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서 각자 근본의 문제가 무엇인지 발견하고 깨달을 수 있도록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첫 번째로, “혹시 살인하고 있지 않으십니까?” 하고 질문을 드렸습니다. 이를 통해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살인할 마음이 있지 않은지 점검해 보았지요. 육의 생명을 해치는 살인도 살인이지만 영적으로는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도 살인입니다(요일 3:15).
이 살인하는 마음만 버려도 많은 담이 헐리지요. 그동안 미움에서 파생된 시기, 질투, 판단, 정죄, 혈기, 다툼으로 쌓았던 담도 함께 헐리기 때문입니다. 마치 굵은 뿌리를 뽑으면 그것에 달린 잔뿌리도 함께 뽑히는 것과 같습니다.
살인하는 마음이 없어지면 온유한 사람, 화평하게 하는 사람, 섬기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니 응답받지 못하던 많은 기도 제목을 응답받을 수 있지요.
그러면 근본 문제를 발견할 수 있도록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1. 혹여 배우자 이외의 이성을 볼 때 간음의 마음이나 음욕이 일어나지는 않습니까?
사랑하는 아내, 혹은 남편이 있는데 왜 다른 이성을 보고 이런 마음을 품어야 할까요? 아직 미혼인 경우도 내가 사랑하는 대상도, 결혼할 상대도 아닌데 그를 보고 정욕이 인다면 이후에 결혼할 상대에게 얼마나 미안한 일입니까?
출애굽기 20장 14절에 “간음하지 말지니라” 말씀했습니다. 이는 십계명 중에 일곱 번째 계명이지요. 데살로니가전서 4장 3~5절에는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에게 거룩함을 거듭 강조하십니다. 그러니 간음, 음욕, 이런 정욕을 다 벗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하지요.
하나님께서는 이런 죄의 속성을 행위로 나타내지 않는다 해도 이런 것을 마음에 품는 것조차 싫어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28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말씀했지요.
이는 갓 주님을 영접하고 말씀대로 살기 위해 힘쓰는 초신자의 경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많이 들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이런 마음을 품는 것이 얼마나 합당치 않은 줄을 알고 신앙의 연륜, 직분과 사명도 있습니다. 믿음이 있다 하고 하나님을 사랑한다 고백하지요. 그러면서도 여전히 이런 정욕 된 마음을 버리지 않는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죄를 계속 가지고 있는 마음, 버리기 싫어하는 마음 이것이 바로 근본의 문제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마음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담이 쌓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담이 더 높아져 응답을 가로막습니다.
물론 세상의 많은 사람은 어떻게 생각으로 오는 것까지 물리칠 수 있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자기 남편, 아내 한 사람밖에 모르면 “고리타분하다. 어리석다.” 말하는 이들도 있지요. 디모데후서 3장 4절 후반 절에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한 대로 많은 사람이 쾌락을 좇아 정욕을 위해 살아갑니다. 점점 사람의 형상을 잃어가고 있지요. 우리 눈에 보이고 들리는 세상 문화 자체가 정욕 적이고 퇴폐적이니 유혹의 요소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을 이기고 세상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마음에 떠오르는 비진리의 생각까지 벗어 버려야 하지요. 정욕을 제어하지 못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사랑하는 아내, 남편과의 신의를 저버린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반면에 주 안에서 남편과 아내를 마음으로도 온전히 사랑하여 서로 신뢰할 수 있다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또한 마음에 정욕이 없다면 자기와의 싸움이 없으니 참으로 평안하지요. 하나님께 민망할 일이 없으니 늘 담대히 기도할 수가 있습니다.
가정을 이루지 않고 홀로 달려가시는 분들도 신랑 되신 주님 앞에 신부로 설 때까지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지킨다면 얼마나 복됩니까? 아버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천국에서나 이 땅에서나 높여주시지요. 그러므로 이런 간음의 마음, 음욕의 마음이 있다면 온전히 뽑힐 때까지 불같이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죄든 그 죄가 마음에서부터 싫어져야 벗어 버릴 수가 있습니다. 기도해 성령 충만을 입으면 간음, 음욕 이런 마음이 얼마나 추하고 더러운지 깨달아집니다. 내 안에 이런 마음이 있는 것이 싫어지지요.
그런데 이런 간음의 분야가 특히 잘 안 버려지는 분들은 자신의 근본 마음을 발견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예를 들어 만약 성장 과정에서 성에 대해 왜곡된 생각이나 지식이 입력되었다면 그런 것을 빼내고 느낌도 바꿔야 합니다. 혹은 그동안 그릇된 가치관이나 생활방식 때문에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는 오직 진리의 잣대로 모든 것을 바라보면 됩니다.
‘나는 간음의 마음이 없다.’ 하시는 분들도 마음을 철저히 분석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깊이 들어가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런 마음이 자리 잡은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동성 친구보다 이성 친구가 더 편하고 좋다거나 이성을 대할 때와 동성을 대할 때의 말투, 행동, 표정이 다른 경우도 있지요.
물론 이 차이가 백 퍼센트 정욕에서 비롯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자신도 모르게 세상 문화에 젖어서 이성을 좋아하는 마음을 자연스럽게 여기거나 경계하지 않는 경우도 있음을 알아야 하지요.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죄를 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혹여 여러분 안에 도적의 마음이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도적질하지 말지니라”(출 20:15) 말씀하십니다. 십계명 중 여덟 번째 계명이지요. 도적의 마음이란 남의 것을 탐내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의 저변에는 내가 수고하지 않고 취하려는 욕심이 자리하고 있지요. ‘나에게는 도적질할 마음이 없는데.’ 확신하는 분들도 한번 깊은 마음까지 점검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예를 들어 저는 믿음의 형제끼리 돈거래를 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개척 때부터 지금까지 거듭 강조해 왔습니다. 그런데도 불순종해서 가정, 사업 터에 경제적인 어려움을 당한 성도들이 종종 나오지 않습니까? 잠언 11장 15절에 “타인을 위하여 보증이 되는 자는 손해를 당하여도 보증이 되기를 싫어하는 자는 평안하니라” 말씀한 대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평안할 텐데 불순종함으로 고난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알면서도 불순종할까요? 많은 수익을 올려 교회의 힘이 되자는 미혹에 넘어가는 분들도 있습니다. 진정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말씀에 순종할 것입니다. 결국 깊은 마음을 점검해 보면 수고 없이 많은 이득을 취하려는 욕심이 작용하므로 불순종한 것이지요. 처음에는 교회의 힘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진실했다고 해도 이익 앞에서 그 마음이 변질한 것입니다.
또한 사업하는 경우, 축복받으려면 반드시 정도를 걸어야 함을 말씀드렸습니다. 법을 어기고 불의를 행하면서 어떻게 하나님께 축복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마음 또한 도적의 마음이지요.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아주 작은 일이라도 간과하지 않는 여러분이 되시기 를 바랍니다. 볼펜 한 자루, 종이 한 장 등 아무리 작은 물건이라도 허락 없이 남의 것을 취하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마음에 감각이 없다면 그 자체가 바로 도적의 마음이지요. 더구나 하나님의 것을 함부로 취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대도적’의 마음입니다.
이제 이런 마음의 뿌리를 찾아서 남김없이 온전히 뽑아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아무리 물질적으로 어려운 환경에 처해도, 어떤 미혹을 받아도 결코 불의한 행동이 나오지 않습니다. 참믿음과 신뢰를 찾아보기 어려운 이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믿고 맡기실 수 있는 선한 청지기가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살인, 간음, 도적의 마음만 벗어도 참으로 많은 담이 헐립니다. 담대히 “하나님 사랑합니다.” 고백할 수 있고 “응답해 주세요.” 기도하면 기꺼이 응답해 주시지요. 그러나 여전히 이런 비진리의 마음들을 갖고 있으면 미혹이 올 때 큰 죄로 나올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안심하실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오랜 죄악의 담들을 다 헐고 마음에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우시기를 바랍니다. 다음 시간에도 이어서 근본 문제를 발견하도록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창세기 3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 단을 쌓으라 명하십니다. 벧엘은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달아날 때 돌을 베고 자다가 꿈에 하나님을 뵌 곳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첫 언약을 세우셨지요.
야곱에게 이 땅, 곧 가나안 땅을 주시고 티끌같이 많은 자손을 주시리라 약속하십니다. 야곱은 베개 삼았던 돌을 기둥으로 세워 기름을 붓고 하나님 앞에 서원하지요. 평안히 자신이 아비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라 고백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명에 따라, 또 자신의 서원을 이행하기 위해 벧엘로 갑니다. 이제는 혈혈단신이 아니라 밧단아람에서 생긴 가족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과 함께 가지요. 이때, 출발하기에 앞서서 야곱은 함께한 모든 사람에게 한 가지를 명합니다. 창세기 35장 2절 후반 절에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하지요. 그들은 순종했고 야곱에게 이방 신상과 귀고리를 내어줍니다. 야곱은 이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묻습니다.
이렇게 정결 의식을 행하자 하나님께서는 야곱 일행이 벧엘까지 형통하게 가서 하나님의 명을 이행하도록 지켜주십니다. 벧엘에 도착해서 야곱이 단을 쌓자 하나님께서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시지요. 그리고 처음 벧엘에서 주신 모든 언약을 상기시키시고 다시 한번 굳게 언약하십니다.
이제 우리도 정결 의식을 행하고, 곧 근본의 문제를 해결하고 거룩한 마음의 성전을 이뤄 더 아름다운 예배를 드릴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만민의 이름으로 부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단순히 개인적인 축복만 주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대성전, 세계 선교, 민족 복음화를 이룰 일꾼으로 사용하려는 계획을 갖고 계시지요. 이 모든 사역을 창대하게 이룬 후에는 영광의 성 새 예루살렘을 얻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혹여 더디 변하는 자기 모습에 낙심하여 이 언약을 잊지는 않으셨습니까? 여러분이 이번 기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들을 상수리나무 아래에 미련 없이 묻어 보십시오. 상수리나무는 영적으로 믿음을 상징합니다. 곧 믿음으로, 기쁨으로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약속, 대성전과 새 예루살렘 언약을 다시 한번 굳게 하실 것입니다. 다 이루기까지 형통케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돌을 베고 자던 야곱과 같은 모습일 때 우리를 만나 주시고 오늘까지 인도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와의 언약을 절대 잊지 않으시는 아버지 하나님, 이런 신실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굳게 믿음으로 새 예루살렘에 이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2-12-21 오전 10:19:13 Posted
2022-12-23 오전 10:53:25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