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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창세기 강해 (2000년~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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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세기 강해(224)
설교자 당회장 이재록 목사 설교본문 창47:13-31 등록일자 2006.08.18
“기근이 더욱 심하여 사방에 식물이 없고 애굽 땅과 가나안 땅이 기근으로 쇠약하니 요셉이 곡식을 팔아 애굽 땅과 가나안 땅에 있는 돈을 몰수히 거두고 그 돈을 바로의 궁으로 가져오니 애굽 땅과 가나안 땅에 돈이 진한지라 애굽 백성이 다 요셉에게 와서 가로되 돈이 진하였사오니 우리에게 식물을 주소서 어찌 주 앞에서 죽으리이까
[16절부터 28절까지 중략]
이스라엘의 죽을 기한이 가까우매 그가 그 아들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환도뼈 아래 넣어서 나를 인애와 성심으로 대접하여 애굽에 장사하지 않기를 맹세하고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선영에 장사하라 요셉이 가로되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야곱이 또 가로되 내게 맹세하라 맹세하니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경배하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과 같이 문명이 발달한 세상에서도 수많은 생명이 기근으로 인해 죽어갑니다. 지금 이 순간도 세계 곳곳에는 굶주려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요. 물론 우리나라에도 몇 십 년 전까지는 보릿고개의 어려움이 있었고 연로하신 분들 중에는 그 고통을 겪어 보신 분들도 있습니다. 또 성경에 보면 기근을 이기지 못해 어미가 자기 자녀를 잡아먹기까지 하는 처참한 내용들이 나오기도 하지요.
그러나 이러한 기근의 참상이 어떤 것인지 잘 느끼지 못하는 분들이 많을 것 같아서 최근의 사례를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2006년 2월 동아프리카 몇몇 나라는 최악의 가뭄이 6년째 계속되면서 국제사회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재난 지역이 되었습니다. 당시 그 지역에 대한 보고를 보면 오랜 가뭄으로 농작물은 물론 초목도 다 말라죽고 사방으로 보이는 것은 메마른 땅과 가시나무뿐이지요.
수많은 사람들과 가축들이 굶어 죽었고 곳곳에 죽은 짐승들의 뼈가 뒹굴고 있지만 사람도 먹을 것이 없으니 짐승을 돌볼 여유는 전혀 없는 상황입니다. 강바닥이 드러나서 마실 물이 없으니 어린 아이들이 5Km 이상, 심지어 15Km 이상까지 걸어가서 물을 길어 와야 하고 40도가 넘는 더위 속에서 이렇게 길어온 물 한통으로 10명이 넘는 가족이 하루를 버티기도 하지요.
구호기관에서 학교급식으로 주는 옥수수 죽이라도 나오면 아이들은 그것으로 한 끼를 먹으며 겨우 연명하지만 그것도 없을 때는 며칠씩도 굶어야 하고, 그것조차도 집에서 굶고 있는 가족들을 위해 먹지 않고 싸가는 아이들도 있다고 합니다.
어린 학생들 중에는 수업을 받는 도중에도 허기로 인해서 기절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하지요. 식량을 찾아 고향을 버리고 떠도는 난민들도 많고 수많은 사람들이 영양실조에 걸려 있습니다. 웅덩이에 고인 흙탕물에는 세균이 득실거리는데도 갈증과 허기를 이기지 못한 아이들이 그 흙탕물로 배를 채우고 병들어갑니다. 그 당시 보고로는 한 달 정도만 더 비가 오지 않으면 동아프리카 일대의 1,400만 명 곧 우리나라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가 굶어죽을 위기에 처해있다 했습니다.
다행히 이후로(2006년 2월 이후) 비가 조금 오고 세계 각처에서 구호 량을 보내 주어 급한 위기는 넘길 수 있었다고 보고되었지요. 그나마 오늘날은 이렇게 다른 지역에서 급하게 식량과 약품의 원조라도 받을 수 있지만 그렇다 해서 기근의 어려움이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오늘날도 이렇게 기근을 극복하기 어렵다면 수천 년 전 요셉의 시대에는 기근이 얼마나 두려운 재앙이었을 지를 능히 상상해 볼 수가 있겠지요. 더욱이 주변의 나라까지 다 함께 기근을 겪는다면 어디 먼 나라에서 도움을 받을 길도 없고 꼼짝없이 굶주리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1, 2년도 아니고 7년이나 기근이 계속 된다면 무수한 사람과 짐승이 굶어죽고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들은 식량을 찾아 유랑하므로 그 주변은 더 이상 사람이 살기 힘든 곳이 되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를 받은 요셉은 이 무서운 기근의 재앙을 능히 극복해 낼 수가 있었습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기에 수년 동안 기근이 계속되면서 사방에 식물이 없고 애굽 땅과 가나안 땅이 기근으로 쇠약해졌지만 바로의 창고에는 곡식이 가득 쌓여 있었지요. 이제 이 곡식만이 애굽 백성들은 물론이고 주변에 사는 사람들의 생명까지도 지탱할 수 있는 유일한 생명줄이었습니다.
백성들은 집안에 양식이 떨어지자 처음에는 요셉에게 와서 돈을 주고 곡식을 샀는데 결국에는 돈이 다 떨어지고 말았지요. 그래서 이제는 자신들의 짐승을 가져와서 곡식과 바꾸게 되었습니다. 사람도 살기 힘든 기근 중에 짐승을 돌봐야 한다면 오히려 짐스러울 뿐이었으니 백성들로서는 짐승을 주고 곡식을 바꾸는 것에 주저할 이유가 없었지요. 그러나 해가 지나자 이제 짐승도 남아있지 않고 더 이상 곡식을 사올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요셉 앞에 나가서 말하기를 19절에 “우리가 어찌 우리의 전지와 함께 주의 목전에 죽으리이까 우리 몸과 우리 토지를 식물로 사소서 우리가 토지와 함께 바로의 종이 되리니 우리에게 종자를 주시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고 전지도 황폐치 아니하리이다” 하지요. 자신들을 그냥 놔두면 어차피 죽을 것이고 경작할 사람이 없으면 토지도 황폐해질 것이니 자신들의 몸과 토지를 식물로 사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바로의 종이 되어 바로의 토지를 경작하게 해달라는 것이지요. 요셉은 그들의 말대로 백성의 모든 땅을 사서 바로에게 돌리고 모든 백성을 바로의 소작인으로 삼습니다.
이때부터 애굽의 모든 땅은 바로에게 속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어찌 보면 이렇게 하는 일들이 참으로 매정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풍족한 양식을 그냥 좀 나눠주면 좋겠는데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고 결국 모든 가축과 토지, 심지어 사람들까지도 바로의 것이 되도록 하고 있지요.
그런데 만약 공짜로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만약 대가를 치르지 않고 곡식을 분배받게 되면 불필요한 낭비가 생길 수 있습니다. ‘양식이 다 떨어지면 또 가서 받아오면 되지…’ 이런 마음들로 인해 아무래도 쉽게 양식을 소비할 수가 있지요. 그러다보면 비축해둔 식량을 가지고 애굽의 모든 백성들이 7년의 가뭄을 견디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고요.
그러니 극심한 기근이 금방 끝날 것도 아니고 7년이나 지속될 것을 아는 요셉의 입장에서는 곡식 한 톨이라도 낭비되게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하여 요셉은 값을 받고 곡식을 팔면서 과다하게 값을 청구한 것이 아니었고, 백성들이 바로에게 속하여 땅을 경작하게 되었을 때도 그들에게 결코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았지요. 그들에게 농사지을 종자를 공급해 주면서 그것으로 추수하게 되면 수확량의 5분의 1 곧 20%를 바로에게 상납하고 나머지는 그들의 양식과 종자로 쓰라 했습니다. 20%라고 하면 결코 과다한 소작료가 아니지요.
예를 들어 우리나라 조선시대 말엽에 소작농들이 지주에게 내었던 소작료는 50% 이상 70%에 달하기도 했습니다. 거기다가 각종 세금과 농사에 들어가는 비용까지 소작농이 지불해야 했기에 백성들은 생계조차 이어가기가 어려운 지경이었지요. 70%에 달하는 소작료가 너무나 무거워서 소작농들의 데모가 종종 일어나기도 했는데, 이때 소작농들의 요구 사항이 바로 소작료를 50% 이하로만이라도 내려달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조선 후기 경주에는 만석꾼 부자의 재산을 300년 동안 이어온 최씨 가문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대대로 주변에 덕을 베풀어왔는데 백성들을 어렵게 하지 않으려고 항상 소작료를 40% 정도로 유지했지요. 40%를 받는 것도 매우 덕스럽게 여겨졌고 백성들은 서로가 그 땅을 소작하고 싶어서 최 부잣집의 땅이 더 늘어나기를 소원했으며, 민란이 나서 부자들이 해를 입을 때도 최 부잣집만은 지킴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런 기록들을 참고해 보자면 요셉이 소작료로써 제시한 20%는 아주 관대한 조건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요셉이 결코 백성들을 힘들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본문 25절에 나오는 백성들의 고백을 보아도 알 수 있지요. “그들이 가로되 주께서 우리를 살리셨사오니 우리가 주께 은혜를 입고 바로의 종이 되겠나이다” 했던 것입니다.
만약 요셉의 행함이 덕스럽지 않았다면 배고픔으로 궁지에 몰린 백성들이 힘을 합해서 민란을 일으켰을 가능성까지도 충분히 있지요. “우리의 돈과 가축과 땅을 빼앗더니 우리까지 소작인으로 삼는 구나” 하며 억울하게 생각하고 원망할 수도 있는 것이고요.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백성들의 고백을 보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살려주었으니 우리가 당신의 은혜를 입었다” 하면서 오히려 감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요셉은 백성들을 어렵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넉넉히 살 길을 마련해 주면서 바로에게도 큰 부와 권세를 안겨주었지요.
그런데 이때 요셉이 행한 한 가지 지혜로운 일은 제사장의 전지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요셉이 만약 굳이 꾀를 써서 애굽 제사장의 전지까지 취하려 했다면, 물론 그렇게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애굽의 제사장은 바로에게 속하여 바로로부터 녹을 받는 입장에 있었으므로 요셉은 바로의 권위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그들의 전지는 건드리지 않았지요.
요셉이 만약 지혜가 부족하고 의욕만 넘치는 사람이었다면 자신이 제사장의 땅까지 취해서 애굽의 땅 전체를 바로의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을 바로가 더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오히려 요셉 자신에게 위험을 자초하는 행동이 될 수 있는 것이었지요. 왜 그런 것일까요?
성도 여러분, 요셉은 애굽에서 바로를 위해 일했고, 이방 제사장의 딸을 아내로 삼기는 했지만, 결코 애굽의 우상을 섬기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요셉의 모든 행함이 겸손하며 전폭적으로 바로에게 신뢰를 받았기에 그가 애굽의 신들을 섬기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에 대해 주변에서도 묵인하고 있는 상황이었지요.
그런데 만약 요셉이 제사장의 소유를 건드린다면 자칫 종교적인 갈등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즉 ‘요셉이 그들의 신을 멸시하므로 제사장들까지 우습게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살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지혜로운 요셉은 이런 것까지도 생각해서 결코 자신이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지 않았고 겸손하게 바로에게 속한 분야를 존중하므로 바로와의 신뢰관계를 유지해갈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이와 같이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는 모두에게 유익과 화평을 주게 됩니다. 상대를 희생하여 내 유익만을 취하는 것이 아니고, 이 사람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 저 사람에게는 손해를 주는 것도 아니지요. 자신이 목표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상대로 하여금 위협을 느끼게 하거나 주변과 화평을 깨뜨리는 것도 아니며, 모두가 함께 유익을 얻는 길로 가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의 지혜입니다.
이처럼 지혜로운 요셉으로 인해 애굽의 백성들은 기근을 잘 넘길 수 있었고 바로는 힘들이지 않고 왕권을 굳건히 하며 국력을 신장시켜 나갈 수 있었지요. 자칫 나라가 완전히 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오히려 바로는 막대한 이득을 볼 수가 있었고, 그러니 바로의 입장에서는 요셉이 너무나 귀중한 보배였습니다. 더구나 변함없이 바로 자신을 존중하며 선하고 겸비하게 행하는 모든 행동이 전혀 흠잡을 데가 없었으니, 바로가 요셉을 얼마나 높여 주었겠습니까?
여러분도 이러한 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교회에서 뿐만이 아니라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어느 곳에 있든지 항상 상대의 입장을 생각해 주고 모두를 섬겨줄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랫사람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알고, 윗사람의 말씀이라면 당연히 귀를 기울이며 동료들의 소리도 귀 담아 들을 수 있어야 하지요. 이것이 지혜로운 것이고 그럴 때 여러분은 비록 최악의 상황을 만난다 해도 그 안에서 최선의 결과를 이끌어 내며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셉이 애굽 땅을 잘 다스리는 동안 야곱과 그 후손들은 고센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며 유복한 삶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야곱은 죽은 줄만 알았던 아들을 22년 만에 만난 후, 17년을 더 살면서 아들과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지요.
야곱이 이처럼 요셉과 그래도 17년이나 더 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요셉의 마음을 헤아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어린 날 그토록 자신을 사랑해 주시던 아버지, 너무나 그리워하던 아버지를 만났는데 이제는 자신이 얼마든지 풍족하게 모실 수 있는 상황에서 만약 몇 년 지나지도 않아서 아버지가 죽게 되면 요셉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제대로 아버지에게 효도 한번 하지 못하고 오랜 세월 마음에 고통만 드렸던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죄송하고 마음 아팠겠지요.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충분히 아버지를 섬기며 마음의 짐을 덜 수 있도록 17년이라는 세월을 넉넉히 허락해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17’이라는 숫자에는 ‘하나님께서 친히 주관하시고 행해 나가신다’는 의미가 있다 했지요. 그러니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가 연단받게 된 것이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신 섭리였던 것처럼 야곱이 요셉과 재회하여 복을 누린 기간도 하나님께서 친히 주관하여 이루셨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사실을 통해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여러분도 더욱 깊이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연단을 허락하시기도 하고, 때때로 연단 중에 있는 여러분을 외면하시기도 하지만 그럴 때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작은 마음의 소원까지라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연단을 통해 열심히 악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이루기 위해 순종해 갈 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작은 소원 하나까지도 반드시 기억하셨다가 때에 맞춰 응답해 주시지요.
저도 하나님의 일들을 이루어감에 있어서 무조건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 왔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제가 드렸던 것보다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것이 훨씬 많다는 사실이지요. 더구나 하나님께서 마치 숨겨 놓았던 선물처럼 때를 좇아 저를 기쁘게 하는 일들을 베풀어 주실 때는 말할 수 없는 감격으로 눈물이 솟아나게 됩니다. “이렇게 섬세한 것까지 나를 위해 예비하셨구나, 아버지께서 나를 위로하기 위해 이렇게까지 마음을 써주셨구나” 하며 뜨거운 감사의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땅에서도 위로와 축복을 주실 뿐 아니라 하늘에서는 더욱 크고 영광스러운 것들로 주시는데, 여러분의 처소와 상급 하나 하나가 여러분의 취향에 꼭 맞게 만들어져 있고 여러분이 믿음으로 행한 모든 것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상급으로 갚아지게 됩니다. 언제 어느 때 여러분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쉬지 않고, 쓰지 않고, 누리지 않았던 것이 있다면 그렇게 하나님 앞에 드려진 모든 것들에 대해 이 땅에서는 물론이고 장차 하늘에서는 이 땅에서 받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놀라운 상급으로 갚아주시지요.
여러분도 바로 이러한 섬세하신 아버지의 사랑을 날마다 체험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롬 8:18에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하신 말씀처럼 장차 나타날 영광을 소망하면서 더욱 열심히 천국을 침노하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성도 여러분, 부자간에 함께 한 17년의 세월은 요셉에게도 행복한 시간이었지만 늙은 야곱에게도 너무나 유복한 말년이었습니다. 육적으로만 편안하고 행복한 시간이 아니라 영적으로도 많은 유익이 되는 시간이었지요. 야곱도 지혜로운 사람이기에 요셉의 행함을 볼 때 아들의 뛰어난 지혜를 깨달을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많은 은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하나하나 깨우쳐 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지요. 특히 요셉이 죽은 줄로만 알았을 때 자신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하여 절망하고 낙심했던 모습을 떠올리면서 하나님 앞에 민망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도 믿음이 좀 자란 후에 예전의 일들을 생각해 보면 종종 그 일로 인해 하나님 앞에 민망함을 느낄 때가 있을 것입니다. ‘내가 그때 왜 그랬을까? 내가 정녕 하나님만을 의지했더라면 그렇게 어리석게 힘들어 하지 않았을 텐데 믿음의 고백과 변함없는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렸을 텐데… 지금이라면 능히 그럴 수 있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 후회하기도 하지요.
분명히 지식적으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들어서 알지만 정작 자신에게 연단이 밀려왔을 때는 눈앞의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므로 입술에 원망의 말이 나오기도 하고, 믿음의 행함을 내보이지 못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지나고 믿음도 성장하고 나면 그 당시의 연단이 오히려 축복의 기회였음을 깨닫고 그 당시에 더 잘 승리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여러분 중에도 지금 ‘내가 연단 중에 있다’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시야를 넓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 보시기 바랍니다. 인간 경작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지금 겪고 있는 이 모든 일들을 영적으로 바라보면 그 안에서 여러분을 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 중심에서 그 섭리가 깨달아지게 되면 ‘내가 지금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지’ ‘어떻게 더 감동적인 믿음의 고백을 할 것인지’ ‘어떻게 선과 사랑으로 행해야 할 것인지’ 이러한 영적인 해답이 떠오르게 되지요. 그래서 그 영적인 해답으로 행해 나갈 때 결국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므로 지금의 연단을 통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셉과 함께 하면서 노년의 행복을 누리다가 자신의 임종이 다가왔음을 깨달은 야곱은 이제 요셉에게 한 가지 맹세를 시킵니다. 곧 “네 손을 내 환도 뼈 아래 넣어서 나를 인애와 성심으로 대접하여 애굽에 장사하지 않기를 맹세하고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선영에 장사하라” 하지요. 전에도 설명한 적이 있는 것처럼 ‘환도뼈’ 곧 넓적다리뼈는 영적으로 ‘곧은 것, 변개치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환도뼈 아래 손을 넣어 맹세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 약속이 지켜지도록 아뢰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보장하시고 인도하시도록 의뢰한다는 의미가 담겨있지요. 이처럼 야곱이 요셉에게 맹세까지 시키면서 자신도 선영 곧 조상들의 무덤에 장사되기 원한 것은 단순히 육적으로 그 땅을 그리워해서가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주신 꿈과 비전 곧 가나안 땅에서 그들의 후손으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신다는 것에 대한 영적인 믿음과 소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사랑하는 요셉과 함께 아무 걱정 없는 17년의 세월을 보냈지만 그 긴 세월 속에서도 야곱의 마음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이 결코 잊혀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순간까지도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신실하게 믿으며, 조상들이 묻힌 땅에 자신도 함께 묻힘으로써 죽은 후에라도 약속의 땅에 돌아감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자신의 신뢰를 증거하고자 했던 것이지요. 그만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야곱의 믿음이 확실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셉은 비록 어린 나이에 애굽으로 팔려왔지만 아버지로부터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배웠고 그것이 요셉의 마음에서 떠난 적이 없지요. 그러니 단순히 아버지를 사랑하기에 그 유언에 순종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도 동일한 소망과 믿음으로 야곱을 조상들의 무덤에 장사하고자 했습니다.
또한 이후에 보면 요셉 자신도 후손들에게 동일한 의미의 유언을 남기는 장면이 나오지요. 창 50:25에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했던 것입니다. 아무리 세월이 지나고 환경이 바뀐다 해도 한 번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잊지 않는 이와 같은 좋은 중심을 가졌기에 하나님께서는 야곱 즉 이스라엘의 자손을 선민으로 택하시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이뤄 가실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곱도 요셉도 애굽에서 사는 동안 아무런 부족함이 없는 삶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정녕 사모한 것은 잠시 누리는 이 땅에서의 부귀영화가 아니었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축복이었지요. 그래서 오랜 세월이 지난다 해도 하나님의 약속을 잊지 않았고 “약속하신지가 언젠데 그 약속이 왜 이렇게 더디 이뤄지는 것인가” 하면서 의심하지도 않았습니다. 끝까지 인내하면서 믿음과 소망으로 바라보았고 그러면서 순간순간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성실히 살아갔지요.
여러분도 각자 하나님 안에서 믿음으로 받은 여러 가지 꿈과 비전이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나도 반드시 온 영을 이루리라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리라’ 하는 소망이 있지요. 교회적으로 함께 품는 대성전과 세계 선교의 비전이 있고, ‘이 안에서 내가 어떠한 일을 감당하리라’고 여러분 각자가 품은 비전도 있을 것입니다. 그 밖에도 하나님 앞에서 응답받고자 기도해 온 크고 작은 소원들이 있을 것이고요.
그러면 여러분은 이러한 기도의 제목들을 얼마나 변함없는 마음으로 품으셨는지요? ‘하나님께서 분명히 이루어 주신다 하셨는데 왜 속히 이루어지지 않는 것인가’ 하면서 믿음이 흔들린 적은 없으십니까? 혹은 평안한 현실에 안주해 버리므로 ‘그냥 이렇게 사는 것도 좋다.’ 하면서 그 동안 기도하며 품어왔던 꿈과 비전에 대한 간절한 사모함이 사라지고 노력하려는 모습도 시들어 가지는 않으셨는지요?
히 10:36에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했고, 이어지는 38절에는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약속하셨다 해서 그저 가만히 기다린다고 받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루리라는 믿음으로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인내할 때 그 약속을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한번 품은 마음이 변개하여 뒤로 물러가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님들은 여러분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들을 꼭 붙잡고 오늘도 변함없는 믿음으로 행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시고 그것을 신실하게 행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도 약속하신 모든 축복으로 풍성히 내리워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6-08-21 오후 12:57:43 Posted
2018-12-04 오후 1:48:37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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