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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창세기 강해 (2000년~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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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세기 강해(215)
설교자 당회장 이재록 목사 설교본문 창43:16-26 등록일자 2006.06.02
“요셉이 베냐민이 그들과 함께 있음을 보고 그 청지기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을 집으로 인도해 들이고 짐승을 잡고 준비하라 이 사람들이 오정에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니라 그 사람이 요셉의 명대로 하여 그 사람들을 요셉의 집으로 인도 하니
[18절부터 24절까지 중략]
그들이 여기서 먹겠다 함을 들으므로 예물을 정돈하고 요셉이 오정에 오기를 기다리더니 요셉이 집으로 오매 그들이 그 집으로 들어가서 그 예물을 그에게 드리고 땅에 엎드리어 절하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공생애의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제자들을 하나하나 부르십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예수님께서 제자로 부르실 때 그 부르심에 제자들은 과연 어떻게 나왔을까요? 마 4:18-19에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자, 20절에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했습니다. 또한 이어지는 21-22절에도 보면 예수님께서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제자로 부르셨을 때도 그들은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았다 말씀하고 있지요.
지금 이들은 오랜 시간 예수님과 함께하며 예수님과 사귐을 가진 것도 아니었고 예수님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진리를 가르침 받은 것도 아니었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직접 체험하며 깨달은 것도 아니었지요. 그럼에도 이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부르시자 자신의 모든 생업과 가족까지도 뒤로 하고 기꺼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따릅니다. 그 삶이 결코 순탄한 것이 아니었고, 이 땅에서 어떤 부나 명예나 권세를 누릴 수 있는 삶이 아니었지만 제자들은 자신들이 한번 선택한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끝까지 지켜내며 대부분이 순교에까지 이르지요.
그런데 이처럼 주님의 제자 된 삶을 살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먼저가 아니고 항상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일이 먼저가 되어야 합니다. 즉 ‘나’라고 하는 것이 없어야 하고, 어떤 개인적인 유익을 구하는 마음이나 자기 입장을 먼저 생각하려는 마음 등 조금의 사심(私心)도 없어야 하지요. 그래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을 수가 있습니다. 내가 살아 있고, 사심이 있을 때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도 없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셉과 그의 아버지 야곱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서 ‘자기’가 살아있고, ‘사심’이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점을 느낄 수 있지요.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듯이 야곱은 가족들이 다 굶주림으로 고생하는 상황에서도 자기가 사랑하는 베냐민만은 형들과 함께 애굽으로 보내려 하지 않습니다. 또한 꼬이고 복잡해지기만 하는 지금의 상황을 모두 아들들의 탓으로 돌리지요. 문제 해결에 있어서도 자기 경험과 방법을 동원하구요.
얍복 강에서 그처럼 철저히 낮아지고 ‘자기’를 깨뜨린 야곱이었지만 아직도 ‘자기’가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즉 자녀를 편애하는 마음, 자기 유익을 구하는 마음 등 이러한 ‘사심’에 가리워 더 큰 것을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처럼 ‘자기’가 살아있고, ‘사심’도 있다 보니 야곱은 지금 하나님께서 이 연단을 통해 과연 어떻게 역사해 가실지에 대해서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야곱이 좀 더 영적으로 깨어 있었고 온전히 ‘자기’를 깨뜨리고 비웠다면 이때도 뭔가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느낄 수가 있었겠지요. 적어도 먼저 하나님 앞에 기도하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고 하나님의 섭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자 했을 것이고요.
그러나 야곱은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과 방법에 의지하여 지금의 상황을 풀어 가보고자 합니다. 물론 하나님 앞에 의뢰한다고는 했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는 가운데 믿음으로 행한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긍휼을 바랄까하는 마음에서였지요.
반면에 요셉의 신앙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요셉도 만약 ‘자기’가 살아있고, 조금의 ‘사심’이라도 있었다면 지금과 같은 방법으로 일을 풀어가지는 않았겠지요. 자기 생각과 자기 방법으로 형들로부터 사과와 용서를 받아내려 했을 것이고, 모든 일들을 자기 뜻에 따라 급하게 처리해 나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요셉은 전혀 그렇지가 않지요. 어찌 보면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 같고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아 보이는데도 요셉은 서두르지 않고 일들을 진행해 나갑니다. 다음 시간에 나오겠지만 요셉은 형들이 자기 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자기 앞에 나왔을 때 ‘이제 됐구나!’하고 자신을 밝힌 것이 아닙니다. 동생 베냐민을 보았을 때 마음이 타는 듯하여 남몰래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던 요셉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을 억제한 채 베냐민을 다시 형들과 함께 고향으로 보내지요.
물론 그렇게 하면서도 거기에는 다 계획이 있었지만, 요셉은 이처럼 서두르지도 않았고 자기감정이나 정에 이끌리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마음을 주관하시는 대로 따랐고 위로부터 주시는 지혜 가운데 정확히 인도받아 일을 처리해 나갔지요. ‘자기’가 아직 남아 있던 야곱과는 전혀 다른 모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자기’가 없고 조금의 ‘사심’도 없을 때라야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와 시를 좇아 정확히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지요.
예를 들어 사업을 하시는 분들에게 만약 ‘자기’와 ‘사심’이 없다고 하면 성령의 음성과 주관을 밝히 받아 너무나 형통하게 그 길을 인도받을 수가 있습니다. 자기 생각과 지혜와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와 방법대로 따르게 되고, 자기 유익과 욕심을 좇는 것이 아니라 늘 정도(正道)를 좇게 되기 때문이지요.
또한 자기편에서 ‘때’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편에서 정하신 ‘때’를 정확히 주관 받아 따르게 됩니다. 그러니 어려움이 와도 피할 길을 얻게 되고 들어가야 할 때와 나와야 할 때 심어야 할 때와 거두어야 할 때도 정확히 주관 받아 형통하게 인도받지요.
이는 하나님의 일을 이룸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앞으로 되어질 일에 대해 어떤 내용을 말씀드리면 성도님들 중에는 그것을 자기편에서 해석하여 받아들이는 분들이 있지요. 그래서 ‘이렇게 하면 되겠다. 저렇게 하면 되겠다. 여기를 연결하면 되겠다. 누구를 연결하면 되겠다.’ 이처럼 자기 생각과 방법이 나옵니다.
또한 때와 시에 대해서도 ‘이때쯤이면 되겠다. 저때쯤이면 되겠다.’ 하며 자기 나름대로 정해 버리는 것이지요. 그러다 시간이 지나도 자기 생각했던 대로 되지 않으면 단에서 나온 말씀을 의심하거나 심지어 판단하는 경우도 있고요.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결코 사람의 생각과 방법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이 ‘형들을 회개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여 자기 생각과 방법대로 형들을 회개시키려 했던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관하심에 따라 하나님의 방법대로 인도받았던 것처럼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법과 주관대로 인도받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생각에 맞추어 조급하게 서둘러서도 안 되는 것이며 자기 방법대로 풀려고 해서도 안 되지요. 하나님께서 “이루리라” 말씀하시고 주관해 가시는 일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면 모든 것이 드러나며 이루어지게 됩니다. 환경이 조성되고, 도울 사람들이 드러나며 하나님의 방법대로 필요한 사람들이 연결되면서 결국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지요.
이는 여러분이 본교회가 세계를 이루어 나가는 과정을 보면서도 충분히 느끼셨을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세계 곳곳에서 성회를 이루기 위해 또는 앞으로 하나님의 큰 섭리를 이루기 위해 개인적으로 사람들을 만나서 사귄다거나 미리 사람의 방법대로 준비를 해온 것이 아닌데도 때가 되면 반드시 저를 도울 사람들이 드러났지요.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사람들을 예비해 두셨다가 때가 되어 필요할 때 드러내셨으며 그것도 사람이 생각하는 그 이상이었습니다. 사람의 방법으로는 불가능한 것도 하나님의 방법으로는 가능하도록 길을 여셨지요. 이런 간증들을 일일이 말씀드리자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사람 편에서 앞서서 사람의 생각과 방법을 동원한다거나 사람의 생각에 맞추어 조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요셉도 조급한 마음으로 자기 생각에 맞추어 ‘때’를 정하고자 했다면 단번에 형들의 용서도 받아내고 가나안 땅에 있는 가족들도 얼마든지 더 빨리 데려올 수가 있었지요.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방법이 아니었고 온전한 열매를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이며, 철저히 하나님의 주관하심에 따라 인도받았지요.
여러분도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는 물론이고 여러분 개개인에 대한 어떤 일에 있어서도 이처럼 하나님의 주관하심에 따라 인도받아 나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바로 잠 3:6에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성령님께서 친히 여러분이 가는 길을 지도하시고, 인도자가 되어주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으로 온 요셉의 형들은 앞으로 자신들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 아무래도 염려와 근심이 되었습니다. 특히 곡물 값으로 치렀던 돈이 다시금 자신들의 자루 속에 들어있던 일로 인해 어떤 오해가 있지 않을까하여 걱정이 되었지요. 이런 요셉의 형들을 요셉은 청지기에게 명하여 자신의 집으로 인도하도록 하였습니다. 함께 식사를 하기 위한 것이었지요. 하지만 이러한 영문을 모르는 요셉의 형들은 자신들을 애굽의 총리 집으로 인도하는 것에 대해 두려워합니다.
18절에 “그 사람들이 요셉의 집으로 인도되매 두려워하여 이르되 전일 우리 자루에 넣여 있던 돈의 일로 우리가 끌려드도다 이는 우리를 억류하고 달려들어 우리를 잡아 노예를 삼고 우리의 나귀를 빼앗으려 함이로다” 했던 것이지요.
그러면서 지난번에 있었던 일 즉 자기들의 자루 안에 돈이 도로 넣어져 있었던 일에 대해 변명하기 시작합니다. 그 돈을 누가 자신들의 자루 안에 넣었는지 자신들도 알지 못하는 일이며 그래서 이번에 양식을 살 돈은 물론이고 지난번에 들어 있던 돈도 함께 도로 가져왔다는 것이었지요.
그러자 요셉의 명을 받은 사람이 이르기를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너희 돈은 내가 이미 받았느니라” 하며 잡혀있던 시므온도 그들에게 데려다 줍니다. 그리고 물을 주어 발을 씻게 하고 나귀에게도 먹이를 주지요. 요셉의 형들이 염려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너무나 호의적으로 자신들을 맞아주는 것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실 사람들이 자기 육신의 생각 가운데 상대를 오해하며 이런 저런 판단을 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저 사람은 무서운 사람이다’ ‘저 사람은 깐깐한 사람이다’ ‘저 사람은 나를 싫어한다’ ‘저 사람은 누구만 좋아한다’ 이런 갖가지 육신의 생각들로 인해 자기 마음대로 오해하고 판단하지요. 자신의 생각과 한계 속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저 사람도 그럴 것이다’ 하며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도 하나님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 틀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 하는 경우가 있지요. 그래서 하나님을 때로는 무서운 하나님으로만, 때로는 무조건 용서만 하시는 하나님으로만 알고 있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자신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자신이 가진 틀에 맞추어 하나님에 대해 잘못 전하는 사람도 있고요.
저에 대해 전할 때도 이런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에 대해서도 자기 생각과 틀을 가지고 바라보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저에 대해 전할 때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를 오해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지요. 그래서 저에 대해 오해하고 있던 분들이 저를 직접 만나고 나면 자신들이 들었던 말들이 얼마나 잘못되었고 전하는 사람의 생각과 틀에 맞춘 것이었는지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생각과 틀을 가지고 상대를 오해하고 판단하는 것도 너무 큰 악이지만 더 나아가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여 다른 사람에게까지도 자신의 잘못된 생각과 틀을 심어 주는 일이 얼마나 큰 악인지를 깨달아야 하지요.
또 한 가지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은 여러분은 좋은 의도로 전한다 해도 그것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오해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분량과 듣는 사람의 믿음의 분량이 다를 수 있으며, 또한 여러분이 적어도 영으로 들어오기 전에는 여러분의 생각과 분별이 온전치 않으므로 여러분 편에서 아무리 좋은 의도로 말한다 해도 그것이 온전치 않을 수가 있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어 ‘당회장님의 의중은 이런 것이야’ 하며 여러분 편에서는 나름대로 가장 선하게 뜻을 헤아려 보려고 한다 해도 그것이 정말 제가 품은 선한 뜻과는 거리가 먼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영으로 들어오기 전에는 영의 마음, 온 영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깨달을 수가 없기 때문에 본인은 의도하지 않았다 해도 자칫 오해와 판단이 나올 수 있지요. 그러니 목자의 뜻과 의중에 대해서도 여러분이 분별한다 하며 함부로 판단하고 오해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때는 더더욱 주의해야 하는 것이고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 보면 요셉의 형들은 자신들이 혹여 오해를 받고 있지 않나하여 자신들을 변명하기에 급급합니다. 물론 그들의 입장에서는 괜한 오해를 받아 자칫 자신들에게 해가 오지 않을까하여 어떻게든 오해를 풀고자 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예전에 요셉이 억울한 누명을 썼을 때 전혀 변명하려 하지 않았고 두려워 떨지 않았던 것과 비교하면 지금 요셉의 형들의 신앙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요셉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어떠한 죄도 짓지를 않았기 때문에 그처럼 억울한 상황에서도 담대할 수가 있었지요. 신실하신 하나님, 반드시 공의 가운데 ‘의’를 드러내시는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앞길을 인도해 주실 것도 전적으로 믿고 의뢰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요셉의 형들은 그렇지가 못했지요. 그들은 예전에 요셉의 일에 대한 것은 물론이고 그 외에도 하나님 앞에 떳떳할 수 있는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시험이나 어려움이 왔을 때 ‘왜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난 것인가?’ 하며 두려워 떨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요일 3:21에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는다” 했는데 요셉의 형들의 신앙은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을 만한 모습이 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자신들이 스스로를 돌아보아도 책망할 것이 발견되는데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는 어떠하시겠습니까? 그러니 담대함도 오지 않고 오히려 두려움 가운데 거할 수밖에 없었지요.
여러분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아 책망할 것이 없는 신앙이 된다고 하면 그런 사람은 하나님 앞에 두려울 것도 없고 어떤 시험이 왔을 때 염려할 것도 없습니다. 요일 5:18에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분명히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하나님 앞에 범죄치 않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지켜 주실 것을 믿는 것이며 설령 시험이 왔다 해도 그것이 결국은 축복을 주시기 위한 시험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의 형들의 신앙은 어떤 환난이나 재앙을 만났을 때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신앙이었던 것이지요. 이런 요셉의 형들에게 요셉의 시종들은 그들의 나귀에게까지 먹이를 주는 호의를 베풀어 주었고 애굽의 총리와 함께 식사를 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도 알려 줍니다.
그리고 마침내 요셉이 집으로 오자 요셉의 형들은 정성스럽게 준비한 예물을 가지고 애굽의 총리인 요셉 앞에 드리며 땅에 엎드려 절을 하지요. 자기들 나름대로는 이처럼 예물과 함께 자신들을 지극히 낮추는 방법을 통해 애굽 총리의 마음에 맞춰보려 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육적인 방법도 때로는 효과를 볼 수가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자기 생각 속에서 나온 방법이었지요. 하나님을 먼저 의뢰하기보다 자기 생각과 경험이 앞섰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도 바로 이러한 분야가 깨어지기를 원하시지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저는 하나님을 먼저 의뢰했습니다.” 말씀하실 분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자신은 하나님 앞에 기도도 했고, 하나님을 의뢰하여 믿음으로 행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비록 겉으로 행하는 모습은 똑같아 보여도 중요한 것은 ‘그렇게 행하는 사람의 마음이 과연 어떠한 마음인가?’ 입니다. 입술로는 “믿습니다.” 고백한다 해도 정말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마음으로 고백하는 사람도 있지만, 입술의 고백과는 달리 그 속마음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요.
어떤 일을 할 때 ‘나는 상대를 위해서 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정말 선한 마음으로 하는 것일 수도 있으나 그렇지 않은 마음으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똑같이 상대를 칭찬하는 말을 해도 정말 중심에서 함께 기뻐하는 마음으로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마음으로 하는 경우도 있고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어떤 일을 하든지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기 원하십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나 그의 아들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같이 말했지만 실상은 자기들 나름대로의 방법에 의존하려 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 방법이 잘 통했을까요?
다음시간에는 요셉의 형들의 입장에서는 잘 풀리는 것 같아 보이던 상황이 오히려 더 곤란한 상황으로 빠져들어 가게 되고, 이제 더 이상 자신들의 힘과 방법으로는 어찌해 볼 수 없는 막다른 상황에 처하게 되는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여러분은 모든 일에 아버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를 정확히 주관 받을 수 있어야 함을 깨우치시기 바랍니다. 자기 욕심과 조급함이 있게 되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오기 전에 자기 생각과 방법이 앞서므로 자칫 일을 그르치게 되는 경우가 많지요.
예를 들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후사를 주시겠다고 한번 말씀하셨기 때문에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잠잠히 하나님의 정하신 때를 기다렸습니다. 반면에 아내 사라는 후사를 이으려는 급한 마음에 그만 사람의 방법을 좇아 행했지요. 자기 몸종을 아브라함에게 첩으로 주어 후사를 이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것이 자신에게 큰 고통으로 돌아왔던 것을 볼 수 있지요.
그러므로 마음이 선한 사람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읽을 수 있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를 좇아 주관해 주실 때까지 참고 인내하며 기다릴 줄도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정확히 받아 나갈 수가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여러분도 범사에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깨달을 수 있어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와 시를 기다릴 줄 아는 선한 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통해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이 행동한다 해도 그 중심의 향은 각각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으시기 바랍니다.
연단 중에라도 정녕 마음 중심에서 기뻐하고 감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겉으로는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같이 행동하지만 실상 그 마음속은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시는 것이며 진실한 마음 중심의 향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받고 인정받은 믿음의 선진들은 모두가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의뢰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과 진실의 향을 하나님 앞에 올려 드렸던 분들이었지요.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는 시 51:6 전반절에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신다”는 말씀처럼 진실한 중심이 되셔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신뢰받을 수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6-06-05 오후 10:18:17 Posted
2018-12-04 오후 1:51:27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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