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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 예배

제목
순전 (2)  [마 12:19-21]
설교자
당회장 이수진 목사
등록일
2024.06.30
지난 시간에 이어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순전하신 예수님의 모습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순전’이란 ‘순수하고 완전함’을 뜻하며, 깨끗한 마음 그릇에 영의 열매가 가득 담겨 있는 상태와 같다 했습니다. 이러한 순전을 이루기 원하는 성도라면 먼저 입술의 말을 살펴봐야 합니다. 마태복음 12장 35절에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말씀한 대로, 특히 말속에는 사람의 선과 악이 담겨 있습니다.
만약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고 판단 정죄하며 수군거린다면 이는 자기가 얼마나 악한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마음에 미움이 있으면 말속에도 담겨 나오지요. 좋은 사이였을 때는 덮어준 허물과 잘못이 사이가 멀어지고 싫어지면 들춰내어 전하므로 나쁜 사람으로 만듭니다. 쌓은 교양으로 나쁜 감정을 절제하여 드러내지 않는다 해도 말속에 가시가 담긴 것을 느낄 수 있지요.
반면에 순전한 사람은 그 말과 행실이 온전하며 아름답습니다. 어떤 사람도 품을 수 있는 온유한 마음에서 모든 사람에게 덕이 되는 말과 행실이 나옵니다. 오해하여 따져 묻는 사람에게도 화를 내거나 싫어하지 않으니,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일 수 있고 선과 사랑으로 오해를 풀 수도 있지요.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희생적인 사랑과 긍휼, 자비, 양선, 오래 참음과 절제 등 영의 열매가 마음 안에 풍성히 맺혀 있으니 그 말과 행실에서 순전한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깁니다. 이는 죽어가는 영혼들을 생명에 이르게 하는 향기가 될 수 있습니다.


셋째,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고우신 성품이 겉으로 나타난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걸음걸이나 몸가짐, 언어 습관에서도 얼마나 흠이 없고 온전하셨는지를 나타내지요. 달리 표현하면 참으로 교양 있으셨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주의 교양을 이루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6장 4절에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했습니다. 아이들이 부모가 원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짜증스럽게 지적할 것이 아니라 먼저 부모가 주의 교양으로 행하며 본이 되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자녀는 부모가 하는 행동을 그대로 배워 행합니다. 혈기가 많아서 식사하거나 대화하다가도 화를 내는 아버지를 보고 자란 아들은 짜증이 많고 다혈질로 성장하여 사춘기가 되고 청년이 되면 그 혈기와 폭력을 부모에게 나타내기도 합니다. 이는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지 않은 부모의 책임입니다. 이때 세상에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 포기하는 경우가 많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가 있습니다. 먼저 부모가 하나님 앞에 철저히 회개하고 변화되면서 자녀를 위해 기도한다면 하나님, 성령님께서 그 마음을 역사하십니다. 또한 가정이 빛이 되니 어둠이 떠나 자녀도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배우자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가 변화되어 선과 사랑으로 남편을 섬겼다면 남편도 구원받고 영육 간에 행복한 가족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말씀은 들었어도 지켜 행하지 않아 주의 교양으로 채우지 못했다면 여전히 짜증 내고 서운해하니 남편에게 전도해도 남편의 마음이 열리지 않지요.
남편도 아내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여 덕과 사랑으로 섬긴다면 아내와 자녀들이 존경하며 중심에서 아빠의 말에 순종하므로 가정의 복음화는 물론 행복한 가정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변화된 모습 없이 명령하고 지적하며 혈기 내는 남편이요, 아빠라면 아무리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말한다 해도 가족이 들으려 하지 않지요. 바로 평상시 나의 말과 행동으로 가족의 행복도, 기도의 응답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교양이 있다고 해서 다 영으로 들어간 것은 아니지만 영으로 들어갈수록 반드시 교양 있는 언행이 나옵니다. 사람의 걸음걸이나 몸가짐, 말에는 그 사람의 마음과 성품이 배어져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에 선과 사랑이 가득하면 상대를 섬기며 배려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내 유익을 구해 남에게 피해를 준다면 마음이 편치 않지요. 섬김받는 것보다 섬기는 것이 편하기에 당연히 섬깁니다. 그런데 혹여 섬길 만한 사람은 섬기고 섬길 만한 모습이 없다 하며 상대를 섬기지 않는다면 이는 선도 아니고 진리도 아닙니다. 주의 교양도 없는 것이지요. 마음이 변화되면 행함도 따라오는 것이 곧 주의 교양입니다.
주의 교양은 육적인 에티켓이 아니라 주님을 닮고 영, 온 영으로 들어가는 길임을 알아 결여되고 부족한 것은 신속히 고치시기를 바랍니다. 몇 가지 고쳐야 할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성격이 급한 사람은 대체로 걸음걸이나 말과 행동이 빠릅니다. 남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성급히 판단해 답하기도 하고 남의 말을 중간에 끊는 무례함도 나오지요. 급히 행동하다가 넘어지거나 물건을 떨어뜨리기도 합니다. 식사하면서 음식을 입에 담고 말하니 음식물이 튀어나오기도 하지요. 걸을 때 몸을 흔들며 걷는 사람도 있고 앉아 있을 때 삐딱하게 앉거나 다리를 떨고 손도 가만히 두지 않으며 부산하게 움직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외모도 반듯하고 행동하는 것도 교양 있어 보이는데 막상 대화해 보면 실망스러운 경우가 있습니다.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인격이 좋지 않음을 알게 되어서이지요. 대화 가운데 남을 은근히 험담하거나 다른 사람의 잘못을 전한다면 그 사람과는 가까이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처럼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 사람의 마음과 직결됩니다(약 1:26, 3:2).
우리 성도님들은 성결을 사모하니 입술을 주의하겠지만, 꼭 비진리의 말이 아니라 해도 불필요한 말을 많이 한다거나 어떤 상황에서 깊이 생각지 않고 즉흥적으로 말을 내는 것도 고쳐야 합니다. 말의 내용뿐만 아니라 말하는 모습도 잘 살펴 순전한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하지요.
상대방을 손으로 치면서 말하거나 삿대질은 불쾌감을 줄 수 있습니다. 입에 음식물을 머금고 말하거나 침을 튀기면서 말하는 것, 공공장소에서 크게 웃거나 큰 소리로 말하는 것 등도 순전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지요. 또 얼굴에 미소를 거의 띠지 않고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하는 사람도 봅니다. 기분이 나쁘거나 상대가 싫어서 그런 것이 아닌데 무표정한 표정과 불친절한 말투가 몸에 배어 있는 것이지요. 또 다른 사람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 얘기만 길게 하거나 식사 자리나 모임에서 휴대폰을 보고 있는 경우도 무례히 행하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말씀들을 들으며 혹시 ‘고쳐야 할 것도 많고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생각하며 내 모습을 살펴야 하나?’ 생각되십니까? ‘순전하신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말씀하시고 행동하셨을까?’를 항상 생각한다면 내주하신 성령님으로부터 답을 얻게 될 것입니다. 또 여러분 삶에서 나를 바라보시는 아버지 하나님과 주님을 항상 생각하고, 나를 지키고 응원하는 천사를 생각하면 행동도 더 반듯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주의 교양으로 대화함으로 선한 향을 발하고 은혜를 끼치며 덕을 세우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골 4:6 ; 엡 4:29).


넷째,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24절에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했습니다. 우리 육의 인생의 모습을 풀에 비유하여 말씀한 대로 본문의 ‘갈대’도 사람을 의미합니다.
특별히 ‘상한 갈대’는 영적으로 ‘악한 세상에서 세파에 시달리고, 마음의 상처를 받아 심령이 상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풀은 영혼이 없기에 말라 죽으면 그만이지만 사람은 영원불멸의 영을 부여받은 존재이므로 육의 수명이 끝나면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됩니다(히 9:27).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영원한 천국에서 영생 복락을 누리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 던져져서 세세토록 고통받지요. 이 땅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다 해도 죽은 후에 지옥 불에서 고통받게 된다면 그는 차라리 죽으면 그만인 풀보다 더 못하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될 뿐이지요(마 6:29).
또한 들풀도 아끼시는 하나님께서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들이 죄에 물들어 그 형상을 잃어버리고 원수 마귀 사단에게 찢기고 상했다고 해서 어찌 단번에 버리시겠습니까?(마 6:30) 아무리 불의가 가득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회개할 수 있는 양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끝까지 버리지 않으시지요.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이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하지만 오래 참으신다고 해서 심판이 없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분명 하나님의 심판은 엄중히 임합니다.
다음으로 ‘꺼져가는 심지’란 무엇일까요? ‘심지’는 양초나 등잔, 석유난로에서 실이나 헝겊을 꼬아서 꽂고 불을 붙이는 부분입니다. 심지가 꺼져간다면 불이 꺼져간다는 뜻으로, 꺼져가고 있지만 아직 불씨는 남은 상태이지요.
여기서 심지도 인생의 영혼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는 우리 영혼의 생명을 등불에 비유한 것을 볼 수 있지요(잠 13:9). ‘꺼져가는 심지’ 또한 구원의 빛이 꺼져가는 인생의 모습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신다’는 것은 악한 세상에 마음이 물든 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다시금 불을 피울 수 있는 조그만 불씨만 남아 있다면, 즉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할 수 있는 양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 심지를 끄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신다’ 했습니다. 이 ‘심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먼저는 인간 경작이 마친 후에 임하는 심판으로, 모든 사람은 이 땅에서 행한 대로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심판에서 한 사람도 멸망치 않기를 원하시지요(요 3:17~18).
물론 모든 사람은 장차 백보좌 대심판 때 최종 심판을 받게 되지만 이 땅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로 이미 심판이 이뤄진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받으면 죽었던 영이 살아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므로 영생이라는 복이 이미 주어지지요. 하지만 주님을 영접하지 않은 사람은 죄의 종으로 살다가 이 땅의 생명이 다하면 결국 지옥으로 떨어지니 주를 믿지 않은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영접한 성도들이라 해도 구원의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을 영접할 때 성령을 보내주시어 온전한 구원과 참 자녀로 나올 수 있게 도와주십니다. 성령께서는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내주하셔서 그 영혼이 천국에 안전하게 이를 때까지 늘 깨우쳐 주시고 주관하시므로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연약함을 도와주시는 역할을 하시지요(요 16:8). 이처럼 아버지 하나님과 주님께서 자녀 된 우리를 끝까지 책임져 주시는 사랑을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로 표현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크고 넓으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받고 기회를 얻어 아름다운 천국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때로 변개하고 넘어지며 지칠 때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힘 주시며 기도해 주셨지요. 그 사랑을 받은 우리는 이제 내 주변과 이웃, 나아가 세상에 이 사랑을 힘써 전해야겠습니다.
또한 여러분이 주님의 순전하심을 닮아 찢기고 상한 영혼들을 주님께로 인도하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과 주님의 뜻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닮은 여러분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며 하늘의 영광중에 여러분을 이끄시기를 순전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4-06-27 오후 1:23:16 Posted
2024-07-05 오전 11:09:59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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