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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창세기 강해 (2000년~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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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세기 강해(219)
설교자 당회장 이재록 목사 설교본문 창45:6-15 등록일자 2006.07.07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8절부터 13절까지 중략]
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 요셉이 또 형들과 입 맞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야 요셉과 말 하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 중에 보면 어떤 일로 인해 서로 간에 이해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해서 오랜 세월을 등지고 살거나 심지어 평생을 원수로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한 꼭 이렇게 심한 경우는 아니라 해도 아주 사소한 일을 가지고 마음이 불편하여 감정이 쌓이고 다투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면 될 일을 말입니다.
그런데 ‘용서’도 다 똑같은 것이 아니지요. 겉으로는 ‘용서한다’고 하지만 그 속마음이 어떠하냐에 따라 진정한 용서가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용서도 그 차원에 따라 나눌 수가 있는데 첫 번째 단계는 마지못해서 용서하는 경우이지요. 사실 이런 경우는 용서한 것이라 말할 수 없지만 겉으로 볼 때는 용서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마음에서는 전혀 용서하고 싶지 않고 여전히 감정과 미움이 있지만 어쩔 수 없어서 용서하는 척 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상대가 나보다 윗사람이거나 내 편에서 어떤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일 경우 마음은 불편하고 감정이 올라오지만 억지로 눌러 참고 감정을 숨기면서 겉으로는 상대를 용서하는 척 할 수 있습니다. 결국은 자기 유익을 위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경우는 상대가 만약 윗사람이나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이 아니라 아랫사람이거나 자신의 유익과도 전혀 상관없는 사람일 때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나올 수 있지요. 굳이 감정을 눌러 참아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면 쉽게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용서’라 할 수도 없으며 오히려 외식하는 것일 뿐이지요.
두 번째 단계는 진리이기 때문에 용서하는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는 꼭 윗사람이거나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이 아니라 해도 용서하는 것이 진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용서하는 것이지요. 물론 이때도 아직 마음에서부터 온전히 상대를 용서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진리대로 행해야 한다는 것은 알기 때문에 그나마 용서하려고 노력하게 되지요. 아직은 지식적인 믿음의 단계이지만 이렇게 진리대로 행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결국 마음에서부터 용서할 수 있는 단계에도 이를 수가 있는 것이고요.
그런데 이런 경우는 아직 마음이 선으로 일구어져서 용서한 것이 아니므로 자신이 생각하는 한계 안에서만 용서할 수가 있습니다. 그 한계를 넘어갈 때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감정을 드러내게 되지요. 마 18:21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여쭈었던 것이 바로 이 두 번째 경우에 해당합니다. 베드로는 비록 형제가 자신에게 죄를 범했다 해도 그것을 용서해 주는 것이 진리임을 알았지만 그것도 결국은 자신의 한계 안에서였지요. 그래서 이처럼 몇 번이나 용서해 줄까를 여쭈었고 자신이 보기에 일곱 번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기에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하며 여쭈었던 것입니다.
다음 세 번째 단계는 마음에서부터 용서하는 경우입니다. 겉으로만 용서하는 척하거나 머리로 아는 지식을 가지고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부터 상대를 용서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때도 아직은 단지 상대를 용서하는 차원입니다. 마음에서부터 용서하기는 했지만 ‘내가 이렇게 용서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은혜를 베푼 것이라’는 마음이지요. 그러니 용서 이상의 것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용서 이상의 것이란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큰 해를 입혔다고 합시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그것을 문제 삼지 않고 그냥 없던 일로 하고 용서해 주었지요. 마음에서도 감정을 갖지 않았고 긍휼의 마음으로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용서를 해주었음에도 상대는 염치도 없이 오히려 더 도와달라고 하는 것이지요. 이런 경우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을까요? 그러나 더 깊은 용서의 차원에 들어가면 이런 경우에도 상대에 대해 ‘너무 한다’는 생각 같은 것은 들지 않습니다. 바로 네 번째 단계는 마음에서부터 용서할 뿐만 아니라 한없는 긍휼로 그 이상을 베풀 수 있기 때문이지요.
저도 이런 경우들을 수없이 겪었습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해 주면서도 또 ‘그가 어렵지나 않을까’ 하여 제 편에서 먼저 상대의 형편을 살펴 주지요. 어떤 경우는 상대가 먼저 요구해 오기도 하는데 이런 경우라 해도 저는 성령님께서 막으시는 경우가 아니라면 주고 또 주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에 조금의 불편함이나 상대에 대한 안 좋은 감정 같은 것은 전혀 없었지요. 오직 상대가 이제는 신앙생활을 더 잘해서 하나님 앞에서도 인정받는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스스로를 볼 때 과연 어떤 용서를 베푸는 차원이십니까?

오늘 본문의 요셉은 단순히 형들을 용서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큰 은혜를 베풉니다. 보통사람 같으면 이런 경우 형들을 용서한다는 것도 사실은 생각하기 어렵지요. 그동안 억울하게 눌러 참았던 감정들이 형들을 직접 대면하여 봄으로써 오히려 더 폭발해 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자신이 가진 권세로 형들에게 보복하려고 할 수도 있지요.
그러나 요셉은 어떤 마음이었습니까? 형들은 자신을 죽이려고까지 했고 결국 자신을 이방나라에 종으로 팔아서 육으로 보면 비참한 상황에 떨어뜨린 장본인들인데도 요셉은 그러한 형들을 마음 중심에서부터 온전히 용서했습니다. 형들 마음의 무거운 짐까지도 어떻게든 덜어 주려고 했지요.
또한 아버지 야곱만이 아니라 모든 형들과 그 가족들까지도 자신이 책임지고 돌봐주려고 합니다. 여러분 같으면 과연 이런 마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요셉의 이와 같은 마음과 행함을 보면서 하나님께서는 왜 요셉을 택하셨고 그를 축복하여 애굽의 총리로 세우셨는지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으시기 바랍니다. 요셉은 이처럼 지극히 선한 마음을 가졌기에 하나님의 선택받은 도구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또 한 가지 깨달아 보아야 할 것은 ‘용서받은 사람의 입장에 대해서’입니다. 예를 들어 늘 용서하고 용서해 주다 보면 어떤 사람은 이제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지요. 늘 용서해 주다 보니 마음이 무감각해져서 자신들이 잘못했다는 사실조차 잊고 의례히 그러려니 하며 넘어가는 것입니다. 심지어 다음번에 또 어떤 잘못을 했는데 그때는 만약 용서해 주지 않으면 오히려 ‘왜 용서해주지 않느냐’는 식으로 불편해 하고 감정을 가지는 사람도 있지요.
그래도 선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가진 사람이라면 어떤 잘못에 대해 용서를 받았을 때 정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자신을 돌아보며 부족함을 발견해서 어떻게든 다음에는 그런 일이 없도록 노력해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용서받은 것이 자신에게 유익될 수 있지요.
만약 용서를 받았다 해도 자신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이 없다면 이런 사람에게는 용서를 해주는 것이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용서를 해주는 사람 편에서는 어떤 계산적인 마음에서가 아니라 어떻게든 상대가 변화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용서하고 또 용서해 주는 것이지만 용서를 받은 사람 편에서 그처럼 용서를 받고도 아무런 변화의 노력이 없다면 이는 점점 더 담만 쌓아갈 뿐이지요.
그래서 어떤 경우는 상대를 용서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당장에라도 용서해 주고 싶은데도 불구하고 상대가 온전한 회개를 이루어 용서받기에 합당한 준비가 될 때까지 일부러 때를 기다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이 상대를 위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요셉도 바로 형들에 대해 이런 마음이었기 때문에 당장 형들을 용서해 주고 싶은 마음이었음에도 형들이 온전한 회개를 할 수 있도록 일부러 시간을 끌면서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무조건 용서해 주는 것만이 ‘선’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형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힌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도 깨우쳐줍니다. 7-8절에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했지요.
6절에 보면 알 수 있듯이 지금은 풍년 7년이 지나고 나서 흉년 2년째를 맞고 있는 때로서 아직도 흉년이 5년이나 더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흉년 2년째를 맞았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애굽을 제외한 주변 나라들에서는 극심한 기근으로 인해 이미 먹을 양식이 없어서 애굽으로 양식을 사러 와야 할 정도였지요.
야곱과 그의 가족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먹을 양식이 없어서 결국은 요셉의 형들이 애굽으로 양식을 구하러 와야 했지요.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 앞으로 5년을 더 흉년을 겪어야 한다고 하면 야곱과 그의 가족들 역시 견뎌내기 힘든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설령 살아남는다 해도 오랜 흉년으로 인해 가산(家産)은 이미 다 바닥났을 것이고, 황폐해 버린 땅에서 다시 가세(家勢)를 일으킨다는 것도 쉽지 않지요. 그러다보면 가족들이 결국 살 길을 찾아 각각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고요.
그러니 앞으로의 모든 일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셔야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열두 아들들을 통해 선민 이스라엘을 이루실 섭리를 세우셨기에 그 섭리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섭리가 온전히 성취될 수 있도록 사람의 지혜와 방법을 훨씬 뛰어넘는 놀라운 지혜와 방법으로 그 길을 예비해 두셨지요. 그것은 바로 요셉을 애굽으로 미리 보내어 그를 애굽의 총리로 세우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육적인 방법으로는 짧은 시간에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고, 그렇다 해서 공의까지 어기면서 하나님의 마음대로 요셉을 단번에 애굽의 총리로 세우실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미 창세기 강해를 통해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의 방법으로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요셉은 지금 이러한 하나님의 뜻과 섭리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와 방법을 깨닫고 있었기에 형들에게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고백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목적에 대해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다” 말하고 있습니다.
극심한 기근 가운데서 야곱과 그의 가족들을 구하여 결국 그들을 통해 한 민족이 일어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요셉을 미리 애굽으로 보내어 이처럼 큰 권세와 부를 가지고 자기 가족들을 얼마든지 보살펴줄 수 있는 존귀한 자리에 세우셨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데에는 단순히 기근으로부터 야곱과 그의 가족들을 건지시려는 목적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한 민족이 온전히 형성되기 위해서는 주변 여러 민족들로부터의 갖가지 위협들도 이겨내야 하지요.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위협들로부터 야곱과 그의 가족들을 안전하게 지키시며 그들로 하여금 한 민족을 이루도록 하시기 위해 그들을 애굽이라고 하는 강대한 나라의 보호막 아래 두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그의 가족들이 기근을 넉넉히 넘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장차 한 민족으로 온전히 서기까지 안전하게 지킴 받으며 성장할 수 있는 가장 알맞은 환경을 마련해 주신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고난 중에라도, 연단 중에라도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깨닫고자 하며 그것이 드러나기까지 잠잠히 기다릴 줄 압니다. 그랬을 때 결국 하나님의 섭리가 드러나고 결국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지요.
다니엘이나 그의 세친구들이 만약 하나님의 섭리가 드러나기 전에 자기들 보기에 좋은 대로 행했다면, 그들은 사자굴에 들어가지 않을 수도 있고 풀무불에 던져지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 또한 나타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그것이 드러나기까지 잠잠히 기다렸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크게 나타날 수가 있었지요.
요셉 역시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기에 연단 중에라도 감사하고 기뻐하며 잠잠히 기다렸고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중요한 것은 요셉이나 다니엘,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자신들에게 어떤 영광이 주어지는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을 온전히 하나님께만 돌릴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혹여 자신에게 주어지는 영광을 가지고 자신을 드러내려 한다거나 자신이 그 영광을 누리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런 사람은 하나님 앞에 쓰임받을 수도 없지만 설령 쓰임받는다 해도 결국 변질됨으로 인해 버림받을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하지요. 그러므로 고전 10:12에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말씀대로 스스로 “이루었다” 생각해서도 안 되는 것이며, 갈 1:24에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는 말씀처럼 자신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마음이 변함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자신이 이렇게 애굽의 총리에까지 오른 것이 자기가 스스로 잘나서 된 것도 아니고, 자기가 영광을 얻기 위한 것도 아님을 분명히 알았지요. 그렇기 때문에 요셉은 자신이 애굽의 총리가 된 것으로 인해 스스로 높아지거나 높임 받으려 하는 마음이 아니었고, 칭송받거나 영광 받으려는 마음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어 드려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려는 마음이었지요.
또한 요셉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신 것이 단순히 아버지 야곱과 가족들을 구원하기 위한 사사로운 목적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더 큰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려는 것임을 알았지요. 그러므로 요셉이 아버지 야곱과 그에 속한 가족들을 자신이 사는 곳 가까이로 오게 하고 자신의 보호 아래서 그들을 부양하려 했던 것이 결코 사사로운 정이나 욕심을 좇아서 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요셉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축복을 가족들과 함께 나누려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처럼 축복을 함께 나누는 것 역시 결국은 그 축복을 바탕으로 해서 하나의 민족이 일어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 길이었지요.
따라서 똑같이 상대에게 선을 베풀고 축복을 함께 나눈다 해도 그것이 단순히 사적인 감정에서 하는 것과 하나님의 뜻을 좇아 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저도 어떤 사람을 구제할 때는 그 사람의 어려움을 같이 느끼므로 그의 형편을 돌아봐주고자 함이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상대가 그 구제를 통해 어려움을 덜고 나면 이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더 마음을 쏟아 충성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지요. 그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더 크고 귀하게 쓰임받기를 원하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 하늘나라에도 더 큰 상급을 쌓고 하나님의 사랑도 더 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제를 할 때도 단순히 육적인 도움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항상 성령의 주관을 받아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생각해야 하지요.

성도 여러분, 요셉은 형들에게 아버지 야곱에게 가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까지 구체적으로 알려 줍니다. 그리고 다음시간에 나오겠지만 요셉은 형들에게 많은 예물도 함께 주어서 아버지 야곱에게 돌아가도록 합니다.
그런데 요셉이 이렇게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지요. 그것은 바로 아버지 야곱으로 하여금 확신 가운데 고향을 떠나 애굽으로 올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야곱이 지금 살고 있는 땅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이미 오래 전에 약속해 주셨고 그 약속의 성취와 함께 허락하신 땅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좇은 야곱의 입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시고 허락해 주신 땅을 자기 임의대로 등지고 떠나서 애굽으로 이주해 간다는 것이 결코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너무나 사랑하던 아들 요셉이 지금도 살아서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안다 해도 고향 땅을 완전히 뒤로하고 애굽으로 간다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요셉이 살아 있고,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 확신할 만한 증거도 없는 상황이라고 하면 야곱이 섣불리 고향을 떠나 애굽으로 갈 리가 없지요.
요셉은 바로 이런 정황에 대해 이미 다 파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애굽으로 먼저 보내신 섭리에 대해 형들에게 설명해 주었던 것이고, 거기다가 아버지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까지도 구체적으로 알려 주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알려 주어야 형들이 아버지에게 그대로 말했을 때 야곱이 그나마 아들들의 말을 믿으려고 할 테니까요.
또한 요셉이 형들 편에 많은 예물도 함께 보낸 것 역시 말로만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고 하면 야곱이 그것을 쉽게 믿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아버지 야곱으로 하여금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을 수 있는 증거를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지요. 바로 요셉의 이러한 세밀한 작업이 있었기에 야곱은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음과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음을 확신하고 고향 땅을 떠나 애굽으로 이주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야곱은 이것만으로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고 고향 땅을 떠났던 것은 아니었지요. 야곱은 신중한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인도받아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증거가 아무리 확실해도 야곱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여쭈어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았지요.
그래서 앞으로 설명이 되겠지만 창 46:1에 보면 이스라엘 즉 야곱은 모든 소유를 이끌고 브엘세바에 가서 하나님 앞에 제사 드렸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알기 위해서였지요. 그리고 결국 꿈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밝히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애굽 땅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여호수아 9장에 여호수아가 취했던 행동과는 매우 크게 대조되는 모습이었지요.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점령해 들어갈 때 하나님께서는 근처의 이방 족속들을 다 진멸하라 명하십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무리의 사신들이 여호수아를 찾아오지요. 자신들은 아주 먼 곳에 사는 족속인데 이스라엘 민족과 화친하기 위해 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가까운 근방의 족속이 아니라 먼 곳에서 온 족속이라는 증거로서 곰팡이 핀 떡과 낡은 의복 등을 보여 주지요. 먼 곳에서 출발하여 오랜 여행을 했기 때문에 처음에 가지고 출발한 떡도 곰팡이가 피었고, 의복도 낡았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그 말만 믿고 그들과 화친을 약속했지요.
그런데 얼마 후 알고 보니 그들은 멀리서 온 족속이 아니라 아주 가까운 곳에 사는 기브온 족속이었습니다. 즉 자신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해 들어감에 있어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진멸해야 하는 대상이었지요. 그러나 여호수아가 이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이미 화친의 언약을 맺고 맹세한 후였지요. 여호수아가 그러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하나님께 여쭈어 보기만 했다면 이러한 우를 범하지는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야곱은 아무리 아들들의 말과 증거가 확실해도 그것만 가지고 결정을 내린 것이 아니라 최종 결정을 내리기 전에 하나님 앞에 단을 쌓고 제사를 드려서 하나님의 뜻을 여쭈었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에게 아직 온전하지 못한 모습이 있기는 하지만 야곱에게는 바로 이러한 모습이 있었기에 그는 하나님의 선택된 도구로서 하나님의 손에 인도함을 받아 나가며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는 기초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다음 시간에는 요셉의 형들이 애굽에 왔다는 소식을 들은 바로와 신하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에 대해 계속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셉은 형들에게 앞으로 행할 바를 다 말해 주고 난 뒤 동생 베냐민과 서로 목을 안고 웁니다. 이 순간은 애굽의 총리로서가 아니라 순순히 형과 동생의 관계로서 지난 세월 동안 쌓였던 진한 사랑과 그리움의 감정을 이와 같이 나누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요셉은 친 동생인 베냐민과만 이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죽이려고까지 했었고, 결국 이방나라에 종으로 팔았던 이복형들과도 입 맞추며 안고 울었지요. 마음 중심에서 진정으로 형들을 용서했기에 요셉의 마음에는 형들에 대한 어떠한 감정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오히려 형들을 더 품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에 대해 전혀 감정을 갖지 않는 차원을 넘어 상대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깊은 선의 차원이지요. 그러니 요셉의 이러한 선한 행동에 형들은 얼마나 감동이 되었겠습니까? 자신들이 지난날 행했던 악에 대해 다시 한 번 철저히 마음에서부터 회개하고 요셉에 대한 고마움과 은혜로 충만케 되었지요.
여러분에게도 요셉과 같은 바로 이러한 선의 마음이 임해 있다면 누구를 이해하지 못하겠고 누구와 화평이 깨어지거나 걸림이 되겠습니까? 여러분을 힘들게 하고 부딪혀오는 상대만을 문제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고 품지 못하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먼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여러분이 더 크고 넓고 선한 그릇으로 변화될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해 육으로는 도저히 이해 안 되는 상황에서도 정녕 선한 사람은 과연 어떻게 행하는지를 깨우치셔서 여러분도 신속히 그러한 선의 차원에 이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6-07-10 오전 9:21:00 Posted
2018-12-04 오후 1:46:15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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