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응답서비스

창세기 강해

제목
창세기 강해(77)  [창 3:16-17]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11.11.11
창세기 강해 일흔일곱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일에 대해 하나님께서 ‘뱀’에게 내리신 저주의 말씀을 설명했습니다. 뱀은 다리가 사라지고 배로 다니게 됨으로 짐승 중에 가장 낮은 존재로 전락했지요.

15절의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말씀에는 중요한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비밀한 가운데 감추어 놓으신 구원의 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십자가의 도’이지요.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인간 경작이라는 미지의 여정을 떠나는 인류에게 이렇게 처음부터 희망의 빛을 비춰 주셨습니다. 또한 어둠의 권세 아래 진행되는 6천 년 인간 경작 역사의 고비 고비마다 하나님께서는 빛을 밝혀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셨고 때가 이르면 그대로 이뤄 주셨지요.

죄악이 최고조에 이르러 영적으로 너무나 캄캄한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불꽃이 활활 타올라 온 세상을 비추도록 역사하고 계시지요. 성도들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 보면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믿음의 분량을 아시기에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을 허락하십니다. 비유를 들면 하나님께서는 초등학생에게 고등학생의 문제를 풀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각 단계의 교과 과정을 잘 밟았다면 누구나 풀 수 있는 시험을 허락하십니다. 그런데도 시험 점수가 좋지 않았다면 그 과정을 다시 밟아야 하지요.

믿음의 훈련도 마찬가지입니다. 각 사람의 단계에 맞는 시험을 주셔서 통과하면 믿음의 단계를 높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시험을 허락하심은 ‘떨어뜨리기 위함’이 아니라 ‘한 단계 높여 주시기 위함’이고 또 축복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은 어떤 믿음의 시련이 올 때 당황하거나 놀라지 마시고 능히 기쁨과 감사함으로 통과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하와가 범죄 한 대가로 어떤 벌을 받았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본문 16절 전반절에, 하나님께서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잉태하는 고통’이란 여자가 아기를 잉태하고서부터 출산하기까지 받는 아픔과 힘듦을 가리키지요. 그런데 이 고통을 크게 더하신다 하셨습니다. 이는 하와가 에덴동산에서도 아기를 잉태하여 출산했고 그때마다 고통을 받았음을 알려 줍니다.

아담과 하와는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오랜 세월 동안 많은 후손을 낳았지요. 당시 하와는 생령이었지만 아이를 낳을 때 통증을 느꼈습니다. 물론 미미한 통증이었지요.

하나님께서 생령의 존재들도 잉태의 고통을 약간 느끼게 하신 데에는 영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참 자녀를 얻기 위한 인간 경작이 끝나기까지 많은 아픔을 느끼십니다. 이처럼 생령의 존재들도 미약하게나마 잉태의 고통을 받게 하심으로 자녀는 거저 얻는 것이 아님을 느끼게 하셨지요. 이 고통이 범죄 이후에 크게 더해졌다 했습니다.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라” 하신 대로 임신 중이나 출산할 때에 더 많은 수고가 따르게 되었지요.

또한 이 말씀에는 ‘자녀를 기를 때도 더 많이 수고해야 한다’는 의미까지 포함됩니다. 에덴동산에서는 어머니들이 크게 수고하지 않아도 아이들이 잘 자랍니다. 질병 같은 해로운 요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아이들이 ‘우량아’로 태어나서 가장 아름답고 멋있는 모습으로 쑥쑥 성장하지요.

그러나 이젠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육의 사람이 되었고, 그들이 사는 이 땅도 저주를 받았지요. 아담과 하와는 수고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특히 자녀를 얻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이 수고하고 애써야 하는지를 절절히 느끼게 되었지요. 비로소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자녀를 양육함에 있어서 사람들이 하는 수고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수고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녀를 낳아 장성하기까지 20년, 30년 수고하면 되지요. 물론 평생 자녀 때문에 마음 쓰게 되는 분들도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인간 경작이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참 자녀를 얻기 위해 애쓰고 계십니다.

이사야 49장 15절에 말씀하시기를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육의 부모들이 자식을 위하는 마음보다 훨씬 애절한 사랑으로 영혼들을 바라보십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지요.

믿음의 선진들도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느끼고 알았습니다. 그래서 죄인들을 구원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일에 혼신을 다했지요. 특히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 19절에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고 고백했지요. 또한 고린도후서 11장 29절에는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하며 영혼들을 향한 애절한 사랑을 표현하셨습니다.

죄인인 한 영혼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고 참 자녀로 나오는 일은 거저 되지 않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우리 주님, 그리고 성령님의 많은 수고와 애쓰심이 있어야 가능하지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예수님은 죄인들을 위해 대신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성령님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영혼들을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며 그들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우리 주의 종님들과 일꾼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맡겨진 영혼들을 위해 얼마나 힘쓰고 애쓰시는지요. 사람들이 미물로 여기는 곤충 중에 자식을 위해 자기 온몸을 내어주는 거미가 있습니다. ‘염낭거미’로 불리는 거미이지요. 염낭거미 암컷은 알을 낳을 시기가 되면 나뭇잎을 말아서 작은 두루주머니를 만들고 그 속에서 산란합니다.(※자료화면)

이는 밀폐된 공간을 만들어 새끼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지요. 그런데 어미도 그곳에 갇혔으니 새끼들의 먹이를 구할 수가 없습니다. 이에 어미는 자신의 몸을 자식들에게 먹이며 죽어갑니다. 결국 염낭거미 새끼들은 자기 어미의 몸을 먹고 살아남지요. 우리는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영생을 얻었습니다. 이 큰 사랑을 받았으니 더욱 영혼 구원과 양육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본문 16절 후반절에, 하나님께서는 여자에게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너는 남편을 사모하리라” 하신 말씀은 하와가 남편인 아담을 사랑하는 마음이 육적으로 변질됨을 뜻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벌’이 될 수 있을까요? 아주 큰 벌입니다. 육의 사랑으로 인해 고통 받아본 분들은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유를 들어 보겠습니다. 남녀가 사랑하여 결혼을 합니다. 서로를 뜨겁게 사랑할 때는 상대의 단점이 보이지 않았고, 모든 면이 좋았지요. 그런데 육의 사랑은 변질됩니다. 결혼 후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상대의 단점이 보이지요. 자신이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기보다 상대가 내 마음에 맞춰 주길 바랍니다. 상대도 이와 같은 마음입니다. 그래서 서로가 자신이 변한 줄은 모른 채 상대가 변했다고 생각합니다.

의견 충돌이 생기고, 마음이 상하는 일도 일어납니다. 서운해합니다. 슬퍼집니다. 상대로 인해 짜증이 나고 화가 나기도 하지요. 한때 매우 사랑했던 사람과의 사이에서 이런 일이 생긴다면 얼마나 당황스럽고 충격적이겠습니까? 마음에 상처도 크게 받지요.

아담과 하와도 육의 사람이 되면서 사랑도 육적으로 변질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은 일에 대해 물으셨을 때 아담은 그 책임을 하와에게 돌리려 했지요. 아담이 하와를 변함없이 영으로 사랑했다면 하와의 허물을 덮어주려 하고 그의 약점을 감싸주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자신이 잘못한 이유는 아내 하와 때문이라고 말했지요.

만일 하와라도 변함없는 영의 사랑을 가졌다면 ‘나로 인해 내 남편까지 곤경에 처했구나’ 하며 자숙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이 아니었지요. 마치 자신도 피해자인 것처럼 뱀이 자신을 꾀었기 때문이라고 둘러댔습니다. 자, 이것이 범죄 직후의 아담과 하와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육의 공간인 지구에 와서 살면서부터는 얼마나 더 빨리 육으로 변질되겠습니까? 서로를 위해 주고 섬겨 주려 하기보다는 자기 유익을 구하고 섬김 받으려 했겠지요.

이에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 사이에 정확히 질서를 세우십니다. 바로 하와에게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말씀하셨지요. 물론 그 전에도 아담이 주체요, 하와는 아담의 지체라는 질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질서의 개념이 달라졌습니다. 남편은 강자의 위치에서 약자인 아내를 힘으로 다스릴 수 있다는 육적인 질서가 잡혔지요.

진리를 알지 못하는 육적인 부부들의 관계가 그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마치 소유물처럼 여기며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려 합니다. 세상의 남편들은 자신이 아내를 꽉 잡고 있다는 사실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내가 말을 듣지 않으면 무섭게 큰소리를 내서라도 자기 뜻에 굴복시키려 하지요. 심지어는 폭력을 행사하기도 합니다.

아직 남편이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가정이 있습니까? 이런 남편이라도 아내가 영으로 사랑한다면 그 사랑의 힘으로 남편이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육의 사랑에 머물러 있을 때는 남편이 잘해 주면 좋아하지만 남편이 힘들게 하면 싫어하고 미워하지요. 그러니 세상의 많은 부부들이 진리를 알지 못하여 얼마나 고통 중에 사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7장 28절에 “그러나 장가가도 죄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가도 죄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말씀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육적인 사랑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잘 알았지요. 그래서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하며 결혼하지 않는 것이 더 복되다고 누누이 강조합니다.

이미 결혼한 분들은 부부가 함께 영으로 들어오면 됩니다. 서로가 유익을 구해주고 섬겨줄 테니 그 가정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우리 모든 만민의 가정들이 이처럼 아름답고 행복하게 회복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끝)

2011-11-14 오후 9:54:21 Posted
2011-11-15 오후 7:45:30 Updated

다음 글 창세기 강해(78) 이전글
이전 글 창세기 강해(76) 다음글
이전 페이지 인쇄하기 글자크게 글자작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