 애굽 총리의 말이 결코 허튼 소리가 아니라 자신들이 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오지 않으면 그의 말대로 자신들은 영락없이 정탐으로 몰릴 수밖에 없는 처지임을 절감하게 됩니다.
이렇게 형들이 잔뜩 번민하고 있을 때 요셉이 다시 형들을 불러 그들 중에 한 사람만 남기고 나머지는 양식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 남은 가족들의 주림을 구하고 나서 막내 베냐민을 데리고 다시 오라 말하지요.
이번에는 한 사람만 남기고 나머지는 고향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형들의 입장에서는 한 사람만 남겨야 한다고 하는 이 사실이 오히려 더 마음을 괴롭게 했지요. 상황이 이쯤 되자 마침내 형들은 지난날의 잘못을 고백하기 시작합니다.
서로 말하기를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했지요. 특히 장자 르우벤은 나머지 형제들에게 “내가 너희더러 그 아이에게 득죄하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피 값을 내게 되었도다” 합니다. 그렇지만 아직은 온전한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르우벤은 자신의 탓보다는 나머지 형제들에게 탓을 돌리고 있지요. 진정 낮아진 마음에서 돌이켰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르우벤의 말만 놓고 본다면 그의 말은 맞는 것이지요. 질서상 르우벤은 가장 머리입니다. 그러므로 나머지 형제들이 질서에 순종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었다면 당연히 장자 르우벤의 말을 들었어야 합니다. 르우벤의 말이 선한 것이었고 질서에 순종하는 것이 옳은 것이니까요.
그러나 나머지 형제들은 르우벤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물론 순종도 당연히 진리 안에서 해야 하지만 이처럼 질서를 좇아 세워진 권세에 순종하지 않았을 때는 연단이 따를 수 있지요. 더욱이 질서에 따르지 않고 진리에서도 벗어나는 일을 했다면 거기에는 보응이 따르게 되는 것이고요. 그러므로 여러분도 세워진 질서를 좇아 권세 앞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형들이 이처럼 지난날의 잘못을 후회하고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을 요셉은 감정이 복받쳐 올랐지만 이를 절제하고 다음 단계의 조치를 취해갑니다. 형제 중 시므온을 취하여 결박한 후 나머지는 곡물을 주어 고향으로 돌려보내지요.
그런데 요셉은 이때 그들이 곡물 값을 치른 돈을 일부러 곡물 자루에 몰래 다시 넣게 합니다. 이제 요셉의 형들은 값도 치르지 않고 곡물까지 훔쳐간 사람들이 되고 말았지요.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돈이 자루 속에 들어있는 것을 발견한 형들은 너무나 놀라고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28절 후반절에 “이에 그들이 혼이 나서 떨며 서로 돌아보며 말하되 하나님이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 일을 행하셨는고” 했던 것이지요.
일이 점점 꼬여만 가게 되자 요셉의 형들은 하나님께서 왜 자신들에게 이와 같은 일들을 행하시는지 돌아보게 되었고 그러면서 지난날의 잘못에 대해 더 깊이 돌아보는 기회를 갖게 됩니다. 요셉은 바로 이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처럼 돈을 도로 자루에 넣게 한 것이었지요.
일이 이 지경에 이르러 고향에 돌아온 요셉의 형들은 그 동안 있었던 일의 자초지종을 아버지 야곱에게 상세하게 말합니다. 예전에 요셉의 일로 아버지를 속였던 것처럼 이번에도 어떻게 숨겨보려한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진실하게 말한 것이지요.
이는 자신들에게 돌아올 어떠한 책임이라도 이번에는 기꺼이 지겠다는 의미입니다. 비록 자신들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면서부터 일이 이처럼 꼬이게 된 것이지만 어쨌든 자신들로 인해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것에 대한 책임을 느끼는 것입니다.
애굽 총리에게 막내 베냐민이 있다는 말을 해서 자칫 베냐민까지 위험에 빠뜨리게 만들었고, 형제 시므온을 남겨 두고 올 수밖에 없었으며 거기다가 이제는 곡물값도 치르지 않은 것이 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지게 된 모든 것에 대해 자신들의 책임을 느끼고 있는 것이지요.
그들이 만약 이번에도 아버지를 속여서 이 상황을 모면해 보고자 했다면 얼마든지 또다시 거짓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시므온은 강도를 만나 죽었다고 한다거나 애굽에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잡혔다가 겨우 도망쳐 왔다고 한다든지 해서 두번 다시 애굽으로 가야하는 일은 생기지 않도록 할 수도 있었지요.
지금 상황에서는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으로 갈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도 없고 설령 베냐민을 데리고 간다 해도 이번에는 곡물을 훔친 도둑으로 몰릴 수 있는 처지이니 이러한 사실을 뻔히 알면서 애굽으로 다시 간다는 것은 자신들의 생명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요셉의 형들은 야곱에게 모든 상황을 솔직히 이야기 했으며, 다시 돌아가서 어떻게든 시므온도 구해보려 하지요. 특히 장자 르우벤은 아버지 야곱에게 “내가 그를(즉, 베냐민을)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거든 나의 두 아들을 죽이소서 그를 내손에 맡기소서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리이다” 말하고 있습니다.
일단 베냐민을 내어주면 그를 데리고 가서 시므온을 구해오고 베냐민도 무사히 아버지의 곁으로 데려오겠다는 말이지요. 그렇지 않을 때는 자신의 두 아들들을 죽여도 좋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르우벤은 자기 아들들의 생명을 담보로 해서라도 아버지가 그처럼 아끼는 아들 베냐민만은 반드시 데리고 오겠다고 다짐하는 것이지요.
이 말에는 참 많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자신들이 예전에 아버지가 그처럼 아끼던 요셉을 종으로 팔아버렸던 것, 그리고 마치 요셉이 죽은 것처럼 아버지를 속였던 것, 그래서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 이 모든 것에 대한 회개의 의미가 담겨있지요.
요셉의 형들의 말을 들은 야곱이 “너희가 나로 나의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 하며 슬피 한탄하는 것을 본 형제들은 더욱 지난날의 일들을 깊이 돌아보며 회개할 수 있는 심령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진심이었기에 르우벤의 경우는 자신의 두 아들들의 생명까지 담보하며 어떠한 경우에도 이제 다시는 아버지 야곱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요셉의 형들은 지난날의 잘못에 대해 물론 앞으로 요셉 앞에도 회개를 하게 되지만 이와 같이 마음에 심히 고통을 받으며 번민하면서 그만한 보응을 받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요셉의 용서를 통해 비로소 그들은 지난날의 잘못에 대해 깨끗함을 받지요. 이렇게 깨끗함을 받은 후에야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그의 가족들을 애굽으로 인도하여 들이셔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는 초석을 삼으십니다. 지난날의 허물된 것들을 깨끗이 정리하고 나서 새로운 출발과 함께 축복해 주시더라는 말이지요. 이제 다음시간에는 요셉의 형들이 막내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으로 가게 되는 과정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축복이 오는 것도 결국은 공의에 맞아야 합니다. 무조건 기도하며 바라만 본다고 해서 축복이 오는 것은 아니지요. 혹여 막힌 담이 있다면 아무리 기도한다 해도 축복이 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축복을 주시기 위해 먼저는 연단하셔서 그 담을 헐게 하신 후에 축복을 내려 주시게 되지요.
그러므로 이런 경우는 연단을 주시는 것도 바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축복을 주셔야겠는데 공의의 법칙을 어길 수는 없기에 연단을 허락하셔서 죄의 담을 헐게 한 후에 공의에 맞추어 축복을 주시려는 것이지요. 이러한 사실을 깨닫는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연단을 허락하셔서 자신을 돌아보게 하시고 지난날의 죄와 허물된 것까지 깨달아 회개할 수 있게 하시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공의의 법칙은 축복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심어야함을 말씀하시지요. 죄의 담도 없고 마음껏 축복주실 수 있는 충분한 환경 가운데 있다 해도 심지 않으면 열매를 거두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심었으면 끝까지 믿고 바라며 구해야 하지요. 이것이 바로 공의 가운데 여러분 누구나 응답받고 축복받을 수 있는 방법입니다. 이러한 공의의 법칙에 따른 축복의 비결을 들으셨으면 이제는 꼭 믿고 행하시므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6-05-22 오전 9:16:59 Posted
2018-12-04 오후 1:46:15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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