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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 예배

제목
순전 (3)  [마 12:19-21]
설교자
당회장 이수진 목사
등록일
2024.07.14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시는 예수님의 순전함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구원받은 성도에게 성령을 선물로 보내시어 진리 가운데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았다 해도 심히 죄를 범하면 회개의 영이 오지 않아 결국 소멸해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몇 번 죄를 지었다고 소멸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하신 사함 받지 못할 죄를 짐짓 행하며, 회개한다고 하고 또 죄를 짓고 성령의 음성도 무시하며 계속해 하나님을 속이니 결국 성령께서도 완전히 떠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완전히 성령이 소멸한 것이 아니라 불씨처럼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회개하고 소생하여 온전한 구원에 이르기까지 붙드시고 무수히 기회를 주시지요. 이것이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라는 말씀에 담겨 있는 의미입니다. 이뿐 아니라 주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무리 죄악 가운데 살며 하나님을 대적한다 해도 예수님께서는 그가 마음을 열도록 계속해서 마음 문을 두드리신다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을 받음으로 죄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서 하늘나라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될 때까지 계속해 마음 문을 두드리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으로 구원받은 우리도 전도할 때 포기하거나 지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하며 그들이 마음 문을 열 수 있도록 도와주며, 성령의 인도를 받아 지혜의 말로 전한다면 가장 합당한 때 여러분의 손을 잡을 것입니다.


1.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신 예수님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의 수가라는 동네 우물가에서 한 여인을 만나십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과 상종하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는 상처 입고 힘든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명을 주셨지요.
이 여인은 다섯 남편이 있었으나 당시 함께 사는 남자도 자기 남편이 아니라 생각할 정도로 참 평안과 쉼을 얻지 못했습니다. 누가 알려 주지 않았음에도 예수님께서는 이미 여인의 과거와 현재를 다 아셨지요. 여러 남자에게 배신당하고 버림받으며 갖은 풍파를 겪었으나 지금도 행복하지 못한 것을 아셨습니다. 사실 현실적으로 보면 이 여인의 삶은 참으로 기구하다 할 만큼 힘들고 거친 삶이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판단하고 수군거리며 손가락질할 수 있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죄악 된 세상에 살면서 마음이 찢기고 상한 것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상처 난 마음을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세상에서 믿고 의지할 사람 하나 만나지 못해 늘 사랑에 주리고 갈급한 심령에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영생수를 부어 주셨지요. 그로 인해 영원히 변함없는 진실한 사랑을 주시는 영적인 신랑, 곧 구세주를 믿고 영접할 수 있는 축복의 길로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도 그리하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사람들은 마리아를 죄인이라 판단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를 물리치거나 싫어하지 않으셨고 오직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지요. 마리아는 그 사랑으로 치료받고 새 생명을 얻으므로 예수님의 죽음의 자리까지 붙좇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9장에는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의 집에서 식사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압제하에 있었고 세금을 거둬들이는 세리들은 백성들로부터 많은 미움과 멸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설움도 쌓이고, 마음의 상처도 많이 있었지요. 때로는 상처 난 마음에 울분을 이기지 못해 백성들에게 더 강압적으로 세금을 거둬들이는 일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죄악 된 겉모습을 보고 멀리하신 것이 아니라 그러한 행동이 나올 수밖에 없는 찢기고 상처 난 마음을 이해해 주셨고 고쳐주길 원하셨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다른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나쁜 사람이라 수군거리는 사람들과 어울린다면 같이 정죄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사람의 겉모습을 보신 것이 아니라 그 중심을 보셨고 어찌하든 한 영혼이라도 구원에 이르게 하려 하셨지요. 상한 영혼, 찢기고 짓밟힌 영혼이라도 끝까지 구원해 주기를 원하셨지, 남의 비난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었기에 오직 선만 행하셨습니다. 바로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은 누구나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 원수 마귀 사단이 주관하는 이 세상에서 살면서 마음이 찢기고 상하며 죄악에 깊이 물들어 가는 것을 아셨습니다(시 51:5). 죄로 물들고 상처 난 마음에서 곱지 않고 거친 행동이 나오며 거짓된 말과 행동이 나올 수 있는 것을 이해하시고 긍휼히 여기셨지요.
대부분의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고 정죄하며, 싫어하고 멀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그 상처 난 마음을 고쳐주시기 위해 사랑으로 가까이해 주셨습니다. 죄인들을 정죄하려는 마음이 아니요, 어찌하든 그들을 살리시려는 마음이었기에 사회적으로 멸시받고 천대받는 사람들도 모두 예수님의 사랑 안에 깃들이려 했지요(마 9:10).
그런데 악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선과 사랑을 향해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비방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대놓고 찌르거나 그들과 다투지 않으셨고 진리로 깨우쳐 주셨습니다(마 9:12~13). 자신이 비방을 받으실지라도 죄인들에게 다가가기를 주저하지 않으셨고, 그들의 마음과 영혼을 고쳐주셨으며,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죄인들을 바라보기는 하지만 그들을 구원과 축복의 길로 인도하기는 주저하는 것을 봅니다. 늪에 빠진 사람에게 “거기 있으면 죽으니까 빨리 나오세요.”라고 말만 하는 것과 같지요. 어떤 경우는 상대의 손을 꽉 붙잡고 놓지 않다가 같이 빠져 죽을 위험한 상황도 도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상대를 사랑한다면 어찌하든 구하려 힘씁니다.
그런데 혹, 늪에 빠진 사람의 손을 잡아주면 그 오물이 내게 묻을까 봐 그저 말만 하고 있지 않았는지요? 내게 손해가 오는 것이 싫어서 죽어가는 영혼들을 보고도 모른 체 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는 거룩한 분이면서도 죄인들의 친구라는 비방을 두려워하지 않으셨고 그들을 구원과 영생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귀신을 물리쳐 주셨고, 병든 자들과 연약한 자들은 강건케 해 주셨지요. 악으로 나오는 사람에게는 다투지 않으시고 진리로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세리 마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죄인이라 오해받은 막달라 마리아는 몸과 영혼이 온전케 되어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며 붙좇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순전하신 예수님을 통해 어둠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아무 소망 없이 살아가던 많은 사람이 구원의 밝은 빛을 보고 산 소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순전하신 예수님께서는 오직 선과 사랑으로 영혼들을 대하셨는데도 예수님을 미워하여 대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의 대제사장과 제사장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지요. 그들은 참 빛 되신 예수님의 나타나심으로 자신들의 악함이 드러나자, 이것을 견디지 못해서 더욱 악을 발했습니다. 어찌하면 예수님을 잡아 죽일까를 궁리했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지요.
이것은 마치 꺼져가는 심지로, 불이 약하여 기름을 완전히 연소시키지 못하니 매캐하고 검은 연기를 내어 주변을 해롭게 하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보통 이런 경우, 더 이상 검은 연기가 나지 않도록 심지의 불을 아예 꺼 버리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자기 악으로 인해 스스로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사람들이 악을 발하여 예수님께 해를 가해도 절대 저주하지 않으셨고, 그들이 멸망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들이 죄에서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도록 말씀으로 가르치실 뿐이었고, 피해야 할 때는 피하셨습니다.
가룟 유다가 자신을 배반하고 팔아넘기려는 마음을 가진 것을 아시면서도 끝까지 버리지 않고 다른 제자들과 동일하게 품어 주셨던 것도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가룟 유다에게 그 마음에 품은 죄악을 지적하고 책망하셨다면 그는 더 악하게 나왔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선대 하셨기에 유다는 예수님 곁에 계속 머무를 수가 있었지요. 그렇다고 가룟 유다의 죄를 모르는 체하신 것이 아니라 때가 이를 때까지 기다리셨고, 어찌하든 돌이킬 수 있도록 깨우쳐 주시고 선하게 대하셨습니다(요 13:1 ; 마 26:24).
결국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에 의해 팔려 십자가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셔야 했지만, 그 길은 결국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섭리를 이루는 길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사실은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사람이 구원의 빛을 보고 영생에 이를 뿐만 아니라 복된 삶을 살 수 있도록 온전한 희생으로 단번에 그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러한 원대한 뜻, 하나님의 비밀 된 섭리가 있었기에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난과 고통도 선과 사랑으로 견디셨습니다.


2. 순전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

육으로 볼 때는 도무지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여러분 편에서 먼저 안 된다며 포기하지 마시고 어찌하든 구원으로 인도하시길 바랍니다. 선을 베풀어도 오히려 악을 발하는 사람이 있다면 악은 싫고 밉더라도 그 영혼은 불쌍히 여김으로 여러분이 먼저 그 심지를 끄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신앙 안에서도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영혼들이 있습니다. 믿음이 연약하여 시험 환란에 넘어져서 혼자서는 교회에 나올 영적인 힘이 없는 영혼들도 있습니다(롬 14:1). 또는 아직 버리지 못한 악으로 인해 성도들을 어렵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악을 행하고 교회를 떠났다가 이후에 잘못한 것을 알아도 민망하고 부끄러워 다시 나오지 못하는 영혼들도 있지요.
신앙 안에서 먼저 되었으나 지금은 영적으로 나중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중에는 자신도 사랑받고 인정받기 위해 몸부림치는데, 때로는 뒤처진 것이 속상하므로 악을 발하거나 앞선 사람들을 시기하여 그들에 대해 험담하기도 합니다. 바로 꺼져가는 심지가 나쁜 연기를 피우는 것과 같은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지요. 이때 정녕 앞서가는 사람이라면 뒤처진 사람들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마음을 헤아려서 품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또 흑백을 가리거나 옳고 그름을 논하여 상대를 꺾으려는 것도 순전한 마음이 아닙니다. 오히려 꺼져가는 심지를 불어 꺼 버리는 경우가 되는 것이지요.
진실과 사랑으로 대함으로써 악으로 나오는 사람들의 마음마저 녹이고 감동을 주는 것이 순전한 마음입니다. 깨끗한 마음 그릇 안에 양선과 사랑이 가득하여 어느 때 누구를 대하든지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므로 그리스도의 진한 향을 발할 수 있어야 순전하다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태복음 12장 21절에 “또한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말씀한 것처럼 순전하신 주님의 이름은 오늘날까지 믿는 모든 사람의 찬송이 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존귀한 이름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진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여 세상에 있는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이 죽어가는 많은 영혼을 구원과 축복의 길로 인도해 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칭찬과 명예와 영광으로 그 지으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며, 새 예루살렘 성의 성민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신 26:19). 주님의 순전하심을 닮아 그 영광중에 함께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4-07-11 오후 10:03:38 Posted
2024-07-19 오후 2:34:20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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