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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

제목
창세기 강해(82)  [창 3:23-24]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12.03.02
창세기 강해 여든두 번째 시간입니다.
창 3:22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야겠다’는 결론을 내리신 말씀이라 했습니다. 아담이 범죄함으로 육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는 에덴동산에서 영생할 수 없고 육의 세상에 가서 살아야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결정을 성자, 성령 하나님과 함께 의논하셨지요.

이제 본문 23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그의 근본된 토지’란 무엇일까요? 육적으로는 이 지구의 땅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실 때 이 지구의 흙을 근본 재료로 사용하셨지요. 아담은 범죄 후 지구로 내려와서 땅을 개간하여 밭을 만들고 채소를 재배해서 소산을 얻었습니다. 땀 흘리며 일해야 양식을 얻을 수 있었지요.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와 함께 아담은 영적으로도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아야 했지요. 이는 바로 자신의 ‘마음 밭을 개간하는 작업’입니다. 농부들이 황무지를 좋은 밭으로 만들 때 어떤 작업을 합니까? 먼저는 잡목과 잡풀을 걷어내지요. 다음으로 크고 작은 돌을 주워냅니다. 그 후에는 땅을 깊이 갈아엎어야 합니다.

영적인 개간 작업도 마찬가지이지요. 마음 밭에 심겨있는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걷어내고 딱딱한 돌멩이들을 주워내야 합니다. 깊숙이 뿌리 내린 악의 속성까지 뽑아내려면 근본적으로 마음을 갈아엎는 작업도 해야지요.

사람의 마음밭 유형과 개간 방법에 대해서는 2010년 전반기에 ‘마음밭을 개간하자’라는 제목으로 일곱 시간에 걸쳐 설교 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그 말씀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 있을 때는 마음밭에 선과 진리만 심겨 있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심어주셨지요. 그런데 선악과를 먹으면서부터 비진리와 악이 심기기 시작했습니다. 아담이 자유의지 가운데 사단의 음성에 순종하자 어둠의 속성들이 마음밭에 심겼지요. ‘영’은 ‘육의 속성’이 0.1%도 없는 순수한 상태입니다. 만일 영의 마음에 육의 속성이 조금이라도 섞이면 그 순간부터 영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육적인 존재’이지요.

생령인 아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와가 건네준 선악과를 먹는 순간부터 육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영은 죽고 혼이 주인이 됐지요. 이렇게 육의 사람이 되어 지구로 내려온 아담은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아야 했습니다. 곧 마음밭을 개간해야 했습니다.

마음에서 비진리와 악을 벗어내는 작업을 해야 했지요. 그래서 다시 ‘영의 상태’로 회복해야 했습니다. 이 작업을 하지 않으면 ‘죽은 영’의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지요. 개간하지 않은 땅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마음 밭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에 대해 히 6:7-8에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말씀했지요.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이 땅으로 내보내시면서 “근본된 토지를 갈라” 하셨습니다. 이는 아담뿐만 아니라 하와와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낳은 모든 후손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이지요.

이 경작은 사실 매우 값진 과정이었습니다. 아담이 생령일 때 가졌던 영의 마음과 우리가 마음 밭을 개간한 후에 갖게 되는 영의 마음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음이 착한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원래 착합니다. 악을 보거나 듣지 않아 악에 대해 잘 모른 채 착하지요. 반면 다른 한 사람은 세상의 악이 어떠한지 잘 알지만 마음을 착하게 잘 지켰습니다. 또는 마음에서 악의 모양을 모두 뽑아 버림으로 착한 마음이 되었지요.

이처럼 악이 뭔지 모르고 착한 사람과 악을 잘 알면서도 착한 사람은 다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전자일까요? 후자일까요? 후자 곧 악에 대해 잘 알지만 착한 사람이지요.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그처럼 아버지의 마음을 더 깊이 알고 이해하길 원하셨습니다. 이럴 때에 사람은 하나님과 더욱 진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요일 2:14에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아비의 신앙’에 대해 나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후손 가운데서 그처럼 아버지를 깊이 알고 진실한 사랑을 주고받을 참 자녀가 나오기를 바라고 믿으셨습니다. 그러한 소망가운데 아담을 이 땅으로 내보내셨지요.

성도 여러분, 그런데 본문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냈다” 했습니다. 여기서 ‘내어 보냈다’는 표현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런데 다음 24절에는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셨다” 했지요.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이 땅으로 온 동일한 사건에 대해 왜 이처럼 표현이 다를까요? 두 가지 표현의 주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먼저 ‘내어 보냈다’는 아버지 하나님 편에서의 표현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이 땅으로 보내실 때에 안타까우셨습니다. 그가 범죄 했다 하여 냉정하게 대하시거나 외면해 버리시지 않았지요.

그래서 아담을 내어 보내실 때에도 마지막까지 사랑의 배려를 하셨습니다. 아담이 평소에 타고 다니던 전용 UFO를 이용할 수 있게 하셨지요. 또한 아담을 늘 호위했던 그룹들로 하여금 마지막까지 함께 하게 해 주셨고요. 첫째 하늘과 둘째 하늘의 최고 머리였던 아담에게 최고의 예우를 해 주셨습니다.

이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에게 벌을 주기 위해 쫓아내신 것이 아님을 보여주지요. 인간 경작을 위해 필요한 과정이었을 뿐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아담을 이 땅으로 내어 보내셨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지 않았습니까. 아버지 하나님께서 버리시지 않았음을 아담과 하와가 항상 기억할 수 있도록 사랑으로 배려해 주셨지요. 이처럼 아버지 하나님 편에서는 아담과 하와를 쫓아내신 게 아니라 경작을 위해 내어 보내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전에 공룡은 에덴동산에서 지구로 쫓겨난 게 맞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공룡들을 그물과 같은 것으로 싸서 단번에 이 땅으로 추방시켜 버렸지요.
그러면 창 3:24에는 왜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라고 기록돼 있을까요? 여기서 ‘쫓아 내셨다’는 문구는 아담의 처지를 객관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아담은 생령에서 육의 사람으로 전락했습니다. 첫째 하늘과 둘째 하늘을 다스리던 권세와 능력도 잃었지요. 앞으로는 UFO를 탈 수도 없고, 아무도 그를 호위해 주지 않습니다. 에덴동산에서는 양식이 풍족했지만 지구에서는 손수 땀 흘리며 일해야 땅에서 소산을 얻을 수 있지요.

이 밖에 주거환경이나 생활수준에서 이 땅과 에덴동산은 큰 차이가 납니다. 아담은 지위가 크게 추락했으며 생활형편도 아주 어려워졌습니다. 마치 한 나라의 왕이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일반 백성이 되는 것과 같지요. 이런 외형적인 조건을 잣대로 삼으면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지구로 쫓겨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겪게 될 이 모든 사정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을 지구로 내보내신 데에는 아담을 향한 아버지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인간 경작의 섭리가 담겨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담은 이 땅에 내려온 후 많은 세월을 눈물로 보내며 여러 가지를 생각 했습니다. 아담은 에덴동산을 그리워했지요. 그럴수록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예전에 있었던 공룡의 배신 사건도 떠올려 보았지요. 자신도 공룡처럼 어리석었음을 깨닫고 늘 회개하는 날들을 보냈습니다.
그 당시 아담의 심정이 담긴 고백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너무나 멀고 멀리 있구나. 예전에 내가 둘째 하늘에 살았을 때는 첫째 하늘이 너무나 가까운 곳이었고 이곳에서 둘째 하늘도 가까운 곳이었는데, 지금은 이런 처지가 되어 이곳에서 둘째 하늘이 있는 곳을 바라보니 그곳은 너무나 멀고 먼 곳이라. 만질 수도 없고 갈 수도 없으며 볼 수조차 없구나. 내 어리석음이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에 그늘을 드리웠으니 내가 얼마나 어리석고 어리석은 자였던고.
이곳에는 아무 것도 없도다. 오직 내 스스로 노력해서 이뤄야 하는구나. 둘째 하늘에서 누렸던 아버지의 사랑과 영광, 그리고 권능이 다 무(無)로 돌아갔도다. 이처럼 낮고 초라한 모습으로 이 땅에 섰으니 얼마나 어리석고 어리석은 일인고.
앞으로 이곳에서 몇날 며칠을 살며 얼마나 많은 날들을 세며 살아나가야 할까? 내 자신을 보니 심히도 초라하고 심히도 초라하구나. 둘째 하늘에 살적에 이 첫째 하늘에 내려왔을 때와는 전혀 다른 처지가 되었도다. 이제 이곳에 와 보니 예전에 보았던 그 땅도, 그 환경도 아니요, 그때 보았던 짐승들도 아니로다.
이로 인해 심히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나 내가 죄를 지어 이같이 정해졌으니 이곳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리라. 내 마음을 정리하고 하늘을 동경하며 아버지께서 주신 이 삶을 얼마나 살아야 할까? 나의 생명의 수(壽)가 다하는 날까지 그날을 세고 세어 내가 했던 모든 일들을 경계하고 경계하리로다.
나로 인해 이 땅에 된 일들을 인하여서 정녕 속죄하는 마음으로 지극히 민망하고 죄송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며 살아야지. 지금의 보이는 모든 것들이 적막하고 한없이 적막하구나. 하늘은 닿을 듯 하나 닿지 않고 너무나 멀리 있고 멀리 있도다. 한탄스럽고 한탄스럽구나.
그러나 이처럼 아버지로부터 다시 새 삶을 얻었음을 다행으로 여겨야지. 새로운 삶이 두렵고 떨리지만 주어진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처지로다. 장차 내 생명의 날이 끝나는 날에는 아버지를 만날 수 있겠지. 그 분을 다시 뵐 수 있겠지. 정녕 내가 이 날들이 다하기까지 경계하며, 경계하며, 경계하며 살리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담이 둘째 하늘에서 누렸던 영화와 위엄은 대단했습니다. 그런 아담이 이전과는 많은 것이 다른 이 땅에 내려왔지요. 모든 것을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해나가는 일이 결코 쉽지는 않았습니다.

비유 들면, 여러분이 어느 날 갑자기 무인도에 떨어진다면 얼마나 막막하겠습니까? 당시 아담의 상황이 그와 비슷했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막막한 상황에 놓였지요. 그 충격을 벗어나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아담은 오랜 세월동안 자신이 했던 일을 뉘우치며 후회했지요. ‘내가 왜 그랬을까? 내가 그때 그 미혹에 넘어가지 말았어야 했는데’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습니다. 아담은 자신이 한탄스럽기도 했지만 한없이 후회만 하고 있을 수 없었지요. 자신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떠올리며 자신을 위로했습니다. 새로운 삶을 주심에 감사하며 스스로 다짐하는 고백을 했지요.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렸던 자신의 행동을 회개하고, 경계하며 새 삶을 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지구로 내어 보내신 과정과 그렇게 하신 이유를 창 3:23 강해에서 말씀드렸습니다.

본문 24절에는 그 이후에 하나님께서 어떤 조치를 취하셨는지가 나옵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했습니다.

그 동안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는 일은 아담의 책무였지요.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이제 아담을 대신해서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그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룹은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영적인 존재이지요. 사람의 모양을 한 천사와 달리 주로 동물의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이 ‘그룹’에 대해서는 창세기 강해 15, 16, 17번에서 이미 자세히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음으로 ‘두루 도는 화염검’은 무엇일까요? ‘화염검’은 말 그대로 불과 결합된 검입니다. 영안이 열려 보면 마치 바람개비와 같은 모양으로 보입니다. 겉은 성령의 불로 휩싸여 있고 그 속에서 검이 빠르게 돌고 있지요. 성령의 불이 활활 타는 소리와 검이 빠르게 도는 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매우 위엄 있는 소리를 냅니다. 악한 영들은 이 소리만 듣고도 두려워 떨지요.

화염검에는 성령의 능력이 담겨 있어서 악한 영들이 이 검에 닿으면 즉시로 능력을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화염검은 마치 살아있는 듯 움직이면서 악한 영들의 모든 동태를 파악합니다. 그래서 악한 영들이 생명나무의 길로 접근하는 것을 원천봉쇄할 수가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왜 그처럼 생명나무의 길을 단단히 지키도록 하셨을까요? 그것은 악한 영들의 영역이 에덴동산 동편에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악한 영들은 에덴동산을 침노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습니다.

먼저는 아담을 미혹하여 타락시키기 위함입니다. 이와 함께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습니다. 바로 에덴동산에 있는 생명나무 과실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악한 영의 우두머리인 루시퍼는 생명나무 과실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생명나무 과실을 먹으면 영생할 수가 있지요. 루시퍼와 악한 영들은 자신들도 영생할 수 있다면 ‘하나님을 영영토록 대적할 수 있다’는 계략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랜 세월동안 에덴동산을 노렸지요.

이윽고 원수 마귀 사단은 아담을 미혹하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사단의 원래 계획은 ‘아담을 미혹한 후 그를 통해 생명나무 과실을 얻는다’ 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런 사단의 계략을 모르실 리가 없지요.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범죄 한 후 곧바로 조치를 취하셨습니다. 먼저는 아담을 이 땅으로 내보내셨지요. 또한 에덴동산에 있던 모든 뱀을 이 땅으로 쫓아 내셨습니다. 사단이 발붙일만한 어떤 여지도 에덴동산에 남겨 두지 않으셨지요. 여기에 큰 위엄과 권세를 가진 존재로 하여금 생명나무 길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앞서 말씀드린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조치를 취하시고 지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신속하게 조치하심으로써 악한 영들의 에덴동산 접근을 철저히 막으셨습니다. 이로써 악한 영들은 더 이상 에덴동산을 넘보지 못하게 됐습니다. 사단이 아무리 어둠의 전파를 에덴동산을 향해 보내도 그것을 받을만한 대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악한 영들은 생명나무 과실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사실 사단은 범죄한 아담이 그처럼 빨리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사단의 계획이 성공하려면 아담이 범죄한 후에도 에덴동산에 더 머물러 있어야 했지요. 그래야 아담을 사주하여 생명나무 과실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모든 가능성이 사라졌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 언젠가는 다시 기회가 생기겠지’라고 훗날을 기약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됐지요.

이에 루시퍼와 악한 영들은 분을 내며 이제 자신들의 타깃을 이 땅으로 돌립니다. 생명나무 과실을 먹지 못하게 된 대신 인간이 경작 받는 이 땅에 어둠의 세계를 구축해 나가려 했지요.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훼방하려 했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우상을 만들게 하고 자신들이 경배 받고자 했지요. 어떻게든 한 사람이라도 더 하나님을 믿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이 땅을 악으로 물들여 가면 자신들이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으리라 착각한 것입니다.

더욱이 원수 마귀 사단도 장차 자신의 머리를 상하게 할 메시아가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의 사람이 나타나기만 하면 어떻게든 그를 핍박하고 죽이려 했습니다. 마침내는 악한 사람들을 주관하여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까지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게 했지요. 이처럼 인간들이 얼마나 악한지 보여줌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자 했습니다. 반면 자신들이 구축한 세계가 얼마나 큰지를 과시하려 했지요.

그러나 이러한 원수 마귀 사단의 궤계 역시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통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만세 전에 이때를 위해 비밀한 계획을 예비해 놓으셨지요. 이 계획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인류에게 구원의 길이 열렸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죄인들에게 죽었던 영이 다시 살며, 새 삶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지요. 이에 대해 고전 15:22에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했습니다. 또한 고전 15:45에서는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했지요.

원수 마귀 사단은 예수님을 죽이기만 하면 자신들의 세계가 계속될 줄 알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결국 원수 마귀 사단은 하나님의 지혜 앞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원수 마귀 사단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지요. 그들은 인간 경작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어둠의 권세를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 권세로 최후까지 한 사람이라도 더 지옥으로 끌고 가려 합니다.

그래서 인간 경작의 마지막이 가까운 오늘날 이 세상은 원수 마귀 사단이 주관하며 죄악이 관영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요. 이사야 60:2절 전반에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말씀한 대로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마지막 때를 그냥 이렇게 놔두시고 인간 경작을 마치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사 60:2 후반절에서 4절에 보면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네 눈을 들어 사면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원방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워 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이뤄지는 때를 예비해 두셨지요. 합 2:14에도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 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의 역사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예수님의 구세주 되심을 온 땅에 선포하게 됩니다. 그래서 수많은 영혼들에게 구원의 문이 활짝 열리는 때가 오지요. 이를 위한 아버지 하나님의 계획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로써 창 3장 강해를 마칩니다. 창 3장에는 아담과 하와가 사단의 미혹을 받아 죄를 짓고 변질되며, 죄의 삯을 받는 모습이 나왔지요. 이 과정은 비단 아담과 하와에게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이 땅에서 낳은 후손들도 대부분 이 전철을 밟지요. 그래서 모든 인류는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역을 통해 무수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왔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닮은 ‘참 자녀’들도 나왔지요. ‘참 자녀’들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간 경작에서 승리하셨음을 증명합니다.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서 이러한 하나님의 참 자녀가 많이 나오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끝)

2012-03-05 오후 9:22:49 Posted
2012-03-08 오전 10:19:57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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