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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제목
요한계시록 강해 (5)  [계 1:13-18]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1.09.03
사람들 중에는 자신이 꿈에서든, 또는 영안이 열려 환상을 통해서든 주님을 뵈었다고 말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주님을 보았다고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주님의 모습에 대해 ‘너무나 자애로우시고 사랑이 넘친다’ 말하지요. 물론 이 땅의 어떤 단어로도 주님의 모습을 표현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본 주님의 모습은 지금 하늘에 계신 영화로우신 모습보다는 인성적으로 보여 주시는 모습이지요. 주님께서 신성적인 면을 부각시켜 보여 주시게 되면 그 권세와 위엄은 가히 대단합니다. 성결되지 않은 사람이라면 감히 그 얼굴을 제대로 볼 수조차 없지요.

또한 주님께서 지금 영광을 얻고 계신 모습을 그대로 보여 준다고 하면 사람들은 그 밝은 빛으로 인해서도 주님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구요.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꿈이나 환상으로 주님의 모습을 뵙는 것은 주님 편에서 그만큼 빛을 감해 주신 모습이며 인성적인 모습으로 보여 주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본문에도 보면 사도 요한이 환상 가운데 본 주님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지요.

13-16절에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했습니다.

사도 요한이 지금 보고 있는 주님의 모습은 주님의 본체를 직접 뵙는 것은 아니라, 영안이 열려 환상 가운데 보는 것이지요. 장차 천국에서 주님을 뵙는 것처럼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한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요한은 자신이 주님의 본체를 친히 뵌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도 주님에 대해 직접적으로 “인자”라고 표현하지 않고 “인자 같은 이”라 표현하고 있지요. 그런데 요한은 지금 인자와 같은 이, 즉 주님이 촛대 사이에 계신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설명한 대로, ‘촛대’란 ‘교회’를 의미하지요.

골 1:18에 보면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하여 주님이 교회의 머리 되심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인자 같은 이가 촛대 사이에 계시다는 것은 모든 교회의 머리 되신 주님께서는 늘 교회들을 두루 운행하시며 살피신다는 뜻이지요. 모든 교회들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인도받아 나갈 수 있도록 늘 중보의 기도를 올리고 계시구요.

하지만 오늘날 주님께서 운행하지 않으시는 교회, 즉, 주님께서 함께하시지 않는 교회들이 점점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기도의 불이 꺼진 교회, 이파, 저파 나뉘어서 서로 싸우는 교회,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듯이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르게 가고 있는 교회, 성령의 역사가 소멸되어 가는 교회, 이러한 교회들과는 주님께서 더 이상 함께하실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교회들이 어떤 교회들인가에 대해서는 앞으로 일곱 교회에 대한 말씀을 통해 자세히 설명이 나가게 될 것입니다.

다음으로 요한은 주님께서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계신 것을 보았지요. 장차 우리도 천국에 가면 모두가 세마포의 긴 옷을 입게 됩니다. 하지만 각 사람이 입는 옷의 빛깔이나 모양 등은 이 땅에서 얼마나 마음을 영으로 일구었는가와 상급의 정도에 따라 다르지요. 여인들의 경우에는 머리카락의 길이도 다르구요.

그런데 요한이 주님을 보았을 때 ‘주님의 옷이 발에 끌린다’는 것에는 ‘은혜가 가득히 넘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늘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 주셔서 우리가 승리해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지요.

다음으로 “가슴에 금띠를 띠었다”고 했는데, 이는 ‘그 믿음이 정금과 같아서 어떠한 변개함도 없으며 그 중심이 곧고 온전하다’는 의미입니다. 주님께서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지요.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마치 가슴에 훈장을 달아주시듯이 마음 중심을 의미하는 가슴에 변하지 않는 금으로 된 띠를 달아 주신 것입니다.

또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양털 같고 눈 같으며” 했는데, 요한은 주님의 머리카락 색을 표현하기 위해 당시로서 가장 흰색이라고 여겨지는 양털과 눈에 비유를 하고 있습니다. 가장 순백한 색깔인 흰색을 표현하는 것이지요.
흰색은 흠도 점도 티도 없는 깨끗함. 즉, 온전한 성결과 선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머리카락을 양털과 눈에 비유한 것은 ‘정녕 온전하여 악은 모양이라도 없으시며 온전한 선 가운데 계시다’는 의미이지요.

다음으로 “그의 눈은 불꽃같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눈이 불꽃같다고 해서 혹여 ‘주님의 눈은 무서운가 보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 되지요. 사도 요한이 주님의 눈을 불꽃같다 한 것은 환하게 밝혀 주며 따사로움을 느끼게 해 준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주님의 눈은 모든 죄악을 태워 버리는 불꽃이기도 하십니다.

또한 너무나 정확하게 진리와 비진리를 분별하시지요. 그러므로 주님의 눈앞에서는 어떠한 거짓이나 속임수도 통할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도 주님의 눈을 피할 수는 없으며 주님 앞에서는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나게 되지요.

그래서 사실 죄인들은 주님을 두려워합니다. 죄인은 감히 주님을 뵐 수조차 없으며 그 앞에 설 수도 없지요. 신랑으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신부의 자격을 갖춘 사람만이 장차 주님 품에 안길 수가 있고 주님의 따사로운 눈을 볼 수도 있습니다.

15절 전반절에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했습니다.

사람의 신체 중에 가장 더러운 곳 중에 하나가 바로 발입니다. 출 3:5에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시는 장면이 나오지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면서 이처럼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신 데에는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가장 더러운 발에 신는 신을 벗는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나오기 위해서는 죄악 된 마음과 행함을 벗어 버려야 한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주님의 발은 인생들처럼 그렇게 더럽혀진 발이 아닙니다. 주님의 발이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다 했는데, 빛난 주석이란 흠도 티도 없는 너무나 깨끗한 것을 의미하지요. 일반적으로 금속물질을 풀무에 단련하게 되면 그 안에 섞여 있던 불순물들이 태워지면서 점점 더 순도가 높은 금속물질이 됩니다. 이런 것처럼, 인생들도 연단을 통해 죄악을 벗어 버리는 만큼 하나님 앞에 깨끗하고 순전한 마음이 되지요.

주님께서는 원래 어떠한 죄악도 없으시지만, 그럼에도 이 땅에 육신의 몸으로 오셔서 인생들이 겪는 희로애락을 몸소 체험하시며 인간 경작의 과정을 겪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발이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과 같다는 것은, ‘주님께서도 인생들처럼 경작을 받으실 때 모든 것을 달게 받으시며 온전히 믿음으로 승리하심으로 어떠한 것도 송사거리가 되지 않는 온전한 모습을 보이셨다’는 의미가 담겨 있지요.

여러분도 이러한 주님처럼 늘 그 발이 깨끗하며 밝게 빛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합당하지 않은 곳에는 발을 옮기지도 마시되, 꼭 발만이 아니라 눈도, 귀도, 입술도, 생각도, 마음도 깨끗하지 않은 곳에는 두지 말아야 하지요.

15절 후반절에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음성을 여러 차례 들어봤는데, 그 소리는 너무나 맑고 아름답고 청아하면서도 크고 우렁차며 웅장하지요. 주님의 음성도 이와 비슷한데 요한은 이러한 주님의 음성을 지금 많은 물소리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이처럼 물소리에 비유한 것은 물이 곧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기 때문이지요. 물은 깨끗하게 씻어 주는 역할을 하며 대부분의 모든 생명체에 꼭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것처럼, 주님의 말씀으로 인해 우리 마음의 죄악이 씻어짐으로 깨끗해질 수가 있는 것이지요.

또한 벧전 1:23에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거듭나서 영생에 이를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곧 주님의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꼭 필요하지요.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듯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살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은 목마른 사람이 마치 시원한 폭포수를 만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에 너무나 시원함을 얻게 되지요. 여러분의 입술도 바로 이런 입술이 되어야 합니다. 상대에게 시원함을 줄 수 있는 말, 편안함과 행복을 줄 수 있는 말, 생명이 될 수 있는 말, 바로 이러한 말을 하는 입술이 되어야 하지요.

16절에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했습니다.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다’ 했는데, 사람이 일반적으로 왼손보다는 오른손이 더 강하고 힘이 셉니다. 그래서 오른손은 힘과 능력을 의미하지요. 또한 ‘별’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창 15:5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오지요. 아브라함의 자손을 별에 비유하고 계십니다.

세상에서도 보면 어떤 큰 인물이 태어나거나 죽을 때, 하늘에 별이 새로 나타나거나 사라지면서 그 징조를 나타낸다는 말을 하지요. 따라서 ‘일곱 별’이란, 본문 20절에도 나오듯이 일곱 교회의 사자, 즉 일곱 교회를 치리하는 목자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 일곱 별을 오른손에 붙들고 계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교회와 택하신 종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붙들고 계신다는 뜻이지요. 보장하시고 함께하시는 증거를 나타내 주시며, 연단하실 때도 하나님께서 친히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마 16:18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세우신 종과 교회는 원수 마귀 사단이나 그 누구라도 결코 넘어뜨릴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붙들고 계신 교회와 종은 훗날 심판의 기준이요 잣대가 되지요. 하나님께서 어떤 교회와 종을 보장하시고 함께하시는지를 보여 주는 측량의 기준이 되므로 정확한 판단의 근거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능력의 오른손으로 붙들고 계신 교회와 종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결국 주님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과 같지요.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했는데, 이는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마치 검과 같다는 말입니다. 히 4:12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하셨지요.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사람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죄악까지도 찔러 쪼갤 수가 있습니다. 죄악 가운데 거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마치 검과 같이 마음에 꽂히게 되지요. 그래서 수술을 통해 환부를 깨끗이 도려내듯이 비진리의 죄악들을 낱낱이 분해하여 벗어 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악의 모양을 발견했으면 말씀의 검으로 한 번에 확실하게 찔러 쪼개 버리면 끝날 것을 가지고, 버리지 않으면서 계속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지요. 그래서 두 번, 세 번 같은 과정이 되풀이 되다보니 그만큼 더 힘들고 고통도 받게 되는 것이구요.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했습니다. 주님의 얼굴은 해보다 훨씬 더 광채가 나지만, 이 세상의 다른 것으로는 표현할 수가 없기에 이처럼 해가 힘 있게 비추는 것 같다 표현한 것이지요.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해를 똑바로 볼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만약 똑바로 쳐다보게 되면 곧 눈이 침침해지고 자칫 멀어버릴 수도 있는 것처럼, 죄인은 주님의 얼굴이나 눈을 볼 수가 없습니다. 마 5:8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말씀한 대로 마음이 깨끗하고 성결된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복이 주어지지요.

그러니까 다 못 보는 겁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다.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이는 장차 천국에 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히 12:14에 보면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했습니다.

주님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다는 말씀은 모든 어둠을 깨뜨리며 감히 어둠이 그 앞에 대적치 못하는 주님의 절대적인 권세를 나타냅니다.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님의 권세 앞에는 모든 어둠의 권세들도 복종할 수밖에 없으며 장차 주님의 말씀으로 정확하게 모든 심판이 이루어지게 되지요.

그래서 하늘, 하늘 위, 또 이 땅 위, 땅 아래 모두가 주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셨다 이 말입니다. 그 앞에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으며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확한 공의 가운데 심판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원수 마귀 사단은 물론이고 그 누구도 아무런 송사를 할 수가 없지요.

우리의 신랑 되신 주님의 모습은 흠도 점도 티도 없이 너무나 깨끗하고 아름다우십니다. 이러한 주님을 신랑으로 맞이하려면 신부도 당연히 합당한 모습이 되어야 하지요. 합당한 신부의 자격은 간단합니다. 마음을 깨끗이 하여 성결되는 것이며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자격을 갖추었을 때만이 빛난 주님의 그 모습을 뵐 수 있으며 주님의 눈을 바라보며 대화도 할 수 있고 그 품에 안길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빛나고 아름다운 주님의 모습을 감히 볼 수가 없으니 영원히 사는 천국에서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본문 17절에, 사도 요한은 주님을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었다’고 썼지요.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사람들이 꿈이나 환상을 통해 ‘주님을 보았다’고 하는 것은 대부분 영광의 광채 가운데 창조주 하나님과 동등 된 권세를 가지고 계신 모습으로서가 아니라 인성적인 면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만약 신성적인 권세와 위엄을 그대로 보여 주시면 사람들이 차마 똑바로 볼 수도 없고 그 권세와 위엄 앞에 두려워 떨게 되지요.

그런데 지금 사도 요한은 장차 천국에서 뵙게 될 주님의 모습, 즉 완전히 영광을 입고 계신 주님을 뵈었으니 비록 그가 주님 앞에서 계시를 받을 만큼 합당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앞에서 이처럼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지금 펼쳐지고 있는 장면은 주님의 영이 친히 요한 앞에 나타나 말씀해 주고 계신 것이기 때문에 요한은 주님 앞에서 더더욱 떨릴 수밖에 없었지요.

이러한 요한에게 주님께서는 오른손을 얹으시며 “두려워 말라” 말씀하십니다. 오른손은 주님의 능력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요한에게 손을 얹어 인치심으로 그에게 마지막 때를 깨우기 위한 계시록의 말씀을 기록하는 막중한 사명을 주고 계시지요.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요한에게 손을 얹으심으로 요한이 평안한 마음 가운데 이 사명을 이룰 수 있도록 그에게 위안을 주고 계신 것이지요.

그러시면서 주님은 요한에게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라’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하신 데에도 영적인 의미가 있었듯이, 처음과 나중이라 하신 데에도 영적인 의미가 있지요. 주님께서는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하시면서.

이어지는 18절 전반절에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하시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즉 부활하셨음을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처음’이라 하신 것은 주님께서 바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심을 의미하지요. 우리도 바로 이러한 주님과 연합하여 하나를 이룸으로 장차 재림의 주님을 맞이할 때 부활의 열매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주님께서 ‘나는 나중이라’ 하신 것은 주님의 공중 강림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그때는 바로 인류에 대한 모든 구속 사업이 끝나는 때이지요. 물론 그 후에 이삭줍기 구원이 있기는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인간 경작은 주님의 공중 강림과 함께 마쳐지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시대도 끝나지요. 성령이 거두어진다 이 말입니다. 7년 환난 때는 이 땅에 성령이 계시지 않습니다. 성령이 거두어져 버려요. 그때가 바로 ‘나중’이 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주님이 처음과 나중이 되신다는 것은 주님께서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는 동시에 주님의 공중 강림으로 말미암아 부활의 열매에 동참하는 모든 구속의 사업이 마쳐지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주님께서는 이제 세세토록 살아 계실 뿐만 아니라, 사망과 음부의 열쇠까지도 가지고 계시지요.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다는 것은 죽고 사는 것이 결국 주님께 달려 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혼들이 ‘구원을 받느냐, 영원한 사망으로 가느냐’가 결정되지요.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사람은 더 이상 사망의 권세에 매여 있지 않고 사망 권세 깨뜨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따라 부활로 나오게 됩니다.

이처럼 영원한 사망에서 놓임 받아 나오게 하는 것이 바로 주님으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된 것이므로 결국 사망의 열쇠가 주님께 있다 말하는 것이지요. 또한 구원받은 사람들이 가게 되는 윗음부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가는 아랫음부도 주님으로 말미암아 결정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음부의 열쇠도 가지고 계신 분이시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처럼 사망과 음부의 열쇠만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니라, 천국의 열쇠도 가지고 계시지요. 요 14:6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말씀한 대로, 오직 천국으로 가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며 주님만이 천국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음시간부터는 일곱 교회에 대한 내용을 본격적으로 설명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장차 천국에 가면 주님께서 흰색의 빛나고 긴 옷을 입으신 것처럼 우리도 흰색의 세마포를 입게 됩니다. 그런데 계 19:8에 보면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말씀하고 있지요. 깨끗한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옳은 행실을 통해서만이 장차 천국에서 세마포 옷을 입을 수 있는 자격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금 장차 여러분에게 주어질 세마포의 주인공으로서 얼마나 준비가 되어 있으신지요? 순결한 신부가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신랑이 기다리는 결혼식장으로 입장하듯이, 하늘에 나팔이 울리고 신랑 되신 주님께서 신부를 맞으러 오실 때 여러분도 순백의 아름다운 세마포를 입고 주님 앞에 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날을 소망하며 거룩한 주님의 신부로서 조금도 부족됨이 없도록 오늘도 거룩하고 옳은 행실 가운데 열심히 세마포를 준비해 가는 복된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1-09-08 오후 1:35:00 Posted
2024-01-07 오후 3:08:17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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