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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

제목
창세기 강해(69)  [창 3:1]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11.08.19
창세기 강해 예순아홉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1절 전반절을 설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간교한 뱀을 에덴동산에 있게 하셨는지 말씀드렸지요. 하나님께서 뱀을 만드신 흙에는 어둠을 접하면 간교함으로, 빛을 접하면 지혜로움으로 발전할 수 있는 속성이 담겨 있었습니다.

뱀은 빛으로 둘린 에덴동산에 있는 동안 매우 지혜롭게 행하여 오랫동안 하와의 사랑을 받았지요. 한편 사단은 ‘어떻게 하면 아담으로 죄를 짓게 할까’를 늘 궁리했습니다. 빛의 영역인 에덴동산에 어둠의 전파를 계속해서 보냈지요. 공룡이 그것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공룡은 반란을 일으켰고 사단은 이 사건을 통해 약간의 자신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공룡 사건 때도 사단의 진짜 목표는 아담이었지요. 사단은 아담을 미혹하여 넘어뜨리기 위해 아담 가까이에 있으면서 사랑받는 공룡에게 먼저 접근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공룡은 그리 지혜롭지 않았습니다. 매우 단순했으며 앞뒤를 잴 줄도 몰랐지요. 단지 자신이 원하는 바를 향해 돌진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무모하게 선악과를 따먹으러 나아가다가 하나님의 징벌을 받았지요.

그후 사단은 지혜로운 존재를 찾았습니다. 보다 교묘하게 아담을 넘어뜨릴 계책을 세웠지요. 그런데 아담의 아내 하와가 뱀을 가까이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뱀은 매우 간교했지요. 이에 사단은 뱀을 자신의 도구로 이용합니다.

물론 뱀이 처음부터 사단의 음성에 귀를 기울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단이 오랜 세월 동안 뱀을 겨냥해서 어둠의 속성을 보냈지요. 그러자 결국 뱀이 거기에 넘어가게 됐습니다. 뱀의 간교한 속성이 바로 사단이 보내는 어둠을 수신하는 안테나 역할을 했지요. 이렇게 뱀은 한 번 사단과 접속을 한 후부터 계속해서 사단의 생각을 받아들였습니다. 결국 뱀은 사단의 충실한 종노릇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지요.

따라서 지금부터 뱀이 여자에게 하는 말은 곧 사단이 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 후반 절에 뱀이 여자에게 물었다 했습니다. 사단은 뱀을 통해 여자에게 접근했습니다. 남자인 아담에게 직접 접근하지 않았지요. 왜 그랬을까요?

당시 아담은 첫째 하늘과 둘째 하늘을 모두 다스리던 지배자였기에 그 권세와 위엄이 대단했습니다. 모든 들짐승도 아담에게 순종했고 아담을 사랑하며 잘 따랐지요. 따라서 뱀이 아담에게 직접 접근하여 그를 미혹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사단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담이지만 뱀이 아담 앞에 직접 나와서 감히 미혹하는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설령 직접 대한다 해도 아담은 쉽게 미혹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사단이 잘 알고 있었지요. 이에 사단은 아담의 사랑을 받고 있는 여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미혹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먼저 아담이 사랑하는 아내 하와를 미혹하고 하와를 통해 아담까지 미혹하려 했지요. 아담은 결국 가장 가깝고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 미혹을 받아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성도들도 가까운 사람을 통해 사단의 미혹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혼 전에는 신앙생활을 잘하던 자매가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여 핍박을 받는 일도 있습니다. 많은 예비 남편들이 “결혼하면 함께 교회 다니겠다”고 약속하지만 결혼 후에는 마음이 변개하지요. 그리고 아내가 교회 가는 것도 싫어하여 핍박까지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기에 시부모나 시댁 식구들까지 가세하여 교회에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지요.

이런 식으로 대놓고 핍박하지 않는다 해도 가정이 복음화 되지 않으면 믿지 않는 가족으로부터 이런저런 미혹을 받습니다. 믿지 않는 가족은 사단에게 속했기 때문에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사단의 사주를 받지요. 

사단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을 어찌하든 구원의 길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그래서 한 가정 안에서도 영적인 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0장 35-36에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 가정에 불화를 가져다주거나 가족이 서로 원수 되게 하신 것은 아니지요. 가족이 모두 하나님을 믿지 않을 때는 모두 사단 마귀에게 속했습니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그는 더 이상 마귀의 자녀가 아니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처럼 한 가정 안에서도 하나님께 속한 사람과 사단 마귀에게 속한 사람 사이에 영적인 전쟁이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지요. 이러한 영적 전쟁에서 지지 않으려면 진리가 마음에 임해야 합니다. 때론 믿지 않는 가족이 하는 권면이 도의적으로는 그럴듯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신앙을 좀 양보하면 가정이 더 평안할 것 같기도 하지요. 결국 ‘가정의 평화를 위한다’며 신앙생활이 미지근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가족이 함께 신앙생활을 한다 해도 사단의 미혹이 있을 수 있으므로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아내가 교회에서 있었던 일을 남편에게 전합니다. 그런데 아내가 전하는 말 속에는 질서상 윗분이나 믿음의 형제자매들에 대한 불평 불만이 섞여 있지요. 뭔가 감정 상한 일이 있었던 것을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하소연합니다.

만일 남편이 아내를 육으로 사랑한다면 아내의 말을 그대로 받아 주면서 동조하게 되지요. “그래요? 너무했다. 그러면 안 되지” 하면서 맞장구를 쳐 줍니다. 진리로 정확하게 분별하지 못하고 아내와 함께 다른 사람을 판단합니다. 이는 엄밀히 말해 남편이 아내로 인해 사단의 사주를 함께 받는 것입니다. 

가족이든 친구든 육적으로 정이 들면 그 사람에 대해서는 분별력이 흐려지지요. 그의 말은 일단 믿고 따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 말씀하시기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했지요. 

욕심도 분별력을 흐리지만 육적인 정(精)도 분별력을 흐립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의 정이 아닌 영적인 사랑을 소유해야 하지요. 육적인 정에 이끌리면 상대와 함께 죄인의 길을 걷게 되고, 심하면 함께 사망으로 갈 수도 있지요. 설령 잠시 동안은 가족과 불화하는 것 같아도 생명의 길을 택해야 합니다. 그래야 결국 가족들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가족이 함께 교회를 다닌다 해도 진리에서 위배되는 행실을 보일 때는 사랑으로 깨우쳐 줄 수도 있어야 합니다. 기분 맞춰 준다며 동조한다면 함께 육의 흐름을 타게 됩니다. 당장은 조금 서먹해진다 해도 진리로 분별하여 깨우쳐 줌으로 영의 흐름을 타고 갈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이 말씀을 오용하면 안 됩니다. 자신이 가족의 일원으로서 마땅히 감당해야 할 역할을 소홀히 하면서 무조건 교회 일만 열심히 해서는 안 되지요. 부모로서, 자녀로서, 아내로서, 남편으로서 가정에서 마땅히 해야 할 바는 해야 합니다. 가족들을 영혼으로 바라보고 영으로 사랑하며 마음으로 섬겨야 하지요.

또한 믿음이 없거나 믿음이 여린 가족을 진리로 인도할 때도 그들 입장에서 이해가 되어 따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무조건 “그러면 안 된다. 지옥 간다. 이렇게 해야만 한다” 이런 식으로 강요하면 안 되지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자신이 먼저 체험하고 그 행복을 나눠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사단이 뱀을 통해 어떤 말로 하와를 미혹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했지요. 이 말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단어 하나하나에 하와를 미혹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주의해서 봐야 할 단어는 ‘참으로’입니다. 이런 단어 하나도 미끼가 될 수 있고 함정이 될 수 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 말을 강조할 때 ‘참으로’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전혀 그런 의미가 아니지요. 사단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금하셨다’는 사실을 부인하게 하려는 의도로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비유를 들면 두 사람이 대화 중 “그게 진짜야? 정말이야?” 하고 되묻는 경우가 있지요. 상대의 말이 참인지 재확인하려는 때도 있지만 ‘믿지 못하겠다’며 부정할 때도 “정말이야?” 하고 되묻습니다. ‘네 말을 믿기가 좀 어려운데’라는 의심이 담긴 표현이지요.

이처럼 사단은 ‘참으로’라는 단어를 넣어 질문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금하셨다.’는 사실을 일단 부인하게 하려 했던 것입니다. 질문을 받는 상대의 마음에 혼란을 일으키도록 했던 것이지요.

이해를 돕기 위해 한 가지 비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100% 맞다’고 알고 있는 한 가지 사실을 상대에게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상대가 “그게 참이에요?” 합니다. 한 번이 아니고 계속해서 “진짜에요? 확실해요? 정말이죠?” 이렇게 반복해서 되묻는 것이지요.

그러면 대부분 마음이 어떻게 됩니까? 처음엔 정말 참이라 여겼던 확신이 점점 줄어들지요. 상대가 의심하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니 말을 꺼낸 당사자도 잠시 움츠러듭니다. ‘내가 알고 있는 내용이 사실일까? 혹시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이렇게 확신이 약해지지요. 그래서 마침내는 한 발 물러서게 됩니다. “다시 확인해 보겠습니다.” 하게 되지요.

사단은 하와에게 질문할 때 바로 이런 효과를 노렸던 것입니다. 결국 하와는 사단의 의도대로 흔들립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에 대해 하신 말씀을 왜곡하지요. 바로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셨는데 “죽을까 하노라”고 답한 것입니다.

자기 마음에 진리가 온전히 임한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누가 뭐래도 참은 참이고, 거짓은 거짓이지요. 예를 들어 미국의 수도는 워싱턴D.C입니다. 맞지요? 정말입니까? 

그러면 다음 상황에서는 어떨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공개 면접을 보는데 여러분의 대기 번호는 30번입니다. 면접관이 1번 응시자에게 ‘미국의 수도가 어디입니까?’라고 묻습니다. 1번은 “뉴욕입니다”라고 답합니다. 여러분은 ‘틀렸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2번도 뉴욕이라고 답합니다. ‘저 사람도 틀렸다’고 생각할 수 있지요. 3번도 뉴욕이라고 답합니다. 아마 ‘3번도 틀렸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4번도, 5번도, 6번도 계속 미국의 수도가 뉴욕이라고 답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여러분은 여러분이 알고 있는 답이 정답임을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어? 혹시 내가 모른 사이 미국의 수도가 바뀌었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겠는지요? 

자, 29번까지 모두가 뉴욕이라고 답했고 이윽고 여러분의 차례가 왔습니다. 자, 묻겠습니다. “미국의 수도가 어디입니까?” 이때 “워싱턴 D.C.입니다”라고 확신 있게 답할 수 있겠는지요? ‘당연히 그래야지’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가 않습니다. 처음엔 분명 ‘옳다’고 생각했던 것도 다른 많은 사람들이 ‘틀리다’고 얘기하면 자신이 없어지고 의심을 품기도 하지요. 이는 자기 유익을 구하는 간사한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만 저들과 다르게 주장하다가 혹시 불이익을 당하지는 않을까, 소외당하거나 무시당하지는 않을까’ 생각하지요. 그래서 틀린 줄 알면서도 결국 그쪽 편을 드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녀는 간사함이 전혀 없고 어떤 상황에서도 진실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진리를 택할 수 있는 곧은 중심을 가진 사람을 기뻐하시지요. 이 말씀도 잘못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이도 저도 가한 상황이라면 내 의견이 아무리 좋다 해도 화평을 좇는 것이 낫습니다. 최선책을 택하기 위해 화평을 깨는 것보다 차선책을 택할지라도 화평을 좇아야 하지요. 사실은 그게 최선책입니다. 단 참이 아닌 거짓, 불의, 불법에 대해서는 절대 마음이 흔들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진실한 사람은 말을 할 때에 ‘참, 진짜’ 이런 단어를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만약 상대를 사랑한다고 고백할 때도 “진짜 사랑합니다.” 이렇게 말하지 않지요. 그냥 “사랑합니다.” 한마디로 족합니다. 그 말 자체가 진실하기 때문에 굳이 거기에 ‘참’이니 ‘정말’이니 이런 수식어를 덧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말씀 앞에 “진실로 진실로”가 붙은 구절이 자주 눈에 띕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는 “진실로 진실로”가 눈에 띄지 않지요. “진실로”가 한 번 쓰인 구절들이 있을 뿐입니다. 요한복음에 “진실로”가 두 번씩 기록된 것은 기록자 사도 요한의 성품이 반영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강조하려는 사도 요한의 간절함이 그렇게 표현되었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사단이 ‘참으로’를 덧붙인 이유는 결코 강조하거나 긍정하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게 하려고 의도적으로 덧붙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주시할 단어는 ‘너희더러’라는 표현입니다. 뱀은 지금 하와와 대화하면서 ‘너희더러’라는 복수 인칭을 사용했습니다. 이는 하와뿐만 아니라 아담도 함께 겨냥하고 있음을 암시하지요. 결국은 아담을 함께 끌어넣으려는 의도가 이 말 안에 담겨 있습니다. 

또한 뱀이 ‘너희’라고 말했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금하신 대상에 하와는 물론 아담도 포함됨을 이미 알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너희’라고 질문함으로써 하와의 대답이 대표성을 띠게 만든 것입니다. 하와가 자신만의 생각을 답한다 해도 이미 아담의 생각도 그렇다는 의미가 되어 버리지요. 뱀의 질문에 ‘너희’라 하여 아담을 포함시켜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와의 대답이 곧 아담과 하와 두 사람의 공동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하와는 뱀의 이런 의도를 알지 못했지요. 뱀은 바로 이 점을 노렸고 결국 여자의 대답으로 인해 아담도 함께 올무에 걸리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진실하여 자기 분수를 지키는 사람은 이런 단어 하나에도 넘어가지 않습니다.

한 예로 어떤 안건에 대한 A선교회의 의견을 알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연락이 A선교회의 부회장에게 왔습니다. 의견을 취합하는 사람이 일이 급한데 회장님과 연락이 안 되니까 부회장님이 대신 알려달라고 재촉하지요. 이럴 때에 A선교회 부회장님이 그냥 자기 생각을 말해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생각이 A선교회의 의견이 되지요. 

설령 그 내용이 A선교회 내부적으로 이미 합의된 내용이라 할지라도 공식적인 의사 표명은 회장님이 해야 합니다. 만일 부회장님이 진실하고 자기 분수를 지키는 사람이라면 선교회의 의견을 임의로 발설하지 않지요. 자신이 알고 있다 해도 아는 체하지 않고 “저희 회장님께 여쭈어 보세요.” 할 것입니다. 상황이 급하다 해도 반드시 회장님의 인가를 받고 전합니다. 

이처럼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작은 티끌 같은 말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반드시 걸러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와는 인간 경작을 받지 않았기에 사단이 뱀을 통해 하는 말에 나쁜 의도가 담긴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뱀과는 평소에 친하게 지냈으므로 어떤 경계 없이 쉽게 말을 들어준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모든’이라는 단어를 유의해야 합니다. 뱀이 여자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물었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창세기 2장 16-17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셨지요. 

하나님께서는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를 마음껏 먹으라 하셨고 오직 선악과만 금하셨습니다. 뱀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만일 정말 사실 확인을 위해 묻는다면 “하나님께서 너희더러 선악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뱀은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라고 물었지요.

이렇게 물은 이유는 하와를 혼란시키기 위함입니다. 미끼를 던진 것이지요. 만일 “선악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라고 물었다면 하와는 “그렇다”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미혹할 거리가 사라지지요. 그러나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물으면 어떻습니까? ‘그건 아닌데’라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이를 노린 뱀은 사실을 교묘하게 왜곡해서 하와로 하여금 부정적인 생각을 하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이해하기 쉽도록 한 가지 비유를 들어 드리겠습니다. 아이와 엄마가 수영장에 갔습니다. 엄마가 아이에게 “깊은 데로 들어가면 절대 안 된다” 하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습니다. 아이는 엄마의 말씀에 순종해서 깊은 물로 들어가지 않고 얕은 물에서 놀았지요.

그런데 나쁜 사람이 아이를 해치기 위해 깊은 물로 들어가게 하려고 합니다. 만일 이때 아이에게 직접적으로 “우리 깊은 데로 가서 놀자” 하면 아이가 말을 듣겠습니까? 아이는 “엄마가 깊은 데는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어요” 하겠지요. 그러면 아이에게 더 이상 말을 건넬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너희 엄마가 정말로 물에 절대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니?” 라고 물었다고 합시다. 이에 아이는 “아니에요”라고 부정적인 대답을 하게 됩니다. 엄마가 물에 들어가지 말라고 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아이는 자신의 생각을 덧붙여서 “물이 얕은 곳은 괜찮다고 하셨어요.”라고 말할 수 있지요.

그러면 “깊은 데로 들어가도 괜찮아. 엄마가 조심하라고 그렇게 말씀하신 거야. 깊은 데는 얕은 데보다 훨씬 재미있어” 이런 식으로 아이를 꼬드길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단이 하와를 미혹할 때도 어떤 식으로 질문을 해야 자신이 원하는 답이 나올지를 알았지요.

사람들이 습관처럼 사용하는 표현 중에서 ‘모든’과 같이 전체를 뜻하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전부’, ‘다’, ‘일체’, ‘모두’ 이런 것들이지요. 사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닌데 사실을 강조하거나 과장할 때 자주 쓰입니다.

예를 들어 식사 자리에 늦게 온 사람이 음식이 조금밖에 남지 않은 것을 보면 “다 먹어버렸다” 하는 경우가 있지요. 여기에 더 강조하기 위해 “먹을 게 하나도 없네” 합니다. 그러면 말한 자신도 불만스럽고 듣는 사람들도 불쾌할 수 있지요. 작은 말 한마디로 인해 서로 감정 상할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하고 정직한 사람은 이런 단어들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입으로 내려고 했다가도 마음에서 걸립니다. “제가 늦었는데도 음식을 남겨 주셨네요. 다른 분들은 충분히 드셨는지요?” 하며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 주지요. 이런 말에는 민망하고 죄송한 마음,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담겨서 듣는 사람들의 마음도 편케 해 줍니다.

또, 사람들이 쉽게 쓰는 표현 중에 한 조직이나 단체에 대해 “그쪽 사람들은 전부 다 그래. 다 똑같아” 이런 식으로 비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단체의 일부 사람들에게 상한 감정을 전체에게 쏟아 붓는 것입니다. 만일 이런 말이 상대편의 귀에 들어간다면 얼마나 기분을 상하게 하겠습니까? 일부 사람들이 잘못한 게 사실이라 해도 전체가 비난받는 것을 견디지 못하여 되받아치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이 싸움이 어른 싸움으로 커지기도 하고, 괜히 특정 지방 사람들에게 안 좋은 감정을 갖기도 하지요.

사람이 사용하는 단어 하나하나에 그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말 한마디가 듣는 상대에게 생각의 차이를 낳고, 생각의 차이는 행함의 차이를 낳지요. 성도님들은 이 점을 잘 기억하여 언제나 정직하고 진실한 말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11-08-22 오후 11:00:25 Posted
2011-08-25 오전 11:38:11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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