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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창세기 강해 (2000년~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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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세기 강해(217)
설교자 당회장 이재록 목사 설교본문 창43:33-44:34 등록일자 2006.06.23
“그들이 요셉의 앞에 앉되 그 장유의 차서대로 앉히운바 되니 그들이 서로 이상히 여겼더라 요셉이 자기 식물로 그들에게 주되 베냐민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오 배나 주매 그들이 마시며 요셉과 함께 즐거워하였더라
[44장 1절부터 33절까지 중략]
내가 어찌 아이와 함께 하지 아니하고 내 아비에게로 올라 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비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셉의 형들은 양식을 구하기 위해 어렵게 동생 베냐민까지 데리고 다시 애굽으로 오기는 했지만 막상 애굽의 총리를 만나려고 하니 염려와 걱정이 앞섰습니다. 지난번처럼 어떤 예상치 못한 일로 인해 또다시 곤경에 빠지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였지요. 더욱이 지난번에 곡물 값으로 치렀던 돈이 고스란히 자신들의 곡물자루에 들어 있었던 일로 인해 어떤 오해가 있지 않을까 걱정도 되었고요.
그러나 이러한 염려와 걱정은 모두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시 115:11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말씀하고 있지요. 따라서 하나님을 경외하여 의지하는 사람은 벧전 5:7 전반절에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는 말씀대로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기게 됩니다.
하지만 요셉의 형들은 하나님께 맡기기보다는 자신들의 생각과 방법을 동원하여 어떻게든 이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마음이 앞섰기에 애굽의 총리를 만남에 있어서 이처럼 많은 염려와 걱정이 따랐던 것이지요.
그런데 막상 애굽의 총리를 만나자 예상했던 것과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습니다. 애굽의 총리는 자기 식물까지 나눠 주며 호의를 베풀어 주었고, 이에 야곱의 아들들도 함께 마시며 즐거워하였지요. 요셉의 입장에서는 비록 형제들이 자신을 알아보지는 못한다 해도 너무나 오랜만에 함께 식사를 하게 된 형제들을 마음 중심에서부터 섬겼던 것입니다. 평안한 분위기 가운데 극진히 대접해 주었지요.
그런데 이때 요셉은 자기 식물을 줌에 있어서 특별히 동생 베냐민에게는 다른 형들보다 다섯 배나 주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왜 굳이 다섯 배를 준 것일까요? ‘다섯 배’라는 숫자에는 요셉이 생각할 때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의미가 담겨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요셉은 20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동생 베냐민에게 형으로서의 도리를 못했습니다. 비록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해도 동생 베냐민에게 아무 것도 해주지를 못했지요. 더욱이 형도 없이 혼자서 그 오랜 세월을 이복형들 사이에서 지내야 했던 것에 대해 안쓰럽기도 하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요셉은 바로 이러한 미안한 마음으로 인해 어떻게든 베냐민에게 보상해 주고 싶었지요. 그래서 요셉은 형제들에게 식물을 나눠줌에 있어서 동생 베냐민에게는 형들보다 오 배나 줌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굳이 다섯 배를 주었던 이유는 요셉이 생각하기에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지요. 세 배를 줄 수도 있었고, 열 배를 줄 수도 있었으나 요셉의 마음에는 다섯 배가 주관이 왔고 요셉은 주관대로 행했습니다. 자기 생각이나 육적인 정 또는 욕심으로 행했던 것이 아니라 정확한 주관에 따라 행했던 것이지요.
요셉은 7년 간의 흉년을 대비할 때도 7년 풍년 수확의 오분의 일을 저장하도록 했었는데 이때도 ‘오분의 일’을 저장하도록 한 것은 그가 애굽의 모든 상황을 정확히 꿰뚫어 보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역시 하나님의 주관에 따랐던 것입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넉넉하다’라는 주관을 받아 행했다는 말이지요.
이는 ‘십일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의 일조를 하나님 앞에 드리게 된 시작은 아브람으로부터 비롯되었지요. 아브람은 전쟁으로 인해 사로잡힌 조카 롯을 구해서 돌아오는 길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살렘 왕 멜기세덱을 만납니다. 이때 아브람은 자신의 손에 대적을 붙여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며 자신이 얻은 것 중에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지요. 여기서 ‘멜기세덱’이 어떤 존재인지는 예전에 창세기 강해를 통해 이미 설명 드렸습니다. 이처럼 아브람이 멜기세덱에게 자신이 얻은 것의 십분의 일을 드린 것이 바로 십일조의 시작이라 할 수 있지요.
그리고 창 28:22에 보면 야곱이 하나님 앞에 십일조에 대해 정식으로 서원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고백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아브람은 멜기세덱에게 왜 이처럼 십분의 일을 드렸던 것일까요? 십분의 이를 드릴 수도 있었고, 십분의 오를 드릴 수도 있었는데 말입니다.
이 역시 하나님께서 주관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얻는 모든 소득은 사실 전부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지요.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십의 이조를 드리라고 하실 수도 있고 혹은 십의 삼조나 그 이상을 드리라고 얼마든지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다만 십의 일조만을 드리도록 하셨지요. 그것만으로도 우리들이 하나님의 물적 주권 즉 모든 축복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인정해 드린다는 의미로 받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소득의 십의 일을 드릴 때 ‘십분의 일’이라고 하는 숫자는 단순한 숫자가 아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약속된 하나의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는 숫자이지요.
그렇다면 요셉은 애굽 땅에 와서 사는 동안 과연 십일조에 대해 어떻게 했을까요? 성도 여러분, 요셉은 비록 어린 나이에 이방 땅으로 팔려와 오랜 세월을 보냈지만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 야곱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하는 십일조에 대해 듣고 배운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늘 자신에게 들어온 수입에서 하나님 앞에 돌려져야 할 몫을 구분했지요.
그렇다고 어디 제단을 쌓아 드릴 수 있는 곳이나 성전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항상 마음에서부터 하나님의 것은 구분했습니다. 그러니 요셉이 하나님 앞에 번제물로 올려드리지 않았다하여 또는 성전에 예물로 드리지 않았다 하여 하나님께서 그에게 “십의 일조를 드리지 않았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지요.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마음 중심의 향으로 드린 십일조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 중심의 향을 담아 드리는 것은 오늘날에도 너무나 중요하지요. 십의 일조는 우리들 편에서 하나님의 물적 주권을 인정해 드리는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라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인데 그렇다하여 단지 십의 일조를 드리는 행함 자체만으로 나의 할 바를 다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십의 일조를 드릴 때 과연 어떤 마음과 어떤 중심의 향으로 하나님 앞에 올려드리느냐가 더 중요하지요. 정말 자신의 모든 축복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음을 인정하고 마음 중심에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려질 때, 또한 결코 억지로나 인색함으로가 아니라 자원하는 기쁜 마음으로 드려질 때라야 그것이 하나님 앞에 올려지는 아름다운 향이 되어 참된 십일조로 드려진다는 사실입니다.
더욱이 말 3:10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씀하셨지요. 이 말씀대로 하나님께서는 분명 십일조에 대해서는 시험해 보라고까지 말씀하셨지만 만약 마음의 향도 실리지 않은 채로 단지 형식적으로만 십일조를 드린다면 그런 십일조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온전한 십의 일조를 드렸다’고 인정해 주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녕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온전한 십의 일조를 드렸을 때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약속하신대로 갚아주십니다.

성도 여러분, 그런데 요셉이 베냐민에게 다섯 배씩이나 주었던 데에는 매우 중요한 영적인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행한 대로 갚아 주신다는 것이지요. 지금 요셉 앞에 나온 열한 명의 형제들 중에 요셉을 애굽에 종으로 파는 일에 동참하지 않았던 유일한 사람이 바로 베냐민입니다. 그것은 물론 베냐민이 그 자리에 함께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설령 베냐민이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 해도 그는 자신과 한 어머니로부터 난 형 요셉을 애굽에 종으로 파는 일에는 결코 동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요셉의 형제들 중에 베냐민만이 형제를 종으로 파는 크나큰 악에 동참하지 않은 사람이었던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지금 바로 여기에 대해 베냐민을 나머지 형들과 구별하여 축복해 주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교훈이 담겨있지요. 예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어떤 육체의 일을 행하여 그에 대한 보응으로써 연단이나 시험을 받게 되면 그때는 회개하고 돌이켰다 해도 잘해야 원상회복밖에 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육체의 일로 인해 물질적인 어려움이 왔다고 하면 회개하고 돌이켰다 해도 예전의 수준을 회복하는 것만으로 감사해야 하지요. 그리고 이제 원점부터 다시 시작해야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때부터 다시 심고 행하는 만큼 그 이상의 축복을 받아갈 수는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많은 시간을 이미 허비했고 더 크게 축복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어렵게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지요.
요셉의 형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셉의 마음에서는 이미 형들을 다 용서했지만 그렇다 하여 그들에게 어떤 축복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요셉이 축복을 주고자 하여도 하나님께서 주관해 주지를 않으십니다. 반면에 베냐민의 경우는 형들과 달리 요셉 편에서 얼마든지 큰 축복으로 줄 수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요셉이 베냐민에게 축복 주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도 그에게 마음껏 축복해 주도록 마음을 주관해 주시지요.
따라서 악에 동참하지 않는다는 것, 하나님 앞에 큰 죄의 담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는 여러분이 지난 98, 99년도의 연단을 겪으면서도 분명히 경험해 보았지요. 그 당시 목자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지 않고 어떠한 미혹에도 귀 기울이지 않았으며, 단에서 당부 드린 대로 비진리는 보지도 듣지도 않은 분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축복으로 갚아 주셨습니다. 저에게 축복의 간증을 해 오시는 분들에게 물어보면 한결같이 그렇게 했던 분들이지요.
반면에 그 당시에 신뢰가 흔들렸고 조금이라도 미혹에 넘어갔던 분들은 그 담을 헐기까지 여러 가지 연단과 시험이 따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도 제 마음을 주관해 주시지 않기 때문에 축복기도를 해주어도 제 마음에 축복의 확신이 오지를 않았고, 구제를 해주려다가도 성령께서 막으시는 것을 여러 차례 경험해 보았지요. 꼭 98, 99년도에 관련된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어떤 죄의 담이 있는 분에게는 제가 아무리 어떤 도움을 주고 싶어도 하나님께서 제 마음을 주관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만 사랑해서 그에게는 많은 축복을 주고, 어떤 사람은 사랑하지 않아서 전혀 마음쓰지 않는 것이 아니지요. 요셉도 동생 베냐민만 사랑하여 그에게는 오 배를 주고 나머지 형들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결국 공의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축복을 주고 안 주고는 하나님의 소관이시며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과 모든 행함을 보시고 공의에 맞추어 가장 정확하게 역사해 가시지요. 여러분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아셔서 하나님과의 사이에 축복을 막는 담을 만드는 일이 결코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애굽의 총리와 즐겁게 식사를 나눈 요셉의 형제들은 아침에 해가 뜨자 양식을 챙겨가지고 고향 땅을 향해 떠납니다. 염려하고 걱정했던 일도 없었고 오히려 애굽의 총리와 즐겁게 식사를 나눈 후에 가족을 위한 양식까지 무사히 구해가게 되었으니 그들은 안도와 기쁨의 마음으로 돌아가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 기쁨도 잠시 요셉의 형제들이 성을 나가 멀리 가기도 전에 애굽 총리의 청지기들이 뒤를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영문도 알지 못하는 말을 하지요. 요셉의 형제들이 애굽 총리의 집에서 도적질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야곱의 아들들은 자신들은 결코 그러한 일을 하지 않았다 하며 만약 자신들에게서 훔친 물건이 나오면 자신들이 애굽 총리의 종이 되겠다 말하지요.
그런데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막내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나온 것입니다. 이처럼 증거까지 나왔으니 이제 야곱의 아들들은 꼼짝없이 도둑으로 몰려 다시금 애굽 총리의 집으로 잡혀가지요. 사실은 이 모든 것이 요셉의 계획이었습니다. 요셉은 청지기를 시켜 미리 은잔과 양식 값을 형제들의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그들이 떠난 후에 멀리 가기 전에 따라 가서 그들의 짐을 수색하여 잔을 찾으라고 했던 것이었지요.
이렇게 해서 또다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애굽의 총리 앞에 잡혀온 요셉의 형들은 명백한 증거 앞에서 변명할 말도 없었습니다. 형들 중에 유다가 말하기를 16절에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어떻게 우리의 정직을 나타내리이까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적발하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종이 되겠나이다” 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결백을 말하고는 있지만, 그 결백을 증명할 길이 없음을 안타까워하며 이 모든 것이 결국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이 예전에 행했던 죄악에 대해 갚으시는 것이라 고백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자신들이 예전에 요셉을 종으로 팔려고 할 때 요셉의 애걸함을 보고도 무시한 채 그대로 팔아버렸던 상황을 떠올려 봅니다.
자신들이 이처럼 억울하게 누명을 쓴 처지가 되어보니 예전에 자신들이 사실 잘못도 없는 동생 요셉을 그처럼 가혹하게 종으로 팔 때 요셉의 심정이 어떠했을까를 느껴보게 되었지요. 또한 반드시 행한 대로 갚아진다는 공의를 마음에 철저히 각인하게 되었던 것이고요.
하지만 아무리 후회하고 깨달았다 해도 이미 그들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입으로 약속했던 대로 이제는 모두가 애굽 총리의 종이 되고 말 처지였지요. 그런데 예상과 달리 애굽의 총리는 잔이 그 손에서 발견된 사람 즉 베냐민만 종이 되고 나머지는 모두가 평안히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것이 잘된 일일까요? 아마 예전의 요셉의 형들이라고 하면 이 상황이 ‘잘되었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물론 아버지 야곱과 했던 약속 즉 베냐민을 어떻게든 무사히 다시 데리고 오겠다던 약속은 지키지 못하게 되었지만 그것도 어떻게든 거짓말을 지어내어 또다시 아버지 야곱을 속이려 했겠지요. 형제 모두가 종으로 잡히지 않고 베냐민만 종으로 남게 된 것을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예전에 요셉을 종으로 팔던 그 당시와 같은 상태의 형들이라면 지금도 충분히 이렇게 할 수가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번에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유다가 또다시 나서서 애굽의 총리에게 지난 일들에 대해 소상히 설명하며 자신이 베냐민을 대신해서 종으로 남겠으니 동생 베냐민만은 나머지 형제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합니다. 만약 베냐민을 데리고 가지 않으면 고향에 있는 아버지에게 자신들이 영영히 죄를 짓게 될 것이며 아버지도 살지 못할 것이라 말하지요.
동생 베냐민을 걱정하는 마음과 함께 아버지 야곱과의 약속을 지키려는 마음, 또한 만약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 경우 아버지 야곱에게 미칠 재해를 진심으로 염려하는 마음에서 유다는 지금 이와 같이 간청을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처럼 애걸하던 동생 요셉을 끝내 종으로 팔아넘기고, 거기다가 아버지 야곱까지 속이므로 아버지의 마음에 두고 두고 고통을 주었던 예전의 형들의 모습이 더 이상 아니었지요.
지난번에 형제 중에 시므온만을 남겨두고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을 때도 고통이었지만 지금 동생 베냐민만을 남겨두고 간다는 것은 도저히 그들의 양심에서 허락되지가 않았습니다. 지금도 만약 요셉의 형들이 악한 마음을 품었다면 요셉이 사라진 후에 그 자리를 대신하여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극진한 사랑을 받고 있는 베냐민이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로 여겨졌겠지요. 그러니 이번 기회에 그러한 베냐민만 남겨두고 가면 이제 더 이상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편애를 받을 대상이 없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형들에게는 더 이상 그러한 마음이 없었지요. 이번 연단을 통해 자신들의 악함을 깊이 깨달았고 형제에 대한 마음들이 새로워졌던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아버지를 속일 마음도 없었고, 형제를 희생하면서까지 자신들만 살아보겠다는 마음도 없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유다는 이 상황에서 종으로 남는다는 것이 어떤 삶이될지를 모르는 것이 아니면서도 자신이 기꺼이 베냐민을 대신하여 종으로 남겠다고까지 자청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만약 요셉의 형들이 이러한 연단을 겪기 전의 모습 그대로 그들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고자 했다면 과연 어떤 모습이었겠습니까? 형제간의 우애란 찾아보기 힘들었을 것이고 서로 간에 견제와 시기, 질투 가운데 결코 하나 된 모습이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어떤 어려움이라도 만나게 되면 서로 희생하고 양보하기 보다는 자기 유익만을 구하는 모습이었겠지요.
그런데 이 연단을 통해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형제간에 서로를 위해 양보하고 희생할 줄도 알고 이제는 설령 누구 한사람에게 편협된 사랑이나 축복이 간다 해도 그것을 불평하거나 불만을 품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며 화평을 좇을 수 있는 모습이 되었지요. 아버지 야곱에 대해서도 질서를 좇아 순종하며 마음에서부터 위해드릴 수 있는 모습이 되었고요.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요셉이 만약 서둘러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자기 뜻과 생각대로 해나갔다면 결코 지금의 이러한 변화는 일어날 수 없었겠지요. 그러나 요셉이 절제와 오래참음으로 하나님의 주관하심에 순종하였고,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주시는 지혜를 받았기에 이와 같은 축복된 결과를 얻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들의 잘못을 철저히 깨닫고 마음 중심에서부터 후회하며 회개하는 형들을 보면서 요셉은 ‘이제 때가 되었음’을 느끼게 되지요. 이제는 자신의 정체를 형제들에게 밝히고 그토록 원하던 재회의 기쁨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때가 왔다는 말입니다. 그 감격적인 재회의 장면은 다음시간에 이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일에는 이처럼 ‘때’라는 것이 있고 하나님의 주관하심에 순종했을 때는 반드시 좋은 열매를 거둘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당장 눈앞의 유익과 자기감정을 좇기 때문에 일을 그르치는 경우들이 많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은 요셉에 대한 말씀을 통해서 ‘때를 기다린다는 것’과 ‘하나님의 주관하심에 순종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라는 것도 모든 것이 공의에 비추어 맞아야만이 올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요셉의 형들의 회개가 아직 부족했고 마음 중심에서부터 나오는 참된 회개가 아니었다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요셉의 마음을 주관해 주지 않으셨겠지요. 그러면 요셉은 그 ‘때’가 오기까지 또다시 다른 방법으로 형들의 온전한 회개를 이끌어내야 했을 것이고요. 또한 요셉이 형제에 대한 정(情)으로는 형들에게도 얼마든지 축복을 줄 수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베냐민에게만 축복을 주도록 주관하신 것도 아직은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때’라는 것도 결국은 형들의 하기 나름에 따라 얼마든지 당겨질 수도 반대로 늦춰질 수도 있었음을 알 수 있지요. 형들이 만약 오늘 본문과 같은 상황에서도 여전히 자신들의 지난 잘못을 회개하지 않고 자기 유익만을 구하며 서로 자기만 살 길을 찾고자 했다면 ‘때’는 다시금 뒤로 미뤄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반면에 형들이 처음 애굽에 왔을 때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하실 만큼 확실하게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고 돌이켰다면 그 당시에 바로 ‘때’를 앞당길 수도 있었겠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적인 축복과 섭리도, 여러분 개개인적인 축복과 섭리도 결국은 여러분 하기에 달려있습니다. 저는 이미 어떤 수준이 되어야 여러분 개개인적으로 축복도 받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쓰임 받을 수 있는지 누누이 말씀드렸지요. 또한 교회적으로도 축복받으며 우리가 이루어야할 사명과 섭리를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기준을 분명히 제시해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여러분은 그 기준에 얼마나 다가와 있으신지요? 여러분이 마음먹고 행하기에 따라 오늘이라도 그 기준을 통과할 수 있고, 내일이라도 다음 주라도 통과할 수가 있습니다. 반면에 여러분 행하기에 따라 뒤로 미뤄질 수도 있고요. 이러한 사실을 꼭 명심하여 이제는 여러분 모두가 정녕 변화와 생명으로 나와 지셔서 오늘이라도 아버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그 때가 다 되었다” 말씀하시며 마음껏 축복과 응답으로 역사해 주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6-06-26 오후 3:32:58 Posted
2018-12-04 오후 1:46:15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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