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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창세기 강해 (2000년~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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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세기 강해(218)
설교자 당회장 이재록 목사 설교본문 창45:1-5 등록일자 2006.06.30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에게 자기를 알리니 때에 그와 함께 한 자가 없었더라 요셉이 방성대곡하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능히 대답하지 못하는지라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가로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셉은 위로부터 받은 지혜와 총명으로 형들이 결국은 지난날에 자신들이 행했던 잘못을 마음에서 철저히 깨닫고 회개하도록 이끌어 갔습니다. 만약 이러한 과정이 없었다면 요셉의 형들은 평생 죄의 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스스로는 그것을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갔겠지요. 따라서 요셉의 형들이 회개하기까지 비록 잠시 염려와 고통 가운데 있기는 했지만 그것을 통해 그들이 하나님 앞과 동생 요셉 앞에서 회개할 수 있었던 것이 그들에게는 큰 축복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요셉도 이처럼 형들이 회개에 이를 수 있도록 이끌어갔던 것이 진정 형들을 위하는 길이었고 사랑이었지요. 이러한 연단을 받기 이전의 형들의 모습은 하나님 앞에 너무나 합당하지 않은 것이었지만 연단 이후에는 얼마나 많이 달라졌습니까? 예전에는 형제들 사이에도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며 자기 입장만을 생각하는 모습이었지요.
비록 요셉이 형들 앞에서 잘난 체하고 자신을 드러내려 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요셉은 한 아버지를 통해 같은 피를 받고 태어난 동생인데 그런 동생이 애원하는 데도 불구하고 그를 냉정하게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 정도였다면 그 형들의 마음이 얼마나 강퍅하고 악한 것입니까?
뿐만 아니라 이러한 악을 숨기기 위해 아버지 야곱이 얼마나 마음에 고통을 받으며 괴로워할지를 너무나 잘 알면서도 요셉이 짐승에게 찢겨 죽었다고 하며 아버지까지 속이지요. 요셉의 형들은 이런 큰 악을 행해 놓고도 20년이 넘도록 그 일을 덮어둔 채 살아갔던 것입니다. 물론 그들 중에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수 있었겠지만 하나님께서 이러한 연단을 허락하시기 전까지는 자신들이 행한 악에 대해 스스로 자백하고 회개할 마음은 아니었던 것이지요. 바로 이런 마음을 가진 요셉의 형들이었으니 그들에게서 형제 간의 우애나 협동심 또한 아버지 야곱을 마음 중심으로 위하며 섬기려는 마음 등을 기대하기란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이러했던 요셉의 형들이 연단을 거치면서 조금씩 변해갔지요. 형제를 걱정할 줄도 알게 되었고, 아버지 야곱을 마음 중심에서 염려하며 어떻게든 다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으려는 마음들이 되었습니다. 형제들 중에 유다는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종으로 잡혀 남게 된 동생 베냐민을 대신하여 자신이 종으로 남겠다고까지 하였지요. 예전 같으면 누구 한사람에게 책임을 지우고 자신들은 어떻게든 빠져나가려는 모습이었겠지만 이제는 이처럼 동생을 위해 자신을 대신 희생할 마음까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전에 행했던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며 이처럼 변화된 모습으로 나와진 형들을 볼 때 요셉의 마음이 과연 어떠했겠습니까? 형들의 변화된 모습이 너무나 기뻤고 더욱이 자기 동생 베냐민을 위해 그처럼 대신 희생하려는 마음까지 된 것을 보면서 요셉은 그동안 참았던 감정이 복받쳐 올라왔지요. 이제는 자신의 정체를 형제들에게 밝히고 정식으로 형제들과 재회의 감격을 나눌 수 있는 순간이 다가온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온 것이지요.

본문 1절에 보면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에게 자기를 알리니 때에 그와 함께 한 자가 없었더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보면 마치 요셉이 육적인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시종들에게 소리까지 지르면서 절제하지 못하고 운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지요. 하지만 지금의 요셉이 그처럼 육적인 정과 감정에 치우쳐 절제하지도 못하고 폭발할 사람은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왜 이때 소리 질러 시종들을 물러가게 한 것이며, 그의 눈물에는 또 어떤 의미가 담겨있었을까요? 먼저 요셉이 시종들에게 소리를 질렀다는 것은 어떤 혈기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큰 소리를 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사람이 심하게 오열을 하면서 말을 하다 보면 의사를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큰 소리로 말을 할 수밖에 없지요. 울면서 말을 하는데 소리까지 작게 낸다면 상대가 그 말을 알아듣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시종들이 알아듣도록 말하기 위해 자연히 큰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요셉이 이처럼 시종들을 물러가게 한 것이 사실은 시종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요셉과 시종들 사이에 쌓아온 관계성은 단순한 주인과 종의 관계 이상이었지요. 요셉 편에서는 늘 아랫사람들을 살펴 주고 마음에서부터 그들을 섬겨 주었으며 힘들게 한다거나 부담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요셉을 섬기는 아랫사람들 역시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요셉을 섬기며 어떻게든 마음에 맞춰 드리고자 했지요.
그런데 이처럼 마음에 맞춰 섬겨드리고자 하는 시종들 앞에서 요셉이 만약 방성대곡하며 울게 된다면 이를 지켜보는 시종들로서는 참으로 민망할 뿐만 아니라 어찌할 줄을 몰라 안절부절못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요셉 자신은 형제들과 그동안 쌓였던 정을 풀기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아랫사람 입장에서는 그러한 요셉을 지켜보는 것이 참으로 부담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요셉은 아랫사람들에게 그 어떤 부담도 주지 않기 위해먼저 그들을 물러가게 하고 나서 형제들과만 마음껏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자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실 머리된 윗사람은 여러 가지 면에서 늘 절제하며 삼가 주의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만약 윗사람이 아랫사람들 앞에서 마음에 불편한 것을 표현한다거나 어떤 근심이나 걱정거리를 말했을 때 이것이 아랫사람들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지요. 물론 정말 윗사람을 마음 중심에서부터 섬기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것을 부담이라 여기지 않고 ‘어찌하면 윗분의 짐을 내가 나눠 질 수 있을까’ 이런 선한 생각을 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아무래도 부담을 느끼며 힘들어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저도 제가 지고가야 하는 짐에 대해 누구에게도 속 시원히 터놓고 얘기해 본 적이 없지요. 그래도 주변에 믿을 수 있고 제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가끔 제가 지고 가는 짐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그것도 극히 일부분만을 말할 뿐입니다.
설령 상대가 제 마음을 이해해 준다 해도 제 편에서는 혹여라도 상대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부담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기에 가족에게는 물론이고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저 혼자 마음에 담고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하물며 육의 사람에게는 더더욱 제 마음을 이야기 할 수가 없고요. 받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기 나름대로 오해까지 해버릴 수도 있기에 혹여라도 주변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 저는 말 한 마디를 할 때도 늘 상대의 마음과 믿음의 분량 등을 고려하여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정말 마음을 터놓고 모든 것을 숨김없이 대화할 수 있는 친구와 같은 사람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300년간이나 친히 동행하셨던 에녹이나 벗이라 칭했던 아브라함, 친구를 대하듯 대면하여 말씀하셨던 모세, 바로 이러한 믿음의 선진들을 얻으셨을 때 그들을 너무나 기뻐하셨고 그들과는 어떤 비밀한 것이라도 함께 나누며 대화하실 수가 있으셨던 것이지요.
그렇지만 이런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요셉도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었다면 그런 사람까지 굳이 물러가게 할 필요는 없었겠지만 시종들과 그런 관계성까지는 아니었지요. 또한 설령 시종들이 요셉의 어떤 모습도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라 해도 요셉의 입장에서는 혹여라도 그들에게 어떤 부담이 되지나 않을까 하는 배려의 마음에서 이처럼 시종들을 물러가게 했던 것입니다. 시종들이 비록 아랫사람이지만 요셉은 그들 앞에서 조차도 자기 유익을 구하기보다는 상대의 입장과 유익을 구해주려는 마음이었지요.
성도 여러분, 그런데 요셉이 이렇게 시종들을 물러가게 했던 또 다른 이유는 바로 형들의 입장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3절에 나오듯이 요셉의 형들은 애굽의 총리가 다름 아닌 요셉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놀라서 능히 그 앞에서 말을 못하지요. 그들이 받은 충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자신들이 노예로 팔아버린 동생이 설령 죽지는 않았다 해도 지금쯤 어디선가 노예로 일하며 살아갈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런 동생이 살아있었고 그것도 종이 아닌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자신들의 눈앞에 서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대함에 있어서 그를 애굽의 총리로 대할 수도, 그렇다고 곧바로 동생 요셉으로 대할 수도 없는 참으로 난감한 상황에 처한 것이지요. 그런데다가 만약 이런 상황에서 요셉의 시종들까지 함께 지켜보고 있다면 요셉의 형들은 더더욱 그런 상황 앞에서는 어떤 말도 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놀라움의 충격과 함께 주변의 눈치까지 봐야하니 그 앞에서 어찌 편하게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요셉은 바로 형들의 이러한 입장까지 생각해서 시종들을 물러가게 한 것이었지요. 형들과 조금이나마 더 편안하고 자유롭게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싶었던 것이고 형들에게도 자유롭고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형제들과만 있게 된 요셉은 막상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형제들과 마주대하게 되니 그동안 묻어 두었던 지난 세월에 대한 기억들이 하나하나 떠오르기 시작했지요. 그렇다하여 자신이 당한 일을 억울하고 분하게 생각한다거나 형들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이 일어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미 요셉은 악을 다 버리고 형들을 마음 중심에서 용서했으며 모든 상황을 감사로 받아들였지요.
따라서 이 순간 지난날의 기억들이 떠오른 것은 먼저 지금에 이르기까지 자신과 함께 해주신 하나님의 손길과 그것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오늘날 이와 같은 축복의 열매로 나와지기까지 자신을 너무나 섬세하게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생각하니 하염없는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지요. 이와 함께 요셉은 지난 세월 동안 한시도 잊지 않았던 아버지와 형제들에 대한 그리움, 특히 동생 베냐민을 보고 싶었던 마음이 한꺼번에 물밀듯이 밀려오면서 기쁨과 감사의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나 보고 싶고 너무나 함께하고 싶지만 그 오랜 세월동안 눌러두어야 했던 감정을 이제는 더 이상 눌러놓을 필요 없이 마음껏 표출할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 애절한 마음이 얼마나 크고 진했던지 요셉이 방성대곡하는 소리가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궁에까지 들렸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도 사실 어떤 때는 절제하지 않아도 되고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상황만 되면 마음껏 울고 싶은 순간들이 많습니다. 그렇다하여 제가 지고 가는 짐이 무겁거나 벅차서 울고 싶다는 말이 아니지요.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마음, 주님을 향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서 그것을 마음껏 표현하고 싶은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저 혼자 있을 때는 수많은 날들을 눈물지으며 아버지 하나님과 주님을 생각하지요. 그러나 저는 혼자 있을 때도 되도록이면 절제하고 또 절제합니다. 아직은 제 마음을 마음껏 터트려서 표현할 수 있는 때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아버지를 생각하고 주님을 생각하면 너무나 그립고 사랑의 마음이 복받쳐서 그렇게 계속하다 보면 저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밀려오는 그리움과 사랑의 마음을 또 절제하고 절제하며 애써 마음을 딴 곳으로 돌리려고 하지요. 제가 마음껏 제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때 바로 장차 천국에 가서 아버지 하나님과 주님을 뵈올 때까지는 말입니다. 그때는 절제할 필요도 없고, 이 땅에 살면서 그리워하고 애절했던 마음을 얼마든지 마음껏 표현해 드릴 수가 있지요.
또한 아버지와 주님을 만나는 순간이 되면 이 땅에서 겪었던 얼마나 많은 일들이 생각나며 은혜와 감동이 제 마음에 밀려오겠습니까? 아버지 하나님께서 항상 저와 함께 하시며 너무나 사랑해 주시고 섬세하게 인도해 주신 기억들, 모든 연단의 날들 속에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시며 결국 승리의 기쁨으로 나오게 하셨던 아버지 하나님과 주님의 마음이 느껴지면서 그 순간의 감동과 감격은 이루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우리를 다시 데리러 오시는 주님을 맞을 때는 육에 속한 모든 것은 다 남겨두고 오직 영에 속한 것만 홀연히 변화된 영체 안에 담겨 올라갑니다. 우리의 몸까지도 온전히 영에 속한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기 때문에 그때는 이 땅에 살면서 육의 한계에 가려 깨닫지 못했던 것들도 순간에 다 깨달아질 수가 있지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도, 주님의 사랑도, 목자의 사랑도, 그것이 얼마나 큰 것인지가 각자의 마음을 영으로 이룬 만큼 이제는 더 이상 어떠한 육적인 제약도 받지 않고 밝히 깨달아지며 느껴지는 것입니다.
고전 13:12에 보면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말씀한대로 이지요. 지금은 여러분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을 아무리 깊이 느끼고 안다고 해도 육의 몸을 입고 있는 이상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지만 장차 주님을 뵈올 때가 되면 더 이상 육의 한계에 가리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때는 ‘상대성’에 대해서도 너무나 밝히 깨달아지고 느껴지게 됩니다. 왜 나를 이 땅에 경작하셨는지, 이 땅에서 경작 받으며 겪었던 육에 속한 것들이 얼마나 헛되고 헛된 것이었으며, 반면에 영에 속한 것들은 얼마나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인지가 밝히 깨달아지면서 ‘상대성’에 대해서도 온전히 깨달아진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그때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감사가 이 땅에서 느끼며 고백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장차 이처럼 온전히 영체로 변화되어 느낄 수 있는 것들을 이 땅에서도 느낄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으로, 온 영으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여러분이 영으로만 들어와도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감사가 이전에 육의 차원에 머물며 느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느껴지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도 온 영의 차원에 들어와서 느끼는 것과 비교하면 이 역시 큰 차이가 있지요. 온 영으로 들어오면 그때는 장차 육의 몸을 벗었을 때 느낄 수 있는 것과 그래도 가장 가깝게 느껴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온 영으로 들어왔을 때는 항상 감동과 감격, 아버지 하나님과 주님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 이런 것들이 밀려오기 때문에 만약 절제의 열매가 맺혀있지 않다고 하면 늘 그리움의 눈물을 짓고 살아야 하지요.
그러나 온 영으로 들어오면 절제의 열매도 온전히 맺혀있으므로 애써 절제하며 아버지 나라와 의를 위한 충성의 마음으로 돌려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절제해 두었던 마음은 장차 천국에 가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만나 영원토록 함께 마음껏 나누면 되지 않겠습니까? 요셉도 바로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과 오랫동안 눌러두었던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이 이제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상황을 만나면서 이처럼 표출되어 나왔던 것이지요.

성도 여러분, 요셉은 전에 형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기 전에도 아버지 야곱의 안부를 매우 궁금해 했는데 지금 형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난 후에도 요셉은 가장 먼저 아버지의 안부를 다시 묻습니다. 물론 요셉의 마음에는 분명 하나님께서 아버지 야곱과 다시 만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지만 ‘혹시 아버지 생전에 뵙지 못하지는 않을까’ 하는 자식 된 도리로서의 염려가 있을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요셉의 형들은 지금 자신들 앞에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 대해 너무나 놀란 나머지 아무 말도 하지를 못합니다. 이 순간 요셉의 형들의 마음에는 여러 가지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었지요.
사실 애굽 총리의 정체를 알기 전까지 요셉의 형들은 ‘이제 모든 게 끝이구나’ 하는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생사를 쥐고 있는 애굽의 총리가 다름 아닌 자신들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한편으로는 안도할 수가 있었지요. 이 모든 어려운 상황이 극적으로 풀어질 수도 있다는 희망이 그들에게 생겼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예전에 요셉에게 어떻게 했었는지는 일단 제쳐두고라도 그처럼 대단하게 보이던 애굽의 총리가 자신들의 동생이라는 사실로 인해 순간적으로 희망이 보였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도 잠시, 형들의 머릿속에는 이내 자신들이 지난날 요셉에게 행했던 일들이 떠올랐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니 오히려 또 다른 염려와 불안이 그들의 마음을 엄습했지요. 그것은 바로 ‘혹시 동생 요셉이 지난날의 일로 인해 자신들에게 복수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요셉이 이러한 형들의 마음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래서 요셉은 먼저 형들의 이러한 불안한 마음을 풀어 주고자 합니다. 형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가까이 오게 한 후에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말했던 것이지요.
요셉은 형들에게 자신을 밝힘에 있어서 “당신들이 애굽에 판자라”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원망이나 분노의 마음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랜 세월의 흐름 속에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형들로 하여금 확실하게 기억을 되살리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일로 인해 조금이라도 두려워하지 않도록 형들을 안심 시킨 후에 이 모든 일에 담긴 하나님의 섭리까지 설명하지요.
이때 요셉이 한 말을 보면 정말 마음에서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적어도 선의 2단계 이상에 들어와야 할 수 있는 참으로 감동적인 선의 고백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내용들을 보아도 요셉의 감동적인 선의 고백과 행함이 곳곳에 나오는데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5절에 나오는 요셉의 고백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듯이 요셉은 현실의 상황이 어렵고 안 좋다 해서 결코 원망하거나 불평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현실의 어려움을 감사의 조건으로 바라보았지요.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찾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도 현실의 어려움으로 인해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많지요.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깨달아질 수도 없고 그러니 결국 어려움 가운데서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왜 이런 연단이 왔는지, 이 연단을 통해 자기 자신이 깨어지고 변화되어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 이러한 영적인 깨달음이 오지 않으니 여전히 연단 속에서 제자리걸음만 하게 되는 경우들이 많지요.
그러나 감사의 눈으로 바라보고 어떻게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찾고자 하는 마음으로 바라본다면 그러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보이며 그로인해 더욱 감사할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도 마음에 악이 없어야 하지요. 요셉이 만약 형들을 용서할 마음이 아니라 여전히 억울해 하고 분하게 여기면서 어떻게든 자신이 당한 것을 갚아 주려는 마음이었다면 이러한 마음을 가진 요셉에게는 결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보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형들에 대한 미움과 복수할 마음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왜 자신을 이곳 애굽 땅에 먼저 보내셔서 총리에까지 오르게 하셨는지 그 영적인 섭리를 깨달을 수가 없었겠지요.
그러나 요셉은 이미 마음 중심에서 형들을 온전히 용서했고 자신이 겪고 있는 연단의 원인도 자기 자신에게서 발견하고자 했습니다. 끝까지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을 인도해 가실 것을 변함없는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았지요. 그랬기 때문에 요셉에게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섭리가 깨달아졌고 지금 형들에게도 그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형들이 과거의 일로 인해 조금이라도 염려, 근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형들의 마음을 풀어주는 차원이 아니라 ‘오히려 그때의 일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이처럼 축복된 상황을 맞을 수 있게 되었다’고 형들에게 위로를 해주고 있는 것이지요. 단순한 용서의 차원이 아니라 더 적극적인 선의 마음이었으며, 상대를 감동시킬 수 있는 선의 차원이었습니다. 이런 선한 말과 행동은 여러분 삶의 아주 사소한 분야에서부터 얼마든지 적용해 나갈 수가 있지요.
예를 들어 만일 자녀가 잘못해서 카펫에 음식물을 잔뜩 쏟고 말았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때 부모로부터 큰 꾸중을 들을 줄 알고 염려와 걱정에 쌓여 있는 자녀에게 부모가 “괜찮아, 앞으로는 조심해라” 이렇게 말하고 넘어간다면 자녀는 안도의 한숨을 쉴 것입니다. 혼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겠지요.
그런데 부모가 만약 자녀에게 “괜찮아, 안 그래도 한번 카펫 청소를 해야 하는데 이번 기회에 하면 되겠구나, 잘 됐네” 이렇게 말해 준다면 자녀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그 마음에 부모님의 자애로운 마음이 느껴지면서 부모님에 대해 감사의 마음도 더 해지며 ‘다시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으리라’ 더욱 명심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간단한 예를 든 것이지만 여러분도 이와 같이 단순한 용서의 차원을 넘어서 더 적극적인 선을 행하는 차원에 들어간다면 이런 여러분에게 아버지 하나님께서 어찌 응답과 축복을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런데 요셉은 자신을 죽이려고까지 했고 결국은 자신을 먼 이방 나라에 종으로 팔아버린 형들에 대해서도 마음 중심에서 온전히 용서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형들을 위로하며 그들의 마음에 감동을 줄 수 있는 깊은 선의 마음을 가졌지요. 이러한 요셉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택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어 가셨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도 이와 같은 선의 마음을 이룬다면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들어 쓰시지요. 여러분 모두가 신속히 이러한 깊은 선의 차원에 들어와 아버지 하나님께서 마음껏 쓰시는 귀한 도구들로 나와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6-07-03 오전 9:34:13 Posted
2018-12-04 오후 1:51:26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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