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목표 : 세상적인 선과 하나님 말씀이 기준이 되는 참된 선에 대해 알아보고 양선의 열매를 맺게 한다.
우리가 성령을 받아 진리대로 행하면 마음과 행실이 선해집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장 15~16절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말씀한 대로 범사에 선을 좇아 행함으로 양선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1. 각자의 양심이 기준이 되는 '선'
주 안에서 성령을 받지 않은 세상 사람들도 나름대로 선을 분별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즉 자기 양심에 따라 "이것은 선하다. 저것은 악하다." 하지요. 그래서 자기 양심에 거리낌이 없으면 나름 선하고 의롭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양심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나는 선하다고 여긴 것이 상대에게는 악할 수 있고, 내게는 악한 것이 남에게는 선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양심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본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사람의 본성은 부모로부터 어떤 기를 받고 태어나는가, 어떤 환경에서 자라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선한 부모의 기를 받고 태어난 자녀는 비교적 본성이 선합니다. 또 좋은 환경 속에서 선한 것을 많이 보고 들으며 자란 사람은 양심이 선하게 만들어지기 쉽지요. 반면 악한 부모의 기를 받고 태어나 악한 것을 많이 보고 듣고 접하면 본성과 양심이 악해지기 마련입니다.
가령, 정직의 중요성을 교육받고 자라는 아이는 작은 거짓말에도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하지만 습관적으로 거짓말하며 자란 아이는 큰 거짓말을 하면서도 잘못한 줄도 모르지요. 양심이 그만큼 악에 물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가치관의 영향을 받고 성장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양심은 달라지며, 사회마다 나라마다, 시대마다 가치관이 다 같지는 않습니다.
옛날 왕정 시대에는 노예를 부리며 학대를 해도 그것을 잘못이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또 30년 전만 해도 우리 사회는 노출이 심한 옷을 입으면 손가락질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의식이 많이 바뀌었지요. 그만큼 시대의 가치관이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보기에 선한 것'을 추구할 뿐이지 절대적으로 선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는 선악과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기준이 항상 동일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변함없는 진리, 곧 하나님 말씀이 그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기준 삼아 행하려는 마음이 바로 '양선'입니다.
2. 양선의 열매란?
'양선(良善)'을 문자대로 풀면 '어질고 착하다'는 뜻입니다. 영적으로는 성령 안에서 선을 추구하는 마음, 곧 진리 안에서 선을 좇아 행하는 마음이지요.
마태복음 12장 35절에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낸다' 하신 것처럼 선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선이 배어나옵니다.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선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선행을 베풀지요. 마치 향수를 뿌린 사람에게서 좋은 향기가 나듯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합니다. 그런데 선을 추구하는 마음만 간절하다 해서 양선의 열매가 맺히지는 않습니다. 선을 보고 듣고 배웠으면 반드시 마음에 이루고 행함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0장에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어떻게 양선을 행했는지 잘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를 보았으나 그냥 지나쳐 버리지요. 그 뒤에 레위인이 지나가지만 그도 외면해 버립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 뜻을 행해야 할 순간에는 행함을 내보이지 못했지요.
마침 한 사마리아인이 그곳을 지나다가 쓰러져 있는 사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바로 상처를 싸매 주며 황급히 주막으로 데려가 돌보아 주었지요. 이튿날 두 데나리온을 주막 주인에게 주며 그를 잘 돌봐 달라고 부탁하며 비용이 더 들면 나중에 와서 지불하겠다고 합니다.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인데도 물질과 시간에 손해를 보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지요.
선을 추구하며 선을 행하는 양선의 마음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냥 지나쳐 버렸다면 '다친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걱정하며 내내 마음에 걸렸을 것입니다. 이처럼 양선은 선을 택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어 하는 마음입니다.
3. 예수님의 양선의 마음
마태복음 12장 19~20절에는 예수님의 양선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말씀한 대로 양선의 열매가 가득하고 향기가 진동을 합니다.
선한 일만 하신 예수님을 악한 사람들은 죽이려 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들을 미워하지 않으셨고 하나님의 참 뜻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아무리 악한 자들이 훼방하여도 다투거나 들레지도 않으셨지요. 육의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기 좋아합니다. 나를 알아주기 원하고 대접받고 싶어 하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고 큰 권능을 베풀면서도 들레지 않으셨고 겸손하셨습니다.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할 정도로 걸음걸이, 몸가짐, 언어에도 흠이 없으셨지요. 오직 그 마음에는 지극한 선과 겸손함, 영적인 사랑만이 가득했습니다.
우리가 양선의 열매를 맺으면 예수님처럼 누구와도 걸리거나 부딪치지 않습니다. 상대의 티나 허물을 들추어내지 않지요. 자신을 드러내 높임 받으려 하지도 않고 경우에 맞지 않는 일을 당한다 해서 불평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셨습니다. 영적으로 '상한 갈대'란, 세상의 죄와 악으로 가득 찬 사람을 말합니다. '꺼져 가는 심지'란 마음이 심히 악으로 물들어 그 영혼의 등불이 꺼져 가는 사람이지요.
상한 갈대와 꺼져 가는 심지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 해도 그 행함을 보면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고 오히려 성령을 거역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경우도 있지요. 예수님 당시 놀라운 권능을 보면서도 여전히 믿지 않고 악을 발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도 끝까지 믿음으로 바라보며 구원받을 기회를 열어 주셨습니다.
양선의 열매가 맺히면 악을 발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품습니다. 굳이 시비를 따져 상대의 잘못을 드러내거나 꺾으려고 하지 않지요. 진실한 마음으로 선대하여 그들의 마음을 녹이고 감동을 줍니다. 설령 사망의 길로 가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여기까지만 참자!"라고 한계를 두고 선을 넘는다고 해서 외면하는 것도 없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살리고자 애쓰지요. 이것이 곧 양선의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양선'의 마음과 다른 성령의 열매와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가령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준 것은 자비나 구제와 긍휼이 아닌가?" 또 "다투지도 않고 들레지도 않는 마음은 화평과 겸손의 마음이 아닌가?"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어떤 면에 중점을 두었느냐를 보면 됩니다.
'양선'에서 부각시키고자 하는 측면은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과 선을 좇아 '행할 수 있는 힘'입니다. 즉 상대를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는 '긍휼'에 초점을 두지 않고, 긍휼히 여겨야 할 상황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선의 마음'에 중점을 두었지요. 또 다투지도 들레지도 않는다는 것은 화평과 겸손의 마음입니다. 이것을 양선에 비유했을 때는 선해서 화평을 깰 수 없는 마음, 인정받으려고 들레기보다는 겸비한 것을 더 좋아하는 선한 마음에 포인트를 둔 것입니다.
양선의 열매를 온전히 맺으면 주님의 마음을 닮게 됩니다.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거나 실족시키지 않으며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습니다. 외적으로도 선과 겸손이 풍겨납니다. 주의 교양으로 범사에 존경받을 만하며 걸음걸이나 몸가짐, 언어 습관 등이 온전해지지요. 따라서 여러분은 신속히 양선의 마음을 이루어 누가 봐도 존중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양선(良善)의 영적인 의미를 써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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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다음 설명 중 틀린 것을 고르시오.
① 양선은 선을 추구하는 마음, 진리 안에서 선을 좇아 행하는 마음이다.
② 진리는 각 사람의 가치관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③ 양선은 다른 성령의 열매에 비해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과 선을 좇아'행할 수 있는 힘'에 중점을 두었다.
④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 자체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변함이 없다.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 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사마리아'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이자 그 주변을 일컫는 말이다. 이곳에 바알 당이나 다른 종교의 사당들이 있었기 때문에 선지자들은 '우상숭배의 중심지'로 여겼다. 예후는 왕이 된 후 이스라엘 중에서 바알을 멸했다.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한 사마리아는 여러 번 앗수르의 공격을 받다가 마침내 함락되고 만다. 앗수르 왕은 사마리아에 자국민들을 이주시켜 혼혈정책을 펼친다. 이로 인해 사마리아는 혼혈 민족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이런 사마리아인들을 적대시하며 상종하려고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