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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제목
요한계시록 강해 (8) 에베소 교회 (3) [계 2:1-7]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1.09.24
남녀가 만나서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여 결국은 결혼을 하게 되고 자녀까지 낳으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처럼 사랑한다고 하던 부부사이가 점점 변하고 마는 것을 보게 되지요. 바로 처음 사랑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사랑하던 그 마음만 변함없이 간직하고 살아간다면 부부사이가 변할 리도 없고, 어떠한 문제도 생길 리가 없지요.

사람이 육을 가지고 있는 이상은 대부분 처음 사랑이 변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주님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이지요. 처음 주님을 영접하고 성령을 받았을 때 이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슴 벅차 올랐던 처음 사랑의 감격을 여러분은 기억하고 계십니까?

그때 가졌던 마음과 지금 여러분의 마음을 비교할 때 “나는 사랑의 마음이 그때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변하거나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자신 있게 말씀하실 분이 계신지요?
아니면 혹여 ‘그거야 처음에나 그런 거지 처음 사랑을 변함없이 간직하며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며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것을 마치 당연한 일처럼 여기시는 분은 안 계시겠지요?

우리 주님께서는 처음 사랑을 버린 것에 대해 “책망한다.”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계 2:5 전반절에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말씀하시지요. 처음 사랑을 가지고 열심을 냈던 모습이 언제 어디서부터 떨어지게 되었는지를 돌아보아 그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그 원인에 대해 회개하고 돌이켜서 처음 행위, 즉 처음 가졌던 열심과 충만함을 다시 회복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왜 처음에는 충만하게 열심을 가지고 달려가다가 중간에 그만 처음 사랑이 식어지고 떨어지게 되는 것일까요?

어떤 사람은 “어느 성도와 걸려서 시험에 들었다.” 말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주일에 돈을 벌기 위해 예배에 한두 번 빠지다 보니 이제는 주일을 지키는 것조차 힘들게 되었다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주의 종과 걸림이 되기도 하고, 단에서 증거되는 말씀이 자기 생각과 이론에 맞지 않아 의심함으로 시험에 들었다고 하는 경우도 있지요.

처음 사랑이 식어지고 떨어지게 되는 가장 큰 원인은 바로 다시금 세상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열심히 버려나가던 세상의 육을 다시 취했기 때문이지요. 비록 영으로 충만히 달려가던 사람이라도 순간 세상의 정욕을 바라보고 취해 나가다 보면 어느새 육으로 빠져들 수가 있습니다.

요일 2:15-16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처음에는 세상을 다시 취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다고 생각했는데, 자신도 모르게 세상으로 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분들은 첫사랑의 충만함 가운데 열심히 마음에 할례를 해 나가지요. 그렇게 일 년, 이 년, 몇 년을 해 나가다 보면 스스로 생각하기에 더 이상 영적인 진전이 없고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비슷한 종류의 연단이 계속 오기도 하고 버린 것 같았던 악의 모양이 다시 나오기도 하지요. 그러다보면 자칫 마음이 힘들어지고 지쳐서 ‘쉬고 싶다.’는 마음이 틈타는 것입니다. 또는 세상의 육적인 것을 통해 위로를 받으려 하거나 쉼을 얻으려는 경우도 있지요.

본인 생각에는 세상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위로와 쉼을 얻으려는 것뿐이라 하겠지만, 이렇게 한 번, 두 번 취해 나가다 보면 나중에는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영적인 것은 결코 육으로 풀어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영적으로 정체되어 있거나 뭔가 한 단계 더 영으로 뚫어야 한다면 그럴수록 오히려 더 영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더욱 매달려서 위로부터 은혜와 능력을 끌어내리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돌이켜야 합니다. 처음 사랑을 버리고 처음 행위를 잃어버림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사이에 생겼던 담을 헐어야 다시금 충만히 달려갈 수 있는 힘과 은혜가 올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냥 대충 회개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는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나를 위해 독생자까지 주셨고, 주님은 나를 위해 대신 십자가를 지시며 그 온갖 고난과 멸시 천대를 받으셨는데, 그리고 변함없는 사랑을 주셨는데, 나는 어찌하여 그 사랑과 은혜를 저버렸는가? 처음 행위가 떨어졌는가? 어찌 하나님과 원수 된 세상을 사랑했는가?

이러한 회개가 마음 중심에서 나와야 하며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하지요. 그래서 처음에 은혜와 진리와 성령으로 충만하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던 것처럼 다시 그러한 뜨거운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 날마다 성장해 가는 것처럼, 신앙도 그래야 합니다. 제자리걸음을 한다거나 오히려 퇴보한다면 에베소 교회처럼 책망을 듣게 되지요.

오늘날도, 처음에는 충만하고 뜨겁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충성해 감으로 성장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성장이 멈춘 교회들이 있습니다. 설령 외형적으로는 조금씩 성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실제 내적인 면을 살펴보면 예전의 열심과 충성과 뜨거움이 사라진 것이지요.

처음에는 진리를 행하기 위해 핍박 가운데도 모이기를 힘쓰며 기도했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제 어느 정도 교회가 성장하고 안정을 이루자 처음의 열심과 뜨거움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자부심이 교만으로 발전하게 되고 이제는 더 이상 진리를 위해 수고하려 하지 않으며 인내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게 되지요. 현재 상황에 위안을 삼으며 안주하려는 마음 가운데 젖어들게 되지요. 그러니 더 크게 쓰임 받을 수도 없고, 지금의 수준에서 만족할 수밖에 없지요.

계 2:5 후반절에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는 말씀대로 되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촛대를 옮긴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촛대는 교회를 의미한다고 했는데, 이러한 촛대를 옮긴다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로는, 개인적으로 우리 마음에서 성령을 거두어 가신다는 의미입니다.

고전 3:16에 보면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하시면서, 우리 몸이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임을 말씀하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촛대를 옮기신다는 것은 교회, 곧 주님의 몸 된 성전을 옮기신다는 것이니 여러분 안에서 성령을 거두어 버리시겠다는 의미가 됩니다.

살전 5:19에 “성령을 소멸치 말라”하셨고, 고전 3:17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인 몸을 더럽히면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멸하시겠다 했는데, 이는 곧 성령을 거두어 버리시므로 더 이상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이 될 수 없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비록 성령은 받았을지라도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고 다시 죄악 가운데 세상과 짝하며 살아감으로 더 이상 거룩하신 성령께서 여러분의 몸을 성전 삼고 계실 수 없는 경우를 말하지요.

물론 성령이 소멸되기 전에, 즉 하나님께서 성령을 거두어 가시기 전에 회개하고 돌이켰을 때는 다시금 기회를 주시며 은혜를 주시지만, 계속해서 회개하지 않고 돌이키지 않음으로 결국 공의의 한계를 넘을 때는 성령이 거두어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러한 상황에 이르기까지 성령께서는 어찌하든 깨우쳐 주시고자 하지요. 마음이 괴롭고 곤고해지게 되며 수많은 말씀으로 돌이킬 기회를 주십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돌이키지 않게 되면 마침내 성령을 거두어 가심으로 그때는 아무리 열심 내려고 해도 되지 않지요.

머리로 아는 지식이 있기 때문에 두려움 때문에라도 어찌하든 돌이키려 노력해도 성령께서 더 이상 도와주실 수가 없으니 어찌 할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면서 여전히 세상의 죄악을 좇게 되며, 세상의 육적인 것들을 통해 마음의 위안을 얻어 보고자 결국 세상으로 더 깊이 빠져들게 되지요.

이미 이런 상태가 되고 나면 더 이상 돌이킬 기회조차 얻기 힘들며, 정녕 공의를 뛰어넘는 사랑의 희생이 없이는 결국 영원한 사망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성령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처럼 촛대가 옮겨질 수밖에 없는 이러한 상황에까지 가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충만함이 늘 끊이지 않고 넘쳐남으로 성령의 밝은 인도와 주관하심 가운데 천성문을 향해 힘차게 달려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촛대를 옮긴다는 말씀에는
둘째로, 교회 안에서 성령을 거두어 가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교회적으로도 처음 사랑이 식어버리게 되면 교회 안에 성령의 역사가 사라지고 부흥도 멈추게 되는 것을 봅니다. 많은 교회가 개척할 당시는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하기를 힘쓰고 충만하다가도 어느 정도 부흥을 하고 나면 열심이 식어져 버리는 것을 볼 수가 있지요.

뜨겁게 기도하던 모습이 사라지고, 모이기에 힘쓰던 모임이 폐하여지며, 열심히 전도하던 모습이 사라져 버리는 등 처음 사랑이 식어져 버린 교회가 많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 교회에서 성령의 역사가 끊기게 되니 자연히 영적으로 잠자는 교회가 될 수밖에 없고, 이렇게 한 번 성령의 역사가 끊기게 되면 아무리 다시 기도의 불을 붙이고 성령의 충만함을 회복하려 해도 그것이 쉽지 않은 것을 봅니다.

교회 전체가 처음 사랑을 잃어버림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촛대를 옮기셨기 때문에 더 이상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고 성령이 운행하시지 않는 것이지요. 이처럼 성령께서 운행하지 않으시게 되면 이내 사단이 역사하기 시작하여 교회 내에 분열과 다툼을 일으키고 결국 교회가 훼파되는 지경에까지 이르기도 합니다.

설령 그렇게까지, 않는다고 해도 더 이상 성령께서 역사하실 수 없는 교회라면 이미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명을 잃어버린 것이라 할 수가 있지요. 그러므로 이 마지막 때를 살고 있는 모든 교회와 성도들이라면 더더욱 벧전 4:7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을 명심하여 깨어 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만일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면 신속히 회개하고 돌이켜서 결코 하나님께서 촛대를 옮기시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에베소 교회를 엄히 책망하시고 나서 다시 칭찬을 하십니다. 즉, 에베소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처음에는 칭찬을, 그러고 나서는 책망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칭찬을 받고 있지요.

앞으로 증거하게 될 나머지 교회들에게 주시는 말씀을 살펴보면, 주님께서 각 교회마다 말씀으로 치리하시는 방법이 각각 다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어느 교회는 칭찬과 더불어 책망하기도 하시고, 어느 교회는 칭찬은 없고 책망만 하시는가 하면 칭찬도 책망도 없이 권면만 하신 교회도 있고, 칭찬만 하신 교회도 있지요.

여러분도 교회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거나, 가정에서 자녀들을 양육할 때, 또는 부부 사이에 서로 권면할 때에도 주님께서 󰡔일곱 교회󰡕를 치리하신 방법을 활용하면 좋은 결과를 거둘 수가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모델이 바로 에베소 교회이지요.

주님께서는 에베소 교회를 책망하시기에 앞서 먼저 칭찬을 하셨습니다. 우선은 좋은 점을 들어서 칭찬해 주신 후에 잘못된 점을 책망하셨던 것이지요. 여러분이 어떤 사람의 잘못을 깨우쳐 주고자 할 때도 먼저 그것을 책망부터 하고 만다면 이후에는 설령 칭찬을 해도 별로 효과가 없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미 책망을 들어서 마음이 닫혀 버린 상태이기 때문에 그때 가서 칭찬을 듣는다 해도 마음에서 기쁨으로 받아들여지지가 않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어떤 잘못을 지적할 때도 먼저는 상대의 좋은 점을 칭찬해 줌으로써 상대가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충만함을 입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고 나서 상대의 잘못한 점을 지적해 주면 그래도 상대방이 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지요. 그런데 상대가 칭찬받을 만한 일이 전혀 없는 경우에는 되도록이면 책망을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칭찬받을 일이 없는데 거기다가 책망까지 들으면 그나마도 힘을 잃거나 위축되고 시험에 들 수가 있지요. 이런 경우에는 책망을 하지 않고 대신 사랑으로 권면하며 잘 타일러 가르쳐 나가는 것이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본문에 주님께서는 에베소 교회에 대해 칭찬과 책망을 하신 후, 다시 칭찬하실 내용을 조금 남겨두셨지요.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주님께서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의 목자와 성도들을 엄히 책망하셨는데 사실 그 책망은 작은 책망이 아니지요.

촛대를 옮기시겠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이 지워져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또한 교회적으로는 성령의 역사가 멈추므로 더 이상 주님의 몸 된 교회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뜻이지요. 이러한 말을 들을 때에 당사자들은 얼마나 충격이 컸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에베소 교회의 목자와 성도들을 엄히 책망하신 후에, 그래도 그들이 힘을 잃지 않고 어찌하든 회개하고 돌이켜 나갈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한 가지 칭찬을 남겨두셨던 것이지요.

본문 6절에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니골라당이란 무엇일까요? 사도행전 6장을 보면 초대교회에서 하나님의 종들이 오직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에만 전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성도들 가운데서 교회의 일을 치리할 만한 사람을 뽑아 집사를 세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행 6:2-4에 보면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했지요.

이 말씀대로, 오늘날에도 주의 종은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일에만 전무해야 합니다. 초대교회가 이렇게 했을 때, 이어지는 7절에 보니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초대교회에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일곱 사람 중에 선택되어 집사로 세움을 입은 사람 중에 하나가 바로 안디옥 사람 니골라였지요. 이렇게 칭찬을 들었던 니골라 집사가 나중에는 진리에서 벗어나는 행위를 하고 무리를 규합하여 당을 이루게 됩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서도 예수님을 배반했던 가룟 유다가 있었듯이 초대교회에서 가려 뽑은 일곱 집사 중에서도 니골라는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지요. 오늘날도 아무리 교회에서 직분을 많이 받고 성령 충만하며 칭찬받는 사람이었다 할지라도 사단의 역사를 받아 진리에서 떠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또한 성도님들도 어떤 사람이 아무리 많은 직분과 사명을 받고 충만히 달려가는 것 같다 해도 하나님께서 온전히 인정해 주시기 전까지는 ‘저 사람은 믿을 만하니까’ 하면서 자칫 미혹되어 비진리에 함께 빠지지 않도록 주의를 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니골라당은 어떻게 하나님을 배반했을까요? 니골라는 주장하기를 ‘영은 깨끗하고 죄가 없으며 성결된 것이다.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은 눈에 보이는 이 몸에 죄가 있어서 죄를 짓는 것이지 사람 안에 있는 영은 죄와 무관하다. 사람이 죽어서 하나님이 그 영혼을 부르실 때 몸은 썩어져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므로 육체는 아무리 죄를 지어도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일단 주님만 믿고 나면 영혼이 정결하게 되기 때문에 육체는 어떠한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 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사람이 몸으로 아무리 죄를 지어도 예수 그리스도만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말이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살기 위해서는 기도하며 수고하는 행위와 인내가 따라야 하는데 그저 교회만 왔다 갔다 하면 설령 죄를 짓고 살아도 구원받는다고 가르친다면, 아직 세상을 사랑하고 어둠에 거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얼마나 유혹받기 쉬운 말입니까?

설령 열심히 죄를 싸워 버리며 나가다가도 자칫 이런 말에 미혹되어 다시금 세상으로 빠질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교회 안에 만약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고 이런 사람에게 동조하는 세력이 생기게 되면 그 교회는 금세 죄악으로 물들어 가게 됩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는 이렇게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은 니골라당을 미워했지요. 주님께서는 이 점을 칭찬하시며 마지막으로 권면의 말씀을 하십니다.

계 2:7에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하셨지요.

우리는 말씀을 들어서 알았으면 단순히 지식으로만 담아 두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마음에 심어 행함으로써 싹을 내고 열매를 거두어야 하지요. 이렇게 할 때만이 이기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이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마음에 새겨서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결국 이 세상을 이기게 된다는 의미이지요. 잃어버렸던 처음 사랑을 회복하여 다시금 열심히 진리 안에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기는 사람에게 주님께서는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약속하셨지요. 생명나무의 과일은 낙원부터 새 예루살렘까지 천국 곳곳에 다 있는 과일로서 이러한 과실을 주어 먹게 하신다는 것은 곧 구원에 이르게 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렇다면 왜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이라 말씀하신 것일까요? 여기서 낙원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의미는 천국의 처소 중에 가장 낮은 곳인 낙원을 의미하지요. 겨우 구원받을 수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 마치 갓난아이와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 장차 구원받아 들어가게 되는 처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분이시므로 천국도 믿음의 분량에 따라서 각각 들어가는 처소가 구분되어 있는데, 에베소의 교인들은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기에 이제 돌이킬 때는 간신히 구원받게 되는 상태였지요.

비록 처음 사랑을 잃었다 해도 어디서 떨어진 것을 찾아 회개하고 돌이켜서 다시금 뜨겁게 달려 나간다면 단지 낙원에만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천국도 침노해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처음 사랑을 잃었던 것을 회개하고 돌이키는 차원에 머무른다면 겨우 부끄러운 구원을 받아 낙원에 가게 된다는 말씀이지요.

낙원의 두 번째 의미는 천국 전체를 표현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 위에 선포되는 말씀으로, 누구든지 처음 사랑을 회복하면 천국에 들어가게 되고 거기서 생명나무 과일을 먹게 된다는 약속이지요.

에베소 교회는 비록 처음 사랑을 잃은 것에 대해 주님으로부터 혹독한 책망을 들었지만, 반면에 그래도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들을 만한 모습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칭찬받을 모습이 있었기 때문에 혹독한 책망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여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지요.

이러한 책망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렇게 열심히 한다고 했고, 나름대로 잘해 왔는데’ 하는 높아진 마음을 가진다면 결코 영적인 잠에서 깨어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잘한 일이 있다 해도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고백할 수 있는 정녕 무익한 종의 마음이 되어야 하지요.

그래야 설령 처음 사랑을 잃었다 해도 성령께서 깨우쳐 주시고 권면해 주실 때 즉시로 회개하고 돌이켜 처음 사랑을 회복하고 처음 행위를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에 주신 말씀을 통해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선교회나 교구에 이르기까지 주님 앞에 칭찬받을 만한 모습은 무엇이며 권면이나 책망 받을 만한 모습은 무엇인지 점검하는 귀한 계기가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특별히 주님과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처음 사랑을 잃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심으로 정녕 변함없는 사랑과 충만함으로 열심히 신앙생활 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날이 갈수록 처음 사랑보다 더욱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1-09-29 오후 2:44:40 Posted
2023-12-23 오전 12:02:23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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