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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창세기 강해 (2000년~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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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세기 강해(225)
설교자 당회장 이재록 목사 설교본문 창48:1-9 등록일자 2006.08.25
“이 일 후에 혹이 요셉에게 고하기를 네 부친이 병들었다 하므로 그가 곧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함께 이르니 혹이 야곱에게 고하되 네 아들 요셉이 네게 왔다 하매 이스라엘이 힘을 내어 침상에 앉아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한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복을 허락하여
[4절부터 7절까지 중략]
이스라엘이 요셉의 아들들을 보고 가로되 이들은 누구냐 요셉이 그 아비에게 고하되 이는 하나님이 여기서 내게 주신 아들들이니이다 아비가 가로되 그들을 이끌어 내 앞으로 나아오라 내가 그들에게 축복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이 공인(公人)이 되다보면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는 많은 분야를 희생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라의 중책을 맡고 있는 사람이라면 가족들과 어떤 약속을 해 놓았다 해도 갑자기 국가적인 중대한 일이 생기게 되면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가야 하지요. 물론 가족들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이해하려 하겠지만 같은 상황이 계속 반복되다 보면 실망하거나 서운함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하여 가족만을 먼저 생각해서 공인으로서의 사명을 등한시(等閑視) 한다면 이는 더욱 바람직한 모습이라 할 수 없지요. 최대한 양쪽을 균형 있게 조화를 이루면 좋겠지만, 이런 경우 선후를 따지자면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하는 쪽을 생각해야 하고 대의(大義)를 좇는 쪽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러한 우선순위에 대해서는 성경에서도 분명히 말씀하고 있지요. 눅 9:59-62에 보면 이에 대한 우리 예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대답하기를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하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십니다. 이때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또 다른 사람이 예수님께 아뢰기를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하지요. 이에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말씀하신 이유는 매정하셔서도 아니고, 가족을 사랑하고 돌보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육과 영의 선택에 있어서 무엇이 먼저인지를 분명히 말씀하신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일꾼이 가져야 할 바른 자세에 대해 깨우쳐 주고 계신 것이지요. 예수님과 함께했던 제자들이 만약 가족에 대한 정에 얽매여 있었다면 그들은 제자로서 쓰임받기 어려웠을 것이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데 있어서도 많은 지장을 초래했을 것입니다.
그렇다 하여 가족을 등한시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지요. 우선순위는 당연히 있으되 가족들에 대해서도 주 안에서 최선을 다해 섬기며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더욱이 주의 일을 핑계 삼아 주 안에서도 당연히 해야 할 가족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하지 않는다면 이는 오히려 주의 영광을 가리게 되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막 7:11-13에 가르치시기를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 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하여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할 바는 마땅히 하되 주 안에서 부모와 가족들에게도 해야 할 바는 해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그렇지 않고 하나님을 핑계하여 해야 할 바도 하지 않는 많은 경우들로 인해 이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잘 명심해서 여러분은 가족들에게도 항상 주 안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할 수 있어야 하며 마땅히 해야 할 바를 소홀히 해서도 안 됩니다.
그렇게 진리로 행하며 심어 나갈 때 온 가족이 화평한 가운데서 마음껏 주의 일에 힘쓰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충성해 나갈 수가 있는 것이지요. 진리 안에서 당연히 행할 바를 행하지 않고 당연히 섬겨야 할 바도 섬기지 않기 때문에 때로는 주의 일을 하면서도 가족으로부터 이해와 협조를 받기보다는 불평과 핍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여러분의 하기 나름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의 요셉은 자신이 맡은 국가적인 중책을 수행하는 것과 고센 땅에 거하는 가족들을 보살피는 일에 있어서 어느 한 쪽도 부족됨이 없도록 행해 나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요셉에게 있어서 우선시 되는 것은 자신이 맡은 국가적인 사명이었지요. 그러나 그것도 자기 공명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영광과 섭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이렇게 애굽의 총리로서 극심한 가뭄이라고 하는 비상시국을 맞아 모든 것을 치리해 나감에 있어서 어느 한 분야도 부족됨이 없게 해나갔지요. 더욱이 가나안 땅으로부터 가족들이 와서 애굽의 고센 땅에 거하게 된 후로는 이전보다 더 자신의 사명에 최선을 다하며 성실하고 충성되게 감당해 나갔습니다.
만약 가족들이 왔다고 해서 늘 그곳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고 가족들 돌보기에만 마음을 썼다면 이를 바라보는 바로와 그의 신하들의 시선이 고울 수가 없지요. 가족에게 마음을 쓰느라 자신이 해야 할 사명에 소홀해진다면 이는 바로와 그의 신하들의 마음을 더욱 불편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바로와 그의 신하들로부터 요셉이 그동안 애굽을 위해 충성했던 모든 일들이 ‘결국은 자기 가족들을 애굽으로 데려와서 배불리 먹이고 살게 하기 위한 것이었구나’ 하는 오해까지도 받을 수 있는 것이지요. 요셉은 이러한 상황까지도 다 예상했기에 혹여라도 가족들로 인해 어떠한 흠이 생기지 않도록 더 많은 수고와 노력과 헌신을 했습니다.
그래서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바라 볼 때 ‘요셉의 가족들이 애굽에 온 것이 결과적으로는 자신들에게도 도움이 되었다’고 그들 스스로가 느낄 수 있도록 했지요. 그러니 요셉은 가족들이 고센 땅에 온 후에도 더욱 바로와 그의 신하들의 신임과 사랑을 받으며 모든 분야에서 덕이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이처럼 이전보다 더 자신의 사명에 충성하며 노력한다 해서 고센 땅에 거하는 아버지와 가족들에게는 전혀 마음을 쓰지 않은 것이 아니지요. 총리로서 이전보다 더 성실하게 자신의 할 바를 다하면서도 가족들에 대해서도 역시 마음을 쓰며 자신의 할 도리를 다해 나갔습니다.
그처럼 그리던 아버지를 22년 만에 만났는데 요셉이 그동안 아버지를 섬기지 못한 것에 대해 보상해 드리기 위해서라도 얼마나 지극 정성을 다 했겠는지요. 다만 요셉은 그렇게 하면서도 늘 공평과 순리를 좇았기에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불편함이 되지 않도록 했고, 자신의 직분과 사명에 결코 소홀함이 없도록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를 못합니다. 육적인 정이나 사사로운 감정에 끌려서 공(公)과 사(私)를 구분 못하고 치우친다거나, 공인으로서 자신이 해야 할 바를 소홀히 해 버리고 마는 경향이 있지요. 사적인 것에 치우쳐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눈총을 받을 만한 모습이 나오기도 하여 정말 중요한 순간에는 정작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함으로 자신의 본분을 다하지 못하며 대의(大義)를 그르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에게는 이러한 모습이 전혀 없었고 늘 주변 사람들까지도 다 살펴서 덕이 안 되는 모습이 조금도 없도록 지혜롭게 행해 나갔던 것이지요. 요셉이 이처럼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도 않고 그러면서도 어느 한쪽에 소홀하지도 않도록 지혜로우면서 온전하게 행해 나갔다는 것을 우리는 오늘 본문 상황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1절과 2절에 보면 ‘혹이’ 요셉에게 그의 아버지 야곱이 병들었다 고하고, ‘혹이’ 야곱에게 그의 아들 요셉이 온다고 고하는 내용이 나오지요. 이때 ‘혹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이’라는 의미인데 그렇다면 이때 그 어떤 사람이 누구였을까요? 그는 바로 요셉과 고센 땅에 거하는 요셉의 가족 사이를 오가며 서로의 메신저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이 사람을 통해 아버지 야곱과 가족들의 사정을 살폈던 것이고, 그로부터 소식도 들었던 것이지요. 바로 이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요셉은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늘 아버지 야곱과 가족들의 사정에 대해 세세히 알 수가 있었고, 필요에 따라 섬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 하여 요셉이 이러한 사람을 둔 것이 어떤 좋지 못한 의도를 가진 것은 결코 아니며, 다만 누구에게도 불편함을 주지 않고 조용히 가족을 돌봐 나가려는 좋은 마음에서 했던 일이었지요. 그러므로 세상 육의 지혜와 선의 지혜는 설령 어떤 일을 똑같이 한다 해도 그 안에 담긴 마음과 의도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요셉은 모든 일을 선의 지혜 가운데 행했고 따라서 그 마음에 결코 악의 모양이나 자기 유익을 구하려는 사심이 없었기에 그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원수 마귀 사단도 전혀 송사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여러분도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게 되면 그때는 비진리의 마음이나 의도를 가진 말이나 행함은 나오지도 않게 됩니다. 더 나아가 온 영으로 들어오게 되면 그때는 무슨 말을 하든지, 무슨 행동을 하든지 모든 것이 선한 의도와 마음 가운데서 나오지요.
그러니 육의 사람이 영의 사람을 보고 자기 마음과 생각에 맞추어서 판단하면 결코 맞을 수가 없는 것이며, 더욱이 온 영의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리 헤아려 보려고 해도 할 수가 없습니다. 마치 바다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바다의 깊이와 넓이에 대해 헤아려보고자 해도 그럴 수가 없는 것과 같지요. 목욕탕의 욕조만을 본 사람에게는 아무리 바다의 광대함에 대해 설명해 주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또한 영의 사람이 온 영의 사람에 대해 헤아려 보고자 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이지요. 온 영으로 들어간 사람에게는 항상 영의 사람이 헤아리는 그 이상의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더 깊고 선한 마음과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육의 지혜를 가진 사람이 위로부터 주신 선의 지혜를 가진 사람을 결코 따라 올 수가 없는 것이며, 같은 선의 지혜라 해도 얼마나 진리로 온전히 마음을 일구었느냐에 따라 깊이의 차이가 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선의 지혜 가운데 선한 방법론이 나온다 해도 온 영의 사람과 영의 사람과는 그 방법의 깊이와 차원이 다르지요.
예를 들어 육의 지혜를 가진 사람은 만약 상대의 의도와 마음이 읽혀지게 되면 그것을 이용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영으로 들어오게 되면 그처럼 상대의 의도와 마음이 읽혀진다 해서 결코 그것을 악용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지요. 상대에게도 유익이 되는 쪽을 좇고자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 온 영으로 들어오게 되면 상대의 의도와 마음이 읽혀졌을 때, 설령 내가 손해를 보고 해를 입더라도 그렇게 해서라도 상대를 위해줄 수만 있다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려는 마음이 되지요. 물론 상대를 육으로 위해 준다는 뜻이 아니라 나를 희생해서라도 상대의 영혼을 살릴 수 있고, 그의 영혼이 잘되는 길로 이끌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 길을 택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온전한 선이 아니면 결코 나올 수 없는 모습이지요.
하지만 악은 결국 악을 선택해 갑니다. 따라서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이 악을 활용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어 가시는 차원도 있다는, 이 정도만 여러분이 지금은 아시면 되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모세가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하면서까지 엄청난 죄를 지은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 간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차마 나를 버리지 못하시니 결국 백성들을 용서해 주실 거야’ 하는 그러한 얄팍한 육의 지혜에서 나온 것이 결코 아닙니다. 모세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저 백성들을 구할 수 있을까?’를 생각할 때, ‘나를 희생해서라도 저들을 구해야겠다’는 지극히 선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진실한 선의 행함이 나왔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선의 지혜와 그러한 선의 지혜로부터 나오는 선의 방법론은 결코 머리를 짜낸다고 나오는 것도 아니고 들어서 아는 지식 가운데서 나오는 것도 아니며, 오직 선한 마음 그 자체가 되었을 때만이 그 마음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병들었다는 말을 듣자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리고 야곱에게로 갑니다. 이는 요셉이 아버지 야곱의 수명이 다 되었음을 알았기 때문이며 야곱의 마음을 능히 헤아리므로 야곱이 요셉 자신뿐만 아니라, 손자들까지도 보고 싶어 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해서 아들 요셉과 두 손자를 맞은 야곱은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언약의 말씀에 대해 설명해 줍니다. 야곱을 통해 생육하고 번성하여 많은 백성이 나고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어서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지요.
그러면서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대해 “내 것이라” 말합니다. 이는 그들을 야곱 자신의 것으로 삼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축복이 그들에게도 돌아가도록 하겠다는 의미이지요. 야곱을 통해 이루시겠다는 하나님의 축복의 언약 안에 요셉의 두 아들들이 들어오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요셉에게 “이들 후의 네 소생이 네 것이 될 것이며 그 산업은 그 형의 명의 하에서 함께하리라” 했는데 이는 지금 야곱이 축복하게 될 요셉의 두 아들 이외에 앞으로 요셉이 낳게 될 자손들까지도 야곱을 통해 주신 축복의 언약 안에 포함되도록 해주고 있는 것이지요. 앞으로 요셉이 낳게 될 자손들이 그 형의 명의 즉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명의 아래서 그들의 산업을 함께하게 된다는 것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에게 임하는 축복이 그들에게까지 연결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시점에 야곱은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아들 요셉의 후손이 이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축복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7절에서는 갑자기 ‘라헬’에 대해 언급하며 지난날 라헬이 죽어 에브랏 길에 장사한 것을 말하고 있지요. 야곱이 이처럼 요셉에게 그의 어머니 라헬을 장사한 곳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은 요셉으로 하여금 다시 한 번 어머니에 대해 인식하며 앞으로 살아감에 있어서도 어머니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조상에 대해서도 늘 마음에 둘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야곱이 뭔가 중요한 말을 할 것처럼 “내게 관하여는”이라고 말을 시작하고는 자신이 살아온 147년이라는 지나간 삶 중에 유독 ‘라헬’에 대해 말했다는 것은 그만큼 라헬과 그와 관련된 일들이 마음에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를 통해 우리는 야곱이 아직도 그 마음에 라헬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간직하고 있음도 느낄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8절에 보면 야곱이 요셉의 아들들을 보고는 “이들은 누구냐?”하고 묻습니다. 야곱이 정말로 요셉의 아들들을 못 알아보고 그들이 누구인지를 물은 것이 아니라, 요셉의 입술을 통해 직접 고백을 듣기 원해서였지요.
이때 요셉이 생각을 동원하는 사람이었다면 “아버지, 어찌 제 아들들을 못 알아보십니까?” 하고 말을 한다거나 아니면 속으로라도 ‘아버지께서 나이가 너무 드셔서 손자들도 못 알아 보시는구나’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묻는 말의 의미를 알았고 거기에 대해 정확히 답을 하지요. “이는 하나님이 여기서 내게 주신 아들들이니이다”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냥 “제 아들들입니다”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들임”을 분명히 입술로 고백했던 것이지요.
즉 이들이 비록 애굽에서 낳은 아들들이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해서 주신 아들들이고, 따라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해 약속하신 하나님의 섭리 안에 이들도 들어있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고백을 들은 야곱은 “그들을 이끌어 내 앞으로 나아오라 내가 그들에게 축복하리라” 말하지요.
제가 지금까지도 누누이 말씀드렸지만 축복은 무조건 빌어준다고 그대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믿음으로 받아야 하는 것인데 이처럼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묻는 말에 어떠한 생각도 동원하지 않고 정확히 대답함으로써 야곱이 요셉의 아들들에게 축복을 빌어줄 수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님들 중에는 많은 분들이 제가 축복의 기도를 해주기 위해 먼저 어떤 질문을 던졌을 때 거기에 대한 정확한 답은 하지 않고 엉뚱한 대답만 하는 것을 보게 되지요. “어디가 아프세요?” “언제부터 아프셨어요?” “온전한 주일 성수와 온전한 십일조는 하십니까?” “사진기도 받으려는 분이 교회 나가시나요?” “무엇 때문에 기도받으시려고 하십니까?” 이처럼 아주 간단한 질문을 드리는데도 대부분이 동문서답을 하거나 빙빙 말을 돌리면서 뭔가를 숨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말을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듣고 계신데 과연 무엇이라 말씀하시겠는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의 요셉은 육으로 생각하면 너무나 엉뚱한 것 같은 아버지 야곱의 질문에 대해 정확히 대답하면서도 영적인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야곱의 마음을 주관하사 요셉의 두 아들들에게 축복을 빌어주도록 역사하실 수가 있으셨던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이 또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어떤 질문에 대해 그 의미를 분명히 깨달아야 바른 대답을 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막 5:25절 이하에 보면 열두 해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와서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고 병을 치료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30절에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지요. 그러자 31절에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합니다. 이 말은 즉 “지금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에워싸서 이리 밀치고 저리 밀치는 상황이니 이런 와중에 누가 와서 어쩌다 주님의 옷을 만졌을 수도 있는데 뭐 그런 것을 물으시냐”는 뜻이지요. 예수님의 질문에 동문서답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물으시는 의중을 전혀 깨닫지 못한 채 너무나 육적인 상황만을 대답했던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마치 육적인 상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계신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때 영적으로 깨어있는 제자가 있었다면 ‘지금 상황이 어떤지 주님도 분명히 아실 텐데 그럼에도 저 질문을 하시는 것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으실 것이다’ 이 정도는 깨달을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질문에 담긴 깊은 뜻을 모르니 예수님의 질문을 단지 육적인 질문으로 생각하여 육적인 답변을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결국 이런 경우도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답을 얻을 수가 없으셨으니 제자들 편에서는 동문서답을 한 것이 되는 것이고요.
그러나 요셉은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아버지 야곱의 질문을 영으로 받고 깨달았습니다. 더욱이 영적으로 볼 때 요셉 자신이 아버지 야곱보다 앞서있는 상태였지만 요셉은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질서 앞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자신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큰일을 했다하여 스스로 높아져서 ‘내가 영적으로 이만큼 이루었으니 내가 직접 아들들에게 축복을 빌어주겠다’ 하는 이와 같은 생각은 결코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언약의 축복이 아버지 야곱을 통해 이어진다는 것을 알았기에 철저히 그 질서에 순종하고 있지요. 이러한 요셉의 겸비하고 순종적인 모습은 다음시간에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곱은 자신의 죽을 기한이 가까왔음을 알고 자신을 찾아온 요셉의 두 아들들에게 축복을 빌어 주고자 합니다. 다음 시간에 나오겠지만 이때 야곱은 결코 육의 현실을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관하심을 따르지요. 장자보다도 차자를 더 높여서 축복해준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한시대의 주역으로써 하나님의 도구가 되었던 사람답게 끝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자신의 할 바를 해 나갔지요. 그래서 비록 야곱에게는 아직 좀 부족해 보이는 분야가 있다 해도 그는 능히 영의 사람이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야곱이 임종을 눈앞에 두고 병이 들었다고 했지요. 하지만 야곱이 병들었다고 한 것은 어디까지나 요셉에게 소식을 전해준 사람의 말이었습니다. 물론 야곱이 나이가 많고 기운이 진하며 눈까지 어두워진 것은 사실이지요. 그러나 그렇다 하여 야곱에게 어떤 질병이 찾아와서 어디가 아프거나 고통을 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기운이 다하다 보니 몸도 쇠해지고 이곳저곳 약한 부분들이 드러나면서 점점 활동하기가 어려워지므로 결국 자리에 눕게 된 것이었지요. 이런 모습을 보고 세상 사람들은 ‘병이 들었다’ 말을 했던 것이고요. 야곱이 비록 온 영의 사람은 아니라 해도 3천층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으로서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끝까지 그를 지켜주셨고, 세상의 어떤 질병이나 균으로 인해 고통 받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여러분에게도 마찬가지이지요. 여러분이 영으로만 들어오면 더 이상 세상의 어떤 질병이나 균이 틈타지 않습니다. 물론 아직 온 영은 아니기 때문에 너무 무리하게 되면 몸이 육의 한계를 느끼는 경우가 있지요. 그렇다 하여 어디가 아프거나 하는 것이 아니므로 잠시 쉬어주면 이내 회복이 되어지는 것이고요.
그러나 온 영으로 들어오게 되면 그때는 육의 한계를 뛰어넘는 체험을 항상 합니다. 세상의 어떤 질병이나 균이 틈타지 않는 차원을 넘어 오히려 날로 더 강건해지지요. 야곱이나 그의 아버지 이삭은 나이가 많아지면서 눈도 흐려지고 기운도 쇠하였던 것과 비교할 때, 온 영의 사람이었던 모세에 대해서는 신 34:7에 “모세의 죽을 때 나이 일백이십 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이처럼 굳이 모세의 죽을 때를 기록해 놓은 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닮은 온 영의 사람들이 어떻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시는 것이며, 또한 야곱이나 이삭과 같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들의 죽을 때의 모습에 관해 기록해 놓은 것은 온 영의 사람과 비교가 되게 하시는 것이지요.
물론 이삭이나 야곱도 죽을 때는 자연스럽게 기운이 진하면서 편안한 임종을 맞이했지만, 몸이 쇠하고 기운이 진하여 죽는 것과 여전히 기운이 쇠하지 않고 강건하지만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기운을 진하게 하여 임종을 맞게 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영감 가운데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성령의 깨우치심 가운데 이러한 차이점을 깨달을 수가 있는 것이고요.
그러므로 여러분도 속히 영으로 들어오고, 온 영으로 들어오셔서 우리 만민의 성도님들 중에는 세상의 어떠한 질병이나 균으로 인해 고통 받는다거나 육을 이기지 못하여 힘들어하는 분들이 한분도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영의 사람, 온 영의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보장하시는 축복 즉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마음껏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6-08-28 오전 10:51:16 Posted
2018-12-04 오후 1:48:37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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