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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창세기 강해 (2000년~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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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세기 강해(229)
설교자 당회장 이재록 목사 설교본문 창50:1-14 등록일자 2006.09.22
“요셉이 아비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 맞추고 그 수종 의사에게 명하여 향 재료로 아비의 몸에 넣게 하매 의사가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하되 사십 일이 걸렸으니 향 재료를 넣는 데는 이 날수가 걸림이며 애굽 사람들은 칠십 일 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더라
[4절부터 11절까지 중략]
야곱의 아들들이 부명을 좇아 행하여 그를 가나안 땅으로 메어다가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사서 소유 매장지를 삼은 곳이더라 요셉이 아비를 장사한 후에 자기 형제와 호상군과 함께 애굽으로 돌아왔더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곱은 147년간의 파란만장한 삶을 마치고 마침내 기운이 진하여 그 열조에게로 돌아갑니다. 야곱의 죽음과 함께 이제 족장시대는 막을 내리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민족 즉 선민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되지요. 그리고 야곱은 이스라엘 민족의 실질적인 시조(始祖)입니다.
창 35: 9- 12에 보면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지요.
하나님께서 친히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새롭게 불러 주셨고, 그를 통해 나온 후손들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 즉 이스라엘의 이름을 따라 그의 열두 아들들이 주축이 되어 ‘이스라엘’이라 불리우는 민족이 탄생한 것이지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삭을 거쳐 야곱의 대(代)에 이르러 민족 형성을 위한 본격적인 환경들이 갖추어졌고, 야곱과 그의 열두 아들들과 그 자녀들이 중심이 되어 실질적으로 선민 이스라엘이 태동된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민족의 형성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던 야곱이 죽음을 맞았고 그의 장례는 참으로 성대하게 치러지지요.
1절에 “요셉이 아비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맞추었다” 했는데 이는 요셉이 그의 아버지 야곱에 대해 얼마나 깊은 정과 사랑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보여 주는 모습입니다. 아버지 야곱을 애굽으로 모셔온 후 지난 17년 동안 최선을 다해 섬긴다 했지만 요셉에게는 애굽의 총리라는 막중한 사명이 있었기에 마음에 있는 만큼 섬겨 드리지를 못했지요.
그러다 막상 아버지의 죽음을 맞게 되니 더욱 잘 섬겨드리지 못한 아쉬움과 아버지에 대한 깊은 정과 사랑을 담아 이처럼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을 맞췄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야곱의 입장에서는 요셉으로 인해 무엇 하나 부족됨이 없는 너무나 풍족하고 평안한 말년을 보내다가 이제 영원한 안식과 평안으로 들어간 것이지요.
그런데 야곱은 죽은 후에도 최상의 예우 가운데 그의 장례가 치러지게 됩니다. 요셉이 그의 수종 의사에게 명하여 향 재료로 아비의 몸에 넣게 했는데 그 날수가 무려 40일이나 걸렸다 했지요. 이러한 방식은 당시 애굽에서 최고위층의 사람들에게 행해지던 장례법으로 쉽게 말해 ‘미이라’로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왜 아버지 야곱의 시체를 이런 방식에 따라 장사했던 것일까요? 요셉은 이미 영의 깊은 단계에 들어가 있었기에 영원한 내세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죽은 사람의 몸이 마지막 날에는 부활체의 몸으로 살아날 것도 알았습니다. 따라서 죽은 사람의 몸이라 하여 함부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지요. 애굽에는 일찍부터 부활을 믿는 신앙이 있었고 이로 인해 죽은 사람의 몸을 미이라로 보존하는 방법이 발달해 있었습니다.
애굽에 어떻게 해서 그렇게 일찍부터 부활의 신앙이 존재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분이 그동안 들었던 창세기 강해를 통해 얼마든지 짐작해 볼 수가 있지요. 애굽 즉 지금의 이집트 지역은 둘째 하늘에 있는 에덴동산과 관련된 흔적들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고, 그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신화와 같은 형태로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이 영원히 산다는 것에 대한 동경심과 소망을 가지게 되었지요.
그러한 것들이 발전하면서 부활의 신앙이 생겨나게 되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진실이 왜곡되었기 때문에 애굽 사람들이 가진 부활의 신앙과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의 신앙과는 전혀 다릅니다. 하지만 애굽 사람들에게는 어쨌든 부활의 소망이 있었기에 그들은 시체를 더 오랫동안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 수천 년 전에 만들어진 미이라가 오늘날까지도 보존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요셉은 이처럼 발달한 애굽의 장례법에 따라 아버지 야곱의 시체를 보존했던 것인데 이는 요셉이 애굽의 신앙을 따랐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마지막 날에 이루어질 부활의 사건에 대해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애굽 사람들까지도 함께 야곱의 죽음을 애도하며 70일 동안이나 곡(哭)을 했던 것을 알 수 있지요. 이는 당시 애굽의 장례 법도를 볼 때 왕족에 준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보통 왕이 죽었을 때 72일을 애도했다고 하지요.)
그렇다면 이것이 무엇을 말해 주는 것이겠습니까? 이는 애굽 사람들에게 있어서 요셉이 어떤 존재였는지를 잘 알 수 있게 해주는 모습이지요. 애굽 사람들이 이방인인 야곱의 죽음에 대해 70일 동안이나 애도하며 곡을 한다는 것이 결코 누가 억지로 시킨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이는 애굽의 백성들이 자원하여 행한 것으로서 요셉이 그만큼 애굽의 백성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었다는 증거이지요.
더욱이 이처럼 왕족에 준하는 대우를 하여 70일 동안이나 애도하는 일은 바로와 그의 신하들까지도 모두 동의해 주지 않는다면 이루어질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이 가능했다는 것은 바로와 그의 신하들 그리고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요셉이 바로와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 어떤 마음과 행함으로 헌신하며 희생해 왔는지를 잘 알고 인정했다는 증거이지요.
그래서 모두가 요셉에 대한 존경심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이와 같이 요셉의 아버지인 야곱의 죽음을 함께 애곡할 수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람 요셉 한 사람으로 인해 요셉에게 속한 모든 가족들에게까지도 얼마나 큰 은총이 임했는지를 잘 알 수 있게 해주는 장면이지요.
이는 오늘날의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사람이 되고 그래서 주변의 뭇사람들로부터도 사랑받고 인정받는 사람이 된다면 여러분 자신뿐만 아니라, 여러분에게 속한 사람들 즉 가족이나 함께하는 모든 사람에게까지도 큰 은총이 임하게 된다는 말이지요.
여러분이 늘 편지를 통해 들으시는 것이지만 예를 들어 본 교회에서 주의 종이나 혹은 그냥 일반 집사라 할지라도 해외 집회나 해외 출장을 나가게 되면 너무나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고 간증을 해옵니다. 우리 일꾼들 중에는 출장을 가서 그 나라의 대통령을 비롯하여 최고위급 인사들을 두루 만나며 대화를 나누고 그분들로부터 너무나 큰 환대를 받았다는 소식을 자주 전해 오곤 하지요.
그러면 그분들이 어떻게 그런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바로 저를 대신하고, 우리 만민교회를 대신하여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들 편에서는 저와 우리 만민교회를 대접한다는 마음과 행함으로 저를 대신하여 가신 분들을 섬겨 주시는 것이지요. 이외에도 출장을 자주 가는 일꾼들 중에는 항공사 측에서 비행기 좌석을 일반석에서 비지니스석으로 바꿔주었다거나, 공항의 까다로운 입국 절차를 너무나 수월하게 통과했다는 간증을 해오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물론 저와 우리 만민교회에 대해 익히 잘 알고 있어서 우리 출장팀이 만민교회 성도인 것을 알고는 그처럼 해주는 경우도 있지만, 비록 만민교회 성도인 것을 모른다 해도 그들의 마음이 주관을 받기 때문에 그처럼 특별한 대우를 해주게 되는 경우도 있지요.
그럴 때마다 우리 일꾼들이 한결같이 ‘목자의 공간 안에 함께한다는 것이 얼마나 복되고 형통한 것인지를 다시 한 번 너무나 깊이 느낄 수 있었다’고 고백하시는 것을 들어 볼 수가 있고요. 바로 이런 것처럼 요셉으로 인해 그의 아비 야곱은 죽은 후에도 왕족에 준하는 예우를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4-5절에 보면 “곡하는 기한이 지나매 요셉이 바로의 궁에 말하여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청컨대 바로의 귀에 고하기를 우리 아버지가 나로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내가 파서 둔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나니 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 내가 다시 오리이다 하라” 말하지요.
여기에도 바로 요셉의 겸손함과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조상의 매장지가 있는 가나안 땅까지는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기에 요셉이 그곳까지 다녀오려면 아무래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리게 되지요. 그러다보면 총리의 직분에 공백이 생기게 되고 이는 당연히 최고 통수권자인 바로에게 승낙을 받아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먼저 이처럼 질서를 좇아 바로에게 자신의 거취에 대해 승낙을 받으려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때 요셉은 자신이 직접 바로 앞에 나가서 그 말을 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바로의 귀에 들어가도록 합니다. 이는 요셉이 바로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지요. 지금 바로는 나라를 다스리는 모든 일에 있어서 요셉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애굽 사람이 아니었기에 바로에게는 ‘요셉이 언젠가는 떠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 같은 것이 늘 있었지요.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 요셉이 직접 나아가 잠시라도 나라를 비우겠다고 말을 하면 바로의 마음에는 조금이나마 염려가 될 수 있습니다. 요셉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섬기는 바로에게 이러한 조금의 괜한 염려까지도 주는 것을 원치 않았지요. 그래서 요셉은 바로에게 가장 부드럽게 아무런 부담도 주지 않으면서 자신의 말을 대신 전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았습니다. 바로와 늘 교통하며 서로 간에 신뢰관계가 쌓여져 있는 사람, 요셉은 이런 사람을 통해 자신의 말이 자연스럽게 바로에게 들어가도록 하는 방법을 택했던 것이지요.
요셉은 바로가 편안한 마음 가운데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들어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처럼 환경을 조성해 갔던 것입니다. 윗분을 섬기는 자로서의 요셉의 사려 깊고 섬세한 마음을 잘 알 수 있게 해주는 모습이지요. 더욱이 이때 요셉은 자신의 입장에서 얼마든지 요구할 수 있는 것을 말함에 있어서도 지극히 겸비한 자세로 나오는 것을 봅니다. “내가 당신들에게 이렇게 은혜를 입혔다” 하지 않고,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입었으면”이라 말했지요.
요셉은 애굽을 구한 은인이요, 지금도 총리로서 애굽을 치리해 가며 나라에 너무나 큰 유익과 은혜를 주고 있었지만 요셉은 이러한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지 않았고 도리어 자신이 은혜를 입은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인 자신을 총리로 발탁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랑하고 인정하며 함께 해준 것에 대해 오히려 은혜를 입었다 말하고 있지요. 물론 이때 ‘은혜를 입었다’는 말 안에는 서로 간에 은혜를 주고받았으며 사귐을 가졌다는 의미도 담겨 있지만, 요셉은 늘 자신이 베푼 것을 내세우기 보다는 늘 자신을 낮추며 상대를 낫게 여기는 이러한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또한 여러분이 요셉과 자신을 비교하여 한번쯤 돌아보아야 할 분야이지요. 어떤 사람은 자신이 뭔가 조금만 잘한 게 있으면 어찌하든 그것을 드러내기 원하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칭찬받기를 원합니다. 또한 상대에게 어떤 부탁할 일이 생겼을 때는 ‘내가 예전에 당신에게 그렇게 해주었으니 이번에는 당신이 이렇게 해주어야하지 않겠느냐’는 식으로 결국은 대가를 요구하는 경우도 있지요.
그러나 이렇게 자신을 드러내기 원하고, 어떤 일을 해주면서도 나중에 그 일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보상을 원하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없고 사랑받을 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설령 어떤 사람이 그런 사람으로부터 은혜를 입었다 해도 ‘저 사람은 나중에 분명히 이 일을 가지고 어떤 대가를 바랄 텐데’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마음에서부터 우러나는 감사가 나올 수 없지요.
또한 사람들에게 자신이 한 일을 드러내기 원하고 그래서 인정받고 칭찬받기 원하는 사람은 이미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대가를 받은 것이므로 은밀한 중에 보시고 갚아 주시는 하나님으로부터는 받을 것이 없게 된다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이에 대해 마 6: 2-4에도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하셨지요.
이처럼 요셉도 자신이 어떤 큰일을 했다 해서 그것을 드러내거나 사람에게 보이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주변을 더욱 살피며 섬겼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드러내어 말하지 않는다 해도 결국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사랑받는 사람이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열매가 지금 아버지 야곱을 장사하는 과정에서 다시 한 번 밝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지요.

요셉이 원하는 바를 전해들은 바로는 기쁜 마음으로 그의 청을 허락합니다. 더욱이 7-8절에 보면 “요셉이 자기 아비를 장사하러 올라가니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장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장로와 요셉의 온 집과 그 형제들과 그 아비의 집이 그와 함께 올라갔다” 말씀하고 있지요. 야곱의 장례에 애굽의 모든 머리된 사람들까지도 다 함께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9절에 “병거와 기병이 요셉을 따라 올라가니 그 떼가 심히 컸더라” 했지요. 이는 요셉의 아버지 야곱의 장례를 바로와 그 나라의 모든 백성들이 어떠한 마음과 행함으로 치러주고 있는지를 잘 나타내주는 장면입니다. 만약 야곱이 가나안 땅에서 말년을 보내고 그곳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면 과연 그의 장례가 어떻게 치러졌겠습니까? 물론 자녀들과 그의 후손들에 의해서도 나름대로 성대하게 치러지기는 했겠지만, 그것이 어찌 지금 받고 있는 이러한 예우와 비교가 되겠는지요?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자신의 사명을 온전히 마무리해 낸 야곱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었으며 또한 이것은 그의 아들 요셉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할 수가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요셉이 애굽의 바로와 그 백성들로부터 사랑받고 존경받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요셉 자신의 장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아버지 야곱의 장례를 이처럼 국가적인 차원에서 성대하게 치러 주었던 것이지요. 이것은 누가 시켜서 되는 것도 아니고 요셉이 애굽의 총리라는 지위와 권세를 이용해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에서도 흔히 어떤 사람이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을 때 그가 평소에 쌓아놓은 덕과 선행이 드러나게 된다는 말을 합니다. 평소에 주변의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왔고 또 얼마나 그들의 마음을 얻었는가에 따라 막상 자신이 도움을 받아야할 상황이 되었을 때 그 열매가 드러나게 된다는 말이지요. 정말 덕과 사랑으로 주변을 섬기며 좋은 관계를 쌓아온 사람이라면 어떤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자신이 직접 나서서 도와달라고 말하지 않아도 주변에서 알아서 도와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주변을 섬기지도 못했고 좋은 관계를 쌓아 놓지도 못했으며 덕과 선으로 심어놓지도 않은 사람은 막상 어려운 처지에 놓였을 때 아무리 주변 사람들에게 도와달라고 간청을 해도 외면당하고 마는 경우가 많지요.
물론 주 안에서는 나에게 잘 대해 주고 서로 좋은 관계를 맺어왔던 사람만 그가 어려울 때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지 못했던 사람에 대해 더 큰 사랑과 관심으로 보살피고 도와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요, 선입니다. 그래서 마 5:46-47에도 보면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 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말씀하셨지요. 그러므로 자신에게 잘해주고 섬겨주는 사람에게만 잘해주거나 어떤 대가를 바라고 해주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대하든지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섬김과 사랑으로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요셉은 바로 그렇게 행했기 때문에 아버지 야곱의 장례를 치름에 있어서 이처럼 그 열매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지요. 왕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으며 매우 화려하고 성대하게 장례가 치러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이처럼 아버지 야곱의 장례가 화려하고 성대하게 치러지도록 했던 것은 결코 자신의 자랑이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었지요. 자신의 명예와 권세를 과시하려거나 아버지 야곱에 대한 육적인 정과 사랑 때문에 이렇게 엄청난 규모로 장례를 치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은 이를 통해 바로 하나님의 사랑받는 사람에게 임하는 축복이 어떤 것인지를 모든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었지요.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려는 것이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볼 때 야곱은 이방인이요, 하나의 족장에 불과해 보이는 사람이었지만 그럼에도 그의 장례가 이처럼 대단하게 치러진다는 것은 야곱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함이었지요.
하나님의 사랑받는 사람에게 어떠한 축복과 영광이 주어지는지를 보여 줌으로써 결국은 그처럼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원했다는 말입니다. 야곱의 장례 행렬과 진행되는 모든 과정이 얼마나 크고 성대했으면, 이를 지켜보던 가나안 백성들이 그 땅의 이름까지 바꿀 정도였지요.
10-11절에 “그들이(즉, 야곱의 장례 행렬이) 요단강 건너편 아닷 타작 마당에 이르러 거기서 크게 호곡하고 애통하며 요셉이 아비를 위하여 칠일 동안 애곡하였더니 그 땅 거민 가나안 백성들이 아닷 마당의 애통을 보고 가로되 이는 애굽 사람의 큰 애통이라 하였으므로 그 땅 이름을 아벨미스라임이라 하였으니 곧 요단강 건너편이더라” 했습니다.
이처럼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장례를 통해서도 이 일을 행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이렇게 해서 애굽의 국가적인 지원 하에 아버지 야곱의 장례를 치른 요셉은 다시 애굽 바로의 곁으로 돌아갑니다. 큰일을 치르고 났으니 ‘이제 조금만 쉬자’ ‘좀 여유를 가지고 돌아가자’ 이런 생각이나 마음을 가진 것이 아니라, 요셉은 일을 마친 후에는 즉시로 자신의 사명이 있는 곳으로 돌아간 것이지요. 더욱이 바로에게 “장례 후에 돌아가겠다”고 약속한 대로 요셉은 지체하지 않고 행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요셉은 늘 그 입술의 말을 지키며 자신의 유익을 좇아 변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로는 물론이고 주변의 사람들로부터도 늘 신뢰를 받을 수가 있었지요. 여러분도 입술의 말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나에게 이런 사정이 있으니까 이해하겠지’ ‘이 정도는 변개하는 것이 아니겠지’ 이러한 사사로운 것들이 쌓여서 결국 변개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도 사람 앞에서도 신뢰를 잃게 되고 마는 것이지요. 이제 다음 시간은 창세기 강해 마지막 시간으로서 야곱이 죽은 후에 요셉이 형제들을 품어 나가는 모습과 요셉 역시 임종을 맞게 되는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후 10:17에 보면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하셨습니다. 주 안에서의 자랑은 이생의 자랑이나 자기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므로 주 안에서의 자랑은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지요.
예를 들어 여러분이 치료받고 축복받고 응답받은 내용을 간증하는 것도 결국은 주 안에서의 자랑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이와 같이 응답받고 축복받았다”고 간증함으로써 그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생의 자랑 가운데 나오는 자기 자랑과 주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자랑은 반드시 구분이 되어져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 분야를 잘 분별하셔야 하지요. 저도 제 자신을 위해서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자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저에게 생명주시고 지금까지 저를 인도하시며 이와 같이 쓰임받을 수 있게 하신 모든 것이 오직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인데 제가 어찌 저에 대해 무엇을 자랑하겠습니까?
그러나 오직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주 안에서의 자랑만큼은 해도 해도 끝이 없지요.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다면 저는 삶의 의미를 느낄 수가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순간이 가장 기쁘고 오직 ‘어찌하면 아버지 하나님께 더 크게 영광을 돌릴까’ 하는 이 마음뿐이지요.
요셉도 아버지 야곱의 장례를 그처럼 성대하게 치르게 했던 것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고 보장받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얼마나 큰 축복과 존귀로 함께하시는지를 확실히 나타내 보였던 것이지요.
이처럼 자기를 드러내려는 마음이 없이 겸손한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은 잠 18:12 후반절에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는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높이셔서 존귀한 자로 세우십니다. 여러분도 이러한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며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늘 자기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섬기면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시므로 아버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존귀히 세우시고 여러분을 통해 더 크게 영광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6-09-24 오후 11:38:39 Posted
2018-12-04 오후 1:48:37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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