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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

제목
창세기 강해(65) 여자 창조 [창 2:19-23]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11.05.06
창세기 강해 예순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19절 전반절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 설명해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제외한 모든 동물은 일일이 흙으로 빚어서 만들지 않으셨지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명하시면 각 피조물의 설계도대로 흙과 물이 조합되어 창조 역사가 이뤄졌습니다.

이제 19절 후반절과 20절 전반절을 보시겠습니다.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했지요.

자녀를 두신 장년 성도님들, 자녀의 이름을 짓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셨습니까? 몇 글자 안 되는 이름에 좋은 뜻을 담으려면 고심하게 되지요. 어떤 분들은 자녀를 잉태한 사실을 알고부터 자녀가 태어나기까지 수개월 동안 ‘이름을 무엇이라 지을까?’ 고심합니다. 어떤 분들은 아예 처음부터 전문적으로 이름을 지어 주는 곳에 의뢰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본문에 보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했습니다. 혹여 ‘아무렇게나 이름을 붙이면 되지, 그 일이 뭐가 어려울까?’ 생각하는 분이 계신가요? 그런 분들은 한번 동물원에 가셔서 눈에 보이는 모든 동물에게 바로바로 새롭게 이름을 지어줘 보십시오. 단, 그 이름을 다 기억해야 합니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아담은 100만 종이 넘는 동물의 이름을 모두 지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담은 동물들의 이름을 모두 기억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뛰어난 지식과 지혜를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요. 아담 스스로 지혜로워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권세와 권능을 주셨는데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도 담겨 있었습니다.

아담은 동물들의 이름을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지은 게 아닙니다. 각 동물의 특징을 알아서 그에 적합하게 지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100만 종이 넘는 동물의 이름을 기억할 수 있었지요.

또한 아담은 동물들과 교통하는 법을 알았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말로 대화하듯 아담이 동물들과 대화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동물들과 교감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지요.

예를 들어 훈련받은 개는 사람의 명령을 알아듣고 그대로 순종합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안내하기도 하고, 마약이 있는 곳을 찾아내기도 하며, 재난 현장에서 실종된 사람을 찾아내기도 하지요. 이처럼 아담은 동물과 교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모든 동물을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아담의 지혜와 지식이 보통 사람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이렇게 지혜롭게 행하는 모습을 지켜보시며 매우 흡족해하셨습니다. 아담이 동물 하나하나에게 지어 주는 이름들이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에도 꼭 맞았지요.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신 지식과 지혜로 아담이 그렇게 할 수 있음에도 아버지는 아담이 그렇게 해내는 것이 너무나 즐거우셨던 것입니다.

비유 들어, 여러분에게 자녀가 있는데 매우 지혜롭고 총명하다고 합시다. 게다가 매사를 여러분의 마음에 쏙 들게 처리해 나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쩜 내 마음을 저리 잘 알아서 마음에 꼭 들게 행할까?’ 하며 자녀를 대견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그러한 자녀를 보는 자체로 마음이 기쁘고 즐거울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기쁘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에 맞게 행하는 것이 매우 흡족하셨지요. 그래서 아담을 심히 사랑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했지요. 우리는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받았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지혜와 능력을 주셨듯이 우리에게도 하늘의 지혜와 능력을 주십니다.

역대하 16장 9절 전반절에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했습니다. 야고보서 1장 5절에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했지요.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자녀들이 하늘의 능력과 지혜를 구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공의에 합당한 사람만이 하늘의 능력과 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영의 세계에서 힘, 곧 능력은 죄를 버리고 성결된 만큼 임하지요.

또한 야고보서 3장 17절에는 위로부터 난 지혜를 받기 위해서도 첫째 성결해야 함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물론 온전히 성결되기 전에도 간절히 구하면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대로 은사 차원의 능력과 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은사로 주어진 능력과 지혜는 성결된 사람에게 주어지는 능력과 지혜보다 수준이 낮고 불완전하지요.

성결된 사람은 사심이나 변개함이 없기 때문에 위로부터 받은 능력과 지혜를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사용합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이 사실을 아시기에 성결된 자녀가 능력과 지혜를 구하면 믿고 주실 수 있지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큰 권세와 능력, 뛰어난 지혜를 주신 이유도 당시 아담은 악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자녀들도 악이 전혀 없고 선만 있는 마음을 이루어 하늘의 지혜와 능력을 담대히 구하기를 원하십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런 자녀들에게는 기다렸다는 듯이 응답해 주시지요.

또한 자녀들이 그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잘해서 영광을 돌리면 참으로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십니다. 아담은 그 큰 능력과 지혜를 가졌음에도 상대성을 몰랐기에 사단의 미혹에 넘어갔습니다. 반면에 상대성을 체험하고 온 영을 이룬 자녀들은 아무리 큰 권능이 주어져도 변개하지 않지요.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의 아담을 통해 영광 받으셨을 때보다 온 영의 마음을 이룬 참 자녀들을 통해 영광 받으실 때에 훨씬 더 기뻐하십니다. 성도님들은 이러한 사실을 잘 깨달아 신속히 온 영으로 들어오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권세, 능력, 권능, 하늘의 지혜를 담대히 구하여 받고 그것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크게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이제 본문 21, 22절을 보시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은 지구의 흙과 물이 섞인 진흙을 빚어 만드셨습니다. 여자는 이렇게 창조된 아담의 신체 중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만드셨지요. 따라서 여자를 조성한 근본 재료도 결국은 지구의 흙과 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빗대를 취하실 때에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마치 병원에서 환자를 수술하기 위해 먼저 마취를 시키는 것과 같지요. 마취 상태에서는 살을 째고 뼈를 깎아도 통증을 느끼지 못합니다.

당시 아담이 생령의 존재일 때도 근본 흙으로 조성된 몸이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몸을 입고 있되, 생기로 충만하여 노화되지 않는 상태였지요. 그 몸도 뼈와 살이 있고 신경이 있으며 피가 도는 몸입니다. 살에 상처가 생기면 피가 나고 통증도 느낄 수 있습니다. 다만 에덴동산에서는 그런 사고를 당할 일이 극히 드물고 설령 상처를 입는다 해도 금세 회복되지요.

생령의 몸은 통증을 느낄 뿐 아니라 그 밖의 자극도 느낄 수 있습니다. 여자의 경우, 아기를 낳을 때에 미미하나마 통증을 느끼지요. 그래서 하와가 범죄한 후에 잉태하는 고통이 크게 더해졌다 한 것입니다. 그때부터 고통이 생긴 것이 아니지요. 크게 더해졌다는 말은 그 전에도 잉태하는 고통이 있었음을 알려줍니다.

뼈나 살이 찌릿하거나 저리거나 쓰리거나 에이거나 하는 아픔이 심하지 않습니다. 단지 몸의 변화를 감지하는 정도이지요. 예를 들어 여자가 출산할 때는 골반이 벌어져야 아기가 나올 수 있습니다. 골반이 벌어진다면 당연히 느낌이 오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담에게서 갈빗대를 취하실 때 아담이 깨어 있다면 당연히 살이 갈라지고 갈빗대가 떨어져 나감을 느낄 수 있지요. 미미하나마 통증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조금도 통증을 느끼지 않도록 그를 깊이 잠들게 하신 다음 갈빗대 하나를 취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또 한 가지 사실은 생령인 아담이 잠을 잤다는 점입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낳은 후손들도 이 땅의 사람들처럼 잠을 자지요. 그들도 잠을 잠으로써 쉼을 얻는 것입니다. 물론 이 땅의 사람들처럼 매일 수 시간씩 꼭 자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잠깐 자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휴식이 되지요.

에덴동산의 사람들은 의식주를 위해 일할 필요는 없지만 그들도 나름대로 할 일이 있습니다. 매일 놀고먹기만 하지는 않지요.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 기술을 익히는 등 각자 나름대로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그들의 문명을 계속 발전시켜 왔지요. 따라서 때를 따라 쉬기도 하고 잠을 자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굳이 아담의 신체 중에서 갈빗대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을까요? 여기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갈빗대는 인체 구조상 중심부에 있으며, 심장, 폐, 위, 장 등 중요한 장기를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몸이 외부로부터 강한 충격을 받아도 갈비뼈가 충격을 완화시켜 주지요. 그래서 갈비뼈는 부러지더라도 장기들은 보호를 받게 됩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이런 점까지 다 고려하여 설계하셨지요.

하나님께서 여자를 갈빗대로 지으신 이유는 남자에게 여자가 ‘갈빗대’처럼 중요한 존재임을 나타내시기 위함입니다. 남자에게 있어서 돕는 배필인 여자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존재입니다.

아담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본문 23절에, 하나님께서 지어 주신 하와를 보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고백할 수 있었지요. 따라서 남편 되신 성도님들은 아내를 어떻게 대해야 하겠습니까? 내 몸같이 아껴 주고 사랑해야 합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내 몸 중에서도 가장 소중한 부분을 대하듯 아내를 대해야 하지요.

에베소서 5장 28절에도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말씀했습니다. 여자는 근본 남자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같다는 말씀이지요.

에베소서 5장 25절에는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했습니다. 우리 모두의 신랑 되시는 주님께서는 신부된 우리들을 얻으시고자 자신의 목숨까지 주셨습니다. 그처럼 우리를 사랑해 주셨지요.

남편들은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자기 아내를 사랑하라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전서 3장 7절에는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했지요.

아내는 남편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이면서 남편보다 더 연약한 그릇입니다. 따라서 남편이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시며 그런 남편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사실입니다.

골로새서 3장 19절에는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했습니다. 남편 되신 분들이 자기 아내를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여긴다면 어찌 괴롭게 하고 마음 아프게 하겠습니까? 무례히 행하거나 성내지도 않으며, 설령 허물이 있다 해도 덮어줄 것입니다. 자신보다 아내의 유익을 먼저 구해 주고 사랑으로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남편이 되지요.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여자를 지어 주시면서 이후로 남녀가 만나 부부가 되면 이러한 영적인 사랑을 나누기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사랑은 남편만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가 함께 노력해야 하지요. 아내도 아내로서 남편에게 행해야 할 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자를 별도의 흙으로 빚지 않으시고 남자에게서 나오게 하셨습니다. 여기에는 먼저 남편과 아내는 따로따로가 아니라 한 몸, 하나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남자가 주체(主體)요, 여자는 남자의 지체(肢體)라는 의미가 담겨 있지요.

본문 23절 후반절에 보면, 아담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갈빗대로 지어 주신 배필을 보고 말하기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했습니다. 여자는 남자에게서 나왔으며 여자를 여자라 칭한 이도 남자인 아담이지요. 이를 통해 남자와 여자 중 누가 먼저이며 누가 주(主)가 되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 7-9절에도 보면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라고 말씀했지요.

따라서 여자가 남자에게 순종해 줄 때 질서가 바로 설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는 아내가 남편을 섬기고 존중하며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이 옳습니다. 에베소서 5장 24절에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했지요.

골로새서 3장 18절에도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여기서의 복종은 ‘주 안에서’의 복종을 의미합니다. 남편이 비진리를 행하도록 요구해도 무조건 들어주라는 의미는 아니지요.

그렇다고 아내 입장에서도 ‘주 안에서’라는 단서를 자신의 기준에 맞춰 임의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아내는 중심에서 남편을 사랑함으로 남편의 마음에 맞춰 섬겨야 합니다. 그러면 남편도 아내의 진실한 마음을 느끼게 되지요. 아내가 교회 가는 것을 반대하지도 않고 결국 전도도 될 것입니다.

아내들이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선으로 남편을 대하며 섬겨 나간다면 아무리 마음이 단단한 남편이라 해도 대부분 녹습니다. 또한 아내가 남편의 의견을 존중해 주고 적극적인 후원자의 역할을 해 주면 가정의 질서가 섭니다. 그러면 남편이 더욱 힘을 얻어 가장으로서의 역할도 잘 감당할 수가 있지요.

반대로 아내가 사사건건 남편에게 이의를 달거나 남편의 힘을 빼는 말과 행동을 한다면 남편이 가장으로서 가정을 이끌어 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영적이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아내 되신 분들이 먼저 선으로 사랑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좇으시기 바랍니다. ‘가정에서 누가 주체가 되고 누가 지체가 되어야 하는지’를 마음으로 깨닫고 납득해야 하지요. 그래서 질서가 잘 잡힌 아름답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도 남자와 여자 사이에 질서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모든 일이 육적인 질서와 함께 영적인 질서를 좇아 이루어져야 합니다. 육적인 질서와 영적인 질서가 잘 조화를 이룰 때 주의 일들이 아름답게 이뤄지지요. 서로가 상대를 먼저 섬겨 주고 존중해 주며 질서를 좇아 순종해 나갈 때 하나님의 나라가 바르게 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남녀 사이에 질서를 세움에 있어서는 남자를 주체로 세우셨지요. 만일 남자와 여자가 동일하게 성결되어 영으로 들어왔다고 할 때에 남자가 머리가 되는 것이 옳습니다. 성경에도 보면 권능을 행한 선지자들은 모두 남자였던 것을 알 수 있지요.

물론 드보라는 여자지만 사사로 쓰임 받았고, 에스더도 민족을 멸족의 위기에서 구했습니다. 오늘날도 이처럼 여자라도 중심이 곧고 공의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면 권능을 받아 하나님의 나라에 크게 쓰일 수 있지요. 또한 여자가 이뤄야 할 분야가 있고 남자가 이뤄야 할 분야가 있습니다. 주 안에서 남녀가 평등하되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남녀의 질서를 좇을 때 하나님의 나라가 아름답게 이뤄집니다.

이 시간에는 아담이,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써 모든 동물의 이름을 지어 주는 장면을 살펴보았습니다. 또한 여자를 남자에게서 갈빗대를 취하여 지으신 섭리를 통해 남녀 사이의 관계성과 질서를 알 수 있었지요. 고린도전서 11장 11-12절에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신 목적이 있듯이 여자도 분명한 목적이 있어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피조물에게는 바로 존재 이유가 됩니다. 남자든 여자든 모든 사람에게는 본분이 있습니다. 전도서 12장 13절에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말씀하셨지요.

성도님들은 창세기 강해를 통해 정녕 우리의 창조주는 아버지 하나님이심을 마음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중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참 자녀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1-05-10 오전 1:56:51 Posted
2011-05-13 오전 9:49:12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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