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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

제목
창세기 강해(64)  [창 2:18-19]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11.04.29
창세기 강해 예순네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돕는 배필’을 주시려는 계획을 처음부터 갖고 계셨음을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녀가 만나 부부가 되면 서로 이해하고 돕는 아름다운 관계가 되길 바라셨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세상은 죄악으로 관영하여 부부관계가 육적으로 변질되었습니다. 마지막 때는 생육하고 번성할 때가 아니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영적인 신부단장을 해야 할 때입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 곳곳에는 ‘결혼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셨지요.

이 시간에는 지난 시간에 이어서 왜 성경에서 ‘결혼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하시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이유는 고린도전서 7장 28절에 나온 대로 “결혼하면 고난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장가가도 죄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가도 죄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했지요. 예나 오늘이나 부모가 딸을 시집보내고 나면 하루하루 마음이 편치를 않습니다. 귀하게 키운 딸이 보고 싶기도 하고, 혹여 남편이나 시부모님의 눈 밖에 나진 않는지, 무슨 힘든 일은 없는지 늘 염려가 되지요.

이렇게 딸을 시집보낸 부모님의 마음처럼 바울은 성도들을 아끼는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 결혼하여 받게 될 고난을 염려함으로 결혼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권면한 것이지요.

결혼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은 둘째 이유는 결혼하면 마음이 나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제일로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말씀하셨지요.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그리고 힘과 지혜와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 이런 자녀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 자녀입니다. 주님을 사랑해서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 마음에 천국 소망만을 채우려 하겠지요.

반면, 결혼을 하고 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이 나뉘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7장 32-34절에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꼬 하되 장가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느니라” 했지요.

실제로 어떤 분들은 결혼 전에는 열심히 신앙생활 했는데 결혼 후에는 변질되는 것을 봅니다. 육적인 삶에 젖어들어서 기도를 쉬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세상을 하나하나 취해 나가며 연단을 자초하지요.

이렇게까지 신앙이 변질되지는 않는다 해도 결혼하기 전과 후는 아무래도 차이가 납니다. 결혼 전에는 주님의 일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른 아침이나 저녁이나 늦은 밤이나 마음껏 주의 일을 할 수 있지요.

그러나 결혼 후에는 아무래도 가정에 매이게 됩니다. 배우자가 서로의 유익을 구하며 상대가 마음껏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게 배려해 준다면 좀 낫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상대가 배려해 준다 해도 기본적으로 남편은 가정을 부양할 책임을 지게 됩니다. 또 아내는 남편과 가족을 섬겨야 할 책임이 생기고요.

쉬고 싶다고 아무 때나 쉬고,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들의 상황을 고려해야 하지요. 명절이나 휴가가 되어도 결혼 전에는 마음껏 자신을 재충전할 수 있고 원하는 대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가족들을 돌아봐야 합니다. 아내로서, 남편으로서, 또 사위나 며느리로서 시댁이나 처가까지도 살펴야 하지요.

이렇게 일단 결혼을 하면 마음이 나뉩니다. 재정도, 시간도 다 나뉘게 되지요. 가족을 위해 마음을 쓰고 배려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결혼을 했으면 서로 책임을 져야 하고 당연히 가족들에게 마음을 써야 하지요. 그래야 ‘온 집에 충성’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선택할 수 있다면 그 시간과 물질과 노력을 주께 드릴 때 얼마나 영적으로 더 유익하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나마 남편과 아내가 다 믿음이 좋아서 서로 간에 영적인 사랑을 한다면 형편이 좀 낫다고 했습니다. 어찌하든 서로가 새 예루살렘에 갈 수 있도록 더 기도하고 상급 쌓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고자 하겠지요. 부부가 서로 신앙 안에서 친구가 되어 선의의 경쟁을 하듯 달려갈 수도 있고요.

그러나 사실, 이런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더구나 양쪽이 다 이런 믿음을 이루었다면 피차 주님만으로 만족하는 마음이기에 굳이 결혼할 필요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지금 이 시간에 “결혼하지 말라”거나 “결혼하면 안 된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 때를 사는 성도들이 알아야 할 성경적인 결혼관을 성경에 의거해서 말씀드리는 것이지요. 믿음이 있고 천국 소망을 가진 사람에게 어떤 것이 더 유익한지를 하나님은 말씀으로 설명해 놓았습니다.

이미 결혼한 분들은 서로가 더 좋은 천국에 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고 영의 사랑을 이루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상적인 부부관계에 대해서는 창세기 2장 21절 이하에 여자를 창조하신 내용이 나오는 부분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본문 19절 전반절을 보시면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을 창조하실 때는 친히 흙으로 빚으셨다 했지요. 그런데 본문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도 흙으로 지으셨다 했지요.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수많은 종류의 동물을 일일이 흙으로 빚으셨다는 의미일까요?

창세기 1장에 하나님께서 동물을 창조하시는 장면을 보면 말씀으로 명하시면 그대로 되었습니다. 1장 20절에 하나님께서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고 말씀으로 명하시자 그대로 됐지요.

1장 24절에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고 말씀으로 명하시자 그대로 되었습니다. 그러면 과연 동물들은 말씀으로 창조된 것입니까? 흙으로 창조된 것입니까? 정답은 “말씀으로 명하시자 흙으로 창조됐다”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하나님께서는 창조 역사를 시작하시기 전에 이미 모든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모든 피조물의 설계도와 재료, 창조 방법에 대한 구상도 갖고 계셨지요.

사람을 예로 들면 설계도에는 인체에 관한 모든 정보가 들어 있습니다. 사람을 만든 재료는 흙과 물이 일정 비율로 섞인 진흙이었지요. 사람의 창조 방법은 “진흙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빚어서 코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하였습니다. 이처럼 모든 피조물에 대한 창조 계획이 하나님의 마음에 담겨 있었습니다.

지구상에는 현재 35만여 종의 식물과 100만 종이 넘는 동물이 있다고 합니다. 이 수많은 종류의 식물과 동물의 설계도가 하나님의 마음에 다 담겨 있었지요. 그것들을 창조할 때 사용할 재료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흙과 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창조 방법은 사람을 창조할 때와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소리로 발하시면 흙과 물이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소리로 발하신 ‘말씀’ 안에는 피조물들 각각의 설계도가 담겨 있었지요.

예를 들어 창세기 1장 11절에 식물을 창조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었다 했지요.

하나님께서는 식물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하셨고 땅에게 그렇게 ‘내라’고 명하셨습니다. 소리로 발하신 말씀은 단순했지만 말씀 안에는 모든 식물의 설계도가 담겨 있었지요. 그래서 땅은 그 설계도대로 모든 식물을 내었습니다.

이를 커피 자판기에 비유해 보겠습니다. 요즘은 커피 자판기에서도 다양한 종류의 커피를 뽑아 마실 수 있지요. 자판기 안에는 다양한 종류의 커피를 만드는 재료가 들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돈을 넣고 버튼을 누르면 원하는 종류의 커피가 만들어져 나옵니다. 이것은 자판기가 명령받은 신호대로 커피를 제조하도록 고안돼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자판기 앞에서 밀크커피를 누르면 밀크커피가 나오고 블랙커피를 누르면 블랙커피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생물을 창조하시기 전, 지구를 근본의 빛으로 두르고 생명수로 감싸 안으셨음을 기억하시는지요? 지구는 마치 양수 속의 태아처럼 생명체의 창조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근본의 빛으로 두르셨을 때에 지구에는 자연의 법칙이 세워졌습니다. 또 지구가 생명수에 잠김으로써 지구의 흙에 생명력이 깃들었지요. 지구의 물은 생명수였으므로 원래부터 생명력이 담겨 있었고요.

커피 자판기로 비유하면 모든 재료와 자동으로 커피를 조제하는 시스템이 구축된 것입니다. 그리고 자판기의 버튼을 누르듯이 하나님께서 말씀을 소리로 발하시면 그대로 창조 역사가 이뤄졌습니다.

다섯째 날 ‘물고기와 새의 창조’, 여섯째 날 ‘육지 동물의 창조’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피조물의 원료는 근본의 빛과 생명력이 깃든 흙과 물입니다. 다만 피조물마다, 흙의 종류, 흙과 물의 조성 비율 등이 달랐지요. 100만여 종의 동물들 각각의 설계도는 하나님의 마음 안에 모두 담겨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설계도를 마음에 품으시고 말씀을 소리로 발하시면 그대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명하시면 흙으로 창조가 됐다고 설명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셨다”는 말씀은 일일이 손으로 빚으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첫 사람 아담만은 하나님께서 친히 손으로 빚으셨지요. 그것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빚으셨습니다. 사람의 형상을 빚으시는 하나님의 손끝에서는 근본의 빛이 계속 나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머리를 만들면 머리 부분은 흙덩이가 아니요, 곧바로 사람의 온전한 머리가 되었지요. 머리에서 목으로, 그리고 몸통, 팔과 손, 다리와 발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손에서 나가는 근본의 빛에 의해 사람의 온전한 신체로 바뀌었습니다.

피부에서는 진흙과 같은 갈색 빛이 아니라 아름다운 우윳빛이 났고요. 그런 다음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자 아담은 살아서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사람을 다른 피조물과 달리 얼마나 큰 애정을 가지고 정성스럽게 창조하셨는지 알 수 있지요. 하나님께서는 사람도 다른 동물들처럼 말씀으로 창조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친히 손으로 빚으신 이유는 하나님의 각별한 사랑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인간 경작이 끝나고 주님께서 공중에 강림하실 때에 잠자는 영혼들 즉 구원받고 죽은 영혼들의 몸이 부활하지요. 영혼은 주님과 함께 하늘에서 내려오고 그들의 몸은 이 땅에서 부활하여 올라갑니다. 부활한 신령한 몸과 영혼이 도킹하여 부활체가 되지요. 이때 오래 전에 죽어서 썩으므로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린 몸이 어떻게 다시 부활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으로 가능합니다.

원래 사람의 몸을 조성했던 성분들은 분해되어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창세기 3장 19절 후반절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말씀하신 대로이지요.

그렇다고 그 구성 성분들이 이 세상에서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흙으로 돌아갔을 뿐입니다. 그런데 부활 때가 되면 흙으로 돌아갔던 성분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한데 모여 부활의 몸을 조성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37장에 마른 뼈들이 군대가 되는 방식도 이와 같습니다. 5-8절에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했지요.

이 말씀은 비록 환상을 보고 기록한 것이지만 부활 때에 잠자는 자들의 몸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부활합니다. 뼈까지 완전히 분해되어 흙으로 돌아갔다 할지라도 다시 그 성분들이 모여서 뼈를 이루지요. 그리고 그 위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입혀지며 가죽으로 덮이면서 신령한 몸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동식물을 창조하실 때도 바로 이 같은 방식으로 흙과 물이 조합되어 각각의 피조물이 생겨났다는 사실입니다.

에덴동산의 동식물도 6일 창조 기간에 창조됐습니다. 에덴동산에도 흙과 물이 있지요. 그 흙과 물이 원료가 되어 지구에서와 동일한 방식으로 에덴동산의 동식물이 창조되었습니다.

에덴동산에도 지구에서 볼 수 있는 온갖 종류의 들짐승과 새들이 있었습니다. 이 땅의 것들보다는 훨씬 아름답지요. 단 지구에는 없고 에덴동산에만 있었던 동물이 바로 공룡입니다. 그래서 공룡은 에덴동산이라는 공간의 특수성을 나타내는 동물이었지요.

그런데 에덴동산에는 지구의 흙으로 지어진 동물들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구에서 지으시고 에덴동산으로 이끌어 들이실 때에 아담과 함께 들이신 동물들이 있지요. 그 동물들은 근본 지구의 흙으로 지어졌는데도 에덴동산에 잘 적응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지어진 동물들과 별 차이 없이 잘 살았지요. 아담도 지구의 흙으로 지어졌지만 에덴동산에 잘 적응한 것처럼 동물들 중에도 그런 종류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에덴동산에는 지구의 흙으로 지어진 동물도 있고, 에덴동산의 흙으로 지어진 동물도 있습니다. 그러나 외관상으로는 두 부류의 차이를 느낄 수가 없지요. 에덴동산의 짐승들은 지금도 처음 창조되었을 때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종류마다 특색 있게 아름다운 외형과 온순한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에 지구의 동물들 중 일부는 아담의 범죄 이후 많이 변형됐지요. 지구에 악이 들어옴으로 인해 외형이 험상궂게 변하고 성질은 거칠고 사납게 바뀐 것들이 있습니다.

한편, 지구와 에덴동산뿐만이 아니라 셋째 하늘의 천국에도 동물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사나 그룹처럼 천국의 동물도 말씀으로 창조하셨지요. 천국은 온전한 영의 세계이기 때문에 동물들도 흙으로 만들 필요가 없었습니다. 단 각기 고유한 형태를 가진 영체(靈體)를 입게 하셨지요.

천국의 동물은 에덴동산의 동물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지구, 에덴동산, 천국은 차원이 다른 공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늘들은 각각 공간의 특수성이 있습니다. 빛이 다르고, 영적인 속성의 밀도가 다르지요. 따라서 동식물뿐만 아니라 각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것도 차이가 난다는 사실입니다. 보석이나 꽃을 첫째 하늘에서 볼 때와 둘째 하늘에서 볼 때, 셋째 하늘에서 볼 때 각각 빛깔과 느낌이 다릅니다.

이 시간에는 ‘성경적인 결혼관’과 하나님께서 지구와 에덴동산의 동식물을 어떻게 창조하셨는지 말씀드렸습니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무엇보다도 영이신 아버지 하나님을 닮은 영의 마음, 거룩한 마음을 이루는 것이 삶의 최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떠한 때에 살고 있는지 한 가지 비유를 들고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살펴본 대로 지구가 먼저 창조됐고, 꽤 시간이 흐른 후 6일 창조 역사가 있었습니다. 아담은 6일 창조 중 여섯째 날 창조됐고, 에덴동산에서 무수한 세월을 지냈습니다.

아담이 범죄하여 지구로 쫓겨나면서부터 인간 경작이 시작됐지요. 하나님께서는 인간 경작의 기간을 6천 년으로 정하셨습니다. 그런데 과학자들은 지구의 나이가 약 45억 년 됐다고 말합니다.

지구 나이가 45억 년이라는 가정하에 45억 년을 1년으로 환산하면 인간 경작 6천 년은 약 4시간 17분 30초입니다. [45억 년 : 1년 = 6천 년 : 4시간 17분 30초] 따라서 지구가 만일 1월 1일에 창조됐다면 인간 경작은 12월 31일 밤 7시 42분 30초가 돼서야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 경작의 기간이 거의 찬 지금은 12월 31일 밤 11시 59분 59초도 지난 시점이지요. 주님의 공중 강림이 1초도 안 남았습니다. 이러한 시점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 15-16절에 말씀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말씀하셨지요. 그러므로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을 일생에 다시 얻지 못할 기회처럼 소중히 여기며 영으로, 온 영으로 나오는 데 집중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1-05-02 오후 11:01:42 Posted
2011-05-05 오후 8:56:48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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