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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

제목
창세기 강해(72)  [창 3:6-7]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11.09.09
창세기 강해 일흔두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사단이 뱀을 통해 하와에게 결정적인 미끼를 던지는 장면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미끼’는 바로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말이었지요. 사단은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명심하지 못하고 있음을 간파하고 이 같은 말로 미혹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와는 사단이 던진 이 말을 물리치지 않고 받아들이고 맙니다. 그러자 그 순간 ‘욕심’이라는 죄성이 마음에 들어와서 ‘육신’으로 자리 잡았지요. 이렇게 잉태된 ‘욕심’이라는 죄성은 마침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죄의 열매’로 나오게 됩니다.

이 시간은 하와가 ‘죄의 열매’를 어떻게 맺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본문 6절에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했습니다.

하와가 사단의 미혹에 넘어가자 마음에서는 ‘육신’의 작용이 시작됐습니다. 그 결과 하와가 선악과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지요. 똑같은 선악과가 이젠 달라 보입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는 마음에 잉태된 ‘욕심’이란 죄성이 세 가지 욕구로 발전했음을 나타냅니다. 먼저 선악과가 먹음직스럽게 여겨진 것은 ‘육신의 정욕’의 작용입니다. 다음으로 “보암직도 하다” 즉 “보기에도 아름다웠다”는 것은 ‘안목의 정욕’의 작용이지요. 여기에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다’는 것은 ‘이생의 자랑’의 작용입니다.

요일 2:16에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말씀했지요. 이 말씀처럼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은 세상 주관자인 사단으로부터 왔습니다.

하와가 사단의 미혹에 넘어가자 마음에 욕심이라는 죄성이 잉태됐고, 그것이 육신으로 자리 잡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육신은 크게 세 가지 욕구로 발전하여 수많은 죄를 짓게 하지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무엇인지는 요한일서 강해 10번, 11번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이 시간에는 간단히 개념만 설명하겠습니다.

먼저 ‘육신의 정욕’은 ‘육신을 좇아 범죄하려고 하는 속성’입니다. ‘육신’은 ‘사람의 몸과 죄성이 결합된 것’이고요. 사람에게 있는 죄성이 겉으로 표출되려고 하는 욕구 곧 범죄하고 싶은 욕구가 ‘육신의 정욕’입니다. 간음하고 싶고, 혈기 내고 싶고, 도적질하고 싶은 욕구, 미워하고 싶은 욕구, 이렇게 죄를 짓고 싶은 욕구가 다 육신의 정욕이라는 말입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볼 때 ‘먹고 싶다’ 한 것은 단순히 식욕이 생겼다는 의미가 아니지요. “먹지 말라” 하신 말씀을 어기고 싶은 마음, 하나님의 명을 거스르려는 마음 곧 범죄하려는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이는 ‘육신의 정욕’의 작용이지요.

다음으로 ‘안목의 정욕’이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을 통해 마음이 동요되어 육의 것들을 추구하게 만드는 속성’입니다. 사람이 어떤 것을 경험하면서 ‘좋다’는 느낌과 함께 마음에 담아 놓았다고 합시다. 그러면 다음에 그 경험을 연상시키는 것을 보고 들을 때 좋았던 그 느낌이 되살아납니다. 예전에 좋은 느낌으로 세상을 취했던 사람이 그 느낌을 되살릴 만한 것을 접하게 되면 다시 세상을 취하고 싶은 욕구가 강해집니다. 그래서 그 욕구를 좇아 육을 취하게 되지요.

하와도 선악과를 볼 때의 느낌이 달라졌습니다. 예전에 ‘정녕 죽으리라’ 하신 말씀을 명심했을 때는 선악과의 근처에도 가지 않으려 했을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마약’을 떠올리면 어떻습니까? ‘가까이 하면 안 된다’ ‘위험하다’ ‘끔찍하다’ 이런 느낌과 생각이 들지요. 마약은 몸과 마음을 서서히 상하게 하다가 마침내는 죽음에 이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은 마약에 취했을 때의 느낌이 강하게 남아 있지요. ‘너무 좋다’는 느낌에 사로잡혀서 멸망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이처럼 육의 것이 좋은 느낌으로 입력되고 그것을 다시 보거나 듣거나 취함으로써 범죄하려는 속성이 안목의 정욕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생의 자랑’이란 현실의 모든 향락을 좇아 자기를 드러내며 자랑하려는 속성입니다. 육의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부와 명예, 지식이나 권세, 외모에 대해 칭찬을 받으면 기분이 좋고 남들이 보내는 부러움의 시선을 즐깁니다. 이렇게 자기를 내세우며 자랑하고 싶은 마음 곧 ‘이생의 자랑’으로 인해 여러 가지 육의 것을 취해나갑니다.

하와도 그랬습니다. 자신이 지금보다 더 나은 존재 곧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요. 그런데 선악과를 보니 과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습니다. 이생의 자랑을 충족시켜 줄 수 있을 만하게 여겨졌습니다. 이처럼 하와가 사단의 미혹을 받은 후 선악과를 보자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발동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선악과를 따 먹고 말았지요. 더 나아가 자기와 함께한 남편 아담에게도 주어 먹게 했습니다.

아담이 하와로부터 선악과를 먹으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옳았을까요? 하와를 호되게 꾸짖고,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있도록 이끌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담은 그렇게 하지 않았지요. 이상하리만치 순순히 하와의 말을 따랐습니다. 결국 아담도 사단의 계략대로 선악과를 먹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아담이 하와의 말에 쉽게 응한 이유는 그도 ‘온전한 영의 존재’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생령이었지만 온전한 영의 존재가 아니라 불완전한 영의 존재였지요. 하나님의 기운인 생기가 빠져나가면 근본 흙의 성질을 가진 육의 존재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아담은 이러한 자신의 한계성을 알고 있었지요. 첫째 하늘과 둘째 하늘의 지배자로 있지만 온전한 영의 세계인 셋째 하늘의 존재와는 근본적으로 다름을 익히 알았습니다. 이에 아담도 온전한 영의 존재에 대한 동경심이 있었지요. 하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단은 이점을 이용하여 뱀을 통해 교묘하게 미혹했지요. 상대적으로 접근하기 쉬운 하와를 먼저 미혹했고 다음은 하와를 통해 아담을 넘어뜨렸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부분에서 마음에 새겨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바로 누군가가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된 행동을 하도록 미혹할 때 아담처럼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즉시 단호하게 물리쳐야 하지요.

이와 함께 미혹하는 상대가 회개할 수 있도록 깨우쳐 줘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일에 대해 책임감을 별로 느끼지 못할 때 더욱 쉽게 죄에 빠져들고 맙니다.
아담의 입장에서 이 상황을 한번 볼까요? 하와가 선악과를 먼저 따 먹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도 권합니다. “먹어봐요. 괜찮아요” 이에 아담은 너무나 쉽게 응한 것입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핑계로 쉽게 죄를 범합니다. ‘다들 그러니까 나도 괜찮겠지. 내가 먼저 시작한 것도 아닌데’ 생각합니다. 이처럼 ‘다들 그런다’ 는 생각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정도에서 벗어나고 불법을 행합니다.

예를 들어 사업하시는 분들은 “다른 업체들은 다 편법을 쓰는데 나만 혼자 정도를 걸으면 나만 손해다’라는 생각이 틈탈 수 있지요. 사단이 이런 생각을 불어넣어 불법을 행하도록 미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도 정도 경영을 하여 성공한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모두가 편법을 쓰고 불법을 행하는 것이 아니지요. 누군가를 통해 ‘다들 그렇게 하니까 이 정도는 괜찮아’ 하는 말을 들었다면 그게 바로 죄의 길로 미혹하는 말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담의 모습에서 얻을 수 있는 또 한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죄를 범하는 형제를 보면 그가 깨닫고 돌이키도록 도와주는 것이 사랑이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에서도 “미움보다 무관심이 나쁘다”는 말을 하지요. 분명히 상대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사망의 길로 가고 있는데도 모른 체 한다면 이는 너무나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형제가 범죄했을 때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먼저 마 18:15-17에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말씀했지요.

또한 약 5:19-20에는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하여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갈 6:1에도 말씀하시기를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했습니다.

성도님들은 이제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단의 미혹을 스스로 물리칠 수 있습니다. 이제 더 나아가 믿음이 연약하여 아직도 죄를 짓는 영혼들에게 여러분이 도움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한 사람도 소외됨 없이 모두 함께 영을 향해 힘차게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본문 7절을 보시겠습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이 구절부터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후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보여 줍니다. 먼저 ‘눈이 밝아졌다’ 했습니다.

이는 ‘혼의 작용이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혼의 작용이 시작되자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었지요. 이들은 선악과를 먹기 전 수많은 세월 동안 옷을 입지 않은 채 잘 지냈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은 후부터 벗었다는 사실이 부끄럽게 여겨졌지요. 그래서 치마를 해서 입었고요.

그 오랜 세월 동안은 한 번도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왜 갑자기 부끄러워졌을까요? 바로 비진리에 속한 혼의 작용 때문입니다. 이미 마음에 ‘육신’이 자리 잡았고, 하나님의 명을 거스르고 선악과를 먹는 ‘육체의 일’까지 나왔지요. 이제는 혼의 작용을 통해서 육신의 생각도 더 활발하게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선악과를 먹은 일과 ‘혼의 작용의 시작’은 무슨 연관이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말씀하셨지요. 이 말씀대로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는 죽게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생령인데 어떻게 죽을 수 있을까요? 생령은 흙으로 빚어진 몸에 영의 기운인 ‘생기’로 채워진 상태입니다. 이 생기가 빠져나가면 생령도 죽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의 죄를 짓는 순간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영의 기운을 더 이상 공급받지 못했지요. 반대로, 육의 기운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죄의 물꼬를 한 번 터주자 이제 육의 기운이 밀려들어왔지요. 육의 기운이 밀려들어오는 만큼 생기는 빠져나갔습니다.

그 결과 아담과 하와에게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생기로 충만했을 때는 영, 혼, 육 중 영이 주인이었습니다. 혼과 육은 영의 지시대로만 움직였지요. 이젠 반전이 된 것입니다. 육의 기운으로 채워지는 만큼 혼이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혼의 작용이 비진리에 속한 것으로 나왔다는 점이지요. 그들의 마음에 자리 잡은 육신으로 인해 비진리의 생각이 떠오르고 나아가 죄까지 짓게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후 선과 악을 알게 된 자체만으로는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육에 속한 혼의 작용이 시작됐다는 점이지요. 선과 악을 알게 되었어도 모든 것을 선하게 영으로 생각하면 죄를 짓지 않습니다. 육신의 생각을 하니 결국 죄를 짓게 되지요.

아담과 하와도 선악과를 먹은 후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벌거벗어서 부끄럽고 창피하다’라는 육에 속한 혼의 작용이 문제이지요. 영으로 생각하면 부끄럽고 창피할 것이 없습니다. 수많은 세월 동안 벌거벗고 살았고, 에덴동산의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사는데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지요. 그런데 그들의 마음에 비진리가 심겨지니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게 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이러한 변화를 비유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중앙방송과 지방 방송이 있다고 합시다. 두 방송은 항상 전파를 쏘아 보냅니다. 아담과 하와는 늘 중앙방송을 들었습니다. 중앙방송의 전파가 매우 강하기도 했지만 그들이 주파수를 항상 중앙방송에 맞췄기 때문이지요. 지방 방송은 틈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파수 다이얼을 다른 데로 돌리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선악과를 먹은 일이지요. 그러자 중앙방송 소리는 희미해졌고 이제는 지방방송 소리가 더 또렷이 들립니다.

이처럼 아담이 생령일 때는 온통 영의 기운에 싸여 혼의 작용이 일어날 수 없었지요. 영의 기운이 빠져 나가자 영의 세력이 약해졌고 혼이 주도권을 잡아 활발하게 작용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원리는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마음을 영으로 온전히 일구지 못했다 해도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영의 기운이 충만해지면 혼의 작용을 제어하기 쉽지요. 순간 육신의 생각이 떠올랐다 해도 바로 영의 생각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영으로 들어가면 육신의 생각은 아예 떠오르지 않지요. 온 영이 되면 떠올리려 해도 안 떠오릅니다.

이처럼 마음이 영으로 일구어진 상태에서는 혼이 영의 지배를 받아 영으로만 생각하게 되지요. 반면, 영으로 들어가기 전에는 성령의 충만함이 떨어지면 육의 기운이 힘을 얻어 혼의 작용이 활발해집니다. 육신의 생각을 차단하거나 절제하기가 어려워지지요.

육신의 생각은 모든 죄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롬 8:6-7에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도 그렇습니다. 어떤 말씀을 듣든지 영으로 생각하고 영으로 받으면 오해가 되지 않지요. 반면 육신의 생각이 동원되면 오해하고 판단하며 정죄까지 낳게 됩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아담이 육에 속한 혼의 작용으로 인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은 하와의 마음에 심겨진 욕심이 죄의 열매를 맺기까지의 과정을 말씀드렸습니다. 또한 아담이 하와의 말에 왜 그처럼 순순히 응했는지를 말씀드렸지요.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수많은 죄의 유혹에 노출됩니다.

그런데 한 가지 기억할 점이 있지요. 어떠한 죄의 유혹을 받는다 해도 그것에 응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개인의 자유 의지에 달렸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지요. 아담은 자유 의지로 죄를 지었지만 성도님들은 오직 의를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달려갈 길을 다 간 후에 의로우신 재판장 앞에 섰을 때에 의의 면류관을 받아쓰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1-09-12 오후 5:53:32 Posted
2018-07-28 오전 12:59:56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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