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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창세기 강해 (2000년~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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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세기 강해(227)
설교자 당회장 이재록 목사 설교본문 창49:1-18 등록일자 2006.09.08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의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너희는 모여 들으라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 아비 이스라엘에게 들을지어다
[3절부터 16절까지 중략]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로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해 준 야곱은 이제 요셉에게 말하기를 “내가 네게 네 형제보다 일부분을 더 주었나니 이는 내가 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니라” 합니다. 다시 말해 유산을 분배해 줌에 있어서도 야곱은 다른 형제들보다 요셉에게 더 많은 것을 주고 있지요.
그렇다면 야곱이 이처럼 행했던 것은 그가 끝까지 요셉만을 편애했기 때문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물론 야곱은 누구보다도 요셉을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야곱이 요셉에게 이와 같이 더 많은 것으로 축복해 주는 것은 단순히 요셉을 더 편애해서만이 아니지요.
사실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야곱의 열두 아들들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형성하는 과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요셉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일들이 가능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가장 큰 공을 세운 아들이었지요. 또한 야곱의 열두 아들들 중에서 요셉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요셉에게 가장 큰 축복이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야곱의 마음을 주관하여 요셉에게 더 많은 것으로 축복해 주도록 역사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는 더 사랑받는다. 누구는 더 축복받는다’ 그런 것을 가지고 시기, 질투할 것이 아니라 ‘그가 왜 더 사랑받고 축복받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깨달으려고 해야 하지요. 시 119: 2에 “여호와의 증거를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전심으로 하나님을 구하는 자 즉 하나님을 사랑하여 간절히 찾는 자에게 복이 있다는 말씀이지요.
요셉은 이 말씀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고 하나님을 사랑하여 늘 하나님을 바라며 찾았기에 하나님으로부터 큰 사랑과 축복을 받을 수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정확하신 분이기 때문에 사람이 눈가림만 하듯 대충 대충 하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을 수는 없지요.
욥 13: 9 후반절에 보면 “너희가 사람을 속임 같이 그를 속이려느냐”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갈 6:7에는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하셨지요. 그러므로 여러분도 사람 보기에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보시기에 선과 진리로 행하셔서 반드시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 앞에 ‘복 있는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임종을 앞둔 야곱은 그의 아들들을 모두 불러서 유언을 남깁니다. 그런데 이때 야곱이 남긴 유언은 결코 야곱이 자기 생각 가운데 한 말들이 아니지요. 본문 1절 후반절에 “너희는 모이라 너희의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하였는데 사람의 앞일에 대해 아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야곱이 남기는 유언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야곱의 입술을 주관하여 말하게 하신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야곱이 남긴 유언은 훗날 이스라엘의 후손들을 통해 그대로 성취 됩니다. 사 55:11에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말씀하신 대로이지요.
그런데 이처럼 각 지파의 조상이 되는 열두 아들들에게 예언의 말씀이 나갔다 하여 그 말씀이 그 지파에 속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임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축복의 말씀이 주어진 지파 중에서도 얼마든지 그 언약에서 벗어난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저주의 말씀이 주어진 지파 중에서도 개인적으로는 얼마든지 축복의 테두리 안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도 있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야곱의 열두 아들들의 지금 현재의 모습만을 생각한다면 인류의 구세주로 오실 예수님께서 과연 어느 지파의 후손으로 태어나시는 것이 가장 합당하겠습니까? 야곱의 아들들 중에 유일하게 성결되고 가장 영으로 깊이 들어간 요셉의 후손으로 오시는 것이 가장 합당해 보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유다 지파의 후손으로 오셨지요.
물론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입술을 통해 이미 유다 지파에서 메시야가 나실 것을 말씀하셨는데 이는 야곱의 아들들 중에서 유다가 특별히 뛰어나거나 온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훗날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실 때가 되었을 때 유다 지파 중에서 요셉이라는 인물이 나오게 되고 그가 얼마나 선한 중심을 가졌는지를 아시지요.
또한 그의 아내가 될 마리아 역시 어떤 마음과 중심을 가진 사람인지를 알고 계십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였을 때 하나님 앞에 어떻게 나올지도, 또한 요셉이 마리아가 자신과 동침하기 전에 잉태한 것을 알았을 때 어떻게 나올지도 아셨다는 말이지요. 그러니 성령으로 잉태되신 예수님께서 바로 이처럼 선한 부모 아래서 성장할 수 있도록 역사하신 것입니다. 지금 현재도 보시지만 장차 앞으로 되어질 일도 다 아시기 때문에 현재의 공의와 미래의 공의 두 가지 모두에 합당할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장차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이루게 될 야곱의 아들들에게 말씀을 주실 때도 그들이 그동안 심고 행한 대로 주신 것이었지만 동시에 그들이 얼마나 선한 중심을 가졌고 하나님 앞에 쓰임받을 만한 사람인가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각 지파에게 주신 말씀 안에서도 결국은 그들의 후손들이 어떻게 행해 나갔느냐에 따라 각 개인에게 임하는 바가 달라졌던 것이고요. 이것이 공의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성결되었고 영이라 해서 그를 통해서만 선민 이스라엘을 이루신 것이 아니라 야곱의 다양한 아들들을 통해 이스라엘을 이루셨고 그 안에서 각 사람의 중심과 행함에 따라 정확하게 역사해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이처럼 정확한 공의 가운데 이루어지는 인간 경작의 결과에 대해 원수 마귀 사단이 아무런 이의를 달수가 없지요.
본 제단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지는 것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본 제단에 무조건 좋은 중심과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만 보내주셔서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어 가시는 것이 아니지요. 물론 하나님께서는 본 제단에 좋은 중심과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많이 보내 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것도 공의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합당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제가 하나님 앞에 행한 대로 하나님께서 공의 가운데 갚아주신 결과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본 제단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가 이렇게 처음부터 좋은 중심과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만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만 쓰임받는 것이 아니며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진리로 변화되어 오늘날 이와 같이 창대하게 이루는 제단이 되었지요. 나중 된 사람이 먼저 되기도 하고 처음에는 비록 좋은 중심과 선한 마음이 아니었다 해도 이제는 변화되어 영으로 앞서가는 분도 있고요.
따라서 이 마지막 때에 목자를 도와 하나님께서 본 제단에 주신 세계선교와 대성전 건축의 사명을 온전히 이루고 마침내 새 예루살렘의 영광중에 거하는 것은 공의 가운데 여러분 각자의 마음과 행함에 따라 여러분 스스로가 선택해야할 몫이지요. 그러면 지금부터 야곱의 열두 아들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과 성취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먼저 장자 르우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3-4절에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도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니 네가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했지요.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특히 아직 족장 시대에 머물고 있던 시대에는 장자가 가지는 의미가 매우 큽니다. 따라서 르우벤 역시 야곱의 장자로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에 그만큼 많은 것이 보장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요.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는 말씀이 바로 장자에게 보장되는 권한을 설명한 것입니다. [위광(威光): 감히 범할 수 없는 권위나 위엄] [초등(超等): 등급을 뛰어넘다. 모든 상징적 실력을 초월하다] 하지만 이때 권능이 탁월하다는 말이 그에게 하나님의 권능이 있다는 의미는 아니며, 다만 장자로서 그만큼 크게 보장된다는 의미이지요. 당시 족장시대에 있어서 장자에게는 이처럼 영, 육간에 절대적인 권한이 보장되어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보장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르우벤이었지만 그는 결국 그 축복을 받지 못하지요. 공의 가운데 그에게는 이와 같은 축복이 임할 수 없는 커다란 죄의 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전에 그가 아버지 야곱의 첩인 빌하와 통간을 하는 큰 악을 행했던 것이지요. 전에 창세기 강해를 통해 설명 드렸듯이 당시 야곱은 이 사실을 알면서도 그냥 잠잠히 덮어두고 지나갔습니다. 모두를 살리고자 하는 선한 마음에서였지요.
하지만 그처럼 덮어두고 지나갔다 해서 르우벤의 죄가 사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죄가 사해지기 전에는 결국 공의 가운데 심판을 받게 되지요. 심판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공의에 따라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주십니다. 설령 이 땅에서는 그냥 넘어갈 수 있었다 해도 장차 백보좌대심판 때에는 누구도 피해갈 수 없으며 각 사람은 자신이 선악 간에 행한 것에 대해 호리라도 남김없이 심판을 받게 되지요. 선을 행한 것에 대해서는 상급 심판을, 죄악을 행한 것에 대해서는 형벌의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르우벤의 경우도 비록 악을 행했던 당시에는 그냥 덮어두고 지나갔던 일이었지만 결국은 그 일로 인해 장자권을 박탈당하고 그의 지파도 뛰어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보응의 말씀을 듣게 되지요. 그래서 이후로 르우벤 지파 중에서는 어떤 이름을 남길만한 사사나 선지자나 왕 등의 뛰어난 인물이 나오지를 못합니다. 출애굽 이후 광야생활을 할 때 그나마 지도자급에 있었던 다단과 아비람은 오히려 모세를 대적하는 고라에게 동조했다가 함께 멸망을 당하고 말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지금 르우벤과 그 후손들에게 “이것이 너희 지파의 운명이고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으니 그냥 받아들이라”는 그런 의미로 말씀하고 계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니 결과는 그 말씀대로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르우벤과 그 후손들에게 절망하라고 이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니지요.하나님께서는 르우벤이 이 말씀을 듣고 지금이라도 돌이켜 회개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며, 그의 후손들 역시 조상 르우벤에게 주신 이 말씀을 대대로 마음에 깊이 명심하여, 결코 그릇된 길로 빠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러한 말씀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르우벤과 그 지파의 운명이 아무리 노력해도 변화될 수 없고 그냥 멸망에 이르러야 한다면 하나님께서 굳이 지금에 와서 이전에 있었던 사건에 대해 다시금 말씀하실 필요가 없으셨겠지요. 그냥 가만히 놔두면 어차피 이전의 죄악을 회개하지 않으므로 결국 멸망에 이르고 말 테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금에 와서 다시 그때의 사건을 상기시키시며 이와 같이 말씀해 주시는 것은 르우벤이 지난 과거의 죄악을 회개하고 온전한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었지요.
하나님께서 본 제단에도 지난 98, 99년도에 시험의 과정에서 범죄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그때 일을 상기시키시며 “계수하시겠다” 하신 진정한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너희는 그때 당시에 그처럼 범죄하였으니 모두가 그 행한대로 보응을 받으라’는 의미이겠는지요? 물론 끝까지 회개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행한 대로 반드시 보응이 임하게 되지만, 하나님께서 그처럼 계수하시겠다 하신 진정한 의미는 지금이라도 그때의 범죄함에 대해 회개하므로 온전한 구원과 축복에 이르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아무 말씀도 안하시고 잠잠하신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때 당시 엄청난 죄를 짓고도 여전히 회개하지 않으므로 이런 저런 시험 환난을 당하게 되고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되겠지요.
그런데 오히려 이처럼 밝히 드러내어 말씀하심으로써 <엡 5: 13>에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는 말씀대로, 빛으로 나와 구원과 축복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지요. 지금 르우벤에게도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의 마음을 담아 말씀해 주고 계신 것이구요.

이제 다음으로 시므온과 레위에게 주신 말씀인데 이 둘에게는 똑같은 말씀이 주어집니다. 5-7절에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예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했지요.
시므온과 레위는 지난날 세겜에서 여동생 디나가 욕을 당한 일로 인해 앞장서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악을 행했습니다. 그것도 간교한 계책을 써서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였지요. 지금 그 악에 대한 보응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예하지 말지어다” 하셨는데 이를 통해 후대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악에 동참하지 말아야 할 것을 당부하고 있는 것이지요.
시 1:1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는 말씀처럼 복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악한 세력과 타협하거나 제휴해서도 안 되며 함께하는 것조차도 삼가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시므온과 레위는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라”는 저주에 따라 훗날 그 지파들이 흩어져 버리게 되지요. 시므온 지파는 광야생활 중에 그 수가 점점 줄어들었고 가나안 땅을 분배받는 과정에서도 독자적인 기업을 분배받지 못한 채 유다 지파에 속하여 기업을 분배받습니다.
또한 레위 지파 역시 훗날 성전에서 봉사하게 되는 성스러운 직분을 받지만 그럼에도 독자적인 기업을 분배받지 못하고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아가게 되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처럼 그들이 행한 악행에 대한 보응으로 이와 같은 말씀을 주신 것 역시 결국은 그들에게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다음으로 유다에게는 축복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8-12절에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그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 이는 우유로 인하여 희리로다” 했지요.
유다는 예전에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려할 때 그나마 나서서 ‘죽이지는 말자’고 하여 요셉의 생명을 구했었습니다. 또한 막내 동생 베냐민이 도둑의 누명을 쓰고 애굽의 종이 돼야할 상황에서도 자신이 베냐민을 대신하여 종이 되겠다고 했었지요. 그러니 유다는 그래도 아버지 야곱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렸고, 위하는 마음도 있었으며, 형제에 대한 우애 역시 형제들 중에서는 가장 나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유다에게 그의 후손들이 이스라엘 민족 중에서 찬송을 받으며 그들의 머리가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대로 훗날 유다 지파의 후손 다윗이 통일 왕국의 왕이 되어 모든 이스라엘 민족으로부터 칭송을 받으며 백성들이 그 앞에 엎드려 절하게 되지요. 또한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라” 하신 대로 유다 지파인 다윗 왕과 솔로몬 왕에 의해 주변의 이방 대적들을 평정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 담긴 보다 근본적인 의미는 바로 유다 지파의 후손으로 나신 예수님께서 원수 마귀 사단의 진을 파하시고 결국 구세주로서의 사명을 완성하신다는 것이지요.
이밖에도 유다에게 주신 말씀 안에는 메시아로 오시는 예수님께서 유다 지파를 통해 오실 것이라는 단서가 여러 번 담겨 있습니다. 10절에 “실로가 오시기까지”라고 했는데 ‘실로’가 바로 메시야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라” 말씀하지요. 이 말씀대로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신 주님 앞에 모든 만물이 꿇어 경배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예언의 말씀들은 그대로 성취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음으로 스불론에게는 특별한 말씀이 없이 간단하게 13절에 “스불론은 해변에 거하리니 그곳은 배 매는 해변이라 그 지경이 시돈까지리로다” 하셨지요. 이스라엘의 역사서 ‘요세푸스’에 보면 이 스불론 지파가 훗날 지중해변까지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통해 그에 대한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증거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다음으로 잇사갈에 대해서는 14-15절에 “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앉은 건장한 나귀로다 그는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기며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고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압제 아래서 섬기리로다” 했습니다. ‘건장한 나귀’라 표현하신 대로 잇사갈 지파는 큰 종족을 이루지만 특별히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하고, 농사일과 힘든 노역에 종사하며 피지배계층으로서 시달리게 되지요.

이제 다음으로 단에 대해서는 16-18절에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같이 그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로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했습니다.
성경에는 ‘단’이라는 지명도 나오는데, 이곳은 원래 ‘라이스’라는 지명을 가졌던 곳을 단 지파가 점령한 후에 그들의 조상 단의 이름을 따서 부른 곳이지요. 그러므로 ‘단’은 결국 단의 후손들이 거주하던 곳으로서 단 지파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곳입니다.
그런데 왕상 12: 27-29에 보면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하고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말씀하신 내용이 나오지요.
통일 왕국이었던 이스라엘은 솔로몬 왕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이르러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나뉘어집니다. 그러자 이때 북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왕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예루살렘이 있는 남 유다로 내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을 신으로 섬기게 하지요. 금송아지 두 개를 만들어 하나는 벧엘에 두고 다른 하나는 단에 두게 한 것입니다. 따라서 ‘단’은 자연히 우상숭배의 근거지가 되고 말지요.
그리고 ‘단’에 살던 단 지파들 역시 가장 쉽게 우상숭배에 물들게 되었고요. 그러니 우상숭배의 근거지가 된 ‘단’과 그곳에 살던 ‘단 지파’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상숭배의 길로 빠져들어 결국 사망의 길로 가게 되었겠습니까. 이러한 단 지파를 향해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통해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로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말씀하고 계신 것이지요. 그리고 계시록 7장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이름들 중에서도 단 지파는 이름이 빠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같이 그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하셨는데 이는 단지파가 심판자로서 백성들을 심판하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지요. 단지파의 행함이 하나의 샘플이 되어 심판의 기준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단지파의 행함이 기준이 되어 그들과 같은 행함의 길을 간 사람들은 결국 단 지파처럼 멸망의 길로 가게 된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이러한 단지파라 할지라도 어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멸망에 이르기를 원하시겠습니까? 딤전 2:4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말씀한 대로 아무리 죄악 가운데 행했던 사람일지라도 어찌하든 회개하고 돌이켜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단 지파에게 주신 말씀의 마지막에도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하여 그들이 끝까지 구원의 소망을 잃지 않고 구원의 은혜를 구할 것을 당부하고 계시지요. 또한 이 말씀 안에는 아버지인 야곱의 입장에서 아들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긍휼과 은총을 간구하는 의미도 담겨 있고요. 이제 다음 시간에는 야곱의 나머지 아들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진리는 참 단순하면서도 쉽습니다. 선하게 살면 복을 받고, 악하게 살면 반드시 보응을 받게 되지요. 물론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관계성과 공의가 맞물리면서 당장 눈앞의 결과로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많지만 결국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대로 이루어집니다. 이 사실을 믿기 때문에 여러분은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진리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고 또 그렇게 노력해 가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한 믿음이 없다고 하면 이처럼 세상을 버리면서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좁고 협착한 길을 기쁨과 감사함으로 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은 반드시 행한 대로 갚아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결코 흔들림이 없는 믿음을 가지고 오직 한 길, 저 천국 새 예루살렘을 향해 힘차게 달려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6-09-11 오후 5:35:09 Posted
2018-12-04 오후 1:48:37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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