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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창세기 강해 (2000년~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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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세기 강해(222)
설교자 당회장 이재록 목사 설교본문 창46:8-34 등록일자 2006.08.04
“애굽으로 내려간 이스라엘 가족의 이름이 이러하니 야곱과 그 아들들 곧 야곱의 맏아들 르우벤과 르우벤의 아들 하녹과 발루와 헤스론과 갈미요
[10절부터 32절까지 중략]
바로가 당신들을 불러서 너희의 업이 무엇이냐 묻거든 당신들은 고하기를 주의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목축하는 자이온데 우리와 우리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소서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거하게 되리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버지 하나님의 섭리하심과 인도 가운데 저와 선교팀 일행은 미국 뉴욕연합대성회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이를 위해 함께 기도해 주시고 금식해 주시며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한 선교헌금으로 힘이 되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수고해 주신 공연팀과 해외 선교국을 비롯하여 모든 선교팀에게도 감사드리며 자원하여 참석하셔서 힘이 되어주신 성도님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특별히 이번 성회는 공의의 법칙에 따라 본 제단과 성도님들을 축복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강하게 주관해 주셔서 많은 분들이 하나님 앞에 힘껏 심었던 것을 봅니다. 물론 그 동안의 해외 성회들을 위해서도 성도님들이 힘껏 심으셨지만 이번 뉴욕연합대성회를 앞두고는 성도님들의 마음이 불일 듯 일어나 모아지면서 아버지 하나님 앞에 큰 감동이 되었지요.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축복주기 원하실 때 먼저 축복받을 사람들의 마음을 주관하여 그들이 하나님 앞에 믿음과 정성을 내보이도록 역사해 주십니다. 그럴 때 믿음으로 순종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게 되지요.
사르밧 과부는 자신의 마지막 남은 양식으로 엘리야 선지자를 공궤하도록 하나님께서 마음을 주관해 주셨을 때 순종했기에 이후로 큰 축복이 임했던 것을 봅니다. 또한 두 렙돈의 적은 돈이지만 생활비 전부를 연보 궤에 넣었던 과부 역시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주관하셨을 때 순종했기에 예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었지요. 예수님께서 칭찬하셨다면 그 이후는 성경에 비록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해도 그 여인이 영육 간에 어떤 축복을 받았을 지를 능히 짐작해 볼 수가 있는 것이고요.
이처럼 이번 뉴욕연합대성회를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영육 간에 마음껏 축복주시기 위해 여러분의 마음을 주관해 주셨고 많은 성도님들이 동참해 주셨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심은 믿음의 씨앗들이 신속히 풍성한 열매로 맺혀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은 야곱과 요셉의 모습을 통해 영과 온 영의 차이점과 또한 영과 온 영의 차이에서 오는 축복의 차이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준에 비춰볼 때 야곱에게는 아직 부족한 면이 있었지요. 편협된 사랑에서 오는 편벽됨과 아직은 온전히 버리지 못한 육신의 생각 가운데서 나오는 자기적인 방법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야곱이 베냐민만을 편애했기 때문에 자칫 가족 전체가 기근으로 인해 위태로워 질 뻔도 했지요. 또한 애굽에 양식을 구하러 갔던 일이 잘못되어 아들 시므온이 애굽에 인질로 잡혔을 때도 야곱은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응답을 얻으려 하기 보다는 사람의 지혜와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지혜와 방법으로 일이 해결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요. 이번에 뉴욕 연합대성회를 준비함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는 일찍부터 일꾼들에게 ‘세상의 힘과 권세에 의지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어떤 권세와 힘이 있는 사람에게 의지하여 성회를 준비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었지요. 일꾼들이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뜻과 방법대로 좇을 때만이 사람의 마음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때를 좇아 필요한 사람들의 마음을 주관하여 우리를 돕도록 하실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의지하고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했을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사람의 마음도 주관하시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더욱이 지금은 영의 분리를 통해 역사하는 단계에 있기 때문에 영의 분리를 통해 필요한 사람의 마음을 주관하여 우리를 도우며 제 앞에 나오도록 역사하게 되지요. 사람을 의지하려고 할 때는 만약 그 사람의 마음이 바뀌게 되면 사람이 세워놓은 계획들이 수포로 돌아가지만 하나님께서 주관하여 세우신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쓰임받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도 예전에 형 에서와의 관계를 풀려고 할 때 자기 생각과 방법에 의지했을 때는 문제 해결의 길이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하나님 앞에 철저히 낮아지고 깨어져서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했을 때는 하나님께서 형 에서의 마음을 주관해 주셨던 것을 볼 수 있지요.
야곱은 분명히 이러한 체험을 했었음에도 오랜 세월이 지나자 다시 급박한 상황에서 자기 방법에 의지하려는 모습이 나왔던 것입니다. 그가 예전에 얍복강 앞에서 철저히 깨어지고 변화되었다고는 하지만 그의 기질적인 면에 남아 있던 이러한 육적인 모습이 나왔던 것이지요. 이는 오늘날 성령시대로 말하자면 육의 흔적이라 할 수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야곱에게 아직 이러한 모습이 남아 있었다고는 해도 그의 마음 근본에서는 하나님을 신실히 믿고 의지했으며 마음이 변함없었지요.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결국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맡기며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했고요. 그러므로 야곱이 아직 온전한 진리에는 좀 부족하다해도 오늘날 성령시대의 사람과 비교하면 ‘영의 사람’이라 인정해 줄 수 있는 수준이었습니다. 따라서 야곱이 받은 축복 역시 영으로 들어온 사람에게 주어지는 ‘영의 축복’이라 말할 수 있지요.
그렇다면 야곱은 어떤 축복을 받았습니까? 그는 외삼촌 라반의 집에 있으면서 20년 동안에 거부가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처음 외삼촌 라반의 집에 갈 때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혈혈단신이었지요. 20년 중에 14년은 두 아내를 얻기 위해 봉사한 기간이었고 나머지 6년은 품삯을 받고 일하기로 했으나 외삼촌 라반은 야곱을 속여 그에게 줄 품삯을 열 번이나 변역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야곱은 이십 년 만에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나올 때 대단한 부를 축적해서 나오지요.
라반이 아무리 야곱을 속이려 해도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지혜를 주시고 야곱의 편을 들어주시니 그런 와중에도 야곱은 이처럼 놀랍게 축복을 받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야곱은 이렇게 해서 모은 부를 가지고 다시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땅인 가나안으로 왔고 이곳에서도 축복을 받아 나가지요.
외삼촌 라반의 집을 나올 때는 자신과 부인 네 명 그리고 아들 열한 명과 딸 하나, 이렇게 열일곱 명이었는데 (막내 베냐민을 낳기 전이었으므로) 오늘 본문에도 나오듯이 야곱이 애굽으로 들어갈 때에는 요셉과 그의 가족까지 포함하여 야곱에게 속한 식구가 칠십 명으로 늘어나 있었습니다. 생축을 비롯하여 가나안 땅에서 얻은 재물 등 물질적으로도 큰 부(富)를 이루었지요.
물론 야곱은 매우 성실한 사람이었고 지혜롭게 재산을 관리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단지 심은 대로 거두고 행한 대로만 받는 육의 법칙 그 이상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넘치게 받은 것이지요.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영의 사람의 축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영의 사람이 받는 축복도 온 영의 사람이 받는 축복과 비교한다면 아직 온전한 것이라 할 수 없지요. 야곱이 받은 축복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어떤 재앙이나 어려움을 만난다고 해서 일순간에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니지만 온 영의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처럼 극심한 가뭄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든 가족과 재산을 온전히 지켜주셨을 텐데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는 두 번이나 아내를 빼앗길 뻔한 상황이 있었는데 처음에 아내를 빼앗겼을 때는 다만 아내를 되찾은 것으로 감사해야했지만 두 번째 아내를 빼앗겼을 때는 아내를 되찾은 것은 물론이고 양과 소와 노비와 좋은 땅까지 얻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이 더 깊은 영의 차원으로 들어감에 따라 이처럼 똑같은 상황에서도 축복이 전혀 달라지더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야곱도 만약 더 깊은 영의 차원 또는 온 영의 차원에 이르렀다면 비록 극심한 가뭄 중에라도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피할 길을 주셔서 가족과 재산을 온전히 지켜주셨겠지요.

그렇다면 이러한 야곱과 비교할 때 요셉은 과연 어떤 축복을 받았습니까? 우리는 요셉의 선함과 그의 지혜,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주관을 받아가는 것과 그 주관하심에 온전히 순종하는 모습 등을 통해 그가 능히 온 영의 신앙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지요.
그러므로 요셉이 지금 받고 있는 축복이 바로 온 영의 축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셉이 13년 동안의 연단을 마치고 나서 받기 시작한 축복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요셉은 연단 중에도 늘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며 만사를 형통케하셨고 어느 곳에 가든 복을 받는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연단을 마친 후에는 순간에 그 큰 나라의 총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나라의 최고위층이라 할 수 있는 제사장의 딸을 아내로 삼게 됩니다. 부와 명예와 권세 등 모든 면에 있어서 최고의 축복을 받았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 축복으로 인해 자신만이 아니라 아버지 야곱과 그에 속한 모든 가족까지도 충분히 지켜주고 돌봐줄 수가 있었습니다. 또한 요셉으로 인해 야곱과 그의 모든 가족들이 애굽의 바로로부터 융숭한 대접과 함께 존귀히 여김 받았던 것이고요.
그런데 이때 야곱과 가족들이 이처럼 은혜와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야곱의 아들들이 하나님 앞과 요셉 앞에 회개하므로 그래도 축복받기에 합당한 그릇을 준비했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지금 시점에 하나님께서는 왜 창세기 강해를 통해 이와 같이 영의 축복, 온 영의 축복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제 축복의 때가 그만큼 다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중에 온 영의 축복으로 나와야 할 분들도 있고, 적어도 영의 축복으로는 나와야 할 분들이 많이 있지요. 여러분이 창세기 강해를 통해 들으신 대로 하나님께서 야곱과 그의 아들들을 통해 선민 이스라엘 민족을 세우시기까지는 참으로 여러 가지 연단과 고비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공의에 맞추어 행하셔야 하기 때문에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요셉에 이르기까지 때를 기다리며 오래 참으시면서 모든 환경과 조건을 만들어가셨지요. 그러면서 한 사람 한 사람 연단하시며 그들도 축복받을 그릇으로 만들어가셨고 그래서 결국 모든 것이 공의에 비추어 맞았을 때,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본 제단이 온전한 축복을 받기까지도 많은 과정과 연단의 시간들이 필요했지요. 몇몇 사람만 하나님 앞에 온전하다 해서 교회적인 축복이 임하는 것도 아니지만 반면에 어떤 경우는 합당하지 못한 몇몇 사람으로 인해 전체적인 축복이 막힐 수도 있는 것이 공의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버지 하나님 편에서 분야 분야 마무리하셔야 할 것을 하셨고, 여러분 편에서도 헐어야 할 것은 헐었으며 정리해야 할 것은 정리하였지요. 그렇다하여 개개인적으로 모두가 100% 다 그렇게 되었다는 뜻은 아니며, 다만 교회적인 축복을 위해 필요한 공의의 기준에 비추어 볼 때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기도와 금식과 정성이 모아져서 이룬 금번 뉴욕연합대성회를 통해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크게 영광을 받으셨지요. 또한 다음 주면 있게 될 전교인 수련회를 통해서도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크게 영광 받으실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금번 수련회에 주신 주제가 바로 ‘진정한 축복’이지요. 여러분에게 있어서 진정한 축복이 무엇이며 그 축복을 받기 위해 지금까지 달려온 과정들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들으실 때 이제는 그 진정한 축복의 때가 여러분 앞에 다가와 있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 하나님께서 축복의 문을 열어 가시는 이때에 교회적인 축복도 반드시 받는 것은 물론이고 여러분 개개인적인 축복도 반드시 넘치도록 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셉은 마침내 애굽으로 올라온 아버지 야곱과 감격적인 상봉의 순간을 맞습니다. 야곱과 가족들은 요셉이 말했던 고센 땅에 이르고 요셉은 수레를 갖추고 고센으로 올라가 그곳에서 아버지 야곱을 맞이합니다. 22년 전 아버지와 헤어질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이제는 수레를 갖추어 타고 애굽의 총리로서의 당당한 위엄 가운데 아버지 야곱 앞에 나타난 것이지요. 이렇게 만난 둘은 목을 어긋맞게 안고 얼마 동안 울었다 했습니다. 이 순간 둘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저도 해외성회를 위해 열흘 정도만 성도 여러분과 떨어져 있어도 성도님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고이는데 너무나 사랑했던 부자 사이인 둘은 서로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의 마음을 간직한 채 22년이라는 세월을 지냈으니 어떠했겠는지요? 더욱이 야곱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들을 다시 얻은 것과 같았지요. 그래서 야곱은 아들 요셉에게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가하도다” 말하는 것을 봅니다.
이렇게 해서 부자간의 극적인 상봉이 이루어진 후 요셉은 형들과 아버지의 권속들에게 말하기를 31-34절에 “내가 올라가서 바로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가나안 땅에 있던 내 형들과 내 아비의 권속이 내게로 왔는데 그들은 목자라 목축으로 업을 삼으므로 그 양과 소와 모든 소유를 이끌고 왔나이다 하리니 바로가 당신들을 불러서 너희의 업이 무엇이냐 묻거든 당신들은 고하기를 주의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목축하는 자이온데 우리와 우리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소서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거하게 되리이다” 하지요. 요셉은 지금 가족들에게 이후에 바로 앞에 서게 되면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이는 요셉이 바로의 마음까지도 훤히 꿰뚫어 보고 있었고 또한 모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게 될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그의 지혜 가운데서 나온 것이었지요. 요셉은 자기 형제들과 그의 가족들이 바로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그들이 가장 안정적이면서도 독립적인 환경 속에서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생업에 종사하며 번성해 갈 수 있는지를 이미 파악했습니다.
이는 자신의 유익을 구하려는 간사한 마음이나 얄팍한 지혜 가운데서 나온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주관받은 것이었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애굽과 바로에게도 결국은 유익이 되는 것이었지요.
어차피 목축업은 애굽 사람들이 가증히 여기는 것으로서 야곱과 그의 가족들이 목축업에 종사하겠다는 것은 애굽 사람들 편에서 볼 때도 자신들에게 전혀 손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바로와 애굽 사람들 편에서 볼 때는 야곱과 그의 가족들이 얼마든지 더 좋은 생업에 종사할 수 있음에도 이처럼 굳이 목축업을 하겠다고 하니 오히려 다행으로 여길 수 있는 상황이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야곱과 그의 가족들이 고센 땅에 거하며 목축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순순히 허락해 주었던 것이고요. 요셉은 이러한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형제들에게 바로 앞에 나가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미리 알려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이렇게 했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보다도 바로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바로는 육적인 기준으로 볼 때 분명 은혜를 아는 사람이었고, 나름대로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진리인 영의 마음은 아니었기에 결국은 시간이 지나면 변하고 마는 육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요.
그러니 지금은 요셉에게 감사하는 마음에서 무엇이나 요셉과 그의 가족들이 원하는 것을 다 주려고 하는 마음이지만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서 그 마음이 조금씩 변하게 되면 그때 가서는 지금의 결정을 후회할 수가 있고 혹여라도 번복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사람의 마음을 잘 알기 때문에 요셉은 모든 것을 결정함에 있어서 나중에라도 전혀 올무가 되지 않도록 지혜롭게 행동해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예전에 아브라함도 아내 사라의 매장지를 살 때 헷 족속의 사람이 매장지를 그냥 주겠다고 했으나 굳이 값을 치르고 샀던 것을 봅니다. 아브라함도 사람의 마음을 잘 알았기 때문에 이렇게 했던 것이고 더욱이 중요한 아내의 매장지를 놓고 혹여 나중에라도 문제가 생기면 안 되겠기에 아브라함은 이처럼 조금의 문제거리도 생기지 않도록 정확하게 절차를 밟았던 것이지요.
요셉도 바로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에 바로가 마음에서 가장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을 좇아 바로의 마음에 합한 대로 구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또한 요셉은 이미 애굽의 상황에 대해서도 너무나 밝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와 가족들이 애굽 땅 어디에 정착하는 것이 가장 합당한지도 정확히 파악했지요. 이처럼 요셉은 영적인 면에서는 물론이고 육적인 면에 있어서도 완벽하게 준비되고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앞서 말씀드렸듯이 애굽과 바로의 입장에서는 야곱의 일족들이 자신들이 가증이 여기는 업을 달라고 하니, 마음에 그들에 대한 경계나 위협 같은 것은 전혀 느끼지 않으면서 흔쾌히 허락할 수가 있었지요. 만약 자신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업을 달라하거나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매우 중요한 땅을 달라고 했다면 아무래도 부담이 되고 경계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이 이러한 모두의 마음을 다 알고 화평함을 깨지 않도록 지혜를 받아 행했기에 요셉은 아버지 야곱과 가족들에게 원하는 것을 얻도록 해줄 수가 있었지요.
여기서 우리는 온 영의 사람이 받는 축복에 대해 또 한 가지를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야곱의 삶을 보면 그는 자신이 바라던 것을 결국 얻기는 했지만 그것을 얻기 위해 무던히도 애쓰고 힘쓰며 연단을 거쳐야 했지요. 사랑하는 여인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해서도, 외삼촌 라반으로부터 자신의 재산을 지켜내기 위해서도, 그리고 형 에서와 화해를 하기 위해서도 야곱은 매번 많은 노력과 수고를 해야 했습니다. 또한 그의 삶에 있어서도 아내들로 인한 고통, 자녀들로 인한 고통 등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은 삶을 살았지요.
이에 비해 요셉은 비록 13년 간의 연단이 있었지만 그 연단의 세월 역시 기쁨과 감사함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형통의 축복을 받으며 보냈을 뿐만 아니라, 연단이 마쳐진 후에는 너무나 큰 축복과 영광중에 거하게 되었던 것을 봅니다. 더욱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음에 있어서도 어떠한 마찰이나 어려움 없이 모든 사람과도 화평함을 좇으면서 순적이 응답받아 가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이는 바로 요셉에게 선의 지혜가 있었기 때문에 육적인 지혜나 방법으로는 할 수 없는 것도 능히 해낼 수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주변과 상대의 마음도 불편하게 하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결코 자기 유익만을 구하지도 않으면서, 모두에게 유익이 되며 화평한 방법을 정확히 주관 받아 일을 이루어 나갔던 것이지요.
이처럼 위로부터 난 선의 지혜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며, 누구와도 걸림이 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품고 모두의 마음에 합한 대로 맞추어 행해 나갈 수가 있습니다. 선의 지혜는 상대의 마음을 알고 헤아린다 하여서 결코 그것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불의하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가운데 모두에게 유익되도록 사용하지요.
어떤 사람은 육적으로 볼 때 참 지혜로워서 많은 것을 깨닫기도 하고 때로는 명철의 길이 보이기도 하는데, 다만 그것을 사용함에 있어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과는 어긋나게 사용하거나 자신에게만 유리한 쪽으로 사용해 갑니다. 이것은 선에 속한 지혜가 아닌 것이며 설령 그렇게 해서 자신에게 유익이 된다 해도 결과적으로는 결코 자신에게 유익이 될 수 없지요. 심판 날에 아버지 하나님께서 호리라도 남김없이 갚아주실 텐데 그때 가서 자신의 행한 대로 심판을 받게 될 테니 그럴 바에야 차라리 그러한 육의 지혜는 없는 것이 자신에게 더 낫다는 사실입니다.
민 22장에 나오는 발람은 하나님과 교통하는 길을 아는 사람이었지요. 또한 나름대로 영적인 법칙을 아는 지혜가 있었고요. 그런데 그는 이러한 영적인 능력과 지혜를 선한 일을 위해 사용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계 2:14 후반 절에 보면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했지요. 이는 벧후 2:15에 기록된 대로 발람이 불의의 삯을 사랑하였기에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것인 줄을 알면서도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발락에게 ‘어떻게 해야 이스라엘 민족에게 재앙이 임하게 할 수 있는지’를 알려 줌으로써 결국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큰 재앙에 빠지게 하는 사건입니다.
발람은 비록 선의 지혜는 아니었지만 육의 지혜가 있었기 때문에 이처럼 이스라엘 민족에게 재앙을 내리게 할 수 있는 방법까지도 제시할 수가 있었고, 그러나 결국 이러한 자신의 육의 지혜로 인해 그는 저주받은 인물 중에 하나로 성경에 기록되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이처럼 멸망의 길을 자초하게 하는 육의 지혜가 많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위로부터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의 지혜, 영으로 일구어진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지혜, 그것이 진정 자신은 물론이고 모든 사람에게도 유익과 행복을 주는 진정한 지혜라는 사실을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위로부터 난 선의 지혜를 받았던 요셉이 그 지혜를 어떻게 활용해 나가는지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중에도 많은 분들이 영을 사모하여 영으로 들어오고자 얼마나 많은 노력들을 하십니까? 그럼에도 노력하는 것에 비해 영으로 들어오는 속도는 너무 느린 것을 봅니다. 이는 바로 여전히 ‘자기’가 있기 때문이지요. ‘나’라는 것이 너무 강하게 뭉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연단을 받으면서 이 ‘자기’라는 것을 신속히 깨뜨려 버려나갔고 그것도 어렵고 힘들게 한 것이 아니라 감사함과 기쁨으로 연단을 받으며 자기를 깨뜨려 나갔다는 사실입니다. 자기를 열심히 발견했고 발견하는 즉시로 인정하며 버렸지요. 그래서 요셉은 자기를 내세우지 않게 되었고 오직 하나님의 지혜와 방법과 생각에 맡겼습니다.
또한 자기가 없으니 높은 위치에 있다 해도 늘 바로가 자신의 머리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고 바로에 대한 예의와 지킬 바를 지켰지요. 마음에 사심이 없으니 어떤 것을 얻기 위해 급하게 서두른다거나 섣불리 행동하지도 않았습니다. 겸손함 가운데 참으며 때를 기다릴 줄도 알았지요.
자기가 아무리 원하는 것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기꺼이 놓을 수 있었고 때를 아시는 아버지를 믿고 의지함으로 잠잠히 그 때를 기다릴 줄도 알았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믿었기에 하나님께만 전폭적으로 의지한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영’이며 ‘온 영’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아버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영광과 축복의 때를 맞이하여 아직까지도 놓지 못하고 있는 ‘자기’를 이제는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왜 그렇게 힘들어 하면서도 악착같이 쥐고 있으면서 놓지를 않으시는지요? 놓으면 마음도 편안하고 그렇게 육적인 것을 놓았을 때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대신 영적인 것으로 채워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렇게 영적인 것이 채워지고 나면 당연히 육적인 축복도 뒤따라오게 되지요. 그러므로 이제는 육을 기쁜 마음으로 내려놓고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영의 흐름에 꼭 동참하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순풍에 돛을 단 배와 같이 영의 축복, 온 영의 축복을 향해 힘차게 달려가는 만민의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6-08-06 오후 9:43:05 Posted
2018-12-04 오후 1:48:37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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