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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창세기 강해 (2000년~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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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세기 강해(220)
설교자 당회장 이재록 목사 설교본문 창45:16-28 등록일자 2006.07.14
“요셉의 형들이 왔다는 소문이 바로의 궁에 들리매 바로와 그 신복이 기뻐하고 바로는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에게 명하기를 너희는 이렇게 하여 너희 양식을 싣고 가서 가나안 땅에 이르거든 너희 아비와 너희 가속을 이끌고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애굽 땅 아름다운 것을 주리니 너희가 나라의 기름진 것을 먹으리라
[19절부터 26절까지 중략]
그들이 또 요셉이 자기들에게 부탁한 모든 말로 그 아비에게 고하매 그 아비 야곱이 요셉의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야 기운이 소생한지라 이스라엘이 가로되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았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셉의 형들이 애굽에 왔다는 소문은 마침내 바로의 궁에까지 전해집니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바로와 신복들은 기뻐하며 17-18절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기를 “네 형들에게 명하기를 너희는 이렇게 하여 너희 양식을 싣고 가서 가나안 땅에 이르거든 너희 아비와 너희 가속을 이끌고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애굽 땅 아름다운 것을 주리니 너희가 나라의 기름진 것을 먹으리라” 하지요.
또한 수레를 가져다가 자녀와 아내를 태우고 그들의 아버지를 모셔오라 합니다. 그러면서 “너희의 기구를 아끼지 말라” 하지요. 여기서 ‘기구’란 세간살이를 비롯하여 그릇, 연장, 기계 등 가정에 속한 물건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기구를 아끼지 말라”는 말은 이곳 애굽에 좋은 기구들이 얼마든지 있으니 굳이 가나안으로부터 힘들게 가지고 오지 말라는 뜻이지요. 바로의 입장에서는 최대한의 호의를 베풀어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의 이러한 모습을 통해 요셉이 애굽의 총리로 있으면서 바로로부터 얼마나 신임받고 사랑받았으며 존귀히 여김 받았는지를 잘 알 수 있지요. 또한 바로의 신하들로부터도 얼마나 사랑받고 존경받았는지도 알 수 있고요.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요셉을 사랑하고 존귀히 여기니 이처럼 요셉의 가족들에게까지도 큰 은혜가 입혀질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바로의 입장에서 볼 때 요셉은 애굽을 구원해 준 은인이었습니다. 만약 요셉이 없었다면 지금쯤 애굽도 기근으로 인해 극심한 고통과 어려움을 겪고 있었겠지요. 따라서 바로에게 있어서 요셉은 그야말로 복을 불러들인 ‘복덩이’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요셉의 형들이 애굽에 왔다는 소식을 듣게 되니 바로는 이 일 역시 자기 나라에 큰 이득이 될 것이라 생각했지요. 먼저는 요셉이 형들과 가족들을 만남으로 인해 마음에 평안과 위로를 얻게 됨으로 나라를 돌보는 일에 더욱 전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물론 요셉은 그동안에도 무엇 하나 흠잡을 것이 없도록 완벽하게 나라의 일들을 처리해왔지만 그래도 이렇게 가족들을 다시 만나게 되면 더욱 힘이 나서 나라의 일을 더 잘 해내리라 생각했지요. 그러니 요셉의 형들이 애굽에 온 것이 결국은 애굽에도 큰 이득이 될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또한 바로가 볼 때 요셉과 같은 인물의 형제들이라고 하면 그들 역시 뛰어난 사람들일 것이고, 이러한 사람들이 애굽에 온다는 것은 자기나라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지요.
하지만 바로가 요셉의 형제들을 이처럼 극진히 환대했던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요셉을 통해 자신과 애굽이 받은 은혜에 대한 보답을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로는 은혜를 아는 사람으로서 자기 나라가 요셉을 통해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요셉의 가족들에게 그 정도 호의를 베푸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요셉이 애굽에 큰 은혜를 입혔다 해도 이처럼 바로와 신하들로부터 전폭적인 사랑과 신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행함과 마음씀 하나하나가 사랑받고 인정받을 만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자신이 애굽에서 바로에 다음 가는 높은 위치에 있다하여 그러한 자신의 권세나 지위를 이용해 함부로 행동하지도 않았지요. 자기가 넘지 말아야 할 선(線)은 넘지 않았고 바로에게 혹여 실례가 되거나 도(度)에 지나치는 모습은 전혀 없었으며 늘 자신의 위치를 지켰습니다.
또한 요셉은 사심이 없었기 때문에 사사로이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일이 없었고 바로에게 돌아가야 할 몫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바로의 앞으로 돌렸지요. 조금의 실수 되는 일도 없었고, 바로가 원하는 것 이상의 열매를 항상 확실하게 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애굽은 그 심한 흉년 중에도 나라가 안정되고 평화로우며 오히려 더 부강해 질 수가 있었지요. 그러니 요셉의 모든 행함 하나하나가 바로의 마음에 흡족했던 것이고, 바로는 그러한 요셉을 전폭적으로 신뢰하여 그에게 전권을 맡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요셉이 조금의 사심이라도 있었다면 과연 어찌 되었겠습니까? 바로의 마음에는 늘 요셉에 대한 불안감과 경계심이 있었을 것입니다. ‘요셉이 혹시 자신을 속이지는 않는지 요셉이 몰래 자기 몫을 챙기지는 않는지 혹여 자신을 배신하지는 않을지…’ 늘 이런 염려와 불안이 있었겠지요.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는 요셉의 형들이 애굽에 왔다는 소식도 결코 바로에게 기쁜 소식이 될 수 없었을 것이고요. 오히려 더 큰 염려거리만 될 뿐이지요.
그러나 요셉은 어떠한 사심이나 자기 유익을 구하려는 마음이 없었고 이러한 그의 마음을 행함을 통해서도 늘 바로에게 나타내 보였습니다. 요셉은 어찌하든 바로에게 이득이 되도록 노력했고 모든 공은 바로에게만 돌렸지요. 이러한 것들이 쌓이면서 바로는 요셉을 전적으로 믿고 신뢰하게 된 것입니다.
더욱이 바로만이 요셉을 믿고 신뢰한 것이 아니라, 바로의 신하들 역시 요셉을 믿고 신뢰하며 존경했지요. 바로의 신하들 입장에서 육으로 생각해 보면 요셉은 자신들에게 돌아와야 할 명예와 권세를 빼앗아간 사람입니다. 자기들과 같은 애굽 사람도 아니고 한낱 이방 히브리 종이었던 요셉이 하루아침에 자신들보다 높은 위치에 서서 바로의 사랑과 신임을 얻으며 승승장구하고 있으니 육의 마음으로 본다면 결코 곱게 볼 수가 없지요.
그런데도 요셉의 형들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바로의 신하들 역시 함께 기뻐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바로의 신하들도 요셉을 사랑하며 신뢰하고 있었음을 말해주지요.
그리고 요셉이 이처럼 바로의 신하들로부터도 사랑과 신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요셉의 선한 마음과 행함 때문이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이 바로 다음 가는 권세자라 해서 바로의 신하들을 무시하지도 않았고, 그들에게 무례하게 명령하거나 지시하지도 않았지요. 늘 예의와 겸손으로 대했습니다. 또한 상대의 입장과 유익을 생각해주며 혹여 그들의 허물이 보인다 해도 사랑으로 덮어주며 감싸주었지요. 바로 이러한 모습을 통해 요셉은 바로의 신하들의 마음도 점점 얻어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잠 18:12에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는 말씀처럼 요셉의 겸손이 결국 요셉을 더욱 존귀한 자로 세워갔던 것이지요. 또한 잠 11:30에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는 말씀대로 선의 지혜가 있었던 요셉은 비록 이방 나라에 있다 해도 많은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고요.
요셉이 만약 교만하고 높아진 마음으로 신하들을 무시하고 그들 위에 군림하고자 했다면 오히려 그들의 시기와 질투와 미움의 대상이 되고 말았겠지요. 그러나 요셉의 선하고 겸손한 마음과 행함은 바로의 신하들의 마음을 얻기에 충분했습니다. 더욱이 요셉의 일처리가 워낙 정확하고 늘 기대 이상의 열매를 내었기 때문에 이를 바라보는 신하들의 마음에서는 요셉을 더욱 존경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성도 여러분, 사람이 아무리 지혜롭고 똑똑하다 해도 자신이 지켜야할 선과 위치를 벗어나게 되면 이는 결국 교만이며 패망의 선봉이 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지혜와 지식만을 내세우지 말고 늘 자신의 본분을 잊지 말아야 하며 자기의 위치를 지킬 줄도 알아야 하지요.
중국의 유명한 소설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공명은 당대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뛰어난 지혜와 명철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제갈공명은 결코 자신의 위치를 넘지 않는 사람이었지요. 유비 현덕을 주군으로 모심에 있어서 자신이 지혜롭고 명철하다 하여 결코 유비의 위치를 넘보려는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고, 유비가 죽은 후에도 유비의 아들을 주군으로서 극진히 섬기며 끝까지 변함없이 자신의 위치를 지켰습니다.
제갈공명에게 만약 조금의 사심이라도 있었다면 유비의 아들을 밀어내고 자신이 얼마든지 황제의 위치에 오를 수도 있었겠지만 제갈공명은 비록 유비의 아들이 황제로서 너무나 부족한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신하로서의 예를 다하며 섬겼지요. 그랬기 때문에 그의 가치가 더 돋보이는 것이고요.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어떤 권세가 주어지고 부와 명예가 주어졌을 때 정말 사심이 없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런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마음껏 쓰실 수 있는 귀한 도구로 선택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은사도 아무에게나 주시지 않지만, 권능은 더더욱 온전한 자격을 갖춘 사람에게만 주십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변질되거나 교만하여 자신의 위치를 넘어서는 사람에게는 아예 처음부터 권능을 주실 수가 없지요.
요셉도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중심을 보실 때 애굽의 총리라는 권세를 주셔도 오직 그것을 하나님의 뜻과 섭리대로 사용해갈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택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에게 사심이 조금도 없고 공과 사를 구분함에 있어서도 분명했다는 사실은 바로의 모습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지요. 요셉은 형들에게 임의대로 먼저 무엇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바로가 지시를 한 후에야 비로소 그 말대로 순종하여 행하지요. 이는 다시 말해 요셉이 자신에게 얼마든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막대한 권세와 부가 있다하여 그것을 자기 임의대로 쓰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요셉은 바로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상태였으므로 자기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수레도 내어주고 좋은 땅과 양식도 내어줄 수가 있지요. 하지만 요셉은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바로의 명에 따라 순종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자신의 형제들이라 하여 사적인 정과 욕심을 앞세운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질서와 순리대로 행했던 것이지요.
바로가 아무리 요셉과 그의 가족들에 대해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고 은혜를 베풀려했다 해도 만약 요셉이 먼저 자기가 나서서 자기 가족들을 챙기고자 했다면 이를 바라보는 바로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열 개를 주려고 했다가도 요셉이 이처럼 먼저 챙기는 것을 보게 되면 아무래도 다섯 개만 주려는 마음이 들 수도 있고, 아니면 기분이 상할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요셉이 먼저 나서지 않고 잠잠히 있었기 때문에 바로는 자신 편에서 은혜를 베푸는 마음으로 더 많은 것을 내어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바로가 굳이 생색을 내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 해도, 요셉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바로가 직접 은혜를 베풀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의 위상도 더 세워주는 것이 되지요.
그런데 바로가 이처럼 먼저 나서서 요셉의 가족들을 챙겨주었던 것은 바로가 요셉의 성품을 잘 알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바로가 그동안 지켜봐온 요셉은 자기 가족이라 하여 먼저 나서서 챙겨준다거나 욕심이나 사심으로 가족의 몫을 챙겨주려고 할 사람이 결코 아니었지요. 늘 자기가 지켜야할 선을 넘지 않았고 자기 욕심이나 유익을 위해 사치하거나 사적인 정에 치우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는 이러한 요셉에 대해 알았기 때문에 요셉이 하지 못하는 것을 자기가 나서서 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요셉은 바로의 호의를 흔쾌히 받아 들여 순종합니다. 그런데 이때 요셉은 바로의 호의를 무조건 좋다고 받은 것은 아니었지요. 요셉은 지혜와 명철이 있는 사람으로서 상대가 호의를 베푼다하여 그것을 무조건 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호의를 받아도 되는 것인지 또한 그 호의를 베푸는 사람의 마음에 어떤 의도가 있는지까지도 다 분별했지요. 그래서 받아야 할 것과 받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바로가 베푸는 호의는 중심에서 나온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자신이 그 호의를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에게도 기쁨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지요. 여러분도 이러한 요셉처럼 상대가 베푸는 호의에 대해 사심과 욕심이 없는 마음으로 분별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마음에 사심과 욕심이 있으면 상대가 어떤 호의를 베풀 때 앞뒤 생각하지 않고 받았다가 나중에 큰 낭패를 보는 경우가 있지요. 눈앞에 당장 유익이 되는 것이라 하여 무조건 덥석 받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또 어떤 것은 받지 않고 거절하는 것이 상대의 마음에 더 맞추는 것인 경우도 있지요.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해서 받지 말아야 하는 것도 있고요. 예를 들어 엘리사 선지자 앞에 나아와 문둥병을 치료받은 나아만 장군은 그 은혜를 갚기 위해 많은 예물을 드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때 엘리사 선지자는 그것을 거절하지요. 엘리사 선지자는 이를 통해 나아만의 마음에 여호와 하나님만이 더 깊이 심겨지도록 하여 그가 그 은혜를 평생 품고 살아갈 수가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엘리사 선지자가 그 예물을 받았다면 이방인이었던 나아만 장군은 ‘내가 이렇게 은혜를 갚았다’는 마음으로 인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은혜의 마음이 사라질 수 있었지요. 하지만 엘리사 선지자가 그 예물을 받지 않음으로 나아만 장군은 오히려 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은혜를 마음 깊이 간직할 수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와는 달리 열왕기하 4장에 보면 엘리사 선지자가 자신을 극진히 섬기는 수넴 여인의 섬김을 기쁘게 받는 내용이 나오지요. 이 수넴 여인은 하나님의 사람을 섬기기 위해 방까지 만들어서 엘리사 선지가가 그곳에 오면 유숙할 수 있도록 마련해 드리기까지 합니다. 엘리사 선지자는 이러한 수넴 여인의 극진한 정성과 섬김을 받아주었고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주관하시니 이 여인에게 잉태의 축복까지 빌어주지요. 수넴 여인이 엘리사 선지자를 섬긴 것은 곧 여호와 하나님 앞에 한 것이므로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켜 엘리사 선지자를 통해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는 결국 엘리사 선지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수넴 여인의 섬김을 받은 것이지요. 바로 여러분의 마음에도 사심이나 욕심이 없고 위로부터 주시는 선의 지혜를 받는다면 이처럼 상대가 베푸는 호의를 받아야 하는 것인지, 받지 말아야 할 것인지를 주관받아 분별할 수가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요셉은 바로의 명대로 수레를 내어주고 길에서 먹을 양식도 주며 형제들과 아버지 야곱에게 주는 귀한 선물도 실어서 형제들을 고향으로 보냅니다. 그런데 이때 요셉은 다시 한 번 형들과 구분하여 동생 베냐민에게는 더 많은 것으로 주지요. 하지만 이제는 형들이 이러한 것을 가지고 동생을 시기, 질투할 마음은 아니었습니다. 연단을 통해 이처럼 변화된 것이지요.
그렇다하여 요셉의 형들이 아직 온전한 선으로 변화된 것은 아닙니다. 더욱이 지금은 잔뜩 은혜를 받은 상태이므로 모든 것이 좋고 행복하게 보이겠지만 그것이 그들의 진짜 일구어진 마음은 아니지요. 요셉은 이러한 형들의 마음을 잘 알았기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형들에게 한 가지 당부를 합니다.
24절에 “당신들은 노중에서 다투지 말라” 말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요셉은 왜 형들에게 이러한 당부를 한 것일까요? 이는 쉽게 말해 응답의 열매를 온전히 맺기 위한 예방조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요셉을 연단하여 애굽의 총리로 세우시고 또한 요셉의 형들을 연단하여 지금에 이르게 하신 모든 일들은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시기 위한 섭리 안에 다 들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야곱과 그의 가족들이 애굽으로 들어와 정착하게 되면 그것으로 이제까지 공들여 이루어 오신 하나님의 섭리가 열매를 맺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이 열매를 맺기 위한 막바지 단계가 지금 진행되고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중요한 순간에 만약 형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생겨서 어렵게 이루어 놓은 형제들 간의 화평이 깨어지기라도 하면 어찌 되겠습니까? 이는 바로 사단에게 송사거리를 내어주게 되므로 자칫 응답의 시점이 뒤로 미뤄지게 되는 결정적인 빌미가 될 수 있지요. 요셉의 형들은 아직 선으로 변화된 것이 아니므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언제 다시 비진리의 속성들이 나올지 모릅니다.
예를 들어 서로가 자신의 공이 크다고 들레거나 뒤늦게 다시 물질에 대한 욕심이 생겨서 불공평한 분배에 대해 불평할 수도 있지요. 지나간 일들에 대해 대화하다가 서로 상대의 책임이라 떠넘기며 다툼이 일어날 수도 있고요. 만약 이러한 일로 인해 다툼이 일어나고 그래서 화평이 깨어지게 되면 이는 응답을 바로 눈앞에 두고 사단에게 송사거리를 내어주는 것이 됩니다. 요셉은 이 모든 상황을 꿰뚫어 보았기에 형들에게 노중에서 다투지 말도록 당부를 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요셉이 함께 가면 되지 않겠는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요셉은 애굽의 총리로서 사적인 일로 인해 쉽게 자리를 비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지금은 흉년을 맞아 나라가 비상사태와 같은 상황에 있었으므로 이러한 때에 개인적인 일로 인해 국정에 공백이 생기게 해서는 안 되지요. 요셉은 공인으로서 자신의 본분을 알았기 때문에 아버지 야곱이 너무나 보고 싶기는 하지만 그 일을 형들에게 맡겼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응답의 열매를 손에 쥐기까지는 결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여러분도 이것을 통해 큰 교훈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이룸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화평입니다. 화평이 깨어지게 되면 즉시로 서로 원수 마귀 사단이 역사하게 되고 그들에게 훼방할 틈을 주게 되지요.
엡 4:26-27에도 보면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했습니다. 분을 내고 다투므로 화평이 깨어지게 되면 그것으로 인해 마귀로 틈을 타게 만든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본교회가 하나님의 크신 섭리를 이루어감에 있어서 늘 화평 가운데 하나 되어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띠로, 성령의 띠로, 사랑의 띠로 모두가 진리 안에서 한 마음이 되어야 하지요. 그럴 때 사단도 훼방할 틈을 찾지 못하며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크게 드러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응답의 순간이 가까왔다 하여 결코 방심해서는 안 되며 응답의 열매를 손에 쥐기까지는 영계의 법칙에 어긋나지 않도록 마음을 더 써야하지요. 응답의 순간을 눈앞에 두고 자칫 사단에게 송사거리를 내어주어서는 안됩니다.
이제 이렇게 해서 고향에 도착한 요셉의 형들은 열심히 아버지 야곱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지요. 그러나 야곱은 그들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미 오랜 세월동안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신뢰를 잃어왔기 때문에 아무리 그럴듯한 말을 해도 야곱이 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려 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더욱이 지금 야곱의 아들들의 말은 야곱의 입장으로서는 쉽게 믿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은 바로 이러한 것까지도 이미 예측을 했지요. 그래서 형들에게 아버지 야곱을 만나면 어떻게 말을 해야 하는지 까지도 세세하게 알려 주었던 것입니다.
결국 요셉의 형들이 요셉이 알려준 대로 아버지 야곱에게 말을 하고 요셉이 준 수레까지 보여주자 그제서야 야곱은 그들의 말을 믿게 되었지요. 그렇다하여 야곱이 아들들의 말과 눈에 보이는 증거만을 가지고 단 번에 확신 가운데 고향을 떠나 애굽으로 향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확증받은 과정을 거치지요. 그 내용부터는 다음시간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셉은 그 마음에 선이 이루어지니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받았고 명철이 임했습니다. 바로의 마음도, 형들의 마음도, 아버지 야곱의 마음도 이미 훤히 꿰뚫어 보고 있었지요.
20년이 넘게 떨어져 있었고 직접 눈앞에서 보는 것도 아니지만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어떻게 나올지까지 이미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을 형들에게 자세하게 알려 주었던 것입니다. 또한 형들에 대해서도 밝히 파악하고 있었고, 응답에 관한 영계의 법칙 또한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형들에게 돌아가는 길에 다투지 말아야 할 것까지 미리 당부하여 보내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이처럼 하나님께서 쓰실만한 그릇이 준비되어지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주관을 너무나 정확히 받아나갈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도 여러분이 이러한 요셉과 같이 선의 차원에 이른다면 얼마든지 위로부터 지혜와 명철을 얻을 수 있고 성령의 밝은 음성과 주관과 인도를 받을 수 있지요.
그러나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고 성령의 음성과 주관을 밝히 받는다 해서 그것만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순종이 따라야 하지요. 아무리 사람의 마음을 잘 분별하고 성령의 음성과 주관을 받으며 선의 지혜와 명철이 있다 해도 정작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대로 순종해 나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주관을 정확히 받았고 선의 지혜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에 온전히 순종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 도구가 될 수 있었지요. 마음에 어떠한 악의 모양이나 사적인 정이나 욕심, 사심 등 이러한 것들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정확한 주관과 함께 온전한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어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오늘 말씀을 통해 요셉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그리고 애굽의 총리로 있으면서 위로는 바로에게, 아래로는 신하들에게 어떻게 행했는지를 잘 깨달아 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요셉이 얼마나 정확하게 하나님의 주관을 받았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순종해 갔는지를 깨달아서 여러분도 신속히 그러한 모습으로 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릇이 준비된 여러분들을 통해 본 제단을 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섭리가 이후로는 더욱 급속하게 창대하게 이루어져 나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6-07-17 오후 7:34:20 Posted
2018-12-04 오후 1:46:15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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