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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창세기 강해 (2000년~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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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세기 강해(226)
설교자 당회장 이재록 목사 설교본문 창48:10-49:17 등록일자 2006.09.01
“이스라엘의 눈이 나이로 인하여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요셉이 두 아들을 이끌어 아비 앞으로 나아가니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입 맞추고 그들을 안고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네 얼굴을 보리라고는 뜻하지 못하였더니 하나님이 내게 네 소생까지 보이셨도다
[48장 12절부터 49장 15절까지 중략]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같이 그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로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후 10:18에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는 말씀처럼 요셉은 먼저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사람이었기에 뭇 사람들로부터도 인정과 사랑을 받았던 것이지요. 더욱이 하나님께서 요셉을 보장하시며 함께하신다는 증거가 나타나므로 그가 비록 종으로 있을 때나 감옥에 있을 때에라도 사람들이 그를 함부로 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요셉의 아버지 야곱과 형들 역시 요셉을 가볍게 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지요. 그것은 요셉이 애굽의 총리여서만이 아니라, 영의 사람이 가지는 권세와 위엄, 그리고 그의 뛰어난 지혜와 명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아들 요셉을 볼 때도 ‘언제 내 아들 요셉이 이처럼 영적으로 성장했는가’ 놀랄 정도로 요셉은 이미 영적으로 높은 수준에 올라 있었지요. 그러니 아버지라도 아들 요셉을 쉽게 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야곱은 아들 요셉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발견하는 은혜의 시간을 가질 수가 있었지요.
야곱은 가족들 안에서 편협된 사랑을 줌으로써 아내들과 자녀들 간에 서로 시기, 질투하여 화평이 깨지게 하는 원인을 제공했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국가의 공적인 일과 가족들을 돌아보는 사적인 일에 있어서 어느 한편으로도 치우침이 없었지요. 물론 모든 일에 있어서 가장 우선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이루는 일이었고, 공인으로서의 사명 감당이 먼저였지만, 그러면서도 요셉은 가족들을 살피는 일 역시 조금의 소홀함이 없도록 했습니다. 일의 중요성에 있어서 당연히 경중은 있겠지만 그렇다 하여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다거나 다른 한쪽에는 소홀해지는 일이 없었지요.
요셉은 혹여라도 자신이 가족들에게 마음을 쓰는 일들로 인해 나랏일에 소홀해지지 않도록 더욱 주의했으며, 바로에게도 괜한 근심과 염려가 되지 않기 위해 이전보다 더 열심히 충성하며 노력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항상 가족들에게 마음이 가 있었고 가족들의 형편과 사정을 살폈고요.
야곱이 만약 이러한 요셉과 같은 모습이었다면 사랑이 더 가는 아내와 자녀에게 사랑을 더 주면서도 그로 인해 다른 가족들이 서운해 하지 않도록 선하고 지혜롭게 행동할 수가 있었겠지요. 그러나 이것은 단지 행동만 따라한다고 그처럼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은 모든 일에 두루 마음을 쓰면서도 그때마다 항상 진실한 마음을 담아 행했기 때문에 주변 사람 모두의 마음을 얻을 수가 있었지요.
예를 들어 요셉이 가족들을 살피고 그들에게 좋은 것으로 섬기는 것에 대해 바로가 알았다고 할 때 바로는 그것으로 인해 마음이 상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이 가족들만 위하여 마음을 쓰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과 나라의 일을 위해서도 더 지극한 정성과 마음으로 살핀다는 것을 알았고 느꼈기 때문이지요. 반대로 요셉이 나랏일로 바빠서 아버지 야곱과 가족들을 자주 못 돌아본다 해도 그것으로 인해 야곱이나 다른 가족들이 서운해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늘 요셉의 마음이 자신들에게 있고 최선을 다해 정성으로 섬긴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오히려 요셉을 더 이해해 줄 수가 있었지요.
이처럼 온 집에 충성한다는 것은 시간과 물질을 많이 투자한다고만 되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진실한 마음을 담아 최선을 다할 때 이룰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진실한 마음이 서로 통하고 느껴질 때는 혹여 어떤 경우 바빠서 육적으로 좀 소홀해 진다거나 이전과 비교하여 행함이 좀 부족해진다 해도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고 오히려 힘을 줄 수가 있지요.
반면에 진실한 마음은 느껴지지 않고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 한다는 느낌이 든다면 아무리 많은 시간과 물질을 투자한다 해도 상대의 마음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나는 시간이 없어서, 바빠서…’ 또는 ‘물질이 없어서…’라는 말은 핑계이지요. 문제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일 때문에’라는 핑계를 대면서 가정이나 직장, 주변에 소홀하게 행하므로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경우도 있지요.
여러분 중에도 혹여 교회에 나간다 하여 가정에서 핍박을 받는 분들이 있다면 오늘 바로 요셉의 모습을 통해 여러분의 부족함이 무엇이었는지 깨닫고 온전히 변화시켜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가족의 사랑과 지원을 받으며 하나님의 일에 충성할 수가 있는 것이고 어느 한 분야도 소홀함이 없이 온 집에 충성할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야곱은 자신의 임종이 가까움을 알고 자신을 찾아온 요셉의 두 아들들에게 마지막으로 축복을 빌어주고자 합니다. 이때 야곱은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하므로 요셉이 아들들을 이끌어 아버지 야곱 앞으로 나갔는데 요셉은 므낫세와 에브라임 중에 므낫세가 장자요, 에브라임은 차자이므로 자신의 오른편에 에브라임을 이끌어서 야곱 편에서 볼 때는 왼손쪽으로 가게하고 자신의 왼편에는 므낫세를 이끌어서 야곱 편에서 볼 때 오른쪽으로 가게합니다. 즉 야곱이 손을 얹어 축복할 때 야곱의 오른손이 장자 므낫세에게 야곱의 왼손은 차자 에브라임에게 가도록 두 아들들의 위치를 정해주었던 것이지요.
영적으로 볼 때 오른손을 얹어 축복하는 것이 더 큰 축복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요셉 입장에서는 이렇게 장자에게 더 큰 축복이 가도록 하는 것이 당연히 질서를 좇는 것이라 생각했지요. 그런데 이러한 요셉의 기대와 달리 야곱은 자신의 팔을 어긋맞겨 얹음으로써 오른손이 차자인 에브라임에게 가고 왼손이 장자인 므낫세에게 가도록해서 축복을 빌어주기 시작합니다.
15-16절에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섬기던 하나님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께서 이 아이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로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기도하는 것이었지요. 그러자 이를 지켜보던 요셉이 아버지 야곱의 오른손이 차자 에브라임에게 얹어지는 것을 보고는 기뻐 아니하며 아버지의 오른 손을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기를 청합니다.
18절에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니 우수를 그 머리에 얹으소서” 했지요. 하지만 야곱은 이를 허락하지 않으면서 19-20절에 이르기를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족속이 너로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너로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리라” 합니다. 결국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던 것이지요. 이처럼 야곱은 요셉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행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이 이렇게 했던 것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주관을 받았기 때문이지요.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하면 당연히 장자인 므낫세에게 더 큰 축복이 가야하겠지만, 야곱은 자기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주관하심에 전적으로 순종했습니다. 이는 예전에 야곱의 아버지 이삭이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알면서도 맏아들 에서를 더 축복하려 했던 사건과는 완전히 대비되는 모습이지요.
이삭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야곱의 후손이 맏아들 에서의 후손보다 더 크게 되고, 큰 자 즉 에서가 작은 자 즉 야곱을 섬기게 될 것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이삭은 맏아들 에서를 더 사랑하여 그로 하여금 별미를 만들어오게 해서 그를 축복해 주고자 하였지요. 그러나 이를 알아 챈 이삭의 아내 리브가의 계책으로 인해 결국 장자의 축복은 야곱에게 돌아갑니다. 물론 이 일 때문에 야곱은 오랜 연단의 과정으로 접어들게 되지만 이 또한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 야곱을 연단하셔서 합당한 그릇으로 만드시기 위한 과정이었지요. 이러한 체험을 했던 야곱은 인간적인 정이나 생각에 치우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주관하심에 따라 요셉의 기대와는 달리 차자 에브라임에게 더 큰 축복을 빌어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어떻게 해서 영적으로 더 앞선 요셉이 야곱처럼 정확하게 주관을 받지 못한 것일까요? 이는 지금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주체가 요셉이 아닌 야곱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데 있어서 요셉도 물론 너무나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지만, 그럼에도 열두 지파를 세우고 선민 이스라엘이 형성되도록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어가는 일은 요셉이 아닌 바로 야곱을 통해 이루어지는 일이었지요.
그래서 장차 열두 지파를 이루는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해 주는 것도 야곱이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때 요셉이 아닌 야곱을 주관하여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각각 축복하도록 역사하고 계신 것이지요. 요셉이 주관을 잘못 받은 것이 아니라, 지금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주관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일을 이룸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영적 교훈이 담겨있지요. 고전 14:30에 보면 “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설령 하나님의 역사를 좇아 계시를 받고 있다 해도 만일 곁에 있던 다른 사람에게 또 계시가 임하면 먼저 하던 사람은 잠잠하라는 말씀이지요.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반드시 질서와 화평을 좇아 역사하십니다.
예를 들어 여러 사람에게 계시를 주신다 해도 계시 받는 사람 간에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질서를 좇아 정확히 역사해 주시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먼저 계시를 받고 있다 해도 다른 사람에게 또 계시가 임했다면 이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의 입술을 통해 역사하고 계심을 깨달아 먼저 말하던 사람은 스스로 잠잠해야 할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32절에는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는다”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는 꼭 계시나 예언에 관한 말씀만이 아닙니다. 모든 하나님의 일을 이룸에 있어서 ‘내 주관만 100% 맞고, 나만 옳다’하는 사람은 마치 하나님께서 오직 자신에게만 역사하신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지요. 나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을 통해 역사하실 수도 있음을 깨닫고 인정할 때 화평함 가운데 모든 일을 아름답게 이룰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도 제가 아무리 성령의 주관을 100% 온전히 받는다 해도, 설령 어린 소자가 와서 성령의 이름으로 말을 할 때는 결코 그것을 무시하지 않지요. 성령님께서 누구를 통해서도 역사하실 수 있음을 인정하고 믿기 때문이며 아무리 어린 소자의 말이라도 그것이 진리일 때는 얼마든지 순종할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요셉도 하나님의 역사를 온전히 인정하고 믿었기에 지금 아버지 야곱이 자신의 생각과 정반대로 행하고 있음에도 이내 생각을 돌이켜 그것을 영적으로 받아들이지요.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에브라임에게 오른 손을 얹고 축복해 주는 것을 보면서 처음에는 순간 자기 생각이 틈탔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야곱에게 손을 바꾸어 오른 손을 장자 므낫세에게 얹어서 축복해 주시라고 말씀을 드리지요. 그렇다 하여 요셉이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거나 자기 의견을 관철시키려했던 것이 아니라 다만 야곱에게 자기 생각을 비췄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야곱은 요셉에게 “나도 안다, 아들아 나도 안다” 대답함으로써 자신이 지금 분명한 어떤 의도가 있어서 이같이 행하고 있음을 표현하지요. 더욱이 팔까지 어긋맞겨 장자와 차자를 바꾸어서 축복을 빌어주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금 야곱의 마음을 강하게 주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야곱이 강하게 주관을 받지 못했다면 그냥 요셉이 데려다 자기 앞에 앉힌 대로 손을 얹어 기도해 줄 수도 있었겠지만 야곱은 굳이 팔을 어긋맞겨 축복해 주었지요.
그리고 요셉은 지금 아버지 야곱이 일부러 그처럼 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를 않습니다. 이는 아버지 야곱이 자신보다 육적인 질서상 위였을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아버지 야곱을 존중했기 때문이지요. 요셉이 비록 순간 자기 생각이 동원되기는 했으나 지금 상황이 영적으로 깨달아 졌을 때는 이와 같이 곧바로 수긍하며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지금 상황에서 요셉이 야곱에게 “영적으로는 제가 더 앞섰으니 제 생각이 더 맞지 않겠습니까? 아버지 한 번 더 기도해 보시지요?” 이와 같은 말이나 행동을 했다면 어찌 되었겠습니까? 요셉이 그러한 말을 할 리도 없겠지만, 만약 했다면 그것은 참으로 교만한 모습이지요. 그러나 요셉은 자신만 ‘옳다’ 하지 않았고 영의 질서를 앞세워 육의 질서를 무시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던 것입니다.
또한 요셉은 진정한 축복이라는 것이 결국은 단지 더 큰 축복을 빌어주었다고 해서 무조건 오는 것이 아님을 알았지요. 빌어준 축복을 자기 스스로가 어떻게 자신의 것으로 만드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그가 친히 체험하며 깨달은 사실이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큰 꿈과 비전을 주셨을 때 단순히 그 약속만 믿고 자신은 아무렇게나 살았던 것이 아니지요.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이루기 위해 요셉은 어느 곳에 있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의 약속이 요셉을 통해 성취될 수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야곱이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각각 빌어주고 있는 축복도 마찬가지이지요. 누구에게 더 큰 축복을 빌어주느냐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렇게 빌어준 축복을 얼마나 믿음으로 받아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비록 장자인 므낫세보다 차자인 에브라임에게 더 큰 하나님의 축복을 빌어주었지만, 결국은 자기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행해 나가느냐에 따라 그들에게 임하는 축복이 결정되는 것이지요.
물론 야곱은 하나님의 사람이므로 그가 하나님의 주관하심에 따라 에브라임에게 더 큰 축복을 빌어주었기 때문에 그 축복의 내용은 훗날 그대로 임하게 됩니다. 훗날 사사시대를 거쳐 분열 왕국 시대를 맞았을 때 에브라임 지파가 므낫세 지파보다 수적인 면이나 영향력 면에서 월등히 앞섭니다.
하지만 이러한 축복에도 불구하고 훗날 에브라임 지파는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여러 가지 악들을 행하지요. 사울 왕이 죽고 다윗이 대신 왕이 되었을 때 일부 사울의 추종자들이 다윗 왕에 맞서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웁니다. 이때 에브라임 지파가 그들 편이 되지요. 또한 이스라엘 왕국이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나뉘어 졌을 때 북 이스라엘의 에브라임 지파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우상숭배에 앞장섭니다. 그러니 야곱이 축복을 빌어준 대로 에브라임 지파가 므낫세 지파보다 더 커졌지만, 그들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했을 때는 이처럼 하나님 앞에 큰 악을 행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성경의 마지막 책인 계시록 7장에 나오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을 보면 므낫세 지파는 이름이 들어 있는데 에브라임 지파는 이름이 빠져있는 것을 봅니다.
결국 진정한 축복은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 앞에 어떻게 행하며 진리와 선으로 쌓아나갔느냐에 따라 정해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사실을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큰 언약의 말씀을 받았고 놀라운 축복의 기도를 받았다 해도 ‘자기하기’에 따라 결과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지요.
물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아무에게나 축복의 말씀을 주시지는 않으며 함부로 축복의 기도를 해주도록 하시지도 않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주관해 주셔서 축복의 기도를 해주는 경우는 흔치 않지요. 그런데 설령 귀한 축복의 말씀이나 기도를 받았다 해도 자신 스스로가 그 말씀과 기도를 보장하기 위해 노력하며 변화되어 가지 않는다면 결과에 대해서는 보장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축복의 말씀을 주시거나 축복의 기도를 해주도록 주관하실 때도 ‘이렇게 이렇게 할 때 약속한 축복이 온전히 임한다’고 하는 ‘단서’를 붙여주시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아브라함이나 사도 바울처럼 아예 택정함 가운데 부름받은 사람이라면 단서를 붙이실 필요도 없겠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말씀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이루기 위해서는 결과만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그 결과를 이루기 위해 주신 과정에도 충실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과 축복의 기도가 온전한 열매로 맺혀질 수가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지금 내가 이렇게 앞서 있다’ ‘누가 더 앞서 있다’ ‘누가 더 좋은 축복의 말씀을 받았다’ 이런 것에만 치우쳐서 정작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에 소홀해 져서는 안 됩니다. 매 순간 여러분을 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닫고 신실하게 행해 나갈 때만이 히 10:36에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는 말씀대로 진정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말씀들이 온전한 열매로 맺혀질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창세기 49장에서는 야곱이 죽음을 맞기에 앞서 열두 아들들에게 남기는 유언이 나옵니다. 우리는 이 유언의 내용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며 각 사람이 행한 대로 호리라도 남김없이 다 갚아 주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요. 야곱이 누구에게는 더 큰 축복을 주고자 한다고 해서 그에게는 좋은 말씀이 나가는 것이 아니며, 혹은 누구는 미워한다고 해서 저주의 말씀이 나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정확하신 주관하심에 따라 야곱의 입술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선포되고 있는 것이지요.
모든 것을 다 보시고 다 듣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각각의 아들들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행해왔는지 또 그들이 앞으로 어떻게 행해나갈지에 따라 정확히 역사하여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또한 각 사람이 하나님 앞에 어떤 중심을 가졌고, 어떠한 선한 마음을 가졌으며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기에 합당한가에 따라 각 사람에게 주어지는 말씀이 다 다르지요. 그리고 이 유언은 후대에 정확히 이루어져 나갑니다.
하지만 이처럼 각 지파의 조상이 되는 야곱의 아들들에게 주어진 말씀들이 그 지파에 속한 모든 후손들에게까지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요. 그 지파의 전체적인 흐름은 말씀대로 반드시 이루어져 나가지만 그 안에 속해 있는 각 사람들은 그 개개인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행하며 얼마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느냐에 따라 각자에게 주어지는 축복과 미래가 달라집니다.
결국 단체에게 적용되는 공의가 있고 각 개인에게 적용되는 공의가 있어서, 이것들이 정확하게 맞물려지면서 전체적인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나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자유의지 가운데 선과 악 중에 어떤 것을 택할지를 아시므로 거기에 맞는 말씀을 주시지만, 그럼에도 결국은 각 사람이 자유의지 가운데 실제로 선과 악 중에 어떤 것을 택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공의가 적용되는 것입니다. 이제 다음시간에는 야곱의 열두 아들들에게 주어진 각각의 유언이 훗날에 어떻게 성취되어 갔는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요셉은 아버지 야곱 앞에 ‘진정한 섬김이 무엇인지’를 보여 줍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지으실 때 영의 질서만 두신 것이 아니라, 1차원의 공의에 맞는 육의 질서도 두셨지요. 그러므로 이 육의 질서도 잘 지킬 때만이 온전한 영의 질서 또한 이루어질 수가 있습니다.
영의 질서만을 우선시 하여 육의 질서는 무시하고 만다면 이는 참된 영의 질서라 할 수 없지요. 물론 육의 질서에 앞서는 것이 영의 질서입니다. 장차 영의 세계인 천국에 가게 되면 모든 것은 이 영의 질서에 따라 결정되지요. 또한 지금도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영의 세계에서는 엄격한 영의 질서 가운데서 한 치의 오차나 흐트러짐 없이 모든 것이 정확하게 운행되며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영과 육의 모든 세계의 주인이시며, 모든 것을 주관해 가시는 분이시지만, 그렇다 하여 영의 질서만을 앞세워 육의 질서는 무시하시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육의 질서도 어그러트리지 않으시면서 영의 질서를 정확히 좇아 이루시는 분이지요.
물론 육의 질서가 영의 질서를 넘을 수는 없으나 그렇다하여 영의 질서가 육의 질서를 무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도 이와 같기를 원하십니다. 진정한 섬김이란 바로 영의 질서와 육의 질서 이 둘 중에 어느 하나도 어그러트리지 않고 조화를 이루어 나갈 때 이루어지지요. 물론 주 안에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두 가지를 잘 조화시켜서 아름답게 이루어 나갈 수가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여러분 스스로가 분별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육의 질서상 앞섰다고 하여 영의 질서를 무시하지는 않았는지?’ ‘자신이 육의 질서상 앞서 있음에도 자신을 알아주지 않고 섬겨주지 않는다 하여 마음이 서운하고 감정이 생기지는 않았는지?’ ‘영의 질서가 더 중요하니까 육의 질서는 좀 무시되더라도 무조건 영의 질서만 우선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지?’ ‘영의 질서와 육의 질서가 대립되었을 때 당연히 육의 질서는 영의 질서 앞에 순종해야 한다고만 생각하지는 않았는지?’ 혹여 이처럼 고정된 틀과 의를 가지고 있다면 그런 사람에게서는 영의 질서와 육의 질서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서로가 자기 입장에서 ‘영의 질서가 먼저니까’ 또는 ‘육의 질서도 무시해서는 안 되니까’ 이렇게 자기주장만을 내세운다면 어떻게 영의 질서와 육의 질서가 조화를 이루겠는지요? 영의 질서상 앞서 있다 해도 육의 질서를 늘 존중해 주고, 육의 질서상 앞서 있다 해도 영의 질서를 우선시 해줄 수 있는 마음… 서로가 이런 마음을 가질 때만이 영육 간에 조화를 이루면서 온전한 영의 질서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대함에 있어서 영의 질서냐, 육의 질서냐를 따지려하지 않았지요. 아브라함은 롯보다 영의 질서상에 있어서도 또한 육의 질서상에 있어서도 다 위에 있었지만 그럼에도 조카 롯에게 양보했고, 끝까지 마음에 품어 살폈던 것을 봅니다. 바로 이와 같은 마음이 중요한 것이지요.
이와 같은 마음을 이루어갈 때 ‘내가 먼저니, 네가 먼저니’ 하며 서로 영의 질서, 육의 질서를 따지지 않아도 모든 것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어 나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롬 13:1에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는 말씀대로 영육 간에 질서를 좇아 권세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벧전 5:3에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는 말씀처럼 질서상 위에 있는 분들 역시 아랫사람이라도 더 섬겨주며 늘 본이 되는 모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영의 질서와 육의 질서가 조화를 이루며 윗사람과 아랫사람도 서로 섬겨주는 가운데 모두가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는 복된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6-09-04 오전 11:01:12 Posted
2018-12-04 오후 1:48:37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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