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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 설교

제목
창세기 강해(39) 다섯째 날 (1) [창 1:20-23]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10.07.09
창세기 강해 서른아홉 번째 시간입니다. 이 시간에는 창조 다섯째 날의 역사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창조 역사를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듣고 계신지요? 이 세상에서도 다 큰 어른과 어린아이는 지식이나 지혜가 크게 차이 납니다.
예를 들어 생물학 박사와 초등학교 1학년생이 갖고 있는 생물에 관한 지식은 매우 많이 차이 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사람의 지식과 지혜는 얼마나 큰 차이가 나겠는지요? 박사와 초등학생의 차이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차이가 나지요.

고린도전서 1장 25절에는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55장 8~9절에는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하셨지요.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루신 창조 역사를 인간의 지식으로 이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마치 생물학의 전문 서적의 내용을 초등학생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과 같지요.

만일 초등학생이 자기가 가진 지식을 총동원해서 전문서적의 내용을 설명한다고 해 봅시다. 책 속에 나오는 그림들만을 보고 자기 생각대로 설명을 한다면 그 설명이 맞을 리가 없지요. 이렇게 설명하는 어린아이를 박사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저 우스울 뿐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많은 인생들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을 보면서 어린아이처럼 생각하며, 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생물의 기원에 대해서도 지식의 조각들을 억지로 짜 맞춰서 ‘이랬을 것이다’라는 이론을 만들었지요. 그냥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음을 믿으면 될 것을 자신의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여 엉뚱한 이론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러한 인생들을 보실 때 그저 안타까울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 욥기를 보면, 욥이라는 인물이 연단을 통해 자신의 의와 틀을 깨트리고 중심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는 과정이 잘 나옵니다. 특별히 욥 38~41장까지는 하나님께서 욥을 친히 깨우쳐 주시는 말씀이 기록돼 있지요.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인간의 지식과 지혜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놀라운 창조의 사역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산염소, 들나귀, 타조, 말, 매, 하마, 악어 등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을 들어 인간의 한계와 무지함을 깨우쳐 주시지요. 욥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마침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에 비하면 심히도 미미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님과 변론하려 했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철저히 깨달았습니다.

욥기 42장 1~3절에 보면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라고 고백했지요.

이 말씀을 듣는 분들 중에는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사람이 한 명도 없기를 바랍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지식의 틀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창조 역사에 대한 설명을 판단해서는 안 되지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자신의 지식을 재정립하는 사람이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또한 창세기 강해의 내용은 창조 역사를 이루신 하나님께서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들으시는 모든 분들이 골로새서 3장 10절 말씀처럼,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 다섯째 날에는 물에 사는 생물들과 새들을 창조하셨습니다. 먼저 본문 20절 전반절에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나온 ‘물들’이란 무엇을 가리킬까요? 창조 넷째 날에 태양이 창조되자 지구에는 ‘징조’가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이 징조는 크게 두 가지로 여러 가지 기상 현상과 지질 활동입니다. 그 결과 육지에도 물이 존재하게 되지요.
태양열로 바닷물이 증발되어 구름이 만들어짐으로 인해 지구 곳곳에 비가 내렸기 때문입니다. 또한 지질활동으로 인해 육지에는 산과 골짜기가 생겨났는데 하늘에서 내린 비가 골짜기를 흐르며 하천을 형성했습니다.

당시는 큰 강이라고 할 만큼 많은 물이 흐르는 것은 아니었고 곳곳에 하천이 만들어졌지요. 또한 땅속으로 흡수된 물은 지하수가 됐으며 지형이 움푹 팬 곳에 물이 고이면서 크고 작은 물웅덩이들도 생겨났습니다.
이처럼 바다뿐만 아니라 육지에도 다양한 형태로 물이 존재한 것을 본문에서 ‘물들’이라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니 하나님께서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바다뿐만 아니라 육지에도 물이 있게 되면서 비로소 물들에 생물이 번성하게 된 것입니다.

시편 104편 10~13절에도 보면 “여호와께서 샘으로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산 사이에 흐르게 하사, 들의 각 짐승에게 마시우시니 들나귀들도 해갈하며 공중의 새들이 그 가에서 깃들이며 나무 가지 사이에서 소리를 발하는도다 저가 그 누각에서 산에 물을 주시니 주의 행사의 결과가 땅에 풍족하도다” 했습니다.
육지에도 하나님께서 주신 물이 있으므로 각종 짐승들이 살아갈 수 있고 만물에 생명력이 넘쳐나게 된 것이지요. 이처럼 물은 생명체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은 천국의 모형이라 할 수 있는데, 천국에도 생명수가 흐르는 강이 있지요. 이 생명수는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나와 새 예루살렘에서 낙원까지 천국을 두루 돕니다. 천국의 만물도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비롯된 생명수로 인해 충만할 수 있지요.

지구를 창조하실 때에도 이 생명수가 지구로 유입되게 하셨고, 물의 근원이 되게 하셨다 했습니다. 그리고 지구에 생물을 창조하실 때에 물 없이는 살 수 없는 구조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생물로 하여금 생존에 꼭 필요한 성분을 물에서 공급받게 하셨지요. 이를 바꿔서 말하면, 하나님께서 물속에 생명을 유지시키는 능력을 불어넣어 주신 것입니다.

이는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생물이 물 없이는 살 수 없듯이 육과 혼뿐만 아니라 영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영적인 물을 공급받아야 살 수 있습니다. 영적인 물이란, 우리에게 영생을 얻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지요.
요한복음 4장 14절에 예수님께서도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말씀하셨지요.

여기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일반적으로 ‘영생수’라 표현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르시는 말씀은 모두 생명의 말씀이지요. 우리 사람은 이 생명의 말씀, 곧 영생수를 마시지 않으면 결코 영원히 살 수가 없습니다. 잠시 잠깐뿐인 이 땅의 삶을 마치고 나면 영원한 사망인 지옥으로 떨어지지요.

디모데후서 3장 15절에도 보면, “성경(곧 하나님의 말씀)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했습니다.
사람은 영을 가진 존재이기에 영적인 물인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받아야만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한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사람은 여전히 그 마음이 공허함을 느끼지요. 세상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른다 해도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사람은 여전히 마음이 허전합니다. 세상에서 많은 지식을 쌓았다 해도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사람은 여전히 마음에 풀리지 않는 답답함이 있구요.

사람들이 갖고 있는 모든 문제의 원인은, 영적인 물인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데 있습니다. 사람은 영을 가진 존재로서 영적인 물을 공급받아야만 살 수 있도록 애초에 그렇게 창조됐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여러분은 모든 문제의 답을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찾으시기 바랍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사모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찾고 마음에 양식 삼으시기 바랍니다.

본문 20절 후반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땅 위 하늘의 궁창”은, 우리 눈에 보이는 육의 하늘, 곧 대기권을 의미합니다. 넷째 날까지의 창조 역사로 인해 대기권도 안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체가 호흡하기에 알맞은 대기 환경을 만드신 후에 모든 새를 종류대로 창조하셨지요.

22절에 보면, 물고기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하셨습니다. 물고기가 창조될 때 이미 바다는 하나가 아니요, 여러 개가 되었음을 알 수 있지요. 하나님께서 창조 셋째 날, 바다와 육지를 나누실 때는 바다도 하나요, 육지도 하나였습니다. 바다는 북극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육지는 남극을 중심으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지요.

넷째 날, 해, 달, 별들이 창조된 후, 지구가 스스로 운행하면서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했지요. 하나였던 지구의 육지는 해와 달 사이의 복합적인 힘의 작용으로 인해 여러 개로 쪼개지고 나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창조 다섯째 날에 이미 바다가 여러 개가 된 것입니다. 바다가 여럿이 되려면 육지가 먼저 여러 개로 나뉘어야 하지요.

이러한 역사가 창조 넷째 날부터 다섯째 날 사이 짧은 시간에 이뤄졌다는 사실입니다. 하나였던 육지가 여러 개로 분리됐고 어떤 곳은 아예 육지에서 떨어져 나와서 큰 섬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로 인해 바다도 여러 개가 되었지요. 과학자들은 이 역사가 수천만 년에 걸쳐 이뤄졌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 넷째 날부터 다섯째 날 사이에 이 과정의 많은 부분이 진행됐다고 하셨습니다. 근본의 빛으로 둘린 영의 공간 안에서 영의 시간의 흐름을 타면 얼마든지 짧은 시간에도 가능한 일이지요.
창조 다섯째 날의 육지와 바다의 모양이 지금과 똑같았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지금처럼 5대양 6대주를 이루는 기본적인 틀이 마련되었지요.

하나님께서는 6일 창조 역사 동안에 인생들에게 가장 좋은 환경이 조성되도록 기본적인 틀은 정하셨습니다. 그 기본적인 틀은 오랜 세월 동안 조금씩 눈에 띄지 않게 변형되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지요. 그로 인해 생물들은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은 것입니다. 만일, 이미 창조 역사가 다 마쳐진 후에 대륙이 갈라지거나 크게 이동한다면 그 속에 살고 있던 생물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급속한 환경의 변화로 인해 살아가기 힘들지요.

예를 들어 펭귄은 주로 추운 극지방에 삽니다. 또한 원숭이는 대부분이 적도에 가까운 열대 지역에서 살지요. 이처럼 각 동물들에게는 살기에 적합한 기후가 있는 것입니다. 바다에 사는 물고기도 마찬가지이지요. 바닷물의 온도에 따라 많이 잡히는 어종이 다른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동물과 식물은 그들이 살기에 적합한 환경이 있습니다. 이처럼 생물이 살기에 적합한 환경을 제공하는 육지와 바다의 기본적인 틀은 이미 다섯째 날의 창조 역사 전에 마쳐졌지요.

본문 21절을 보면,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체가 살기에 적합한 환경을 먼저 만드신 다음, 각 환경에 알맞은 동물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이는 바꿔 말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동물에게 각각의 처한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는 의미도 되지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동물들은 처음에는 악(惡)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말씀으로 창조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처럼 강한 것이 약한 것을 잡아먹는 일이 없었지요. 싸우거나 물어뜯거나 죽이는 일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따라 서로 해(害)를 주지 않고 화평했지요.

이는 여섯째 날에 창조되는 지상의 동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땅을 기어 다니는 동물이나, 하늘을 나는 새나 물속의 물고기들 중에도 다른 동물을 잡아먹는 일이 없었지요. 육식 동물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 당시는 모든 동물이 풀과 물만 먹어도 생존에 필요한 양분을 공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땅이 점점 악으로 물들면서 동물들 중에서도 일부가 악하게 변질되었지요. 그런 종류들은 대부분이 식성(食性)도 육식으로 바뀌었습니다.
인간 경작이 끝나고 천년왕국이 시작되면 변질됐던 이 땅의 모든 환경은 처음 창조 당시로 회복이 됩니다. 그래서 동물들도 다시 악이 없는 온순한 상태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기록이 이사야 11장 6~9절에 나오지요. “그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천년왕국에 대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처음 동물을 창조하셨을 때도 이와 같은 모습이었지요. 하나님께서 처음 지구를 만드셨을 때는 이처럼 악이 없었기에 참으로 평화롭고 아름다운 세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동물들 중 상당수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독특한 본능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귀소본능이라는 것입니다. 귀소본능이란, 동물이 자신의 서식장소나 산란, 육아를 하던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 다시 그곳으로 되돌아오는 성질입니다.

예를 들어 예전에 시골에 있는 집에서 보면 봄이면 제비들이 찾아와서 집을 짓고 알을 낳아 새끼가 자라면 떠나가지요. 그런데 다음 해에 보면 지난해 그 집에서 태어났던 제비가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제비는 우리나라에서 여름을 보내는 철새로 가을이 되면 따뜻한 남쪽으로 떠나지요. 반대로 기러기와 같은 겨울철새는 우리나라에서 겨울을 보내다가 봄이 되면 북쪽으로 떠납니다.

한편, 철새를 가지고 이런 실험을 해 보았다고 합니다. 철새의 알을 인위적으로 어미 새에게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옮겨 놓았지요. 그런데 이 알에서 부화된 철새도 때가 되자 동일하게 같은 방향으로 날아갔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철새들은 이동 경로를 어른 새에게 배우는 것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알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지요.

물고기에도 귀소본능을 가진 종류가 여럿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 연어를 들 수 있습니다. 연어는 일반적으로 강에서 부화한 치어가 바다로 내려가서 성장한 다음 원래 있던 강으로 되돌아오는 습성이 있습니다. 바다로 떠난 연어는 3년 내지 6년 정도가 지나면 완전히 성숙해져서 산란을 위해 자기가 태어난 강으로 되돌아오게 됩니다.

대서양 연어의 경우 산란 후 다시 바다로 갔다가 돌아오기를 몇 번 반복하기도 하지요. 또한 바다로 나가는 강물의 길목이 막히면 민물에 적응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연어는 자기가 태어난 바로 그곳으로 반드시 돌아와서 죽는다는 것입니다.

연어는 드넓은 바다를 몇 년 동안 항해하다가 어떻게 자기가 태어난 강이 있는 곳을 정확하게 찾을 수 있을까요? 왜 굳이 세찬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면서까지 자기가 태어났던 곳을 찾아가는 것일까요?
강물의 냄새를 인위적으로 바꾸거나 연어의 후각 신경을 마비시킨 경우에는 회귀율이 현저히 떨어졌다는 연구 결과가 있기는 합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연어가 바다에서 지내는 수년 동안 자기가 태어난 강물의 냄새를 잊지 않고 기억한다는 것도 매우 신기한 일이지요.

연어나 철새들이 가진 귀소본능은 진화로 인해 얻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람에게도 영적인 귀소본능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심어 주신 ‘생명의 씨’로 인해, 사람에게는 ‘영원한 곳’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지요.

‘생명의 씨’는 하나님의 근본의 빛을 조금 떼어 주신 것이므로 생명의 씨는 하나님을 찾고자 하며 천국을 그리워합니다. 이 생명의 씨가 깨어나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연어처럼 정확하게 본향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씨가 깨어나지 않은 영혼은 원수 마귀 사단의 주관을 받아 결국 지옥으로 가게 되지요.

히브리서 11장 16절에 보면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했습니다.

미물인 연어도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힘든 여정을 다 이겨내면서까지 본향을 정확히 찾아가는데,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떻게 해야 하겠는지요?
우리 영의 근본인 아버지 하나님이 계신 새 예루살렘 성까지 힘차게 오르고 또 오를 수 있으시지요? 스스로 포기하지 않으며 성령의 인도하심만 받아 가면 누구나 새 예루살렘 성까지 갈 수 있습니다. 강물을 힘차게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모든 성도님들이 영의 흐름을 타고 아버지 하나님이 계신 곳까지 기쁘고 행복하게 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시간에는 창조 다섯째 날의 역사 일부를 말씀드렸습니다. 넷째 날까지의 창조 역사를 통해 대기와 물이 생명체에게 좋은 환경으로 정리가 되자 하나님께서 다섯째 날에는 공중에 새와 물에 물고기를 창조하셨지요. 각자가 처한 환경에서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불어 넣어서 각각 종류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저자이신 성경에는 분명 동물이 ‘각각 종류대로 창조됐다’고 나오는데, 진화론자들은 이러한 창조 역사를 믿으려 하지 않지요.

다음 시간에는, 진화론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논리적으로 모순되며, 근거 없는 이론인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또한 21절에 나오는 ‘큰 물고기’가 무엇이며, 왜 굳이 다른 물고기들과 구분해서 별도로 기록하셨는지도 말씀드리겠습니다.

태초에 이처럼 놀라운 창조 역사를 베푸신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영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를 창조하셨기에 육의 아버지도 되시구요. 그러므로 성도님들은 “창조주 하나님이 바로 나의 아버지이시다”는 영적인 자부심도 갖게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한 아버지의 자녀답게, 악은 모양도 없고 선하며 능력 있는 하나님의 참 자녀로 속히 변화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0-07-12 오후 11:04:51 Posted
2010-07-27 오후 2:43:02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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