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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창세기 강해 (2000년~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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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세기 강해(230)
설교자 당회장 이재록 목사 설교본문 창50:15-26 등록일자 2006.09.29
“요셉의 형제들이 그 아비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가로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하여 이르시기를
[17절부터 23절까지 중략]
요셉이 그 형제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요셉이 일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곱이 죽은 후 그의 아들들에게는 염려거리가 생겼습니다. 15절에 “요셉의 형제들이 그 아비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했던 것이지요.
요셉의 형제들이 생각하기를 그 동안은 아버지 야곱이 살아계시므로 요셉이 자신들을 어찌하지 않았지만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안계시니 혹여라도 자신들이 예전에 요셉에게 행했던 일로 인해 요셉이 보복하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과 염려가 생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의 형제들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이름까지 들어가며 요셉에게 긍휼을 구하지요.
16-17절에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에게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다 하라 하셨나니 당신의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요셉이 그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했지요.
우리는 이 모습들을 통해 육의 사람과 영의 사람의 마음이 이처럼 전혀 상반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껴볼 수가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요셉은 이미 오래 전에 마음에서부터 온전히 형들을 용서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형들에 대한 감정이 조금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마음과 정성을 다해 더 섬겨주었지요.
그런데 요셉 편에서는 이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야곱이 돌아가신 후에 형들이 이처럼 두려움에 떠는 것을 보자 마음이 너무나 아팠습니다. 형들이 자신의 마음을 너무나 몰라주는 것이 요셉을 슬프게 만들었던 것이지요.
사실 요셉의 형들의 입장에서는 요셉의 마음이 이해될 수가 없었습니다. 육의 사람이 영의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육의 사람은 상대방을 바라볼 때도 자기 틀과 자기 생각 가운데 보기 때문에 영의 사람의 마음 역시 자기 육의 기준에 맞추어 보게 됩니다. 그러니 자기 기준에 맞추어서‘저 사람의 마음이 이럴 것이다’ 하고 판단하게 되지요.
요셉은 정말 마음 중심에서 형들을 용서하고 이해하며 품었지만 형들은 자신들이 그 마음이 되지 못하니 요셉의 마음도 중심에서 느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자기들 같으면 그런 상황에서 요셉과 같은 마음이 도저히 될 수 없기 때문에 자기들 마음의 기준에 맞추어 요셉의 마음에 대해서도 판단하게 되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 이처럼 자신의 마음을 너무나 몰라주는 형들을 볼 때 요셉의 마음이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더 나아가 요셉은 지금 두려워하는 형들의 입장까지 생각하니 형들의 마음이 느껴지면서 더 슬펐던 것이지요.
이렇게 영의 사람은 상대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 주지 못해서 슬픈 것도 있겠지만 자신의 마음을 느끼지 못해서 오해하고 있는 그 상대의 입장까지도 함께 느끼기 때문에 그로 인해 더 슬플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도 이런 경우들을 많이 경험해 봤습니다. 제 편에서는 오직 선과 사랑을 베풀었는데, 그것을 받는 편에서는 육으로 받아서 오해하는 경우들을 보았지요. 영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니 자기들의 육의 마음에 맞추어 이런 저런 생각들을 동원하고 마는 것입니다. 저의 말을 자기 생각과 기준에 맞추어 마음대로 해석해서 생기는 오해들도 있고요. 저는 이런 경험들을 수없이 해오면서 ‘육의 사람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너무나 철저히 느껴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제 마음을 이해 못하는 상대방에 대해 싫은 마음이나 감정 같은 것은 조금도 있어본 적이 없지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육의 마음을 가진 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오히려 그들을 위해 대신 눈물 흘리며 더한 긍휼의 마음으로 기도해 주었습니다. 혹여 마음 상할까, 혹여 낙심할까 안타까움으로 마음 졸이며 그들에게 더 사랑과 관심을 주었고, 그 영혼들을 위해 아버지 앞에 간구했지요.
오늘 본문의 요셉도 친히 자신 앞에 나아와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 이렇게까지 말하는 형들을 보면서 “왜 나의 마음을 그처럼 몰라줍니까?” 하며 그들을 탓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19-21절에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했지요.
요셉은 형들에게 비록 그들이 행한 것은 큰 악이었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 허락하신 일이었고 그 일로 인해 결국은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룸으로 자기들의 가족들이 구원에 이르게 되었음을 다시 한 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형들은 물론이고 그들의 자녀들까지도 요셉 자신이 책임지고 기르겠다 약속해 주고 있지요. 지금까지도 물론 그래왔지만 앞으로 더 살피고 돌보며 섬기겠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요셉은 간곡한 말로 형들을 위로했지요. 이 얼마나 선한 마음입니까? 자신에게 악을 행한 상대를 오히려 감동시킬 수 있는 선한 말과 행동인 것이며, 능히 생명까지라도 줄 수 있는 선이지요.
여러분의 마음과 한번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이해해 주지 못하고, 여러분의 마음을 오히려 오해해서 감정을 가지는 사람이 있다고 할 때 ‘왜 저 사람은 내 마음을 몰라주나 왜 저렇게만 생각할까’ 이런 안타까운 마음이 들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혹여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지? 저 사람은 구제불능이야’ 이런 마음이 들지는 않았는지요? 그러다가 여러분 편에서도 감정을 가지게 되고 더 나아가 부딪힘이 생기지는 않았습니까? 아니면 그런 사람을 더 이해하려 노력하며 섬겨주면서 품으려고 하셨는지요?
아무리 육의 사람이라도 그가 변화될 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내 편에서 먼저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품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요 13:1 후반절에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하신 대로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까지도 끝까지 품고 사랑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셉도 일백십 세에 이르러 마침내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삼십 세의 젊은 나이에 애굽의 총리가 된 후 80년 간을 살면서 요셉은 영육 간에 화평을 이루어 왔지요. 육으로 볼 때 요셉은 애굽의 바로와도, 바로의 신하들과 백성들, 자신을 섬기는 사람들과도, 그리고 아버지와 형제들과도 모두 화평함을 이룰 수가 있었습니다.
이는 먼저 영적으로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었고, 자기 자신과도 화평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악은 모양이라도 없는 선한 마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았기에 하나님과 화평을 이룰 수 있었고, 자신과의 화평의 관계도 이룰 수가 있었지요. 그러니 주변의 누구라도 품고 이해하며 지극한 선으로 섬겨나갈 수 있었고, 이러한 요셉과는 누구 한 사람 걸림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선의 지혜 가운데 모든 것을 풀어 나가므로 요셉으로 인해 마음이 불편해 한다거나 요셉을 시기, 질투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았고, 어떤 감정을 가지며 반대하는 사람도 없었지요.
여러분도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하나님과도, 여러분 자신과도 화평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변과 두루 육적인 화평도 이루어지면서 참된 평안과 희락이 찾아오게 됩니다. 그러나 혹여라도 사람과의 화평을 위해 하나님과의 화평을 깨어서는 안 되지요. 하나님의 뜻을 좇기 위해 사람과의 화평이 깨어지는 경우가 있다 해도 하나님과의 화평이 우선이라는 사실입니다.
요셉은 자신이 억울한 누명을 썼을 때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는 말을 하지 않았고 그런 상황에서도 오직 감사하며 기뻐했지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화평을 좇은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화평을 좇으니 결과적으로는 더 큰 축복이 왔고 사람과의 화평도 회복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이처럼 하나님과의 화평을 좇을 때 비록 당장에는 사람과의 화평이 깨어지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렸으니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십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요셉을 통해 ‘화평을 이루는 방법’에 대해 잘 깨달아 보시기 바랍니다. 그 비결은 바로 ‘선’이었습니다. 요셉은 늘 모든 상황을 선으로 바라보았지요. 상대방의 행함만을 생각하면 너무나 상대가 악하고 그래서 용서하기가 쉽지 않을 수 있지만, 요셉은 그런 상황에서도 선으로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었기에 모든 것을 하나님 편에 맡기고 선한 마음과 생각으로 바라보았지요.
그러니 불평, 불만이 나올 리가 없고 사람에 대해서도 감정을 갖거나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더 낮추는 겸손함 가운데 상대를 선으로 섬겨주었지요. 이런 모습에 사람들은 감동을 받게 되고 그들 마음에 요셉이라는 인물이 깊이 새겨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요셉이 애굽 사람들에게 얼마나 깊이 심겨져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출애굽기 1장에 잘 나와 있지요.

8절에 보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리더니” 했는데 이때부터 바로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애굽 사람들의 박해가 시작됩니다. 당시의 역사서를 참조해서 계산해 보면 이때는 이스라엘 민족이 고센 땅에 정착한지 이미 300년이 훨씬 넘은 시점이었지요. 그런데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면서부터 이처럼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박해가 시작됐다는 말을 역으로 한번 생각해 보면 그전까지는 수백 년이 지나도록 애굽의 왕들이 요셉에 대해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 덕분에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 안에서 안정되게 살 수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이방인으로서 애굽의 총리가 되었던 요셉의 명성이 그가 죽은 후에도 수백 년 동안 남아있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 요셉이 애굽이라는 나라에 있어서 얼마나 큰 은혜를 입힌 인물이었으며, 덕망이 높은 인물이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핍박하고 종으로 부릴 수도 있었겠지만 요셉이 애굽에 끼친 은혜를 기억하고 있었기에 요셉을 봐서라도 차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요셉이 죽은 후에라도 단지 그의 이름만 기억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그의 실질적인 영향력이 대단했다는 사실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요셉의 영향력으로 인해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 안에서 안정되게 생육하고 번성하며 큰 민족을 이루어갈 수 있었지요.
여러분도 요셉과 같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러분으로 인해 여러분의 주변까지도 함께 은혜를 입을 수 있고 그것이 후대에까지 전해질 수 있다면 이는 여러분이 그만큼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모든 면에 인정받았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이처럼 영육 간에 인정받았던 요셉이 이제 죽음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맹세시키기를 25절에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지요. 요셉 역시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에 자신의 뼈라도 묻히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요셉은 장차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갈 것을 알았고, 하지만 그것이 가까운 훗날은 아니라는 것도 알았지요. 그래서 훗날 때가 되어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으로 가게 되면 잊지 말고 자신의 유해를 함께 가져가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유언은 400여 년이 지난 후 이스라엘 후손들에 의해 지켜집니다. 수 24:32 전반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이끌어 낸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했지요.

성도 여러분, 요셉은 죽음을 맞기 전에 하나님 앞에 마지막으로 기도를 올립니다. “나의 사랑하는 하나님이시여, 나의 철없던 시절에 나를 보시므로 정녕 하나님 안에서 이와 같이 나를 인도하시고 진리로 온전히 이끌어주신 나의 하나님이시여 감사를 드리나이다.
내 삶에 있어서 모든 것이 항상 평안하였고 모든 것이 형통함은 아버지의 은혜요, 미천한 자를 생각하시어서 정녕 온전한 자에 이르기까지 이끄셨고, 많은 자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에 무릎을 꿇게 하셨으며 결국에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게 하시니 감사를 드리나이다.
나의 모든 삶 속에서 적다 함도 아니요 또한 부족하다 함도 아니요 모든 것에 넘쳐났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났으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과 은혜가 심히도 큼으로 인하여서 감사를 드리나이다.
이제 이와 같이 눈을 감으오나 남은 모든 것들을 인하여서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이루시며, 정녕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아니하도록 모든 이들에게 항상 은혜의 광선을 비추사 많은 이들에게 그 은혜를 잊지 아니하는 그와 같은 마음에 깨우침이 되게 하시며 그 길을 인도하소서.
하나님께서 계심으로 인하여서 제가 있었고 하나님의 은혜와 은택 가운데서 이와 같이 영광을 드리우며 정녕 많은 이들에게 하나님을 알리게 하심에 감사드리나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게 너무나 넘쳐났고 하나님의 기뻐하신 증거가 저를 통해 너무나 많이 넘쳐났나이다. 저를 통하여서 심히 큰 열매를 거두시며 정녕 많은 것들을 인하여서 기뻐하시고 이루게 하심에 감사드리나이다.
정녕 저는 아무 것도 아닌 자였고 아무 것도 있을 수 없는 자였으되, 그러나 저를 생각하시며 사랑하사 그 길을 인도하시고 이와 같이 많은 수(壽)를 누리게 하시며 축복을 받아 많은 것들의 형통함 속에서 이 땅의 삶을 마무리하게 하시니 감사드리나이다.
이제 이후에 있을 모든 일들도 하나님의 섭리와 뜻 가운데 이룰 줄 믿사오니 하나님의 은혜가 이곳을 인하여서 넘치게 하시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하여서 그 은혜가 그치지 아니하게 하소서.
감사드리나이다. 나를 사랑하심에 감사드리나이다. 내게 은혜를 주시니 감사드리나이다. 내가 이와 같은 모든 영광중에 있게 하시니 감사드리나이다. 그 영광중에 이 자가 눈을 감게 하심에 또한 감사드리나이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며 이와 같이 평안히 그 앞에 안기오니 하나님의 아들, 곧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이 아들을 아버지 품에 안으사 기뻐하소서”
지금 들으신 요셉의 기도내용을 보면 앞서 야곱이 임종을 앞두고 올렸던 기도의 내용과 많이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자신에게 너무나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자신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심에 대해 오직 감사하는 내용의 기도였지요. 앞으로 이루실 섭리에 대해서도 믿음으로 부탁드리고 있습니다.
반면에 야곱도 감사의 기도를 드렸지만 그 내용은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하여 변화시켜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었지요. 야곱은 자신의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니 비록 연단과 어려움의 시간들이 있었지만 그것들을 통해 오히려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고, 변화될 수 있었음을 깨닫고 감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자신도 많은 연단의 과정을 겪었지만 그럼에도 매순간 감사하는 마음이었고 연단의 과정 중에라도 항상 넘치게 은혜와 축복을 주셨다고 고백하며 감사했던 것이지요. 즉 자신이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있었을 때도, 누명을 쓰고 깊은 감옥에 갇혀있었을 때에도 요셉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은혜를 주셨고 늘 넘치도록 축복해 주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영의 사람인 야곱이 감사하는 내용과 온 영의 사람인 요셉이 감사하는 내용과는 깊이의 차이가 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영의 사람은 자신을 발견케 하시고 변화시켜서 영으로 인도해 주신 것에 감사하는 차원이라면, 온 영의 사람은 자신을 발견케 하여 변화시켜 주신 것뿐만 아니라, 그렇게 나오기까지 지내온 모든 과정에 대해서도 매 순간 중심에서 감사를 올린다는 사실입니다. 육의 사람이 볼 때는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육으로는 너무나 힘들고 절박한 상황에서도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온 영과 영의 사람의 차이입니다. 영과 온 영의 마음 그릇의 차이인 것이며 그 마음에 담긴 것도 차이가 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그러므로 영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온 영에 이르기까지는 정녕 더 노력하고 노력하며 마음 안을 온전한 진리로 채워야 합니다. 마음에 악이 전혀 없다 해도 마음이 온전히 진리로 채워진 것과 그렇지 않은 것과는 마음 씀에 있어서 많은 차이가 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창세기 강해를 마무리 하면서 우리는 요셉의 신앙과 그의 마음을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인물들을 통해 여러분은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 보았을 것이고, 이제 요셉의 신앙을 보면서 정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 영의 사람에 대해 구체적으로 깨달아보는 시간이 되었지요.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드신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닮은 자녀 즉 온 영의 사람을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자녀의 모습에 얼마나 가깝게 닮아 오셨는지요? 여러분도 요셉의 신앙을 본받아 그와 같이 선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감동시켜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사랑받고 기뻐하시는 자녀가 되어 영육 간에 축복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지요. 요셉은 타국에 종으로 팔려간 신세에서 그처럼 존귀하고 영화로운 자리에까지 올랐는데 하물며 여러분은 무엇이 불가능하겠습니까? 요셉이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렸는지, 그의 삶과 신앙과 마음을 여러분 자신과 다시 한 번 비교해 보시고, 여러분의 부족된 모습을 하나하나 발견하여 꼭 변화시켜 나가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창세기 강해가 지난 2000년 12월 1일에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철야는 2006년 9월 29일에 시작했지만 지금 창세기 강해 230번을 마치게 된 시간은 9월 30일이지요. 하루도 틀리지 않고 정확히 70개월 만에 창세기 강해를 마치게 됩니다. 여러 번의 해외 성회와 해외 출장, 산기도 등 지난 70개월 동안 많은 일정들이 있었음에도 마치 일부러 짜 맞춘 것처럼 너무나 정확히 마무리 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지금까지 수없이 체험해 왔지만 이런 것 하나까지도 사람이 하고자 한다고 해서 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직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친히 주관하시고 인도하셔서 이루어진 일들이지요.
이처럼 너무나 세밀하게 우리를 인도하시며 지금까지 창세기를 풀어 주시고 깊은 영의 세계로 이끌어 주신 아버지 하나님께 모든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여러분은 창세기 강해를 통해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너무나 깊은 영의 세계까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태초 이전의 시간들과 하늘의 오묘한 영의 세계들 그리고 지구를 비롯한 천지만물의 창조에 대한 비밀한 말씀들을 들을 수 있었지요. 창세기 강해와 더불어 여러분에게 영의 세계를 활짝 열어주기 시작하셨고 여러분으로 하여금 영의 세계를 친히 눈에 본 바요, 손에 만진 바가 되도록 무수히 역사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정녕 이렇게까지 깊은 것들을 풀어 주시고 영의 세계를 열어 주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요일 2:13 전반절에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하신 대로 바로 여러분을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아비의 신앙으로 이끄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말씀들을 듣고 또 친히 영의 세계를 보면서 여러분의 믿음이 날로 성장하여 신속히 하나님의 인간경작의 섭리에 합당한 참 자녀들로 나오기를 원하신 것이지요. 마 13:17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말씀한 대로 여러분은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것을 들었고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큰 은혜를 입었으니 이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이 듣고 본 것을 머리에 지식으로만 담아 놓아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창세기 강해의 내용을 잘 알고 영의 세계에 대해 잘 안다고 해도 그것으로 여러분이 변화되고 성결되어 영으로, 온 영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지요.
창세기 강해를 통해 태초에 홀로 계셨던 아버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경작하시게 된 그 깊은 사랑의 마음을 느껴야 하는 것이며, 그 사랑을 어떻게 나타내 주셨는지를 느껴야 합니다.
또한 이러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알아 정녕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들로 나와졌던 믿음의 선진들의 모습을 통해 여러분 자신이 깨어지고 변화되어야 하지요. 그것이 곧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길이며, 여러분에게 창세기 강해를 풀어 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입니다. 이러한 여러분 모두가 되셔서 정녕 아버지 하나님 앞에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음 주 금요철야는 창립전야로 드리게 되고 그 다음 시간부터는 요한계시록 강해가 시작됩니다. 이 또한 아버지 하나님께서 때가 되었기 때문에 주관하시고 역사해 가시는 일이지요.
요한계시록에는 우리가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할 때까지의 과정과 그 이후 이 땅에서 벌어질 일들 그리고 주님께서 이 땅에 지상재림 하시어 천년왕국을 지낸 후에 백보좌대심판이 이루어지기까지의 많은 내용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제 요한계시록 강해를 새롭게 허락하신 이유는 이제 신랑되신 주님 맞을 날이 멀지 않은 이때에 여러분이 정녕 깨어 있어서 신부단장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이지요.
동시에 이 말씀을 듣게 될 전 세계의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요한계시록 강해는 우리가 휴거되고 난 후에 이 땅에 남아 7년 환란을 겪게 될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요.
우리 성도님들은 앞으로 증거될 요한계시록 강해의 말씀을 사모하셔서 정녕 깨어 있는 마음으로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요한계시록 강해의 말씀 매 시간 시간이 여러분에게 은혜가 되고 능력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신속히 주님의 온전한 신부로서 모든 단장을 마치시고 신랑되신 주님을 기쁨과 설레임으로 기다리다가 그날에 담대히 주님을 맞이하여 그 품에 안기실 수 있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6-10-02 오후 12:52:49 Posted
2018-12-04 오후 1:48:37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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