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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

제목
창세기 강해(85)  [창 4:8-9]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12.03.23
창세기 강해 여든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동생 아벨의 제사만 열납하신 일로 악한 감정이 올라왔습니다. 동생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했으나 자신은 자기 좋은 대로 제사 드렸기에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았지요. 그런데도 가인은 분해했고 하나님께까지 서운한 마음을 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서 악이 발동함을 아시고 권면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인이 더 큰 죄를 짓지 않도록 막아 주시려 했지요. 그런데 가인은 듣지 않았습니다.

본문 8절 전반절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했습니다.
이는 가인이 자신의 마음에 있는 감정을 아벨에게 쏟아 놓았다는 뜻입니다. 자신이 아벨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또 왜 그러한 감정을 갖게 되었는지를 말했다는 의미이지요. 그로 인해 동생 아벨을 몹시 힘들게 했습니다. 다시 말해 “나 너한테 감정이 있어. 너 때문에 분이 났고 하나님께 권면도 들었어” 이런 식으로 말함으로써 심적 고통을 안겨 주었다는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분을 가라앉히고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 하셨는데, 가인은 반대로 행해 나갔습니다. 가인은 악을 누그러뜨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키워나갔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권면도 듣지 않았지요. 시간이 지날수록 악한 감정은 더해졌습니다.
가인도 아버지 아담으로부터 진리를 배워서 자신이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감정을 다스려보려고 했지만 제어하지를 못했지요. 오히려 점점 악한 감정이 쌓여 갔고 이윽고 악한 행동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죄의 속성이 이렇습니다. 마음에 악이 심겨질 때에 바로 뽑아 내지 않으면 금세 자라나서 마음을 정복합니다. 원수 마귀 사단의 사주를 받아 스스로 마음을 제어할 수 없게 되지요.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죄의 종노릇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런 단계에 이르기 전 ‘이것은 죄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 하고 깨달았을 때 바로 돌이켜야 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지요.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능력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따라서 항상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이어지는 8절 후반절에 보면 “그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했습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것도 즉흥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지요. 가인이 두고두고 마음에 품어왔던 감정을 때를 보아 행동으로 나타냈다는 점에서 이 죄가 참으로 크다 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가인은 하나님으로부터 권면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죄의 소원대로 행했지요. 이는 이미 그 마음에 악이 얼마나 크게 심겨져 있었는지를 나타냅니다.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라는 표현으로 봐서 가인이 동생과 단 둘이 외진 곳에 있을 때를 기다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동생을 죽일 마음을 품었고 적당한 기회를 노리고 있었지요. 가인은 치밀하게 살인 계획을 짰던 것입니다. 이처럼 같은 살인이라도 고의로 사람을 쳐서 죽인 경우에는 그 죄를 더욱 크게 여긴다는 사실입니다.
삼하 3장에도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사람을 죽인 한 사례가 나옵니다. 때는 다윗이 유다지파 만의 왕이 된 지 7년 6개월이 되어갈 무렵이었지요. 나머지 열한 지파는 아직 사울의 아들인 이스보셋의 수하에 있었습니다. 이때 이스보셋의 군대장관인 아브넬이 이스라엘 열 한 지파를 대표해서 다윗을 찾아와 화친할 것을 제안합니다. 다윗은 아브넬을 극진히 대접했지요.
이에 아브넬은 21절에 “내가 일어나 가서 온 이스라엘 무리를 내 주 왕의 앞에 모아 더불어 언약하게 하고 마음의 원하시는 대로 모든 것을 다스리시게 하리이다”라고 약속했습니다. 전쟁을 하지 않고도 다윗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왕이 되어 통일 왕국을 이룰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평안히 돌아가는 아브넬을 몰래 부하로 하여금 뒤쫓아 가서 다시 데려오게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다윗의 군대장관인 요압이었지요. 삼하 3:27에 보니 “아브넬이 헤브론으로 돌아오매 요압이 더불어 종용히 말하려는 듯이 저를 데리고 성문으로 들어가서 거기서 배를 찔러 죽이니 이는 자기의 동생 아사헬의 피를 인함이더라” 했습니다.
요압은 예전에 전쟁터에서 아브넬이 자기 동생을 죽인 데 대해 원한을 품고 이렇게 궤계를 써서 아브넬을 죽이고 말았지요. 개인적인 원한을 갚기 위해 국가 중대사를 그르칠 수 있는 악행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여기엔 사심도 개입돼 있었습니다. 적장인 아브넬이 다윗의 수하로 들어오면 자신의 지위가 위태해질 수 있었지요. 열한 지파를 데리고 오는 아브넬의 공로는 매우 큽니다. 이에 대해 다윗은 적절한 대우를 해줘야 하고요. 요압은 자신보다 아브넬이 더 높은 자리에 앉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요압은 궤계를 써서 아브넬을 죽이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다윗은 어려움을 당할 뻔 했으나 지혜롭게 행함으로 인해 무난히 통일왕국을 이루었지요.
그런데 요압이 이와 비슷한 악행을 또 다시 행했습니다. 압살롬이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질하며 잠시 왕이 되었을 때에 ‘아마사’를 자신의 군대장관으로 삼았지요. 다윗이 이 반역 사건을 진압하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복귀할 때에 아마사를 군대장관으로 삼겠다고 약속합니다. 삼하 19:13에 다윗이 말하기를 “너희는 또 아마사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골육이 아니냐 네가 요압을 대신하여 항상 내 앞에서 군장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시기를 바라노라 하셨다 하라” 한 것입니다.
본래 반역자들은 모두 죽이는 것이 상례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큰마음으로 적장을 품음으로써 반역에 가담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얻으려는 선한 뜻을 내비췄지요. 그리고 다윗은 아마사를 시켜 유다 사람을 소집해 올 것을 명합니다. 그런데 이때 또 요압이 개입하여 아마사를 죽이고 맙니다.
삼하 20:9-10에 “요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 형은 평안하뇨 하며 오른손으로 아마사의 수염을 잡고 그 입을 맞추려는 체하매 아마사가 요압의 손에 있는 칼은 주의치 아니한지라 요압이 칼로 그 배를 찌르매 그 창자가 땅에 흐르니 다시 치지 아니하여도 죽으니라” 했습니다.
요압은 이처럼 번번이 다윗의 뜻을 거슬러서 악한 행동을 저질렀습니다. 늘 다윗에게 가시 같은 존재로 있다가 종국엔 배신을 했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이에 대해 왕상 2:32에 “여호와께서 요압의 피를 그 머리로 돌려보내실 것은 저가 자기보다 의롭고 선한 두 사람을 쳤음이니 곧 이스라엘 군대 장관 넬의 아들 아브넬과 유다 군대장관 예델의 아들 아마사를 칼로 죽였음이라” 했습니다. 사람이 악의를 품고 고의로 누군가를 해치면 그 죄에 대한 보응을 반드시 받게 됩니다.
민수기 35장에 기록된 모세의 율법에도 고의로 사람을 죽인 경우 즉 고살한 경우 “반드시 살인자를 죽이라” 했지요. 민 35:20-21에 “만일 미워하는 까닭에 밀쳐 죽이거나 기회를 엿보아 무엇을 던져 죽이거나 원한으로 인하여 손으로 쳐죽이면 그 친 자를 반드시 죽일 것이니 이는 고살하였음이라 피를 보수하는 자가 그 고살자를 만나거든 죽일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반면, 아무 원한이 없는데 실수로 또는 우연히 살인한 사람에게는 살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곳곳에 ‘도피성’을 두어, 그곳으로 피신할 수 있게 했지요. 오늘날 법정에서도 이런 부분은 어느 정도 감안하여 판결을 내립니다.
설령 두 사람이 똑같은 죄를 지었다 해도 범죄 동기에 따라서 형벌의 경중이 달라집니다. 우발적이었는가, 계획적이었는가, 악의를 품고 고의로 했는가,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했는가. 죄를 지은 이유에 따라서 판결이 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의 마음 중심까지 꿰뚫어 보시지요. 누군가 범죄를 했다면 믿음이 연약하여 순간 죄의 유혹에 빠졌는지, 아니면 악의를 품고 고의로 불순종했는지, 열심히 말씀대로 살다가 한 번 넘어졌는지, 혹 늘 불순종을 일삼다가 또 불순종했는지, 각 사람의 형편과 처지를 모두 감안해서 판단하십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대부분 고의로 상대를 어렵게 만들거나 해가 되는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에게 불편한 감정이나 서운함을 풀지 않고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면 언젠가는 그것이 불쑥 튀어 나올 수 있지요.
두 가지 상황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먼저는 상대가 칭찬을 들을 때입니다. 누군가가 칭찬을 받으면 함께 기뻐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그런데 그 대상이 예전에 자신이 불편한 마음과 서운한 감정을 품었던 사람일 때는 함께 기뻐할 수가 없지요. ‘저 사람이 내게는 잘 못 했었는데 윗분에게만 잘해서 칭찬받는구나’ 하면서 마음이 더 불편해집니다.
마치 자기가 억울한 일을 당했다는 듯이 다른 사람들에게 상대의 티를 알려서 상대를 깎아 내리려 합니다. 하지만 이처럼 상대를 깎아내린다 해서 자신이 높아지는 것일까요? 설령 사람들 앞에서는 자신이 더 높아진다 해도 어찌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사람 마음에 있는 모든 악의 모양은 하나님 앞에 속속들이 드러나게 됩니다. 하물며 마음에 있던 악을 계획을 세워 행동으로 옮겼다면 어찌 하나님께서 모르시겠는지요.
두 번째 상황은 서운했던 상대가 어떤 일을 잘못하여 궁지에 몰리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받을 때입니다. 이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함께 비난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그가 그런 줄 진작에 알았다.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다’ 이런 식으로 과거에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보태는 것입니다. 이는 예전에 상대에 대해 품었던 불편함과 서운한 감정을 여태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이지요.
이런 사람이 만일 권세를 얻게 된다면 일의 처리과정에 사심을 개입시킬 수 있습니다. 불공정한 판결로 상대가 져야 할 책임을 과하게 부가할 수 있지요. 하나님께서는 원수도 사랑하라 하셨고 엡 4:26에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 하셨습니다. 또한 롬 12:17에는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했습니다.
그런데 악한 감정을 풀지 않고 담아두었다가 때를 보아 악행으로 갚는다면 이는 얼마나 큰 악인지 알아야 합니다. 요일 3:15 전반절에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 했지요. 그런데 한번만 미워한 것이 아니라 미움의 감정을 쌓고, 쌓고, 또 쌓는다면 이는 얼마나 많은 살인을 저지른 것인가요. 그로 인해 기도 응답이 안 되고 있고, 축복이 막혀 있으며, 시험 환난이 왔는데도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원한이나 서운함 등의 악한 감정이 마음에 쌓이고 쌓인 결과 큰 병이 날 수도 있고요. 육의 사람들은 악은 악으로 갚아야 시원하다 여길 수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물론이고 악을 품고 있는 자체만으로도 자기 자신에게 큰 해가 된다는 사실을 정녕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상대는 나에게 악을 행했다 할지라도 내 편에서는 오히려 선으로 갚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럴 때 상대도 살릴 수 있고 자신도 살 수 있으며,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은 더욱 선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악은 그 모양이라도 버리라” 하신 말씀에 담긴 아버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깊이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9절을 보시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으냐” 물으시자, 가인은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사실을 이미 아시고 물으셨습니다. 이는 가인을 추궁하기 위함이 아니라 은혜를 베푸시기 위함이었지요. 곧 가인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알지 못한다”며 완전히 시치미를 떼었습니다. 자신의 악행을 숨기고자 뻔뻔하게 거짓말을 했지요. 더 나아가 오만하게도 하나님께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대들었습니다.
잠 9:8 전반절에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말씀했습니다. 이는 거만한 사람은 자신을 책망하는 상대를 미워한다는 뜻도 되지요. 또한 자신이 책망을 받을 때에 마음이 불편해지거나 책망하는 상대가 미워진다면 그만큼 자신이 거만한 사람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지금 본문의 가인은 마음에 악이 심겨서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한 채 오히려 적대감을 나타냈지요. 이미 가인의 마음에 악이 얼마나 많이 심겼는지를 보여 줍니다.

성경 곳곳에 이런 예가 많이 나오지요. 열왕기상 22장에 보면 북이스라엘 왕 아합과 남유다왕 여호사밧이 연합하여 아람과 전쟁하는 장면이 기록돼 있습니다. 여호사밧은 출정에 앞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자고 제안합니다. 이에 아합이 선지자를 4백 인쯤 모아서 물어보니 모두가 이번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말했지요.
여호사밧은 이를 이상히 여기고 “우리가 물을 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있지 아니하니이까?” 했습니다. 이에 왕상 22:8에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오히려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 한 사람이 있으니 저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물을 수 있으나 저는 내게 대하여 길한 일은 예언하지 아니하고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내가 저를 미워하나이다” 답했습니다. 자신에 대해 좋은 일은 예언해 주지 않고 흉한 일만 알려준다 하여 미가야 선지자를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좋든 싫든 참 선지자가 전달하는 말씀은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아합은 선지자를 통해 말씀을 들어도 마음이 심히 악했기에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분별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마음도 아니었고요.
이때도 미가야 선지자가 흉한 예언 곧 ‘아합이 이 전쟁에서 죽을 것’이라는 얘길 하자 아합은 그를 옥에 가두어 버렸지요. 그런데 잠 29:1에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대로 아합은 그 전쟁에서 죽임을 당했지요. 미가야의 예언이 마음에 걸려서 변장하고 전쟁터에 나갔지만 그럼에도 적군의 화살에 우연히 맞아 죽었습니다.

이와 유사한 길을 답습한 또 다른 왕이 있습니다. 바로 남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지요. 당시 북이스라엘은 이미 망해서 사라졌고, 남유다도 바벨론의 압제 아래 있었습니다. 바벨론이 원하는 대로 조공을 바쳐야 했고, 바벨론이 원하는 정책을 펴야 했지요.
이때 선지자 예레미야는 바벨론의 지배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시드기야에게 전합니다. 하나님의 공의 가운데 남유다는 심판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지요. 그러나 심판받아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70년 만에 다시 회복할 수 있음을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셨습니다.
오래전 야곱의 열두 족속이 애굽에서 한 나라를 이룰 만한 백성으로 성장했지요. 이처럼 이번은 바벨론의 압제 속에서 유대 민족이 겸비하게 연단을 잘 받으면 뛰어난 민족으로 거듭날 수 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렘 29:11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고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시드기야 왕과 신하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한 채 예레미야를 매국노 취급하며 핍박했습니다. 그리고 바벨론에 저항하려는 노력을 폈지요. 이에 결국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기에 이릅니다. 예루살렘 성이 워낙 난공불락의 요새였기에 포위 상태로 1년 6개월이 흘렀습니다. 그간 바벨론은 끊임없이 시드기야에게 항복을 권유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지요. 거짓 선지자들이 “하나님께서 이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게 도와주실 것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시드기야가 조용히 예레미야를 불렀지요. 그때도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바로 예레미야 38:17-18에 “만군의 하나님이신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바벨론 왕의 방백들에게 항복하면 네 생명이 살겠고 이 성이 불사름을 입지 아니하겠고 너와 네 가족이 살려니와 네가 만일 나가서 바벨론 왕의 방백들에게 항복하지 아니하면 이 성이 갈대아인의 손에 붙이우리니 그들이 이 성을 불사를 것이며 너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했습니다.
이에 시드기야는 이어지는 19절에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냈지요. “나는 갈대아인에게 항복한 유다인을 두려워하노라 염려컨대 갈대아인이 나를 그들의 손에 붙이면 그들이 나를 조롱할까 하노라” 바로 자신이 항복하고 바벨론에 잡혀가면 먼저 포로로 끌려가 있는 유대인들을 만날 텐데 그들에게 조롱받는 게 두렵다는 것입니다.
시드기야는 국가의 존망이나 성전의 보존, 신하들과 백성들의 안위보다 자신의 체면을 더 중요하게 여겼지요. 이에 예레미야는 다시 한 번 간곡히 간하지요. “그 무리가 왕을 그들에게 붙이지 아니하리이다 원하옵나니 내가 왕에게 고한 바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소서 그리하면 왕이 복을 받아 생명을 보존하시리이다” 그러나 시드기야는 끝까지 듣지 않았습니다.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넘어 들어올 때에 성 밖으로 나가 도망치다가 붙잡히고 말았지요. 결국 두 눈이 뽑히고 쇠사슬에 묶여서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레미야 선지자는 사람들이 들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조롱해도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외쳤습니다. 당시 예레미야의 심정이 렘 20:8-9에 잘 기록돼 있지요. “대저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강포와 멸망을 부르짖으오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한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혼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와 같은 심정이 됩니다. 상대가 사망으로 가고 있는데도 ‘듣기 싫어할 테니까, 마음 아파할 테니까’ 아무 말도 안 해 준다면 이는 상대를 미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정녕 상대를 사랑한다면 당장 관계가 어색해지는 게 문제가 아니라 사망에서 구해내는 게 중요하지요.

저는 지난 30여 년간 이런 심정으로 목회를 했습니다. 말씀을 선포하는 저는 물론이요, 듣는 성도들도 편치 않을 줄 알지만 그래도 죄에 대해, 의에 대해, 심판에 대해 외쳐왔지요. 그 결과 수많은 영혼이 어둠에서 빛으로 나왔고 영으로, 온 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엡 5:13에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라는 말씀대로 되었지요. 그러므로 성도님들은 혹여 책망이나 지적을 받아도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항상 마음을 낮추어 어떤 이가 권면하든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설령 어린아이가 권면을 해도 들을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이처럼 우선 들을 수 있는 마음이 되어야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가 있지요. 귀 기울여 들어보아서 그 말이 진리이면 따르고 진리가 아니면 순종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아예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옳은 말도 옳게 들리지가 않습니다.
영으로 깊이 들어올수록 ‘스스로 돌아볼 때 책망할 것이 없는 상태’가 됩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항상 순종할 마음으로 계명들을 지켜 나가기 때문이지요. 영으로 깊이 들어올수록 아버지의 마음도 밝히 깨달아짐으로 계명을 더욱 즐겁게 지켜 행합니다. 설령 하나님께 책망을 받는다 해도 모든 것을 사랑으로 느낌으로 더욱 온전한 빛으로 변화되지요.
그러나 본문의 가인은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범죄를 감추는 데 급급했습니다. 그 결과 죗값을 톡톡히 받게 됩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이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성도님들은 오늘 말씀을 잘 양식 삼아서 늘 빛 가운데 행하심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기쁨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끝)

2012-03-27 오전 12:39:03 Posted
2012-04-03 오전 11:05:06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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