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응답서비스

강해 설교

제목
창세기 강해(27)  [창 1:6-8]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10.03.19
창세기 강해 스물일곱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창조 둘째 날에 육의 세계와 영의 세계에서 일어난 일을 말씀드렸습니다. 육의 세계에서는 대기권이 만들어졌으며 궁창 아래의 물은 바다의 근원이 되었고, 궁창 위의 물은 공기 중의 수증기가 됐지요.
궁창 위와 아래의 물은 넷째 날 태양이 창조된 후부터 순환하기 시작했습니다. 즉 바닷물은 태양열에 의해 수증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서 구름이 됩니다. 구름은 곳곳으로 흘러가서 비나 눈을 내리지요. 수증기가 비가 되어 내리려면 물방울의 직경이 0.2밀리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이보다 작은 물방울은 떨어지는 동안 증발해 버리기 때문에 비가 될 수가 없습니다. 물방울의 직경이 가장 작은 비는 이슬비이지요. 만일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면 비가 아닌 눈이 되어 내립니다.

성도님들은 혹시 눈을 자세히 들여다 본 적이 있으십니까?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창조주 하나님의 솜씨에 놀라게 됩니다. 현재 지구상에는 약 68억 명의 사람이 사는데 모두 얼굴이 다르듯이 눈의 결정도 모두 모양이 다릅니다. 모양이 모두 제각각이면서도 신기하게 기본적인 형태는 거의 육각형이지요.
아무리 능력이 뛰어난 디자이너라 해도 단 한 가지 소재를 가지고 이처럼 다양하고 아름답게 디자인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많은 연구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왜 눈 결정이 이처럼 육각형인지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결정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요하네스 케플러란 과학자가 다만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지요. 모양을 만드는 힘이 얼음 속에 있어서 그것이 육각형을 형성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모양을 만드는 힘이 무엇인지 그 과학자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우리는 압니다. 바로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지요.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물에 깃들어 있어 구름 속의 물방울이 눈이 되어 내릴 때에 육각형의 결정이 되게 한 것입니다. 그 무수한 눈의 결정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에 의해 그런 모양으로 디자인됐다는 말이지요.
욥기 38장 2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욥에게 "네가 눈 곳간에 들어갔었느냐 우박 창고를 보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물론 눈 곳간이나 우박 창고가 하늘 어딘가에 있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눈과 우박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깨닫게 해 주지요.

제가 이 눈의 결정체를 보고 왜 아버지 하나님께서 육각형으로 만드셨는지 궁금하여 기도했습니다. 이에 아버지 하나님께서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는데 그 내용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천하 만물을 만드실 때에 하나하나를 귀히 여기셔서 특색대로 각각에게 의미를 담아 주셨습니다. 전능자의 솜씨임을 알 수 있도록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깃들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과 뜻도 담아 주셨지요.

예를 들어 새를 지으실 때는 찬양을 즐거워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담아 주셨습니다. 대부분의 새소리는 밝고 맑은 느낌이지요. 그래서 새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상쾌해집니다. 그렇습니다.
목소리가 곱고 노래를 잘하는 사람을 보면 "목소리가 꾀꼬리 같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아름다운 새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듯이 하나님께서는 찬양 듣기를 즐거워하시지요. 더구나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찬양하면 그 소리를 참으로 기쁘게 들으십니다. 이러한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 인생들이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새를 지으실 때는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게 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새들에게 날개를 주신 이유도 있습니다. 인생들은 두 발을 땅에 딛고 살아가지만 새는 날개가 있기에 공중을 날 수 있지요.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이 공중을 나는 새를 볼 때 무엇을 깨닫기 원하셨을까요?
사람이 발을 딛고 살고 있는 이 땅, 이 육의 세계와는 차원이 다른 세계가 있음을 알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새 하나를 지으실 때에도 이처럼 인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담아 주셨던 것입니다.

다른 모든 피조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것에는 마음의 향을 받기 원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담아 주셨습니다. 또한 불같이 일어나는 하나님의 권능을 표현하신 것도 있고, 창조주가 한 분임을 표현하신 것도 있습니다.
이 땅의 사람들이 천국의 아름다움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도록 만드신 것도 있지요. 과연 어떤 피조물에 어떤 아버지의 마음과 뜻이 담겨 있는지를 숨은그림찾기 하듯이 하나씩 찾아내는 기쁨도 클 것입니다.

눈의 결정체를 모두 육각형으로 만드신 것에는 어떤 뜻이 담겨 있을까요?
먼저 숫자 6에는 영적으로 경작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인간 경작도 6천 년이고, 인간 경작을 위한 창조 역사도 6일 동안에 모두 이뤄졌지요. 또한 첫째 하늘인 이 육의 공간에서는 숫자 6이 완전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6천 년이면 인간 경작을 하기도 충분한 기간이고, 창조 역사도 6일 동안에 다 이뤄졌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측근의 천사장들에게 장차 베푸실 창조 역사에 대해 이런 저런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루시퍼도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이루실 창조역사에 대해서 많은 것을 들어 알고 있었지요. 그러나 루시퍼는 하나님의 창조 섭리 중에서 선과 진리와 빛의 분야를 자신의 마음에 담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에게 필요한 것만을 담았고 타락한 후에는 오히려 그러한 것들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방편으로 이용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원래 세우신 근본의 개념을 많은 분야에서 변질 시켰습니다.
예를 들어 음악과 춤을 두신 근본의 개념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함이지요. 그런데 루시퍼는 이 근본의 개념을 변질시켜서 사람들이 자신의 정욕을 충족시키는 데에 음악과 춤을 사용하도록 사주했습니다. 또한 사단을 숭배하는 데에도 사용하게 했지요. 루시퍼는 음악과 춤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분야에서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근본의 개념을 변질시켰지요.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숫자 6입니다. 루시퍼는 숫자 6을 사용하여 짐승의 수 666을 만들었습니다. 요한계시록 13장 18절에 보면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육십육이니라"
계시록강해에서 말씀드렸듯이 짐승의 수 666은 바코드에 찍힌 숫자입니다. 장차 7년 환난에 떨어진 사람들이 이 표를 이마나 손에 받으면 이삭줍기 구원의 기회마저 잡을 수 없게 되지요.
한마디로 짐승의 수 666은 구원과는 상관없는 영혼임을 낙인찍는 표시입니다. 루시퍼는 이처럼 숫자 6을 안 좋은 곳에 사용하여 그 근본의 개념을 변질 시켜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루시퍼가 변질시켰다 해도 아버지 하나님께서 세우신 근본의 개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요.

하나님께서 세우신 숫자 6의 본래의 개념은 경작한다는 의미라 했지요. 첫째 하늘인 이 육의 공간에서 숫자 6은 완전하다는 의미라 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루시퍼가 숫자 6의 개념을 변질시킬 것을 아셨지요. 그래서 숫자 7로써 온전함을 이루셨다 이 말입니다. 모든 창조 역사는 6일 동안 이루셨지만 하루를 더하여 7일째는 안식 하셨지요. 그래서 총 7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또한 인간 경작도 6천 년 동안 이루시지만 이후 이 땅에서 천년왕국이 이어집니다. 루시퍼와 악한 영들의 사주로 인해 황폐해진 이 땅을 완전히 회복시키시고 구원받은 영혼들이 천 년 동안 지내게 하시지요. 그래서 결과적으로 7천 년을 채우십니다.

이처럼 숫자 7은 영적인 개념에서 완전수입니다. 완전수 7과 관련된 영적인 개념의 예는 성경에서 많이 찾아 볼 수가 있지요. 그 중에서 몇 가지 예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하나님의 일곱 영을 들 수 있지요. 일곱 영은 일곱 가지 분야를 감찰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여기서 다섯 가지나 여섯 가지가 아니라 굳이 일곱 가지를 감찰하시는 것은 일곱이 영적인 완전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실 때에 결코 어떤 것을 못 보시거나 잘못 보시지 않고 완전히 정확하게 보심을 나타내지요.
레위기 4장에 보면 속죄제를 드릴 때 속죄 제물의 피를 반드시 일곱 번 뿌릴 것을 명하셨습니다. 일곱이 영적으로 완전수이기 때문에 일곱 번 뿌린다는 것은 죄를 완전히 털어낸다는 의미입니다.
열왕기하 5장에 엘리사가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을 고쳐줄 때도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 했지요. 열왕기하 5장 14절에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 했습니다. 열왕기상 18장에 엘리야 선지자가 3년 6개월의 가뭄을 끝내는 비의 응답을 받을 것도 일곱 번째로 확인했을 때였습니다.
창세기 33장에 야곱이 20년 만에 형 에서를 다시 만났을 때도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혔다 했지요. 형에게 완전히 굴복하겠다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18장 21절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하고 여쭸지요. 이에 예수님께서는 22절에 답하시기를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하셨습니다. 일흔 번 씩 일곱 번 용서하라는 이 말씀의 의미는 완전히 용서하라는 것이지요.

이처럼 숫자 7은 영적인 개념에서 완전함을 뜻합니다. 한편 숫자 6도 원래 개념은 육의 세계에서는 숫자 6이면 완전하다는 의미라 했지요. 이렇게 원래 하나님께서 숫자 6에 완전함이라는 개념을 담아 놓으셨음을 알 수 있는 몇몇 증거가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눈의 결정체가 모두 육각형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육의 세계에서는 면이나 부피나 높이에 있어서 육각형이 가장 안정적이고 균형적이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삼각형이나, 사각형이나, 오각형은 불안정하다 하셨지요.
흥미롭게도 사람의 몸에 가장 유익한 물의 분자 구조가 바로 육각형이라는 사실입니다. 육각형의 분자 구조를 가진 물을 6각수라고 하지요. 인체의 전체 중량 중 물은 60에서 80%를 차지합니다.
혈액이나 체액의 경우에는 90% 이상이 물이지요. 이처럼 인체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물의 약 62%가 6각수 구조를 이루고 있고, 24%가 5각수이며, 나머지 14%가 4각수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사람의 몸은 6각수를 좋아한다는 의미이지요. 인체를 구성하는 세포를 감싼 물이 6각수일 때 그 세포는 가장 정상적으로 활동을 합니다. 반면 6각 구조가 흐트러지면 세포의 기능에 이상이 생기지요. 실제로 암 세포와 당뇨병성 세포의 물을 조사한 결과 대부분 5각수였다고 합니다.

6각형이 가장 안정적임은 수학자들도 동의합니다. 수학에서 가장 완전한 도형은 육각형입니다. 수학적으로 둘레가 일정할 때 넓이가 최대인 도형은 원입니다. 그러나 원은 여러 개를 이어 붙일 때 틈새가 생겨서 평면을 덮을 수가 없습니다. 정다각형 중에서 오직 정삼각형, 정사각형, 정육각형만이 평면을 덮을 수가 있지요.
그런데 일정한 공간을 채우고자 할 때 정삼각형은 정육각형에 비해 훨씬 더 많은 개수가 필요합니다. 정사각형은 정육각형에 비해 구조가 튼튼하지 못하지요. 따라서 최소의 재료로 가장 튼튼한 최적의 공간을 만들려면 정육각형이 가장 적합합니다.

이 육의 공간에서 가장 완전한 수가 왜 숫자 6인지를 여기서도 알 수가 있지요. 본능적으로 이러한 원리를 이용하여 집을 짓는 동물이 있습니다. 바로 꿀벌입니다. 꿀벌이 만드는 벌집은 여러 개의 육각형이 맞물려 있는 형태이지요. 이 육각형인 벌집의 벽두께는 0.1밀리 정도라고 합니다. 이렇게 얇은 벽으로 지어진 벌집에는, 집 자체 중량의 약 30배에 달하는 꿀을 저장할 수 있다고 하지요.
벌집이 이렇게 얇으면서도 튼튼한 이유가 바로 육각형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적은 양의 재료로 가장 튼튼한 집을 지으려면 육각형 구조로 지어야 함을 벌들이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지요.

파퍼스라는 수학자의 수학집성이라는 책에 꿀벌의 집에 관한 이야기라는 대목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꿀벌은 천국으로부터 꿀이라는 신들의 음식 일부를 얻어서 인류에게 날라다 준다.
이처럼 귀한 꿀을 땅바닥이나 수목, 그 밖의 마시기 곤란한 곳에 함부로 부어넣는 것은 적당치 않다. 그래서 꿀벌들은 꿀을 붓기에 알맞은 그릇을 만들었다. 이 그릇은 불순물이 끼지 못하도록 서로 빈틈없이 연이어 있는 형태를 지녀야 한다. 그런데 동일한 점을 둘러싼 공간을 빈틈없이 채울 수 있는 도형은 정삼각형, 정사각형 그리고 정육각형의 세 가지 밖에는 없다.
꿀벌들은 본능적으로 최대의 각을 가진 정육각형을 택했고, 이 형태는 다른 두 도형보다 훨씬 많은 꿀을 채울 수가 있다"

성도 여러분! 벌들이 어떻게 이런 수학을 알았겠습니까! 육각형의 구조가 가장 안정적이고 꿀도 가장 많이 저장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하자고 회의를 했겠습니까? 아니지요. 벌이 본능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벌에게 그 능력을 주셨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벌집식 구조는 하니컴이라 불리며 여러 방면에 응용되고 있습니다. 최소한의 재료로 가장 가벼우면서도 튼튼하며 안정적인 구조물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제트기와 인공위성의 벽에도 응용이 되지요. 방음과 방열 효과도 뛰어나다고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장차 인생들의 지식이 발달하면 0, 1, 2, 3, 4, 5, 6, 7, 8, 9 이런 수의 개념을 갖게 될 줄 아셨습니다. 또한 과학 기술이 발달할수록 천하 만물에 숨겨두신 창조의 섭리들을 발견하고 깨닫기를 바라셨지요.
눈의 결정체가 육각형이라든지 몸에 좋은 물이 6각수라는 사실도 과학기술이 발달했기에 알게 된 내용들입니다.
이렇게 지식이 더할수록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깨달으려 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져야할 자세이지요. 눈(雪)의 결정체들을 보면서도 6일 창조역사와 6천 년의 인간 경작을 온전히 이루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떠올리며 영광과 찬송을 올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루시퍼는 반대로 역사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근본의 개념들을 많은 분야에서 변질시켰다 했지요. 사람들의 지식이 발달할수록 그 얄팍한 지식으로 하나님을 부인하고 대적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하나님의 창조라는 이 진리를 진화론으로 변질시키려 하지요. 진화론은 생물이 처음에 저절로 생겼고, 환경에 적응하면서 다양한 종(種)으로 진화했다는 이론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종류대로 창조됐음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이론이지요.
환경에 적응하는 종만이 살아남는다는 진화론의 이 근본개념은 생물학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분야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학, 철학 등 사회 전반에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갖게 했지요.

1900년대 이후 이 세상은 사랑이 더 식어지고 악에 악이 더해졌지요. 제 1차 세계 대전과 제 2차 세계 대전 등 세계적인 전쟁도 그 뿌리는 강한 자만이 살아 남는다는 진화론적인 사고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루시퍼가 얼마나 교묘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죄악에 물들게 하며 사망으로 이끌고 있는지 알 수가 있지요.
하나님의 창조를 믿으면 이러한 루시퍼의 교묘한 계략에 빠져 들지 않습니다. 풀 한 포기, 새 한 마리를 보아도 창조주 하나님께서 정성들여 만드셨음을 알기에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됩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을 생존경쟁에서 이겨야 할 대상이 아니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귀한 존재로 대할 수가 있습니다.

전도서 12장 13절에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사람이 지어진 근본의 개념을 알려 주지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도님들이 만물에 깃들인 창조의 섭리를 깨닫게 되면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에서 경외한다면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악을 행할 수가 없지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되 억지로가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서 지키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녀들에게 반드시 복을 주시겠다 약속하셨습니다. 바로 잠언 22장 4절에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하신 것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창세기 강해를 통해 더욱 중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셔서 예비 된 영광과 풍성한 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0-03-22 오후 9:07:26 Posted
2018-02-21 오후 2:44:51 Updated

다음 글 창세기 강해(28) 이전글
이전 글 창세기 강해(26) 다음글
이전 페이지 인쇄하기 글자크게 글자작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