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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창세기 강해 (2000년~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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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세기 강해(223)
설교자 당회장 이재록 목사 설교본문 창47:1-12 등록일자 2006.08.11
“요셉이 바로에게 가서 고하여 가로되 나의 아비와 형들과 그들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가나안 땅에서 와서 고센 땅에 있나이다 하고 형들 중 오인을 택하여 바로에게 보이니 바로가 요셉의 형들에게 묻되 너희 생업이 무엇이냐 그들이 바로에게 대답하되 종들은 목자이온데 우리와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고 그들이 또 바로에게 고하되 가나안 땅에 기근이 심하여 종들의 떼를 칠 곳이 없기로 종들이 이곳에 우거하러 왔사오니 청컨대 종들로 고센 땅에 거하게 하소서
[5절부터 10절까지 중략]
요셉이 바로의 명대로 그 아비와 형들에게 거할 곳을 주되 애굽의 좋은 땅 라암세스를 그들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고 또 그 아비와 형들과 아비의 온 집에 그 식구를 따라 식물을 주어 공궤하였더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일을 이룸에 있어서 어떤 두 사람이 같은 의견을 낸다 해도 “그 말을 하는 사람이 둘 중에 누구인가”에 따라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전혀 다를 수가 있습니다. “저 사람이 뭔가 자기에게 유익이 되니까 저렇게 말하지” 하며 안 좋게 볼 수도 있고, 반대로 “저 사람의 말이면 믿을만하다 우리에게 서로 다 유익이 되는 말이겠지” 하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는 의견을 낸 두 사람이 각각 평소에 쌓아온 이미지가 다르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주변 사람들에게 과연 어떤 사람으로 인식이 되고 있으십니까?
요셉은 바로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동안 창세기 강해를 통해 들으신 것처럼 요셉 한 사람의 지혜와 성실로 인해 애굽 사람들은 큰 축복을 받았지요. 자신들은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고도 무서운 기근 속에서 평안히 거할 수 있었고, 더구나 주변 나라들 가운데서도 가장 부요하고 힘센 나라로 부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애굽 사람들과 바로에게는 요셉이 하는 모든 일은 자신들에게 큰 유익이 된다는 사실이 깊이 심겨져 있었습니다.
더구나 요셉은 큰 공을 세웠으면서도 자신의 공을 들레는 일이 없었고, 큰 권세를 얻었으면서도 늘 덕스럽게 모든 사람을 섬겼으며 상대의 유익을 구해주는 사람이었지요. 이러한 요셉을 수년 동안 지켜본 애굽 사람들은 요셉이 어떤 일을 한다 해도 그것이 자신들에게도 좋은 일이라고 믿으며 요셉을 신뢰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요셉으로 인해 야곱과 그의 가족들은 가뭄을 피해 애굽에 들어왔을 때 원하는 응답을 형통하게 얻을 수 있었고 구한 것 이상의 축복까지 받을 수 있었지요. 오늘 본문은 요셉의 가족들이 바로와 만나서 바로로부터 자신들이 고센 땅에 거하도록 허락을 받아내는 장면입니다.
지금부터 본문을 통해 요셉이 어떻게 선의 지혜 가운데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지 살펴볼 때 여러분에게도 능력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주변의 뭇사람들의 마음을 얻으며 범사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입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셉은 자기 가족들을 데려오려고 할 때부터 이미 마음에 품은 곳이 있었습니다. 바로 고센 지역이었지요. 고센 땅은 바로 편에서 야곱과 그의 가족들에게 내어주었을 때 크게 아깝다거나 불편하게 여기지 않을만한 곳이면서도 토질이 비옥하여 목축하기에 좋은 지역이었습니다. 또한 바로가 있는 애굽의 중심지에서도 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으므로 야곱의 일족이 애굽 사람들과 구별되어 자유롭게 거할 수 있는 곳이었지요.
그런데 요셉은 이 땅을 가족들에게 주고 나서 바로에게 그 사실을 보고한 것이 아니라 바로가 스스로 그 땅을 내어줄 수 있도록 지혜로운 방법을 동원합니다. 일단 자기 가족들을 고센에 머물게 한 후에 요셉 자신이 먼저 바로에게 가서 고하지요. “나의 아비와 형들과 그들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가나안 땅에서 와서 고센 땅에 있나이다” 합니다.
바로의 명대로 자기 일족이 모든 소유와 함께 애굽에 들어왔음을 보고하는 동시에 “그들의 양과 소”라고 굳이 언급했던 것은 가나안에서 온 자기 가족들은 목축을 하는 사람들로서 애굽 사람들이 하찮게 여기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비추기 위해서입니다.
곧 자기 형제들이 애굽에 왔을 지라도 그들이 애굽에 어떤 해를 입힌다거나 바로를 대적하여 위협이 될 만한 어떠한 요소도 없다고 느껴지도록 이처럼 자기 형제들에 대해 낮추며 겸손한 태도로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또한 목축을 하는 사람들이니 지금 머물러 있는 고센 지역의 토지가 그들이 정착하기에 적당하다는 사실을 미리 바로에게 인식시켜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요셉 편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고 그것을 바로에게 통보한 것이 아니라 바로가 결정할 수 있도록 했던 것이고요. 만약 요셉이 바로에게 “내 아비와 형들이 고센에 정착하고 싶어 합니다” 했다거나, “그곳에 살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보고를 했다면 이는 이미 요셉 편에서 일방적으로 정해 버린 것이지요.
그러나 요셉이 “그들이 고센 땅에 있나이다” 한 것은 일단 고센 땅에 머물러 있기는 하지만 자신들 편에서 무엇을 정한 것이 아니고 그곳에서 바로의 명을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처럼 바로의 마음을 헤아려 편안하게 해주면서 바로의 결정권을 존중해 주는 요셉의 겸비함과 섬김을 늘 체험했기에 바로는 요셉을 이방인처럼 여기지 않았으며 그를 믿고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요셉은 먼저 바로에게 겸손하게 자기 일족이 애굽에 왔음을 알린 후에 바로 앞으로 형들을 인도해 갑니다.
그런데 이때 요셉은 열한 명의 형제들을 다 데려간 것이 아니라 다섯 명의 형들만 골라서 바로 앞에 나가지요. 그렇다면 요셉은 왜 그런 것이었을까요? 만약 건장한 야곱의 아들들이 한꺼번에 바로 앞에 나온다면 이들을 바라보는 바로의 마음에 조금이나마 불안감이 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요셉의 형들이 열 명이고 애굽에 온 일족의 수가 칠십이나 된다는 사실을 바로가 이미 알고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 해도 열 명이 넘는 형제들이 우르르 바로 앞에 나와 보게 된다면 말로만 들을 때와는 느낌이 다를 수 있지요. 그래서 요셉은 바로가 형들을 볼 때 혹여라도 어떤 부정적인 생각이나 느낌이 들지 않도록 형들 다섯 명만을 바로 앞으로 인도한 것입니다.
요셉은 늘 바로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바로의 시각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이처럼 섬세한 부분까지도 고려할 수가 있었지요. 그렇다고 해서 요셉이 자기의 지혜만을 의지하고, 육적인 방법들을 동원해서 바로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요셉이 고센 땅을 택한 것이나, 자신의 일족이 목축업을 한다고 말한 것, 또한 형들 중에 다섯 명만 바로 앞에 보인 것 등 이 모든 것들은 요셉이 바로의 마음을 헤아리며 애굽의 모든 상황에 대해서도 통달한 가운데 나온 그의 지혜였지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모든 요셉의 행동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결코 자기 지혜와 방법에 의지한 것이 아니라 사람 편에서 해야 할 바는 최선을 다해 행하되 일의 과정과 결과에 대해서는 오직 하나님만을 의뢰하며 맡겼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대로 지혜를 주실 수가 있었고 친히 바로의 마음도 주관하셔서 모든 상황을 형통하게 만들어 가실 수가 있으셨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가 요셉의 형들을 만났을 때 그는 요셉이 예견한 그대로 “너희 생업이 무엇이냐” 하고 질문합니다. 마치 요셉과 미리 약속이라도 한 것 같았지요. 바로가 말할 내용이나 행동할 방향까지도 요셉이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요셉은 바로의 성격과 관심사, 그 주변 상황까지 너무나 잘 파악하고 있었기에 바로보다 한발 앞서 그의 마음을 헤아리며 모든 것을 이루어 갈 수가 있었지요.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상황을 파악하고 분석하는 지혜만으로는 온전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지요. 현실을 아무리 잘 파악한다 해도 그 현실에 맞게 대처할 방법론을 모른다면 자신에게 유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중국의 역사 설 삼국지에 보면 위나라 왕 조조의 부하 중에 ‘양수’라는 인물이 나오지요. 양수는 항상 자신의 지혜를 자랑스럽게 여겼고, 자신이 섬기는 조조의 마음까지도 능히 읽어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에게 지혜가 있어서 조조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읽어낼 수는 있었지만, 자신이 만약 섬기는 윗분인 조조의 마음까지 그처럼 정확히 헤아린다고 드러냈을 때 그 사실을 아는 조조가 어떻게 나올지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점이지요.
결국 그것이 자신의 생명까지 앗아가는 생각지도 못한 결과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한번은 조조가 한중이라는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싸우는데 보급로가 차단되어 심히 곤란을 겪게 되었지요. 군량이 없으니 더 이상 싸우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철수하자니 한중 땅을 포기하기도 아깝고… 조조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큰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런 어느 날 조조는 암호를 정할 때 그것을 ‘계륵(鷄肋, 곧 닭갈비)’이라 정하지요. 전쟁 중에 갑자기 암호가 ‘닭갈비’라니 얼마나 이상한 일입니까? 이에 대해 부하 장수들이 궁금해 고 있을 때 양수 한 사람만 기분 좋게 웃으면서 짐을 싸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잘난 척을 하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이유를 설명하지요. “닭갈비라는 것은 살이 너무 적게 붙어서 뜯어먹자니 너무 수고스럽고 그렇다고 버리자니 아까운 부분이다. 조조에게 있어서 바로 한중 땅이 이 닭갈비와 같이 느껴지기 때문에 오늘의 암호를 계륵이라고 정한 것이다, 이런 걸 보면 조조는 곧 한중 땅을 포기하고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릴 것이니 빨리 짐을 싸두는 것이 낫다” 했지요.
과연 다음날 아침이 되자 양수의 말대로 조조는 한중을 떠나 철수하라는 명을 내립니다. 그런데 나중에 양수가 자신의 의중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는 말을 들은 조조는 마음이 매우 상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앞서서 헤어리고 행동했던 양수의 지혜에 대해 감탄하고 존중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에 위협을 느꼈던 것이지요. 그래서 기회를 봐서 양수를 제거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됩니다.
양수는 이런 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자신의 지혜를 뽐내며 조조의 마음을 미리 헤아려 앞서 행동하다가 마침내는 조조에게 올무를 잡히게 되었고 결국 처형을 당하고 말았지요. 아무리 똑똑해서 상대의 마음을 읽는다 해도 오히려 상대의 경계심을 자극하여 해를 입었으니 어찌 이 사람을 지혜 있다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도 진리 안에서 이러한 이치를 잘 깨달아 적용해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일을 할 때 나름대로 두뇌 회전이 빠르고 경륜도 쌓여 있어서 일에 대한 적절한 방법론이 한 눈에 보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방법론이 보인다 해도 그 일을 이루어감에 있어서 주변 사람과 어떤 관계를 유지하며 얼마나 덕스럽고 겸손하게 대하느냐에 따라 일의 열매가 전혀 달라질 수 있지요. 주변의 여러 사람들과 화평을 이루지 못하면서 자신의 지혜와 방법론만 좇고자 할 때는 설령 자기 능력만큼은 열매를 낼 수 있다 해도 온전한 열매를 내기는 어려우며 이처럼 화평이 깨어진 곳에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을 수도 없습니다. 또한 이런 사람은 나름대로 좋은 성과를 낸다 해도 주의 사람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니 단지 일을 잘하는 사람으로 인식될 뿐 존경받고 신뢰받는 사람이 되기는 어렵지요.
그러나 요셉과 같은 선의 지혜가 있다면 상대의 마음과 상황을 읽어낼 뿐만 아니라 선한 방법으로 상대의 마음도 얻으며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있습니다. 요셉은 바로 그러한 지혜가 있었기 때문에 바로의 마음을 헤아렸을 때 바로가 전혀 거부감을 느끼지 않도록 하면서 응답을 이끌어 내는 것을 볼 수 있지요.
바로가 요셉의 형들에게 질문을 하자, 요셉의 형들은 요셉이 알려준 대로 대답합니다. “종들은 목자이온데 우리와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대답한 후에 “가나안 땅에 기근이 심하여 종들의 떼를 칠 곳이 없기로 종들이 이곳에 우거하러 왔사오니 청컨대 종들로 고센 땅에 거하게 하소서” 했지요.
육적인 질서로는 요셉의 형들이 요셉보다 위이지만 요셉의 형들은 그동안 연단을 겪으면서 요셉을 육의 동생이라 여기기보다는 질서 가운데 순종해야 하는 존재로 철저히 마음에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자신들의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요셉이 시키는 그대로 순종하여 대답을 하지요. 자신들이 애굽 땅에 들어온 것은,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바로의 은혜를 구하러 왔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곧 계획적으로 애굽의 기름진 땅을 노리고 들어온 것이 전혀 아니며, 애굽에 어떤 해를 입히려는 마음도 없다는 말이지요. 그러면서 자신들이 거할 곳으로 고센 땅을 구했는데 고센 땅에 대해서는 요셉이 먼저 바로에게 언급해 둔 바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고센 땅에 머물러 있음을 바로가 들었고, 그 땅이 목축에 적합하다는 사실도 바로가 이미 인식하고 있는 상황이었지요.
이처럼 요셉이 먼저 사전작업을 해놓았기에 요셉의 형들이 고센을 구할 때도 바로의 입장에서는 갑작스럽게 느껴지지 않았고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바로가 요셉의 형들로부터 갑자기 고센 땅을 달라는 요구를 받았다면 바로 입장에서는 ‘저들이 무슨 이유로 저 고센 땅을 달라고 하는가’ 하며 뭔가 꺼림찍한 느낌이 들었을 수도 있겠지요.
물론 바로는 요셉의 형들이 무엇을 요구하든 다 들어 줄 것처럼 말은 했지만, 설령 그렇게 말을 했다 해도 막상 현실적으로 부담이 될 만한 것을 요구한다면 사람의 마음은 또 변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입으로 말한 것이 있으니 마지못해 부탁을 들어준다 해도 이후로 불편한 관계가 될 수가 있는 것이고요.
요셉은 이러한 사람의 마음을 잘 알았기에 자신이 먼저 바로에게 고센 땅에 대해 언급한 후에 형들로 하여금 겸손하게 고센 땅을 구하게 한 것입니다. 바로의 입장에서는 요셉의 형들을 볼 때 전혀 경계할만한 것이 없었고 그들에게 고센 땅을 내어준다 해도 그곳에서 조용히 가축을 돌보며 평안하게 바로를 섬길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지요. 그러니 고센을 구하는 그들의 요청에 대해서도 너그럽게 들어줄 마음이 우러났습니다.
그래서 요셉에게 말하기를 “네 아비와 형들이 네게 왔은즉 애굽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땅의 좋은 곳에 네 아비와 형들로 거하게 하되 고센 땅에 그들로 거하게 하고 그들 중에 능한 자가 있는 줄 알거든 그들로 나의 짐승을 주관하게 하라”합니다.
“네 아비와 형들이 네게 왔다” 하는 것은 그들이 화평한 의도로 애굽에 들어왔음을 바로가 인식하고 있다는 의미이지요. 형들에게 위협적인 요소가 전혀 없으며, 단지 기근을 피해 골육인 요셉을 찾아온 것으로 편안하게 받아들여졌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이제 바로는 주권자로서 매우 관용스러운 태도를 보여 줍니다. “애굽 땅에서 아무 곳이나 골라도 좋다. 그러나 그 중에 너희에게 고센이 적합하다면 그 곳에 머무르도록 허락하겠다” 했던 것이지요.
또한 고센 땅을 내어준 것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바로의 짐승들을 주관하라는 사명까지 더해주었습니다. 바로의 가축, 곧 왕에게 속한 재산을 이방인들로 하여금 관장하게 한다는 것은 큰 신뢰와 관용의 표현이지요.
이렇게 해서 형들이 바로로부터 응답을 얻어내자, 요셉은 이번에는 자기 아비 야곱을 바로 앞으로 데려갑니다. 요셉이 이렇게 했던 것은 질서 가운데 형들과 아버지를 구별하는 의미에서였지요. 바로와의 첫대면에서 어떤 반응이 나올지도 또한 바라던 바를 얻어낼 수 있을지도 아직 확정되지 않은 불안한 상황에 아버지 야곱을 함께 모시고 간 것이 아니라, 이미 응답을 받고 평안한 상황에서 비로소 아버지 야곱을 바로에게 소개했던 것입니다.
요셉으로서는 아버지 야곱으로 하여금 혹여라도 난처해질 수도 있는 자리를 피하도록 했던 것이지요. 이미 요셉의 형들과의 만남을 통해 마음이 편안해진 바로는 이제 야곱을 볼 때 편안하게 대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본문에 야곱이 바로를 축복해 주었다는 내용을 통해 알 수 있지요.
바로는 자신이 볼 때 아랫사람인 야곱이 자신을 축복한다 해서 ‘어찌 이방인이 감히 이 나라의 주관자인 나에게 축복을 빌어 줄 수가 있는가’ 하며 기분 나빠 하지를 않았습니다. 또한 야곱이 바로가 섬기는 신의 이름으로 축복을 해 준 것이 아님에도 거기에 대해 거부감을 갖지 않았지요.
바로의 입장에서는 야곱을 단순히 나이 많은 노인이요 자신이 사랑하는 신하 요셉의 아비로 대하며, 노인이 좋은 말로 자신에게 복을 빌어준다는 정도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만큼 지금 바로가 야곱에 대해 편안하고 열린 마음이었음을 알 수 있지요.
더욱이 바로가 나이를 물을 때 야곱의 대답 역시 바로를 안심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했는데, 이 말 또한 바로에게는 야곱과 그의 가족들이 전혀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시켜 주는 말이었지요.
야곱과 그 조상들은 오랜 세월동안 나그네처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목축을 하며 살아왔고 어떤 땅을 취하려고 한다거나 욕심 가운데 남의 것을 넘본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바로는 야곱과 그의 가족들이 주변의 다른 사람들과 거칠게 다투거나 해를 주며 산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업에 종사하며 평화롭게 살아왔다는 좋은 느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지요. 이렇게 해서 요셉의 가족은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 바로와의 만남을 가졌고, 요셉은 자신이 계획한 대로 고센 땅에서 가족들을 부양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제 요셉이 가족들을 위해 무엇을 준다 해도 그 모든 것은 애굽의 최고 통치자인 바로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되지요.
만약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요셉의 가족들이 애굽에서 누리는 모든 것에 대해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물론 요셉은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지만, 70명이나 되는 요셉의 가족들이 들어와서 애굽의 좋은 땅에 거하게 되는 것을 볼 때, 이에 대해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이 없으리라고는 장담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요셉의 권세 덕분에 그의 가족들이 평안함을 누리게 될 때 이를 보는 애굽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마치 애굽의 재산으로 이방인들을 배불리는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면 “왜 우리나라 안에 이방인들을 끌어 들이는가? 혹여 저들이 적들과 내통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는 것인가” 하며 이런저런 모함을 할 수도 있지요.
그러나 요셉의 겸비함과 선한 지혜 속에서 모든 것이 바로의 명령으로 진행되게 만들었기에 이제는 누구도 감히 그런 말을 입 밖에 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요셉에게는 이러한 놀라운 지혜가 있었기 때문에 철저히 질서를 존중하고 화평을 좇으면서도 결국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다음시간에는 요셉이 어떻게 해서 바로와 백성 모두에게 유익이 되는 방법으로 기근을 헤쳐 나가는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요셉에 대해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지혜가 참으로 뛰어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사람으로서 앞으로 되어질 일들을 마치 눈앞에 보는 것처럼 예견하는가? 어떻게 남의 마음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끌어 갈 수 있는가?” 하며 감탄을 금할 수가 없지요.
그렇다면 여러분도 요셉의 이러한 지혜가 사모되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여러분이 반드시 깨달아야 할 것은 요셉의 지혜는 자기 유익을 구하고 상대를 이용하려는 사심 가운데서 나온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요셉은 바로의 마음을 읽는다 해서 그것을 육적으로 이용하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는 간교한 마음이 결코 아니었지요. 그렇게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서는 남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선의 지혜가 나올 수 없습니다. 요셉은 자신이 애굽의 제2인자라 할지라도 질서를 어기지 않고 머리인 바로를 존중하며, 상대의 입장을 고려해 주는 마음을 갖고 있었기에 이러한 선의 방법론이 보였던 것이지요.
그런데 사실 바로의 입장에서는 단지 요셉의 몇 마디 말만으로 마음이 움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요셉이라는 사람 자체가 얼마나 성실하며 사심이 없고 자신을 중심에서 섬겨주는지 바로는 그러한 것을 항상 체험해 왔지요. 이처럼 요셉에 대한 신뢰가 쌓여왔기에 요셉이 하는 말을 더 좋은 쪽으로 받아 주었고 요셉이 의도하는 대로 호의를 베풀어준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었지요. 요셉이 자기 가족들을 고센 땅으로 인도한 것은 단순히 혈육에 대한 사사로운 마음으로 인해 자기 유익을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스라엘 선민을 이루기 위해 요셉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정확히 주관받아 행하므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요셉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더욱 담대하게 이 일들을 진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정녕히 이러한 요셉과 같이 축복과 응답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근본 마음이 요셉을 닮아야 합니다.
요셉이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는 지금까지 수 시간에 걸쳐 들으셨는데 여러분도 이러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범사에 지혜를 주시지요. 그리고 잠 16:1에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는 말씀대로 여러분이 마음에 품고 계획하는 일마다 하나님께서 사람과 환경을 주관하셔서 형통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셉과 비교할 때 여러분은 과연 어떤 모습이십니까? 주변 사람들에게 여러분은 떤 존재로 심어져 왔는지요? 교구 안에서, 선교회 안에서, 혹은 직장 동료나 가장 가까운 가족들이 볼 때 여러분은 어떤 사람일까요? “저 분은 정녕 겸손하고 섬기는 사람이다. 사심 없이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사람이며 선하고 진실한 사람이다” 이렇게 여러분에 대해 느끼고 있습니까? 아니면 “진리를 알고 가르치기는 하지만, 섬김 받기 원하는 마음이 있기에 늘 조심해야 하는 사람이다”라거나, “경륜이 있고 업무적인 능력은 있지만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이고 들레는 사람이다” 이렇게 인식되지는 않았습니까?
오늘 다시 한 번 요셉과 비교해서 여러분의 마음과 말과 행동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제는 마음의 자그만한 교만이나 들렘, 자기 유익을 구하는 마음과 사심 등 세미한 분야까지도 다 벗어 버리므로 위로부터 난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 만사에 형통한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6-08-14 오전 10:39:08 Posted
2018-12-04 오후 1:48:37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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