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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창세기 강해 (2000년~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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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세기 강해(216)
설교자 당회장 이재록 목사 설교본문 창43:27-34 등록일자 2006.06.09
“요셉이 그들의 안부를 물으며 가로되 너희 아버지 너희가 말하던 그 노인이 안녕하시냐 지금까지 생존하셨느냐 그들이 대답하되 주의 종 우리 아비가 평안하고 지금까지 생존하였나이다 하고 머리 숙여 절하더라
[29절부터 32절까지 중략]
그들이 요셉의 앞에 앉되 그 장유의 차서대로 앉히운 바 되니 그들이 서로 이상히 여겼더라 요셉이 자기 식물로 그들에게 주되 베냐민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오배나 주매 그들이 마시며 요셉과 함께 즐거워하였더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양식을 구하기 위해 막내 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다시 애굽으로 온 형들을 만난 요셉은 먼저 아버지 야곱의 안부부터 묻습니다. “너희 아버지 너희가 말하던 그 노인이 안녕하시냐, 지금까지 생존하셨느냐” 하지요. 지난 번에 형들이 처음으로 양식을 구하기 위해 애굽에 왔을 때 그들을 통해 아버지 야곱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지금은 다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였기에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안부가 궁금했던 것입니다.
요셉은 자신을 지극히 사랑해 주시던 아버지 야곱과 헤어진지가 20년이 넘었으니 얼마나 아버지가 보고 싶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요셉은 지난번에 형들을 만났을 때 그 정을 억제하고 인내하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주관하심에 순종했던 것이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때로는 정과 욕심을 철저히 끊어 버리고 하나님의 주관하심을 따라야 합니다.
그렇다 하여 가족에 대한 사랑과 정을 갖는 것이 잘못된 것이고 비진리라는 뜻은 아닙니다. 당연히 가족에 대해서도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정성을 다해 섬기며 위해주어야 하지요. 딤전 5:8에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하여 주 안에서도 자기 가족을 돌아보아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뜻과 일은 뒤로 하고 육적인 정과 욕심을 먼저 좇는다는 데 있지요. 마 12:50에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말씀하신 대로 진정한 형제와 자매와 가족은 주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육적인 관계에 매여서 하나님의 뜻보다는 육적인 정과 욕심에 이끌린다면 이는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은 것이지요.
내 것, 내 가족, 내 사람, 내 편 등 이러한 것들을 먼저 생각하고 좇는 것은 결국 육적인 정과 자기적인 유익을 구하려는 욕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렇게 육적인 정과 욕심을 좇는 사람은 하나님 편에서도 믿고 쓰실 수가 없지요. 여러분도 과연 범사에 무엇을 먼저 생각하며 무엇을 우선으로 하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에 대한 마음과 형제들에 대한 마음이 너무나 깊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했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원했지요. 그렇지만 가족에 대한 애틋한 마음과 사랑이 변하거나 사라진 것이 아니었기에 형제들을 다시 만났을 때 이처럼 아버지 야곱의 안부를 먼저 물었던 것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우선으로 했지만 그러면서도 가족 또한 지극히 사랑했던 요셉의 마음을 이 한 마디에서 느낄 수 있지요. 아버지 야곱의 안부를 묻는 요셉의 질문에 요셉의 형들은 “주의 종 우리 아비가 평안하고 지금까지 생존하였나이다” 대답합니다. 요셉 즉 애굽의 총리 앞에서 이렇게 자신들을 ‘주의 종’이라 말하면서 스스로를 지극히 낮추고 있으며, 거듭 머리를 숙여 절을 하지요. 지금 요셉의 형들이 애굽의 총리에게 어떻게든 잘 보이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이처럼 먼저 아버지 야곱의 안부를 확인한 후에 이제 눈을 들어 형제들 중에서 아우 베냐민을 찾지요. 형제 중 유일하게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동생 베냐민을 헤어진 지 22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성도님들, 왜 22년만인지 아시지요? 요셉이 애굽에 종으로 팔려와 총리가 될 때까지 보낸 시간 13년과 7년의 풍년이 지났고 지금은 흉년 2년째입니다. 이때가 흉년 2년째라는 것은 창 45:6에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는 말씀을 통해 알 수 있고요.
이렇게 오랜만에 동생 베냐민을 본 요셉은 그동안 참았던 감정이 복받쳐 오르며 타는 듯한 마음을 어찌할 줄 몰라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 울지요. 하지만 이것은 서러움의 눈물도 아니었고, 단지 감정을 못 이겨서 흘린 눈물도 아니었습니다. 물론 동생에 대한 그리움의 눈물이기도 했지만, 그것은 무엇보다도 감사의 눈물이었지요.
동생이 그 오랜 세월동안 형 없이도 잘 자라 준 것에 대한 감사였고 그래서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게 된 것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동생을 지켜주신 것과 오늘날 이와 같이 다시 만날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였지요.
이처럼 요셉은 모든 상황을 감사의 눈으로 바라보았다는 사실입니다. 요셉은 단순히 결과가 좋을 때만 감사한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순간마다 그 상황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헤아리고자 했지요. 그래서 범사에 감사의 조건을 찾으며 모든 것에 감사할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요셉은 단순히 육적인 감정에서 눈물을 흘린 것이 아니라, 이처럼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축복하신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감사하는 마음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과연 어떤 눈물을 흘리고 계시는지요? 감사와 기쁨과 소망의 눈물이십니까? 아니면 서러움과 한탄과 슬픔의 눈물이십니까? 여러분이 아무리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해도 그것이 육적인 감정이나 탄식의 눈물이라면 하나님께서는 받으시지 않습니다. 물론 탄식의 눈물 중에도 회개의 눈물이나 영혼들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흘리는 눈물도 있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육적인 슬픔과 서운함, 서러움 등으로 인한 눈물이라면 하나님 앞에서 가치 있는 것이 될 수 없지요.
어떤 분은 눈물을 펑펑 쏟으며 회개한다고 말은 하지만 정녕 마음 중심에서는 돌이키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따라서 눈물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눈물에 담긴 의미가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똑같은 감사와 기쁨의 눈물이라도 그 안에 담긴 마음의 농도는 믿음의 분량과 마음을 영으로 이룬 정도에 따라 다 다르지요. 그렇기 때문에 수백, 수천 사람의 눈물보다도 때로는 한 사람의 눈물이 하나님의 마음에 더 진한 감동을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세월이 아무리 오래 지나도 하나님 앞에 감사와 기쁨의 눈물이 마르지 않는 신앙생활, 오히려 눈물에 담긴 사랑의 깊이와 감동이 날이 갈수록 더 진해질 수 있는 신앙생활, 바로 이러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29절에 보면 동생 베냐민을 만난 요셉이 그에게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 말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때 요셉의 형들이 영적인 감각이 있었다면 애굽의 총리가 하는 이 말을 놓치지 않았겠지요. 애굽 총리가 누군지 모르는 형들의 입장에서 볼 때 애굽 사람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는 자체가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예전에 요셉의 형들이 처음 애굽의 총리를 만났을 때도 요셉은 형들에게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니”라는 말을 했었지요. 이는 요셉의 입장에서 형들로 하여금 뭔가 힌트를 얻을 수 있도록 실마리를 던져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요셉의 형들은 요셉이 던진 말을 그냥 흘려 버리고 말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지금 요셉의 형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모면해 볼까 하는 번민과 두려움으로 인해 온통 육신의 생각 가운데 잠겨 있었지요. 그러니 요셉의 말에서 어떤 실마리를 찾기 보다는 자신들에게 ‘또 무슨 말을 할까’ 하는 걱정과 염려가 앞서 있었습니다. 즉 자신들의 육신의 생각에 가로막혀 있어서 영적으로 깨어있을 만한 상황이 아니었지요.
이는 여러분들도 한번 잘 깨달아 보아야 할 분야입니다. 예를 들어 생각이 전혀 딴 곳에 가있으면 아무리 답을 손에 쥐어 주려고 해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요. 힌트를 주고 돌려서 말하고 심지어는 직접 말을 해줘도 자기 생각에 가로막혀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엉뚱한 동문서답이 나오는 것이고요.
이처럼 자기 생각 곧 육신의 생각에 잠겨있는 사람은 영적인 깨우침이 올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똑같은 이야기를 듣고도 자기 생각에 맞추어 잘못 생각하여 오해하고 판단하는 경우까지 있지요. 그러므로 자기 생각 곧 육신의 생각이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깨달아 영으로 들어가는 데 있어서 얼마나 큰 장애물이 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영은 이런 것이다’ 말해 주어도 그것을 자기 생각의 틀에 맞추려고만 하지요.
저는 지금까지 이런 경우들을 참 많이 경험했습니다. 저와 대화할 때는 분명히 ‘아’라고 했으면서 나중에 가면 ‘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요. 어떤 것에 대해 아무리 깨우쳐 주려 해도 계속 딴 소리만 하며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요.
저에게 어떤 깊은 의중이 있는데 그것을 파악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라면 ‘내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서 그랬구나’ 하고 이해하며 넘어갈 수 있겠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하세요” 말했을 때 그것을 자기 생각 가운데 “저렇게 하세요”라고 듣는 경우가 있다는 말입니다. 또 심지어 어떤 경우는 자기 생각 가운데 ‘당회장님의 의중은 이것이야’ 하며 자기 마음대로 제 의중까지 정해 버리지요. 이런 분야들에 대해서는 금번 구역장, 조장, 지역장 교육 때 좀 더 자세히 다루게 되겠지만 ‘내가 혹시 그런 사람이 아닌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순종할 마음만 있다면 성령의 주관과 인도를 얼마든지 받을 수 있습니다. 순종할 마음이 없기 때문에 주관을 해주셔도 순종이 안 나오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결국 자기 뜻과 유익을 좇는 것입니다. 그러나 순종해 드릴 마음 자세가 되면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고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지요.
이는 사람과의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방의 말에 순종할 마음이 있다면 상대방의 의중도 깨달을 수가 있지요. ‘뭘 원하는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런 것들도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순종할 마음이 아닐 때는 상대가 아무리 ‘이렇다, 저렇다’ 말해도 결국 자기 보기에 좋은 대로 하고 말지요. 애초부터 상대방의 말을 들을 마음도, 그 말에 순종할 마음도 아니기 때문에 자기 원하는 대로 하고 마는 것입니다.
여기에 또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마음에 선이 임해있어야 만이 하나님의 뜻도 깨달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편에서 아무리 순종하려는 마음이 있다 해도 하나님의 선의 깊이를 느끼지 못하면 온전한 순종이 나올 수 없지요. 예를 들어 마음에 선이 50% 밖에 임해있지 않은 사람은 아버지 하나님의 선에 대해서도 50% 정도밖에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순종하려고 해도 아버지 하나님의 선에 100% 맞추어 온전한 순종이 나올 수는 없다는 말이지요.
저도 이런 경우들을 많이 체험해 보았습니다. 제가 어떤 일을 지시할 때 그것을 받아 행하는 일꾼 편에서, 제 마음을 100% 헤아려서 순종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쁘고 행복하겠습니까? 그런데 일꾼 편에서는 최선을 다해 순종한다고 하지만 정말 제 마음을 헤아려서 순종해 주는 경우는 극히 드물지요.
전에 한번은 일꾼들 편에서 앞으로는 사무실 내에서 사용하는 전열기구들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방침에 대해 건의를 해온 적이 있었습니다. 화재와 안전사고를 예방하려는 차원에서 그런 조치를 취하려는 것이었지요. 그 취지가 좋고, 또 업무를 보는 사무실 안에 업무에 필요하지 않은 전열기구를 두는 것도 가하지 않겠기에 그렇게 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들으니 모든 사무실에 그 원칙을 일률적으로 적용했다는 것이었지요. 제 입장이라면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을 것 같은 경우에 대해서도 당회장님의 결재사항이라는 명분을 들어서 각 부서의 특성이나 상대를 고려하지도 않은 채 동일하게 조치를 취했던 것입니다. 물론 제가 지금 어떤 차별이나 예외를 두는 것이 옳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그 일을 추진하는 일꾼 편에서 정말 제 마음을 헤아렸다면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지요. 더욱이 그 일이 제 결재사항으로 진행이 되어지는 일이었다고 하면 당연히 한번쯤 더 목자의 입장과 목자의 마음을 헤아려 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도 바로 이처럼 마음을 헤아려 순종할 수 있는 일꾼을 찾으십니다. 물론 순종하려는 마음이라도 있는 사람과 아예 순종할 마음이 없는 사람 중에라면 당연히 순종할 마음이라도 가진 사람이 훨씬 낫지요. 그러나 온전한 순종이 되려면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과 목자의 마음을 헤아려서 하는 순종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순종하려는 의욕이 앞선다 해도 하나님과 목자의 마음과 뜻을 헤아리지 못하면 오히려 누(累)가 되는 경우도 있지요. 그러므로 온전한 순종을 하려면 여러분이 그만큼 아버지 하나님을 닮은 선의 마음을 이루어서 아버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깨닫고 헤아릴 수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셉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마음도 되어 있었고 그의 선한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기에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해 나갈 수가 있었지요. 자기 보기에 좋은 방법을 취해나갔다거나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하며 아직 때가 되기 전에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면 하나님의 뜻과 섭리는 온전히 이루어질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토록 보고 싶던 동생 베냐민까지 만나게 되었으니 ‘이제 이쯤에서 내 정체를 밝혀도 되겠지’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요셉은 타는 듯한 정을 억제하면서도 끝까지 하나님의 주관하심에 순종했지요.
따라서 여러분도 ‘과연 내가 얼마나 하나님의 주관하심에 순종하기 위해 인내하고 오래참았는지’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편에서 마음이 조급하지는 않았는지? 시간이 지나면서 두 마음을 품지는 않았는지? 자신이 정한 때에 맞추어 행해나가지는 않았는지? 바로 이러한 분야들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현실은 너무 더디고 어려운 것같아 보인다 해도 하나님의 주관하심에 순종하려는 사람은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오기까지 잠잠히 참고 인내하며 기다리므로 결국은 열매를 따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요셉 역시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를 기다리기 위해 정을 억제하고 다시 형제들 앞에 나와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되지요.

그런데 이때 32절에 보면 “그들이 요셉에게 따로 하고 그 형제들에게 따로 하고 배식하는 애굽 사람에게도 따로 하니 애굽 사람은 히브리 사람과 같이 먹으면 부정을 입음이었더라” 했습니다. 요셉은 윗사람이니 따로 음식을 차려드리는 것이 당연한 일일 수 있지만, 요셉의 형제들과 배식하는 애굽 사람들에게 각각 따로 음식을 차린 이유는 그런 것이 아니었지요. 그것은 바로 애굽 사람들은 히브리 사람과 같이 먹는 것을 부정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해 요셉이 애굽에서 어떤 마음과 행함으로 그들과 화평을 이루며 살아갔는지를 깨달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성도 여러분, 요셉이 히브리 사람이라는 사실은 이미 애굽 사람들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애굽의 총리로서 막강한 권세를 가진 사람이었지요. 그러니 애굽 사람들은 요셉이 히브리 사람인 것은 알지만, 그를 차별하여 음식을 함께 먹지 않을 수도, 그렇다고 함께 먹을 수도 없는 난처한 상황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애굽 사람들이 요셉이 히브리 사람이라 하여 그와 함께 음식을 먹지 않으려 했을 때 요셉이 그들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면 요셉과 애굽 사람들의 사이는 불편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런데 지금 요셉을 시중드는 애굽 사람들이 요셉과도 음식을 따로 차렸을 뿐만 아니라 히브리 사람인 요셉의 형들과 음식을 따로 차렸다는 것은 요셉이 이러한 차별적인 행동을 인정해 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즉 요셉은 자신의 권세를 가지고 애굽 사람들이 지키려는 이러한 관습까지 억지로 무시하지 않았다는 말이지요.
요셉이 만약 자신을 섬기는 애굽 사람들에게 “나도 히브리 사람인데, 너희들이 어찌 내 앞에서 히브리 사람을 차별할 수 있느냐” 하며 그들에게 억지로 히브리 사람인 형들과 함께 먹도록 시켰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요셉의 권세가 두려워서 요셉 앞에서는 그처럼 차별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애굽 사람들의 마음에는 점점 요셉에 대한 반감이 자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지요. 그들의 관습이나 종교적인 규례까지도 존중하며 인정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요셉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결코 하나님을 서운케 하는 일이나 그들의 종교와 타협하는 일은 하지 않았지요. 다만 요셉은 이방인들 가운데 살아야 하는 상황에서 자기 권세를 앞세워 그들의 관습과 규례를 무시하거나 그들로 하여금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을 억지로 믿도록 강요하는 행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요셉은 애굽의 총리를 하면서도 늘 그 나라 사람들과 화평을 이루었고 그들로부터 어떠한 시기나 질투, 미움 등의 공격을 받지 않을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물론 요셉은 이방인 중에 살면서도 늘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나타내 보였습니다. 그래서 애굽 사람들도 요셉이 믿는 하나님을 인정했고 요셉의 말도 전적으로 신뢰하며 따랐던 것이고요.
그러나 만약 요셉이 선지자의 사명을 띠고 애굽 땅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전해야 했다면 당연히 그는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하나님을 선포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요셉의 사명은 그런 것이 아니고 또 애굽에 하나님을 전해야 하는 상황도 아니었기에 요셉은 그들과 부딪히지 않으면서 화평을 이루었지요. 요셉을 섬기는 애굽 사람들도 바로 이처럼 자신들의 입장까지 헤아려 주는 요셉의 선하고 넓은 마음을 느꼈고, 그래서 요셉을 두려워하거나 싫어한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부터 존경하며 섬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과연 주 안에서는 물론이고 이방인들에게서도 이러한 요셉처럼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으신지요? 예를 들어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주변 사람들에게 열심히 하나님을 전하려 했지만 오히려 그들이 불편해하므로 화평이 깨어졌다면 이런 경우 혹여 여러분의 방법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한번 돌아보아야 합니다.
물론 복음을 전하다 보면 모두가 순순히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여러분 편에서 지혜롭지 못하여 오히려 복음전할 길을 막는 경우가 있지요. 가령 여러분 편에서 믿지 않는 상대에 대해 어떤 편견을 가지고 대한다거나 혹은 여러분의 의를 가지고 상대를 대하게 되면 상대방에서 오히려 거부감을 가지게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또는 이런 경우도 있지요. 여러분 편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또한 상대방의 영혼을 위해 한 것인데 오히려 상대가 싫어하고 불편이 여기므로 화평이 깨어지는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요? 이런 경우 여러분이 정말 상대의 입장에 서서 상대를 이해하며 화평을 좇으려 했는지, 아니면 내 입장에서만 어떻게든 상대를 설득하여 굴복시키려 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지혜롭고 덕스럽게 상대를 포용하려 했는지, 아니면 “내 것이 좋은 것이니까 당연히 내 것을 따르라”고 하며 상대에게 우겨 넣듯이 강요하지는 않았는지, 여러분의 모습을 오늘 본문의 요셉과 비교해서 돌아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요셉은 형제들과 식사를 하면서 형제들의 장유의 차서대로 즉 형과 아우의 순서대로 앉힙니다. 애굽의 총리가 요셉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형제들은 요셉이 이처럼 장유의 차서를 따라 정확히 자신들을 앉히는 것을 보며 이상해했지요. 그러나 이때도 요셉의 형들은 그 이상의 깨달음은 받지 못했습니다. 그저 ‘어떻게 우리 형제의 위아래를 알았지’하며 이상하게 생각할 뿐이었지요.
그렇다면 이때 왜 요셉은 형제들을 굳이 이처럼 장유의 차서대로 앉힌 것일까요? 요셉에게는 바로 질서와 도리를 좇아 형제들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동생 베냐민만 가까이 두고 또 자신과 그래도 관계가 좀 나았던 형들을 자신의 가까이에 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질서와 도리를 좇아 섬겼던 것이지요. 요셉은 형들에게 어떠한 감정도 없었기에 이처럼 섬김의 마음으로 행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34절에 보면 요셉이 자기 식물을 형제들에게 줌에 있어서 베냐민에게만 5배나 주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요셉은 왜 그랬던 것일까요? 베냐민에 대한 편애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어떤 영적인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살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요셉이라는 인물을 통해 그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해 나갔는지를 듣고 계십니다. 바로 하나님의 뜻에 무조건 순종하려는 마음이 있었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헤아리고 깨달을 수 있는 선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온전한 순종이 가능했다고 했지요. 또한 그가 어떻게 애굽 사람들 가운데 살면서도 그들과 화평을 이루어갈 수 있었는지 들었습니다.
바로 덕스러운 마음과 섬김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오히려 애굽 사람들로부터도 존경과 사랑을 받을 수가 있었지요. 이밖에도 요셉을 통해 본받아야 할 여러 가지 영적인 면들이 있겠지만 여러분이 오늘 말씀을 통해 이 두 가지 분야를 확실히 깨닫고 명심한다면 그것만으로 큰 능력이 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약 1:23-25에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는 말씀대로 들은 말씀을 꼭 행하는 분들이 되셔서 영육 간에 넘치는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6-06-12 오전 11:14:19 Posted
2018-12-04 오후 1:46:15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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