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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창세기 강해 (2000년~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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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세기 강해(214)
설교자 당회장 이재록 목사 설교본문 창43:1-15 등록일자 2006.05.26
“그 땅에 기근이 심하고 그들이 애굽에서 가져온 곡식을 다 먹으매 그 아비가 그들에게 이르되 다시 가서 우리를 위하여 양식을 조금 사라
[3절부터 14절까지 중략] 그 사람들이 그 예물을 취하고 갑절 돈을 자기들의 손에 가지고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요셉의 앞에 서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애굽에 양식을 구하러 갔던 야곱의 열 아들들은 애굽의 총리로부터 정탐으로 오해를 받아 결국 형제 중에 시므온을 볼모로 남겨두고 고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형제 시므온을 구하기 위해서는 이제 반드시 막내 베냐민을 함께 데리고 가야 하는 상황이었지요.
그런데 거기다가 자신들이 양식 값으로 치렀던 돈이 고스란히 양식자루 속에 담겨있는 것이었습니다. 영락없이 도적으로까지 몰릴 상황이 된 것이지요.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 설령 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간다고 해도 애굽으로 다시 간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르우벤은 어떻게든 동생 시므온을 구하기 위해 아버지 야곱에게 간청을 하게 되지요. 일단 베냐민을 자신들과 함께 가도록 해 주면 동생 시므온을 구하고, 베냐민도 반드시 무사히 데리고 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이러한 르우벤의 말을 듣지 않지요. 창 42:38에 “야곱이 가로되 내 아들은(즉, 베냐민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의 형은 죽고 그만 남았음이라 만일 너희 행하는 길에서 재난이 그 몸에 미치면 너희가 나의 흰 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 했던 것입니다. 쉽게 말해 베냐민을 데리고 갔다가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게 되면 자신은 살 소망마저도 없어지게 되어 결국 슬픔 가운데 죽고 말 것이라는 말이지요.
아버지 야곱이 이렇게까지 말을 하니 그의 아들들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점점 시간만 흘러가게 되었지요. 그러다가 그나마 애굽에서 구해온 양식마저도 이제는 다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야곱도 어쩔 수 없이 아들들에게 말을 꺼내지요.
오늘 본문 2절에 “그들이 애굽에서 가져온 곡식을 다 먹으매 그 아비가 그들에게 이르되 다시 가서 우리를 위하여 양식을 조금 사라” 했던 것입니다. 야곱은 지금 상황에서 아들들이 만약 막내 베냐민도 데리고 가지 않고 다시 애굽으로 양식을 구하러 가게 되면 그들에게 위험이 닥칠 수도 있음을 잘 알지요. 그럼에도 야곱은 막내 베냐민은 내어주지 않으면서 나머지 아들들에게만 위험을 무릅쓰라는 것입니다. 결국 아들들에게 책임을 미루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자 아들들 중에 유다가 이러한 아버지 야곱의 말에 조리 있게 대답을 해 나갑니다. 애굽의 총리가 자신들에게 “너희 아우가 너희와 함께하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엄히 말했기 때문에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막내 베냐민과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베냐민과 함께 가지 않으면 어차피 애굽의 총리도 만날 수 없으니 양식도 구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더욱이 이번에는 베냐민과 함께 가지 않으면 영락없이 정탐으로 몰리게 될 것이고, 지난번에 곡물값까지 고스란히 자루에 도로 넣어져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끼리만 애굽으로 다시 가는 것은 생명까지도 위태로운 상황이 될 수 있지요. 유다는 지금 이러한 모든 상황을 정확히 파악해서 아버지 야곱에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유다의 말은 분명 옳았지요.
하지만 이스라엘 즉 야곱에게는 베냐민을 내어줄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유다의 말이 맞다는 것은 알지만 그렇다고 베냐민을 내어줄 마음은 아니었기에 이때 야곱은 오히려 아들들의 탓을 하지요.

6절에 “이스라엘이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너희에게 오히려 아우가 있다고 그 사람에게 고하여 나를 해롭게 하였느냐” 했던 것입니다. 막내 동생이 있다는 말만 안 했어도 이러한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지요. 아들들이 막내 동생이 있다는 말을 했기 때문에 일이 이렇게 꼬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모든 책임을 아들들에게 돌리고 있지요.
성도 여러분, 야곱은 지금 오직 베냐민에 대한 애착으로 인해 더 큰 것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사랑하는 베냐민이지만 지금 상황은 기근으로 인해 베냐민은 물론이고 자칫 가족 전체가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지요. 베냐민을 데리고 가서라도 양식을 구하고 또한 시므온도 구해오게 하는 것이 모든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으로서 가져야 할 더 크고 넓은 마음일 것입니다.
물론 그러다 보면 베냐민에게 위험이 올 수도 있지만 그렇다하여 베냐민만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가족들의 안전과 생명에 대해서는 ‘나 몰라라’ 한다면 이것을 어찌 넓고 선한 마음이라 할 수 있겠는지요?
이러한 야곱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그의 신앙에 대해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그가 비록 얍복 강가에서 철저히 자신을 깨뜨리고 하나님 앞에 겸비하여 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그의 깊은 속에는 버리지 못한 육의 모습이 남아 있었던 것이지요.
오늘날 성령시대를 기준으로 볼 때 아직 온전히 성결되었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 입장만을 생각하는 모습도 있고, 아직까지 편협된 사랑을 주는 모습도 있지요. 남의 탓으로 돌리려는 마음과 자기 유익을 좇으려는 마음도 있고요. 그러니 이러한 야곱의 태도에 아들들도 자기 입장만을 말하게 됩니다.

7절에 “그들이 가로되 그 사람이 우리와 우리의 친족에 대하여 자세히 힐문하여 이르기를 너희 아버지가 그저 살았느냐 너희에게 아우가 있느냐 하기로 그 말을 조조이 그에게 대답한 것이라 그가 너희 아우를 데리고 내려오라 할 줄을 우리가 어찌 알았으리이까” 하지요. 자신들이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것이 아니라 애굽의 총리가 먼저 가족에 대해 자세히 물어서 거기에 대답한 것뿐이었고 설령 그렇게 가족에 대해 말해 주었다 해서 애굽의 총리가 베냐민을 데려 오라고 할 줄을 자신들이 어찌 알았겠느냐는 말입니다. 자신들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이지요.
성도 여러분, 지금 야곱의 아들들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들도 애굽의 총리가 자신들을 정탐으로 몰아서 막내 베냐민을 데려 오라고 할 줄은 전혀 생각도 못했겠지요. 하지만 이때 만약 야곱의 아들들이 좀 더 선한 마음을 가졌다면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설령 자신들의 주장이 옳다 해도 아버지 야곱의 마음을 먼저 헤아려보려는 선의 마음이 있었다면 좀 더 선한 말이 나왔을 것입니다.
너무나 사랑하던 요셉을 잃었고, 그나마 사랑을 주며 위안 삼고 있던 베냐민마저도 잃을 수 있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으니 야곱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물론 편애하는 마음을 가진 야곱의 행동이 옳았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로서 당연히 먼저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렸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이렇게 아버지 야곱의 마음을 헤아렸다면 같은 말을 하더라도 표현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아버지 야곱의 마음도 풀어 드리고 그러면서 애굽에 잡혀있는 형제 시므온도 구해올 수 있을까에 대한 선의 지혜가 왔겠지요.
먼저는 아버지 야곱의 마음이 얼마나 애타며 번민하고 있을까를 생각하여 그의 마음을 풀어줄 수 있는 말을 했어야 합니다. ‘자신들이 더 깊게 생각하지 못했고 더 신중하게 행동하지 못해서 오늘날 이처럼 아버지의 마음에 고통을 드리는 일이 생기게 되어 정말 죄송하다’는 말 한 마디를 먼저 했다면 상황은 많이 달라질 수가 있었겠지요.
야곱도 아들들에게 탓을 돌리기는 했지만 사실 그것이 그들의 잘못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들들이 이처럼 모든 것을 자신들의 탓으로 돌리며 죄송하다고 하면 야곱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아들들을 탓하려던 마음이 움찔할 수밖에 없지요. 그럴 때 아들들이 야곱에게 막내 베냐민을 데리고 가서 시므온도 구하고 양식도 구해서 반드시 무사히 데리고 오겠다고 말했다면 야곱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경험들이 있을 수 있는데 서로 간에 이처럼 감정싸움이 일어날 때는 먼저 상대의 감정을 풀 수 있는 선한 말 한마디가 매우 중요하지요. 감정 나는 대로 말을 하다 보면 싸움은 점점 더 커지게 되고 마음에 깊은 상처와 감정의 골이 생기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모습이십니까? 상대가 아무리 악한 감정으로 나온다 해도 거기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상대의 마음을 풀어줄 수 있는 선하고 감동적인 말을 한다면 이런 사람은 누구와도 걸림이 되지 않을 것이고 누구와도 화평이 깨지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비록 두 사람이 똑같이 옳은 말을 한다 해도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속마음은 다를 수 있습니다. 또한 대의명분을 내세우지만 실상은 자기 유익을 구하는 사람도 있지요. 지금 야곱의 아들들의 말도 비록 그것이 옳은 말이기는 하지만 선한 마음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 야곱이 모든 것을 자신들의 탓으로 돌리고 막내 베냐민도 내어주지 않으면서 양식을 구해오라고만 하니 마음이 불편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아버지의 말에 반박을 하며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명목상으로는 가족 전체를 생각하는 아들들의 주장이 당연히 옳은 것이었지만 그런 말을 하는 아들들의 속마음이 전적으로 선한 것은 아니었다는 말이지요.
오늘날도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마치 전체의 의견을 대변하는 것처럼 어떤 의견을 주장함에 있어서 말의 내용만을 놓고 본다면 옳을 수 있지만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속마음은 자기 유익을 구하고 자기 입장을 관철하려는 사심(私心)이 담긴 경우가 있지요.
또 어떤 사람은 겉으로는 상대를 위해주는 것처럼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은근히 상대를 찌르거나 힘이 빠지게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그 말이 옳다고만 해서 선하고 좋은 말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에 담긴 마음까지도 선할 때라야 진정 선한 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지금 야곱의 아들들이 하는 말은 비록 그 말 자체로는 옳다 해도 그 말을 하는 의도는 결국 자기 입장과 자기 유익을 구하려는 것이었지요. 더욱이 이러한 일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에 대해 아버지 야곱에게는 여전히 숨기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지난날 요셉에게 했던 악으로 인해 오늘날 자신들에게 이와 같은 보응이 임하게 되었다는 말은 하지 않고 있지요. 그러면서 아버지 야곱이 동생 베냐민을 내어 주지 않으려하는 것만을 문제 삼아 자신들의 입장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야곱과 그의 아들들 사이에 오고 가고 있는 대화와 상황을 보면서 뭔가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하셨는지요? 그것은 이들이 지금 전적으로 자신들의 생각과 방법에만 의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아브라함이라면 과연 어떻게 했겠습니까? 먼저 하나님 앞에 의뢰하고 기도하여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서 하나님의 방법대로 풀어나가려 했겠지요. 그런데 야곱이나 그의 아들들은 서로 상대 탓만 하며 자신들의 육의 한계 안에서 해결책을 찾으려했습니다.
야곱은 이미 하나님의 역사도 체험해 보았고 자신을 통해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도 알고 있지요. 그런데도 지금 하나님을 찾고 의뢰하기 보다는 당장 눈앞의 현실을 바라보고 있으며 자기 입장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이런 극한 상황이 되니 결국 자기 신앙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지요. 이는 야곱만 그렇다 할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도 돌아보아야 합니다. 평상시에는 대부분 선한 말을 하려하고 믿음의 고백을 하려고 하지요.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생각해 주려하고 자기를 희생하는 모습도 나옵니다.
그러나 연단이 찾아오고 그것이 더 심해져서 극한 상황이 되면 그때는 비로소 속에 있던 마음이 드러나지요. 불평, 불만의 말을 하기도 하고 믿음 없는 말이나 의심하는 말을 내기도 합니다. 당장 눈앞에 있는 자기 유익을 먼저 생각하며 자기 입장을 주장하기에 급급해지지요. 주변을 돌아볼 겨를도 없어지고 세상의 지혜와 세상 방법에 의지하기도 하구요.
오늘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 은사집회에 오신 여러분 자신은 어떠했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무 문제도 없고 평안하게 신앙생활 할 때와 지금 어떤 문제가 있어서 하나님 앞에 나올 때와 여러분의 마음과 모습은 어떠하신지요?
막상 여러분에게 어떤 문제가 찾아오면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지 않았습니까? 그처럼 믿음 있는 것 같던 여러분의 마음에 두 마음이 일어나게 되거나 의심하는 생각이 틈타지는 않았는지요? 예전에는 상대의 입장도 생각해 주고 자신을 희생하던 모습이 이제는 ‘내 입장’만 생각하고 ‘내 유익’만을 구하려는 모습으로 변하지 않았습니까? 오늘 본문의 야곱의 모습을 통해 여러분 자신의 마음과 믿음은 얼마나 응답받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준비되었는지 스스로 점검하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유다를 비롯한 아들들의 말에 야곱에게 마침내 심경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꼭 아들들의 말을 듣고 그 말에 동의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지요. 10절에 “우리가 지체하지 아니 하였더면 벌써 두 번 갔다 왔으리이다” 하는 유다의 말에서 지금의 상황이 매우 급박함을 알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지체하게 되면 정말로 가족 전체가 기근으로 인해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될 상황인 것이지요. 그러니 이런 상황을 잘 아는 야곱으로서도 이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동안은 애굽에서 구해온 양식을 가지고 어떻게든 아껴가며 버텨보려 했지만 기근이 그칠 기미는 보이지 않고 점점 심해만 가니 이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지요. 만약 구해온 양식이 떨어지기 전에 기근이 그치기라도 했다면 야곱은 아들들을 다시금 애굽으로 보내려 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애굽에 잡혀있는 아들 시므온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시므온을 포기할 수도 있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기근이 계속되는 가운데 양식이 떨어지게 되니 이제는 하는 수 없이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막내 베냐민을 아들들과 함께 애굽으로 보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어차피 베냐민을 보내게 될 바에야 야곱이 차라리 일찍 결단을 내렸었다면 야곱은 물론이고 아들들의 마음의 고통도 덜고 가족들의 안위도 덜 위협받았을 텐데, 야곱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야 결국 베냐민을 내어주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러면서 나름대로 방법을 제시해 줍니다.
11-12절에 “그들의 아비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러할진대 이렇게 하라 너희는 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그릇에 담아가지고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예물을 삼을지니 곧 유향 조금과 꿀 조금과 향품과 몰약과 비자와 파단행이니라 너희 손에 돈을 배나 가지고 너희 자루 아구에 도로 넣어 온 그 돈을 다시 가지고 가라 혹 차착이 있었을까 두렵도다” 했지요. [차착: 어그러져서 순서가 틀리고 앞뒤가 서로 맞지 않음]
사람의 마음을 잘 아는 야곱은 이처럼 예물을 준비하여 가게 함으로써 애굽 총리의 마음을 풀고 혹시 있을지 모르는 오해를 풀어보려 했던 것입니다. 이 방법은 예전에 야곱이 자신의 형 에서의 마음을 풀기위해 사용했던 방법과 같은 것이었지요. 잠 21:14 전반절에 “은밀한 선물은 노를 쉬게 한다”는 말씀처럼 이러한 방법이 때로는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야곱의 방법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구하여 선의 지혜 가운데 나온 방법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지요. 야곱은 예전에 이미 하나님께서는 능히 사람의 마음도 주관하여 움직이신다는 사실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에서도 야곱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도록 했어야 하지요. 그런데 야곱은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자기 경험과 생각 가운데 이와 같이 예물을 준비하여 보냈던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이 예물을 준비해 보낸다 해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보냈을 때와 사람의 생각과 방법 가운데 보냈을 때와는 그로인한 역사가 전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해서 야곱은 아들들에게 예물을 준비케 하고 예전에 양식 값으로 치렀던 돈도 이번에는 배나 가지고 가게 함으로써 어찌하든 해(害)를 면해 보고자 하지요. 그러고 나서 14절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합니다. 이제야 비로소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지요.
이런 모습이 오늘날에도 많습니다. 막상 어떤 문제를 만나게 되면 세상에 의지하여 세상 방법을 다 동원해 보다가 그래도 안 돼서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이지요. 또는 세상 방법은 방법대로 다 하면서도 하나님 앞에도 나와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믿음이라 하실 수가 없지요. 참 믿음을 가지고 나온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으니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나왔을 때는 마음에 믿어지는 참 믿음이 올 수 없지요.
믿음으로 나온 사람은 온전히 하나님께 믿고 맡겼기 때문에 마음에 평안이 오게 됩니다. 응답의 확신과 함께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이지요. 그러니 “나는 치료받았다. 응답받았다”고 하는 믿음의 고백이 나오는 것이고요.
그런데 오늘 본문의 야곱은 하나님께 의지한다고 고백해 놓고는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합니다. 이는 에스더가 왕 앞에 나가면서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나갔던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말이지요. 야곱은 지금 자기가 할 방법을 다 해놓고 하나님 앞에도 은혜를 구하면서 ‘이렇게 했는데도 안 되면 어쩔 수 없지’라는 체념의 마음으로 이처럼 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며 맡긴다 했지만 마음에는 믿음의 확신이나 평안도 없기 때문에 이처럼 부정적인 믿음 없는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혹여 여러분 중에도 이런 분들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 문제를 해결받고 응답받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지 못하고 믿음으로 나오지 못한 것부터 회개해야 합니다. “저를 치료해 주세요, 저의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 이와 같은 기도를 하기에 앞서 “저의 믿음 없는 것을 용서하시고 도와 주소서” 이런 기도를 먼저 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왜 자신에게 이런 문제가 왔는지 그 원인을 찾아서 회개해야 하고요. 그러나 어떤 문제가 찾아왔다 해도 정녕 변함없이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나오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의 믿음대로 역사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이렇게 해서 막내 베냐민을 데리고 다시 애굽으로 들어가게 된 야곱의 아들들 앞에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지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계속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곱은 20년의 연단을 거치면서 자신을 철저히 깨뜨리는 과정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온전히 깨어진 것은 얍복강 앞에 이르러 정말 자기 힘과 능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극한 상황을 만났을 때이지요.
그런데 그처럼 ‘자기’가 철저히 깨어지고 부서졌던 야곱에게서 또다시 ‘자기적인 모습’이 나오고 있습니다. 독자 이삭이라도 주저함 없이 하나님 앞에 번제로 드렸던 아브라함과 비교할 때 야곱의 신앙이 얼마나 부족한지가 느껴지지요.
하지만 당시는 지금처럼 성령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마음 근본에 있는 육의 속성을 온전히 뽑아낸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와 신약의 성령시대와는 믿음의 단계를 구분하는 기준이 좀 다를 수 있지요.
야곱의 경우 아직 악의 모양이 남아 있고 육의 속성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성령시대인 오늘날로 보면 아직 온전한 성결의 차원에 이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야곱은 오랜 연단을 거치면서 중심의 간교한 속성을 뽑아내었지요. 구약시대에 본성 속에 깊이 내재되어있는 근본의 속성을 뽑아낸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에도 야곱은 그것을 해내었습니다.
또한 야곱의 하나님을 향한 중심만은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이 없었지요. 그의 성실과 끈기 그리고 목적한 바를 반드시 이루 어내는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 크게 인정받을 만한 모습이구요. 그의 이러한 장점들과 열매가 있었기에 야곱이 아직은 부족한 면이 좀 있었다 해도 당시로서는 3천층에 들어갈 자격을 얻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시대인 오늘날은 그렇지 않지요. 악은 모양도 없어야 하고 연단 중에라도 중심에서 나오는 기쁨과 감사의 향으로 선한 고백을 올려드릴 수 있는 모습이 되어야 비로소 3천층에 이를 수 있는 온전한 자격을 갖추었다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오늘 살펴본 야곱의 신앙을 통해 온전한 영의 차원이 어떤 것인지 깨달으셔서 여러분의 신앙을 신속히 영으로 변화시켜 나갈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온 영의 차원으로 더욱 힘차게 침노해 들어오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6-05-29 오전 10:24:09 Posted
2018-12-04 오후 1:46:15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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