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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 설교

제목
창세기 강해(33)  [창 1:6-8]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10.05.07
창세기 강해 서른세 번째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 둘째 날, 물 가운데 궁창이 있게 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육의 세계와 영의 세계에는 새로운 일들이 일어났지요. 육의 세계에서는 대기권이 만들어졌고, 영의 세계에 속한 둘째 하늘에는 빛의 영역과 어둠의 영역이 조성됐습니다. 육의 세계에서 궁창 아래의 물은 창조 셋째 날 바다가 되고, 궁창 위의 물은 대기권의 수증기로 남았지요.

창조 넷째 날 해와 달이 창조된 후부터는 물이 순환하기 시작합니다. 바닷물은 수증기로 올라가서 구름을 만들고 구름은 바람에 의해 세계 곳곳으로 이동하여 비를 내리지요. 이러한 물의 순환이 있기 때문에 모든 생물들이 물을 공급받아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물을 비뿐만 아니라 눈이나 이슬 등의 다양한 형태로 내리게 하시지요.
하늘에서 내리는 이 모든 것은 원래 "하나님의 은택(恩澤)"을 상징합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비롯한 모든 생물들에게 유익을 주시기 위해 물을 다양한 형태로 내리게 하신 것이지요.

신명기 11장 14절에도 "여호와께서 너희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시편 65편 10절에는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 주시나이다" 했지요. 하나님께서 이 지구를 창조하셨을 때는 자연 만물이 공의 가운데 순환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 유익을 구하기 위해 자연을 파괴하면서부터 자연계의 질서가 조금씩 무너졌지요.
그 결과, 비와 눈은 하나님의 은택의 수단으로 뿐만 아니라 재앙의 수단으로도 나타나게 됐습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연 질서 가운데에서는 비와 눈이 균형 있게 골고루 내렸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연 질서를 파괴하면서 불균형이 생기기 시작 했던 것입니다.
비나 눈이 너무 많이 오는 곳이 있는가 하면, 거의 오지 않는 곳도 많이 생겼지요. 곧, 폭우와 폭설과 가뭄과 홍수 등의 자연재해가 발생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연 질서를 아무리 파괴해도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이 땅의 근본 공의는 흔들리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십니다.
예를 들어 지난번 칠레의 지진으로 자전축이 조금 움직였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정도는 아주 미세했지요. 아무리 자연재해가 심해진다 해도 인간 경작 기간 동안은 지구가 버틸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마지막 때 자연재해가 심해질수록 반대로 하나님의 권능은 더욱 빛을 발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요.
예수님께서 바람과 파도를 다스리셨던 것처럼, 성령의 불같은 권능으로는 지진, 홍수, 화산 폭발도 제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들을 통해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크게 영광 받으시고 인간 경작을 마무리 지으시게 됩니다.

창조 둘째 날에 영의 세계에서는 둘째 하늘에 두 영역이 조성됐다 했습니다. 둘째 하늘에 있는 두 영역이란 빛의 영역과 어둠의 영역입니다.
빛의 영역 안의 에덴동산과 어둠의 영역은 서로 맞닿아 있음을 나타내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서로 맞닿아 있다는 것은 경계선을 중심으로 해서 한편은 어둠의 영역이요, 한편은 에덴동산이라는 의미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경계선이 되는 곳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창세기 3장 24절에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아담과 하와를)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했지요.
길목을 지킨다는 것은 그 길목에 침투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니, 분명 하나님께서 에덴동산 동편을 지키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에덴동산에 있는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지요. 이는 누군가가 생명나무를 노릴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3장 2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말씀했지요. 여기서 그란 바로 범죄한 아담을 가리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명을 어기는 불순종의 죄를 범했지요. 그 결과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영계의 법에 의해 영생할 수 없게 됐습니다.
생명나무 실과를 따 먹으면 영생할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에 오랫동안 살았던 아담은 이 사실을 알고 있기에 생명나무 과실을 따 먹을 수도 있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이 땅으로 내어 보내신 것입니다. 아담을 내어 보내신 후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생명나무의 길을 계속 지키게 하셨습니다. 이는 바로 악한 영들이 생명나무 실과를 따 먹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악한 영들도 둘째 하늘에 있고, 에덴동산도 둘째 하늘에 있다 했지요. 따라서 아담이 없는 에덴동산을 악한 영들이 침노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께서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생명나무의 길을 철저하게 지키게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둘째 하늘에 빛의 영역과 어둠의 영역이 서로 맞닿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창조 둘째 날 궁창을 만드실 때 영의 세계에서는 이처럼 빛의 영역에는 에덴동산이, 어둠의 영역에는 악한 영들의 처소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둘째 하늘에는 이런 공간들 외에 또 다른 한 공간이 만들어졌습니다. 바로 육의 세계인 첫째 하늘과 영의 세계와의 완충지대 역할을 하는 특별한 공간이 있는데, 이 공간도 이때 함께 만들어졌지요. 이 특별한 공간은 시간의 흐름이 정지됐고, 아무런 움직임도 없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존재들이 이 공간을 통해 육의 세계를 순간에 오고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특별한 성질을 가진 공간도 궁창에 있음을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창조 둘째 날에 궁창에 만드신 영의 공간은 크게 세 가지이지요. 바로 빛의 영역과 어둠의 영역, 그리고 시간의 흐름이 정지된 완충지대입니다.

본문 6절 전반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이처럼 물 가운데 궁창이 있게 하신 데에는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물은 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지요. 따라서 물 가운데 궁창이 있게 하신 것은 궁창의 모든 것이 결국 하나님의 권한 안에 있음을 나타냅니다. 궁창을 만드실 때 조성된 공간들 곧 첫째 하늘의 대기권과 둘째 하늘의 두 영역과 완충지대까지도 모두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영의 세계에서 궁창 위의 물은 어떤 공간으로 갔을까요?
바로 둘째 하늘에 있는 에덴동산의 강을 이루는 기초가 됩니다. 창세기 2장 11~14절에 보면, 에덴동산에 있는 네 개의 강이 나옵니다. 10절에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했습니다. 이는 네 강의 근원이 하나임을 말하지요. 바로 네 강의 근원을 이루는 물이 바로 본문에 나온 "궁창 위의 물"인 것입니다.
에덴에 있는 강의 크기는 이 땅에 있는 강과 비교가 안 됩니다. 에덴의 강은 폭도 이 땅의 강보다 훨씬 넓고, 길이도 훨씬 깁니다. 따라서 강물의 양도 당연히 더 많습니다. 에덴의 이 물들, 곧 궁창 위의 물은 원래 초기 지구를 덮고 있던 물이었지요. 그런데 물 가운데 궁창이 생기면서 궁창 위의 물과 아래 물로 나뉘었고, 궁창 위의 물이 에덴의 강을 이루는 근원이 된 것입니다. 궁창 아래의 물은 지구의 바다를 이뤘구요.

에덴의 물과 지구의 물은 그 근본이 같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천국에서 유입해 주신 생명수이지요. 그런데 지구의 물은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점차 오염되고 변질되었습니다. 아담이 범죄하여 지구로 쫓겨날 때 이 지구와 지구 위에 있는 모든 것도 함께 저주를 받았지요. 그때로부터 지구에 있는 모든 것이 점차 변질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에 사람들이 무분별한 개발을 함으로써 자연을 심하게 훼손 했고, 환경오염을 점차 가중시켰지요. 그 결과 자연계의 질서가 깨어졌고 기상이변과 자연재해가 빈번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에 지구를 아름답고 쾌적하게 만들어 주셨는데, 사람들이 자기 욕심과 악으로 인해 지구를 오염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지구와 달리, 에덴동산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처음 모습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맑고 깨끗하며, 아름답고 풍요로운 자연 환경이 처음에 조성되었던 상태대로 보존되어 있지요. 에덴의 강에 흐르는 물 역시 잘 보존되어서 맑고 깨끗하며 영롱한 빛이 납니다.
에덴의 물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 땅에 쏟아져 내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노아의 홍수이지요. 창세기 7장 강해 시 자세히 말씀드리겠지만, 노아의 홍수 때에는 40일 동안 비가 내려서 가장 높은 산까지 물에 잠겼습니다.
지구에 있는 모든 물로는, 설령 극지방의 빙하가 모두 녹는다 해도 가장 높은 산까지 잠기지는 않습니다. 지구상에 있는 물만으로는 지구를 완전히 덮을 수 없다는 말이지요.

노아 홍수 당시를 설명한 창세기 7장 11~12절을 보면,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했습니다.
여기서 큰 깊음의 샘들이란, 에덴에 있는 네 강의 발원지입니다. 그리고 하늘의 창들은 둘째 하늘과 통하는 문들이지요. 하나님께서는 홍수 심판 때, 에덴의 큰 깊음의 샘들을 터트리셨습니다. 그리고 둘째 하늘의 창을 여심으로 이 지구에 쏟아지게 하신 것입니다. 앞서 에덴의 강물의 양은 지구의 강물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다 했지요. 따라서 에덴의 강물이 지구로 흘러나온다면, 능히 지구를 덮을 수 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에덴의 강의 근원인 큰 깊음의 샘들까지 터트리셨지요. 그리고 첫째 하늘과 연결된 둘째 하늘의 문을 여심으로 에덴에 있던 물들이 이 땅에 비처럼 내리게 하신 것입니다.

하늘의 창들이라 하여 창이 복수로 표현되었습니다. 이는 당시 일정 지역의 하늘만 열린 것이 아님을 나타냅니다. 지구로 연결되는 둘째 하늘의 문이 다 열렸지요. 노아가 살던 지역뿐만 아니라 지구전체에 한꺼번에 둘째 하늘의 물이 쏟아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40일 만에 지구의 가장 높은 산까지 잠겼지요. 이렇게 홍수 심판 때 이 땅에 흘러 나왔던 에덴의 물은 홍수 심판 후에 다시 에덴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그 물을 에덴으로 끌어 올리셨는지에 대해서는 창세기 7장에서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시간 여러분이 기억하실 것은 창조 둘째 날 궁창 위의 물은 에덴의 강의 근원에 모아졌고 그 근원으로부터 네 강이 발원했다는 점이지요. 그리고 노아의 홍수 때에 하늘의 창들이 열려 지구에 쏟아진 물이 바로 그 사실을 증명한다는 점입니다.

둘째 하늘의 존재에 대한 또 다른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후 광야생활을 할 때 먹었던 만나입니다.
19세기의 어떤 식물학자는 이 만나에 대해 시나이 반도에 서식하는 식물이 진디에 의해 찔렸을 때 내는 수액이 굳은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시나이 반도나 중동 지역에서는 잔 나뭇가지에서 채취한 구슬모양의 열매를 천상의 양식이란 이름으로 판매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만나는 이 땅에 있는 어떤 식물의 열매가 아닙니다. 성경에는 분명 만나가 하늘에서 비같이 내렸다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16장 4절에,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하늘이란, 바로 둘째 하늘이지요. 시편 78편 23~24절에는 "그러나 저가 (즉 하나님께서) 오히려 위의 궁창을 명하시며 하늘 문을 여시고 저희에게 만나를 비같이 내려 먹이시며 하늘 양식으로 주셨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에 나온 위의 궁창도 둘째 하늘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만나가 둘째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 이슬이 내릴 때에 둘째 하늘 문을 열어 만나를 함께 내려 주셨지요. 해가 뜨고 이슬이 마른 후에 보면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은 만나가 있었습니다. 이 만나의 모양은 진주처럼 생겼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만나를 거두어서 맷돌이나 절구로 가루를 내어서 음식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출애굽기 16장 35절에 보니, "이스라엘 자손이 사람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되 곧 가나안 지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40년 동안이나 양식을 친히 공급해 주신 것입니다.

여호수아 5장 12절에 보면 "그 땅(곧 가나안 땅) 소산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해에 가나안 땅의 열매를 먹었더라" 했지요. 이것만 봐도 만나는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의 소산을 먹게 되자, 정확하게 그다음 날 부터는 만나가 내리지 않았지요. 그래서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중동지역을 여행하시다가 만나라고 팔고 있는 식물(食物)을 본다 해도 그것은 진짜 만나가 아님을 아시기 바랍니다. 만나는 하나님께서 둘째 하늘에서 내려 주셨고,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생활을 했던 40년 동안만 내렸습니다.
둘째 하늘에 있는 에덴동산은 영의 세계에 속하지만 온전한 영의 세계는 아닙니다. 육의 사람이 본다면 볼 수 있고, 만지고자 한다면 만져지는 영의 세계이지요. 그래서 만나가 둘째 하늘에서 내려온 식물임에도 육의 사람이 먹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시 동방박사들을 인도했던 별도 둘째 하늘의 별입니다. 마태복음 2장 9절에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쌔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했습니다. 하늘의 별이 동방박사들의 보조에 맞춰서 가다 서기를 반복했고,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는 멈춰 섰지요.
이 별이 만일 첫째 하늘의 별이라면 천체의 질서를 깨트림으로 인해 엄청난 문제가 발생했을 것입니다. 첫째 하늘의 별들은 설정된 경로대로 질서 있게 운행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당시 박사들을 인도한 별은 첫째 하늘의 별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둘째 하늘의 별을 움직이심으로 첫째 하늘에는 어떤 영향도 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별이 움직이는 둘째 하늘의 공간을 열어서 박사들의 눈에 보이게 하신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별의 이동을 우리에게도 수없이 보여주셨습니다.
나란히 동시에 이동하는 세 개의 별, 지그재그로 이동하는 별, 서로 역방향으로 이동하는 별 등 첫째 하늘에서는 있기 어려운 별의 이동을 우리에게 수차례 보여 주셨지요. 바로 그때 이동한 별들이 둘째 하늘의 별들입니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 둘째 하늘의 공간을 열어서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영의 공간을 느낄 수 있도록 이 밖에도 여러 기사와 표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를 들어 하늘의 일정한 고도에서 매우 맑고 깨끗한 구름이 나왔다가 휘감기듯이 다시 들어가는 장면도 보았지요. 그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누군가가 하늘 저편에서 하얀 연기를 내뿜었다가 다시 들이키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성경 곳곳에도 영의 세계로 통하는 일이 있을 때에 구름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세 명의 제자와 함께 변화산에 오르셨을 때이지요. 마태복음 17장 5절에 보면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실 때도 사도행전 1장 9절에,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했지요. 마가복음 13장 26절 등에 주님께서 공중강림하실 때에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했습니다.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께서 친히 강림하실 때는 항상 구름이 나타났음이 출애굽기 19장 9절 등에 나오지요.
이처럼 영의 세계로 통하는 문이 열릴 때에 구름이 함께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이 육의 하늘의 구름이 아닌 영의 세계의 구름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계가 다가 아니요, 영의 세계가 분명히 존재함을 우리로 깨닫게 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6일 창조 동안 5일은 그 만드신 것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나옵니다. 단, 창조 둘째 날만은 성경에 좋았더라는 표현이 안 나오지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둘째 날에 만들어진 궁창에는 악의 영들이 거하는 어둠의 영역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경작을 공의롭게 하시기 위해 루시퍼와 악한 영들의 처소를 둘째 하늘의 어둠의 영역에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어둠의 영역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을 리는 없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이 없는 것입니다.
혹시, 이런 생각이 드는 분이 계신가요? 창조 첫째 날에 악한 영들을 풀어 주셨고, 빛과 반대인 어둠이 있게 하셨는데, 왜 첫째 날에는 좋았더라 하셨을까?
여러분이 창조 첫째 날 부분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창조 셋째 날부터 여섯째 날에는 그날의 창조 역사를 모두 마치신 후에 좋았더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반면 첫째 날에는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말씀하지요. 그 후에 빛과 어둠을 나누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첫째 날에는 하나님께서 빛만을 보고 좋았더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하고 이유 없이 기록된 것이 하나도 없지요. 우리는 창조 첫째 날과 둘째 날의 역사만 보아도 하나님께서 얼마나 빛을 좋아하시고 어둠을 싫어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17절에는 이러한 하나님에 대해 빛들의 아버지라 표현하며,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했습니다. 여러분은 이처럼 빛 자체가 되시는 하나님의 자녀이지요. 그러므로 여러분의 마음에도 어둠은 조금도 없고 빛만 가득하도록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삶에 어둠의 영들은 결코 역사하지 못하며, 빛의 열매로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0-05-10 오후 9:49:05 Posted
2010-07-27 오전 10:25:20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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